75화.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4)
“대장 동무가 느끼기에는 저자들의 수준이 어떠헌가? 우리 계획에 합류한다면 일으키는 자를 끝장낼 수 있갔나?”
잠시 골똘히 생각한 리태연이 대답했다.
“제 실력이 일천하여 저자들의 바닥을 알기 어렵습네다만 화력은 충분하리라 여겨딥네다.”
‘그 정도란 말이디.’
한수길은 방위단 대장 리태연의 고개 숙인 뒤통수를 응시하며 자신의 윤기 나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전쟁이 끝나고 뉴휴전선이 세워졌다.
하지만 몇십 미터 높이의 벽은 보통 인간은 막을 수 있었으나, 각성자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뢰지대 아래로 수십 개의 땅굴이 뚫렸다. 옛 시대의 특수부대보다 훨씬 뛰어난 신체능력을 지닌 각성자 상인들이 그 땅굴을 오갔다.
남쪽에서는 빨간약을 비롯한 각성자용 약물이 올라왔고, 북쪽에서는 쿠데타를 거치며 지하로 숨어든 옛 시대의 무기들이 내려갔다.
한수길은 그 밀수업을 용인하며, 때로는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또 때로는 독려하며 상당한 부를 쌓았다.
남쪽에서 쫓겨 온 암흑능력자들의 조직, 그들 스스로 혈귀단이라고 부르는 그 조직과 연을 맺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처음에는 성을 습격당할까 전전긍긍했다. 폐하께 파병을 요청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혈왕(血王)이라 자칭하는 음침하고 창백한 사내가 그를 방문했다.
혈왕과 대면한 후 한수길은 혈귀단에 대한 염려를 상당히 덜었다.
‘남쪽의 길드 련합을 쓸어버리겠다고 했었디.’
그들이 어떤 허황된 꿈을 꾸는지 한수길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영토에 흥미가 없다는 사실 뿐.
그 암흑능력자들의 무리는 장벽 근처 어딘가에 은신처를 만들고 가끔 성에 나와 생필품을 사가는 것 외에 성 내외의 사람들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수길은, 그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이 남쪽으로 넘어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상납하는 빨간약, 이른바 힐링포션과 온갖 약물을 장마당에 풀면 부르는 것이 값이었으니까.
국왕 폐하의 허락도 없이 거대한 무력대가 자신의 영지 내에 머무르게 용인하고 있다는 염려는 그 달콤한 부 앞에 차츰 잊혀졌다.
십여 년 전.
강계의 란(亂)이 일어난 뒤 폐하의 보위대(保位隊)가 직접 내려와 수십 개의 땅굴을 폐쇄한 후로 밀수꾼의 씨가 마르고, 남쪽에서 들어오던 약이 뚝 끊기면서 그 거위가 낳는 알의 가치는 몇십 배로 커졌다. 독점의 마술이었다.
그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한 달 전 남쪽으로 내려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장마당의 사냥꾼 협회를 중심으로, 암흑능력자들의 은거지에 빨간 약과 온갖 보물이 무더기로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남쪽에서 전멸한 건가. 소문대로 그들의 본진에 빨간약이 숨겨져 있다면……!’
그들의 본거지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한수길 역시 몰랐다.
일으키는 자의 영토 너머, 장벽 인근 어딘가에 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었다.
근거 없는 소문이었으나 가능성마저 없지는 않았다.
혈귀단의 본거지를 수색할 계획은 진작 세워두었다. 그 계획을 실행하지 못한 이유는 그 길목을 지키고 있는 일으키는 자의 존재 때문.
몇 년 전 서쪽에서 흘러들어와 성의 남쪽에 자리 잡은 일으키는 자는, 성의 전 전력을 퍼붓는다면 잡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산성의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방어단 대장 리태연이 성 인근에서 보위대와 마주쳤다 보고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보위대? 신분표는 확인했디?
-그거이… 기밀 엄무를 수행 중이시라 하여…….
진땀을 흘리는 리태연에게 한수길은 보위대를 사칭하는 역적들을 체포하라 지시했다.
하지만 며칠 뒤 그의 귀에 들어온 긴급 보고는, 방위단 본진이 그 역적들에게 박살나고 있다는 것.
리태연은 보위대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속아 넘어갈 만큼 아둔하지만, 그의 검술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아마 근육이 소모하는 에너지의 아주 조금이라도 뇌에게 양보했다면 왕성에서 한 자리 얻었을 터.
그런 리태연을 어린아이 다루듯 했다는 이들이다.
‘대체 어디서 그런 자들이……?’
황망한 와중에도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한수길은 당장 사람을 보내 그들을 정중히 모셔오라 했다.
남쪽에서 올라온 세 애송이는 나이에 비해 엄청난 실력을 가졌으나 역시 애송이였다.
