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별 거 아닌 꿈 (1)
-각성하고 나니까 바로 힐을 해주더라. 3년 동안 어깨를 못 썼는데. 10분 만에 회복되더라고. 평생 팔병신으로 사나 보다 했는데.
-어쩌다 다쳤냐?
-훈련하다가……?
-대련? 아니면 교관 새끼들한테 맞았냐?
-형. 내가 대련하다가 부상당할 정도로 데데해 보이냐. 나 거기서도 잘나갔다고.
그 얘기를 할 때 김강산의 표정과 말투.
더듬거리고, 머뭇거리고, 어딘가 체념적이고, 평소의 김강산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던 그 모습.
녀석이 열한 살까지 그렇게 살았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거든, 내가.’
피분수를 뚫고 놈들이 쇄도했다.
허리를 뒤로 젖혀 도끼를 회피하고 단번에 접었다.
허공을 수직으로 가른 흰 검기가 도끼놈의 어깨를 잘라냈다.
연환퇴(連環腿)로 철퇴를 올려 차고, 훤히 드러난 철퇴놈의 어깻죽지를 베어냈다.
“이 간나새끼가!”
도 하나가 내 허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탄지공(彈指攻)으로 날려 보낸 돌조각이 도놈의 손등을 관통했다. 도를 떨군 놈의 어깨를 잘라내고, 그대로 한 바퀴 크게 회전하며 쇄도하던 검사놈의 어깨를 또한 잘라냈다.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부드러운 카페트가 붉은 피로 축축하게 젖었다.
나는 꿇어앉은 녀석들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몇 번 검을 휘둘렀다. 세 개의 오른쪽 어깨가 나란히 나란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여덟 명의 교관놈들은 모두 어깨를 잃고 고통의 신음을 흘려대고 있었다.
빡치게도, 힐을 하면 금방 자라나겠지만.
“대체 왜 이런 짓을…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우리는 위대하고 령도하시는 국왕 폐하의 명에 따라… 아악!”
한 놈이 기백 있게 목소리를 높이다가 한쪽 다리를 추가로 분실했다.
…국왕 폐하라.
그래. 아랫놈 백날 조져봐야 뭐 하겠냐.
보육원처럼 내가 지키고 있을 수도 없다. 더 이상 지켜야 하는 대상을 늘릴 수는 없으니까.
내 몸은 하나고, 계룡으로도 충분히 벅차다.
그래도, 너는 얘기가 다르지. 훈련소장놈.
내가 원래 장(長)자 달린 놈들 모가지에는 좀 박한 편이라서.
“훈련소의 애를 범하는 것도 그 위대하시고 령도하시는 국왕 폐하의 명이시냐?”
소장놈이 벌거벗은 몸을 비비 꼬았다.
“범하다니요. 오해십네다. 저는… 그래, 사랑! 사랑을 하고 있었습네다. 민주, 오민주! 거기서 뭐 해, 당장 이리 와서 사실을 고하지 않고! 오민주 네가 네 스스로 내 방문을 열었지 않느…….”
귀가 더러워질 지경이다. 비명도 듣고 싶지 않다.
스팟.
흰 빛무리가 소장놈의 목을 지났다.
벌리던 입을 다물지 못한 대가리가 허공을 한 바퀴 돌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열정적으로 입을 벙긋거리는 소장놈을 지나 내 시선이 교관들을 느릿느릿 훑었다. 제각각의 어깨에서 줄줄 피를 흘리는 놈들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허리를 굽신거리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느라 여념이 없었다.
카펫에 번진 핏자국처럼, 발가락 사이로 허무가 스며들었다.
‘이게 다 헛짓거리일까.’
악인은 아무리 죽여도 끝없이 생겨난다. 블랙데이의 괴물들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일을 얼마나 반복했던가.
곡사파놈들. 내장산채놈들. 혈귀단.
장벽 너머의 땅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욱 심하다.
내가 닿지 못한 곳에서 또 얼마나 많은 악인들이 제 욕망을 채우고 있을지.
