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별 거 아닌 꿈 (2)
잠시 놀랐던 진영 아지매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진영 아지매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아이가 아닌, 나에게 말을 걸었다.
“뉘신데 이 에미나이를 데려오셨습네까. 이 에미나이는 위대하시고 령도하시는 폐하의 보위대가 되기 위해 훈련소에 입소하였는데요.”
내가 김강산을 향해 손짓하자 김강산이 슬며시 아이를 내려놓았다.
서은창이 아이의 손을 잡았다. 이쪽을 바라보던 아이는 김강산이 백염으로 장미꽃을 만들어내자 시선을 빼앗기고 김강산과 서은창을 따라 멀어졌다.
참 사이좋은 모습이다.
얼마 전 김강산의 과거 스토리를 들은 후로 서은창은 김강산을 긁지 않았다. 아니, 은근히 챙겼다. 김강산도 그런 서은창이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도적놈의 새끼’, ‘혈귀단 찌끄레기’, 잘해도 ‘야’였던 호칭이 오늘 아침 드디어 ‘은창이 형’으로 바뀌었으니까.
나는 사이좋은 남매처럼 보이는 우리 애들에게서 시선을 떼어내 눈앞의 아지매를 응시했다.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낀 뒤 비스듬히 입술을 들어올렸다.
검자루를 툭, 툭, 건드는 건 기본이다.
“아이 부모는? 네가 뭔데 껴들고 지랄이야.”
진영 아지매가 할 말 많은 표정으로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담장 안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횃불을 든 남녀가 담장 밖으로 나왔다.
“당신들 딸이야. 오민주. 훈련소장이 아이에게 몹쓸 짓을 했더군.”
고맙습니다, 라는 말이 나와야 정상인데 역시 나오지 않았다.
“우리 민주는 보위대가 될 인재웨다. 대체 어데서 무슨 소리를 듣고 얼굴 멀끔한 젊은이래 남의 집 일에 끼어드는디 모르겠디만 여서 행패 부리지 말고 당장 민주를 훈련소에 데려다 놓으시오. 아니, 내래 날 밝으면 데려가리다. 민주야, 아바이에게 날래 오라!”
남자가 멀리 떨어진 김강산과 서은창을 소리쳐 불렀다.
서은창이 머뭇거리며 오민주의 손을 쥔 채 다가왔다.
내가 오른손을 들자 서은창의 걸음이 멈췄다. 서은창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오려는 오민주를 김강산이 안아 냉큼 뒤로 돌았다.
들어 올린 내 오른손이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놈이 발버둥을 치며 켁켁거렸다.
“이거 놓으라우! 뉘기래 한밤중에 습격해서 행패를 부립네까!”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내 팔에 매달렸다.
내가 팔을 휘두르자 여자가 우당탕 나자빠졌다.
“어마이!!”
오민주가 외치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나는 남자의 얼굴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니들이 애를 팔아넘겼구나. 그렇지?”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팔아넘기다니. 거 말이 심하디 않소. 내래 그저 내 딸의 창창한 앞길을 위해 보다 나은 선택을 한 것 뿐이라우.”
“이 새끼가. 애 듣잖아.”
“알아야디, 지도 알아야디. 그 정도 어려움도 견디디 못해서야 어디 보위대가 되것어! 고작 그 정도도 못 버티고 집으로 돌아올 거면,”
빠악.
남자의 얼굴이 크게 돌았다.
무엇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내가 아니다. 김강산이다.
김강산이 다시 주먹을 들어올렸다. 손등에 핏줄이 솟아 있었다. 악문 잇새로 짐승의 신음 같은 작은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그때.
김강산의 부모가 다섯 가마니의 쌀과 몇 장의 돈표를 받고 김강산을 훈련소에 판매했을 때.
-처음에는 몰랐어. 어마이랑 아바이는 그날 왜 그렇게 웃었지? 내가 훈련병으로 뽑힌 게 그리 좋나? 어여 보위대가 되어야겠구나… 거저 그리 생각했디.
김강산은 훈련소로 떠나던 날의 광경을 기억했다.
좁은 마당 가득 쌓여 있던 쌀가마니. 엄마의 손에 들려 있던 돈표. 엄마와 아빠는 마을 장벽까지 나와서 자신과 자신을 데려가는 사내를 배웅했다.