그들은 참으로 애송이답게 마핵에 눈이 어두워져 입으로 지껄인 약속을 믿고 그의 제안을 쾌히 승낙했다.
‘허디만 약속이라는 거이 항상 지켜디디는 않디.’
마핵이야 일이 잘 끝난 뒤 회수하면 된다. 하루 사이에 마핵을 모두 먹어치울 리는 없을 터이니.
한수길은 막 떠오른 이 기발한 작전이 잘 풀리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몇 년 간 골치였던 일으키는 자를 소멸시키고, 혈귀단의 본진을 털고, 거기에 더해 곪아 터지기 직전의 고름까지 짜낼 수 있는 일석삼조의 묘수.
스스로의 생각에 만족한 한수길이 지긋이 웃으며 리태연에게 물었다.
“그 일으키는 자는 아직도 그곳에 있나?”
“예. 더 이상 북상하지 않도록 방위단이 유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네다.”
“보름 후 작전 개시하겄다. 철저히 준비하라우.”
“명에 따르겠습네다, 성주님.”
***
야트막한 담장 안 4층 건물에서 어슴푸레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건물 앞 훈련장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어린아이들이 기합을 내지르는 소리, 간헐적인 비명 소리가 담장을 넘어왔다.
‘옛날 생각나네.’
각성에 실패하고, 대신 영약을 흡수해 얻은 내력을 가지고 희망보육원에 돌아갔을 때.
이 훈련소는 여러모로 보육원과 비슷했다.
옛 시대의 학교 건물이라는 점. 그리고,
애들을 보호하고 가르쳐야 하는 곳에서 애들을 학대하고 있다는 점.
-훈련소라고, 아이들을 모아서 훈련하고 각성을 시키는 덴데. 훈련이 엄청… 빡셌어. 진짜…….
김강산은 과거의 모든 삶을 털어놓았으나 그 구체적인 장면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을 터.
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마음 약한 애새끼가 동기들을 다 잃고 혼자 살아남아 얼마나 괴로웠을지.
김강산이 6살부터 11살까지 머물렀던 훈련소는 강계훈련소였다.
이곳은 그곳이 아니다.
이 훈련소의 교관들은 김강산을 가혹하게 다룬 그 새끼들이 아니다. 이 훈련소의 교관과 훈련소장의 목을 모두 베어낸다 해도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또 비슷한 놈이 파견되어 오겠지. 또 같은 일이 일어나겠지.
알고 있다.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짓은 그저 화풀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사형.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십니까.”
“뭐, 딱히.”
계룡에서 챙겨온 인피면구를 쓰고 숙소를 나서려는데 맞은편 문에서 나온 서은창과 마주쳤다.
-너도 가게?
-예. 사형.
악몽을 꾸는 듯 신음을 흘리던 김강산의 목소리가 막 잦아든 참이었다.
-복면은 챙겼냐?
-당연합죠.
지도를 따라 차가운 밤바람을 뚫고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훈련소에 도착했다.
서은창이 담장 안을 흘깃거렸다.
“…너는 왜 따라왔냐?”
“사형이 혈겁 일으킬까봐요. 혈귀단 쫓으러 왔다가 뉴혈귀단 창단하면 낭패지요.”
“걱정도 팔자다.”
“강산이 얘기 듣고부터 사형 기세가 워낙 흉흉해서 말이죠. 언제 터지나 했는데. …그래도 일주일이면 오래 참으셨습니다.”
일단 내상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다.
간단하게 끝날 수도 있지만 언제 어떤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까.
김강산을 만나고 6년 동안 몰랐던 일을, 일주일 더 미룬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있었다. 내 기분.
덕분에 내상은 회복되었으나 빡침은 심화되었다.
“내가 애새끼도 아니고. 빡친다고 모가지 막 자를까봐?”
“…제가 사형이라 부르지만 사형 스물두 살입니다. 스물둘이 애새끼가 아니면 누가 애새낍니까.”
아. 맞다. 나 애새끼지.
그럼 애새끼답게 막 나가 볼까.
“됐고, 가자.”
내 발이 소리 없이 바닥을 걷어찼다.
솟구친 몸이 야트막한 담장을 단번에 뛰어넘었다. 그리고 곧장 건물의 뒤편으로 향했다.
목표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4층.
이런 놈들이 어떤 식으로 사는지 나는 아주 잘 안다.
가장 좋은 방을 차지하고 푹신한 침대를 넓은 방에 놓고 부드러운 고기를 씹으며 높은 단상 위에 올라 거드름을 피운다. 놈들이 누리는 것들은 사실 타인에게서 빼앗아 온 것들이다.
손끝이 나무 창틀에 닿았다.