오늘 이 소장놈을 죽였으나 비슷한 놈이 또 소장이 되겠지.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될 터.
누군가가 강간을 당하고, 가혹행위를 당하고, 방치당하고, 훈련이라는 이름의 학대를 당할 것이다.
내가 떠나면 내년 1월 1일에는 다시 그 좆같은 시험이 열리고, 열한 살짜리 애들은 떼죽음을 당할 것이다. 김강산의 동기들이 그랬듯이.
“네놈들 말이야. 잘하라고. 착하게 굴지 않으면 다음번에는 내 검이 네놈들 목을 지날 테니까…….”
나는 코스대로 분근착골을 하고 흙덩이를 하나씩 입에 쑤셔 넣은 뒤에 꿇어앉은 놈들을 향해 일장연설을 했다.
놈들이 이마를 땅에 박으며 눈물콧물을 줄줄 흘렸다.
아주 반성하고 있다는 듯한 몸짓과 표정.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이 정도로 반성할 놈들은 처음부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내 목소리가 텅 비어 있는 듯 공허하게 들렸다.
물론 기분 탓이었다.
“가요. 누님.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서은창이 속삭이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무거운 발을 떼어냈다.
소장놈의 목을 자르고 교관놈들의 어깨를 모두 베어냈는데도 전혀 분노가 가시지 않았다. 모두의 목을 자른다 해도 아마…….
“언니! 저도, 저도 데려가요! 제발, 제발이요!”
이불에 돌돌 감겨 있던 아이가 불쑥 얼굴을 내민 것은 내가 건물 중간에 새로 뚫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언…니?”
-사형 얘기잖아요. 지금 설화 누님 인피면구 쓰고 있으시잖아요.
서은창이 작게 속삭였다.
알지. 나도 아는데, 그래도 기분이 좀 그렇다. 응?
***
김강산이 빈주먹을 움켜쥐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일곱 마리의 백호가 얼굴 없는 동기들을 밟아 죽이고 꼬리로 후려치고 있었다. 피가 튀고,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팔꿈치가 땅바닥을 굴렀다.
-!!!!!
무어라 외쳤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김강산은 그날 백호 앞에서처럼 얼어붙어 얼굴 없는 동기들이 한 명 한 명 죽어가는 모습을 몸을 떨며 바라보았다.
모든 동기들을 죽인 백호 일곱 마리가 그를 응시했다.
백호 한 마리가 하늘을 둥실 날아 그에게 다가왔다. 그 발이 정수리에 닿고, 천천히 땅을 향해 내려앉았다.
무릎이 부러지고, 뼈가 가죽을 찢으며 튀어나왔다. 쇄골이 부스러지고 목뼈가 동강났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고통 속에서 그는 피 웅덩이의 바닥을 긁으며 천천히 죽어…….
“허억! 헉!”
김강산이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으로 몸이 축축했다.
‘꿈이었구나. 하여튼… 약해빠져서는.’
장벽을 넘어온 뒤로 거의 매일 밤 비슷한 꿈을 꾸는 중이었다.
십 년 만에 돌아온 북쪽 땅.
자신의 상태는 스스로 염려했던 것보다 괜찮았다. 오히려 서림에게 과거의 일을 털어놓고 나니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원산성에 잠입하고, 신분표를 발급받았다. 도중에 조금 소동이 있었으나 어쨌든 혈귀단의 본거지를 찾는 일도 실마리를 잡았다.
원산성의 리치 소탕 작전은 보름 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서림은 그때까지 수련을 하겠다며 숙소에 틀어박혔다.
그사이 꽤나 친해진 서은창과 장마당을 돌며 미호 만두를 사 먹고 남쪽보다 퍽퍽하고 간이 약한 꼬치구이도 다섯 접시나 먹어치웠다.
분명 괜찮았는데.
이마에 돋아난 식은땀을 손바닥으로 대충 닦아내며 김강산이 나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악몽의 끄트머리를 타고, 과거의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고 있었다.
거의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
높게만 느껴지던 훈련소의 담장.
더 빨리 움직이라는 다그침과 함께 날아들던 교관의 채찍.