그 부모의 얼굴에 가득하던 함박웃음. 김강산은 그 웃음의 의미를 몇 년 후에서야 깨달았다.
-…내 부모가 나를 팔았구나. 그날 거기 쌓여있던 쌀가마니가, 어마이 손에 들려 있던 돈표가, 내 목숨 값이구나…….
“꺄아아악!!! 여보!!!!”
비명을 지르며, 여자가 제 남편을 껴안았다.
남자의 어깨가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힘없이 늘어진 오른쪽 팔이 끈 떨어진 연처럼 덜렁였다.
-야. 김강산. 강산아. 산아.
나는 김강산의 손목을 꽉 붙들고 그 귓가에 속삭였다.
-애가 본다. 저기, 오민주 있다고. 산아.
제 부모를 향해 달려오려던 오민주를 서은창이 막 들춰 안았다. 서은창에게 안긴 오민주의 고개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필사적인 표정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팽팽하던 근육에 천천히 힘이 풀렸다.
“저것도 부모라고…….”
“아냐. 저건 부모가 아냐. 누가 저런 걸 부모라고 부르냐. 다들 그렇게 불러도, 나는 아냐.”
남자를 껴안고 있던 여자가 소리를 쳤다.
“습격이다! 도적떼가 습격했다!”
방벽 안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김강산의 손목을 잡아끌며 서은창에게 눈짓을 했다.
“가자.”
“네, 누님.”
김강산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오민주를 안은 서은창이 뒤따랐다.
곧 세 줄기 바람이 원산성 외곽의 깊은 숲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
“벌써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하. 동감이네요.”
“하룻밤 사이 애가 생겼나.”
“인생이라는 것이 참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디요.”
바스락.
나는 철제 책상 위에 돈표 뭉치를 올려놓았다.
여자의 눈동자가 돈표를 향했다가 나를 향했다가 김강산의 손을 잡고 있는 오민주를 향했다.
“어젯밤에 훈련소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더군. 훈련소장이 죽고 여자아이 하나가 사라졌다던데.”
“모르는 일입네다.”
“범인을 찾는다고 아침부터 장마당이 발칵 뒤집혔디. 여자 사냥꾼은 모두 방위단에 잡혀갔디.”
꼴깍.
김강산이 침을 삼켰다.
“어르신. 이 아이의 신분표를 만들어 주시겠습네까, 만들어 주시지 않겠습네까. 그것만 말하라우.”
오늘 아침, 평소대로 일찍 일어나 운기조식을 하던 내 귀에 잡힌 것은 순찰단의 목소리였다. 훈련소를 공격한 두 괴한과 훈련소에서 사라진 여자아이를 찾는 이들이 숙소의 방을 하나씩 뒤지고 있었다.
오민주를 안은 채 창문에 매달려 일단 위기는 넘겼지만.
‘놈들이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어 다행이지.’
정보가 조금밖에 없을 때는 그것에 더욱 집중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부러 서은창에게는 복면을 씌우고 나는 인피면구를 썼다. 그게 통하기는 했는데…….
-저를 받아주지 않으셨던 거라. 내 들었쉐다. 돌아가라 말씀하시는 거… 그럴 줄 알았쉐라. 아바이 어마이는 내래 훈련병으로 선출되었을 적 하마이 기뻐하셨어라. 하지만 내래… 훈련소가 너무 싫수다…….
애는 그 와중에 김강산의 눈치를 살피며 제 아버지의 팔이 괜찮을지 염려했다.
팔을 다치면 일을 못 나가고 일을 못 나가면 배급을 못 받는다며 소리 죽여 우는 애를 달래느라 김강산과 서은창이 아침 내내 진땀을 흘렸다.
일을 못 하는 게 문제일까.
훈련병이던 아이가 훈련소장을 살해한 괴한을 따라 탈출했으니 그 부모에게 불똥이 튀기지 않을 리 없다. 이곳의 분위기를 봐서는 바로 사형에 처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김강산도 서은창도 하지 않았다.
아이가 알 필요가 전혀 없는 이야기다.
지금도, 앞으로도. 가능하다면 영원히.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이 아이를 계속 데리고 다닐 수도 없다. 그렇다고 가져다 버릴 수도 없다. 일단 지금 당장이든 나중이든 이 아이에게 필요한 건…….