왼손에 의지해 창에 매달린 채 월영검을 가볍게 내리그었다.
몇 번 검을 긋자 벽에 네모진 구멍이 뚫렸다.
건물 중간에 새로 생긴 문 안으로 가만히 발을 내딛…….
“이 새끼 봐라?”
중년의 남자놈이 어린 여자애를 침대에 앉혀 놓고 설명하기 싫은 짓거리를 시도하고 있었다.
“꺄아아악!”
알몸의 여자애가 소리를 질렀다.
마찬가지로 중년의 사내놈이 여자애를 밀치며 재빨리 팔을 뻗었다. 손가락이 향하는 곳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검.
알까기로 훈련소장 자리를 차지한 건 아닌 모양이다.
판단도 동작도 모두 신속했다. 하지만.
스팟.
월영검의 검끝을 타고 솟아오른 검기가 길게 뻗은 놈의 손등을 꿰뚫었다.
푸쉬쉬 튀어오르는 붉은 피분수 사이로 리드미컬한 타격이 시작되었다.
퍽.
퍼억.
퍼버버버벅벅벅벅.
검자루로 턱을 올려치고 검등으로 손등의 피 터진 상처를 후려치고 권(拳)을 복부에 꽂아넣고 각(脚)으로 팔꿈치를 즈려밟고 바닥에 까라진 놈을 다시 공중으로 내던져 그곳에 연속적인 타격을 꽂아 넣었다.
몇 번 회피를 시도하던 놈은 ‘각으로 팔꿈치를 즈려밟고’ 부터 그저 꿈틀거릴 뿐 유의미한 반격을 하지 못했다.
-괜찮아. 오빠 나쁜 사람 아니야. 저 언니는… 음… 저래 봬도 나쁜 사람은 아니야.
여자애를 이불로 돌돌 말고 손바닥으로 입을 꽉 막은 서은창이 필사적으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래 봬도라니. 야. 저래 봬도가 뭔데.”
“헤헤. 그걸 들으셨어요? 아무튼 귀도 좋으셔.”
서은창과 환담을 나누는 사이 알몸의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으악! 침입자다! 아악! 침입… 악악!”
곧 방문 앞으로 우르르 몰려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이불에 돌돌 말린 여자애를 방구석에 옮겨놓은 서은창이 문 앞에 가서 섰다.
나는 소장놈의 마혈을 잡아 던져놓고 방문 앞으로 다가섰다.
“소장 동무! 괜찮으십네까!”
“일 없습네다.”
내가 목소리를 돋워 대꾸하자 서은창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왜. 뭐. 왜.”
“맥락이 영 안 맞잖아요, 사형.”
“그냥 해보고 싶었다고.”
“…네. 사형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당연한 소리를.”
그 사이 문 뒤의 소란은 더욱 커졌다.
참지 못한 훈련소장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들어오라고! 이 간나 새끼들아!”
우지끈!
나무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저거 원래 내 역할인데.
“소장 동무!”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열 명 남짓의 각성자들이 부서진 문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마 이놈들이 교관이겠지.
다들 고만고만한 놈들이다.
“그런다고 밝힐 정체라면 복면은 왜 썼겠냐. 생각을 좀 해라. 응?”
방구석에 찌그러진 알몸의 훈련소장을 발견한 교관놈이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나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소장님을 어떻게 한 거냐?!”
“어떻게 하긴 뭘. 그냥 가볍게 마사지 좀 해줬지. 빨가벗고, 딱 마사지 받으려고 준비하고 있던데.”
“…무슨 개소리……!”
“아하. 니들도 알고 있구나? 이거 딱 보니까 한두 번 한 짓이 아니네.”
놈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여기까지만 할까. 저기 이불에 돌돌 말려 있는 애가 듣기에 좋은 소리는 아니니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
“당연히 안 무사하지. 니들이.”
가벼운 대꾸와 함께 내 발이 바닥을 걷어찼다.
교관1이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황금빛 불꽃에 휘감긴 검을 있는 힘껏 내뻗었으나,
파앗!
월영검의 검날과 부딪친 놈의 검이 두부처럼 잘려나갔다.
놈의 검을 부러뜨린 월영검은 그대로 놈의 어깨를 지났다.
두 조각이 된 놈의 검이 나란히 허공을 한 바퀴 돌았다. 그 위로 붉은 피가 흩뿌렸다.
“죽여!”
하하. 참 말 쉽게 하네.
내가 네놈들 모가지를 싸그리 따버리고 싶은 걸 얼마나 꾹꾹 눌러 참고 있는지 안다면 차마 그런 소리는 못 지껄일 텐데.
이 새끼들은 그 새끼들이 아니다. 아니지만.
화가 난다.
분노가 끓는다.
참아야 하는 이유를 찾고 싶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