윗 기수의 욕설과 발길질, 구타.
훈련소는 또래에 비해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아이들을 선발해 어린 능력자를 배출하는 곳이었다.
여섯 살에 훈련소에 입소한 김강산은 이후 5년 동안 낮에는 격투술과 검술을 배우고, 밤에는 위대하시고 령도하시는 국왕 폐하의 업적을 외웠다.
그리고 11살의 새해가 밝았다.
매년 1월 1일, ‘시험의 날’.
11살이 되는 아이들은 그날 훈련소를 나와 시험장으로 이동했다.
고블린과 구울, 세이렌의 서식지가 공존하는 작은 산에서 김강산은 고블린을 죽이고 각성했다.
군인들이 따뜻하게 김강산을 맞아주었다.
사방에서 축하가 쏟아졌다. 김강산은 얼떨떨했고, 슬펐으며, 한편으로 안심했고, 안심하는 스스로가 끔찍했다.
‘졸업 시험’은 백 명의 훈련생 모두가 각성하거나, 각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죽음으로 확인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김강산의 동기 백 명 중 각성한 것은 김강산 하나였다.
나머지 아흔아홉 명은 십여 마리의 구울에게 물어뜯기거나,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 창에 심장을 관통당하거나, 혹은 시험의 장을 탈출하려 도주하다가 죽었다.
-여어. 꼬맹이. 이제 보위대가 되겠디. 출세했다고 해서 내 은혜를 잊디는 않것디.
훈련소의 교관이 각성을 축하하며 건넨 문장은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날 저녁 김강산은 회복술을 받았다.
채찍질로 생긴 흉터가 사라지고, 부러진 채 굳어버렸던 어깨도 회복되었다. 훈련소에서는 각성을 축하하는 작은 잔치가 벌어졌고 김강산은 전날까지 자신을 구타하던 이들에게 축하의 술잔을 건네받았다.
훈련소는 국왕 폐하의 직속 부대인 보위대를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시설이었다.
머리가 굵어지기 전부터 국왕 폐하의 위대함만을 듣고 자란 소년병들은 일찍 각성하는 만큼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년들은 두터운 충심으로 무장했다.
왕의 사냥개이자 권력의 노른자.
김강산은 다음날 아침 일찍 왕성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국왕 폐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보위대 임명식이 일주일 앞이었다.
그날 그곳, 강계성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강계의 난(亂)은 보름 만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그사이, 갓 각성한 덩치만 큰 어리버리한 남자애 하나가 강계성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내가 너를 샀어. 아주 비싸게 주고 샀지. 돈값은 해야지. 안 그래?
각성자용 수면제로 일주일 내내 잠들어 있던 김강산이 정신을 차렸을 때 마주한 사람은 얼굴에 긴 칼자국이 있는 사내, 희망보육원의 원장이었다.
‘고마운 사람이지. 림이 형을 만나게 해줬으니. …근데, 형은 또 어디 갔냐?’
침대에서 일어난 김강산은 맞은편 서림의 침대가 비어 있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평소라면 모를 리 없었는데 확실히 얼빠진 상태이긴 한 모양이었다.
“이러다 또 림이 형 발목 잡으면 아예 뒈져야지, 김강산! 정신 차리자!”
짜악. 짜악.
손바닥으로 뺨을 몇 대 후려갈긴 김강산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근데 림이 형. 진짜 어디 갔냐.”
한숨을 내쉬며 김강산이 길게 자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분명히 자신이 잠들기 전에는 건너편 침대 밑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 ‘수련’ 자세.
“또 정보 수집이라도 하러 갔나.”
김강산은 잠을 청하려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김강산의 귀에 인기척이 들린 것은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벌떡 일어난 김강산은 나무 창문을 열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주시했다.
어둠 속에서 검은 인영이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형! 그새 또 어디…….”
설화누님 인피면구를 쓴 서림이 열린 창문을 통과해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김강산은 끊어진 문장을 잇지 못하고 얼빵한 표정으로 서림과 그 뒤에 도착한 서은창과, 서은창의 품에 안긴 어린 여자애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형. 이제 납치까지?”
“이놈이. 나를 뭘로 보고.”
***
‘아이 씨. 이러다가 또 일 커지면 머리 아픈데.’
처음에는 대가리들이나 적당히 후려패주면서 화풀이 좀 하고 깔끔하게 돌아 나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소장놈이 하고 있던 짓거리에 속이 뒤집혔고,
소장놈이 변명이라고 지껄이는 소리에 눈이 뒤집혔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
여자애는 옷을 입혀놓고 나니 완전 애기였다.
9살이라는 나이치고는 키가 훌쩍 크기는 했다. 김강산의 이야기로는 성장이 빠른 애들이 훈련소에 뽑혀온다더니 이 애도 그런 모양이었다.
그래도 키만 컸지, 얼굴이나 하는 소리가 완전 애기인데.
이런 어린 애한테 어떻게 그런 짓을. 진짜 죽일 놈의 새끼다.
…아. 이미 죽였지, 내가.
-동무 하마이 강허무다. 동무도 보위대와요? 하마이 센 사람들은 다 보위대 소속이라던데. 국왕 폐하를 뵌 적은 있슴매? 국왕 폐하 진짜 잘생겼습네까? 동무만큼? 내래 시험 통과해서 보위대 될 거꾸마!”
애는 울며불며 데려가 달라고 매달리던 게 거짓말처럼 해맑았다. 그리고 귀가 아프도록 말이 많았다.
나와 서은창이 숙소에 들러 피로 떡칠한 옷을 갈아입는 잠깐 사이 김강산은 애와 꽤 친해진 눈치였다.
나는 경공을 전개하며 김강산을 살폈다.
김강산은 약자를 돕는 일이 제 사명인 양 구는 최지수와는 달랐으니까.
내 말에 따르기는 해도 매번 툴툴거렸다. 김강산이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건, 아마 나 때문일 터.
애를 내려다보는 눈이 촉촉했다. 저런 김강산의 얼굴은 처음이다.
제 과거를 떠올리는 건지. 어려서 죽은 동기들을 떠올리는 건지.
‘어느 쪽이든 별로인데.’
어쨌든 해맑은 아이는 김강산에게 안겨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작게 꺅꺅거리는 중이었다.
“조용. 이제 성벽 넘을 거라우. 집에 가려면 지금은 조용히 하라우.”
김강산이 답지 않게 부드러운 말투로 아이를 얼렀다.
훈련소 습격 사건이 알려졌는지 성 안에 소란이 일고 있었다. 무리지은 순찰단원들이 지붕 아래 골목을 이리저리 쏘다녔다.
나는 기감의 그물을 넓게 펼쳐 놈들의 진로를 피해 손쉽게 성벽을 넘었다.
“이쪽. 아니, 오른쪽! 아니, 아니, 아까 거그, 큰 나무 옆길로 가시라우. 어… 아난?”
작년에 마을 인근에서 납치되어 왔다는 아이는 제 집으로 가는 길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덕분에 죄 많은 구울과 오크와 나가 몇 마리가 세상과 이별했다.
9살짜리가 그렇지, 뭐.
이런 애한테 그런 짓을. 그 죽일 놈의 새…….
그래, 내가 죽였지. 참 잘했다, 나놈.
아이의 집이 있는 성벽 바깥의 작은 마을, 북쪽에서는 집단농장이라고 부르는 곳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10여 미터의 담장 위 초소에서 보초를 서던 여자가 문 앞에 멈춰선 나를 발견했다.
“누구냐? 멈춰라!”
“이미 멈췄는데.”
말문이 막힌 여자를 향해 김강산이 아이를 들어올렸다.
“진영 아지매!”
아이가 발랄하게 여자를 불렀다.
다음 차례는 진영 아지매가 놀라고, 구르듯 계단을 내려오고, 소리쳐 아이의 부모를 찾아 마을로 달려 들어가고, 아이의 부모가 눈물을 흩뿌리며 아이를 얼싸안고…….
그래야 했었는데 말이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