‘신분표는 있어야 살 수 있겠어.’
백발의 여자가 오민주를 응시했다.
짧은 침묵 후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이름. 나이. 출신 구역.”
“이름은 김철이고요, 열두 살입네다. 강계성 4구역에서 출생해서, 부모를 여의고 사냥꾼인 형을 따라다니며 짐꾼으로 일하고 있습네다.”
오민주가 준비한 내용을 술술 말했다. 역시 똑똑한 녀석이다. 눈치랑 머리는 김강산보다 낫다.
“형이 누고?”
“김산이요. 여기.”
오민주, 아니, 이제 김철이 된 녀석이 김강산의 손을 잡아당겼다. 김강산이 김철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꽤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 같은 것 같기도 한데…….
“기다리라우.”
…아이 씨. 이게 이리 안심할 일이냐고.
나 또 쫄았었냐.
가슴을 쓸어내리는 나를 향해 여자가 손짓했다.
“자네. 이짝으로 오라우.”
***
철제 문 안쪽은 바깥과 비슷한 좁은 방이었다. 방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커다란 철제 책상이었다.
책상의 한쪽에는 쇠로 된 위조 신분표와 정과 끌, 송곳, 그 외에 용도를 알 수 없는 다양한 도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여자의 작업실이었다. 전날에는 바깥에서 기다리라 했었는데.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어쩔 심산인가. 남쪽으로 데려갈 생각인가?”
…어떻게 눈치 챘지. 꽤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자네, 설마 그 말투.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것디? 차라리 벙어리 행세를 하는 편이 낫겄네만.”
“하하. 그런가요. 뭐, 그럼 편하게 말하지요.”
내 웃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희미한 미소조차 띄우지 않았다.
머쓱하게 웃음을 멈춘 나를 향해 여자가 다시 물었다.
“대답하게. 그 아이는 어쩔 심산인가.”
그러게. 어쩔 심산이지.
나 역시 그게 궁금하다.
내 존재가 오히려 계룡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그래서 혈귀단의 뒤를 쫓는다는 핑계를 대며 계룡을 떠나왔다.
그래놓고, 북쪽에 와서 또 비슷한 짓거리를 시작하고 있다.
훈련소장놈. 그래, 김강산의 이야기를 듣고 분이 끓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저 후려패고 분풀이를 하고 돌아올 생각이었지 또 누군가를 지키고 구하는 지랄을 떨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의 부모에게 아이를 떨궈놓고 올 수도 없었다. 아이의 부모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인간의 껍질을 쓴 괴물만도 못한 중생들이다.
어쩌면 혈왕놈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지.
인간이란, 이렇게 애를 써 지킬 가치가 없는 존재일지도.
불쑥, 그런 생각이 솟아오르곤 했다.
최지수가 곁에 있을 때에는 누를 수 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김강산의 과거를 듣고, 훈련소장놈의 행태를 목격하고, 오민주의 부모를 마주치고 나자…….
‘내가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
길을 잃은 기분이다.
아니, 한참 전부터 그런 기분이었다.
혈귀단의 본거지를 찾겠다고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있지만, 그걸 찾아 박살낸 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결정하지 못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당장 계룡으로 돌아가고 싶다.
마이 스위트 스위트 홈. 최지수가 있고, 월매가 있고, 은영단과 계룡문 애들이 있는 곳.
하지만, 그 기생충들이 또 나타난다면?
혈왕에게 기생한 놈은 약한 놈이었다.
그러나 백호에게 기생했던 놈은, 당시와 비교할 수 없도록 성장한 지금으로서도 잡을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지금까지 나타난 두 기생충은 묘하게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나타날 놈들도 모두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더군다나 한 놈이 아니라 여러 놈이 한꺼번에 나타난다면?
무엇이라도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왜 놈들이 내 주변에 나타나는지. 놈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혈왕에게 기생한 놈이 지껄인 말은 어떤 의미인지. 백호에게 기생했던 놈이 지껄인, 내가 잊어버린, 잃어버린 것이 대체 무엇인지…….
‘…내가 없는 게 차라리 더 안전해. 이제 계룡은 괴물에게 위협당할 수준이 아니니. 위험한 건 인간. 그리고, 기생충이니까.’
여자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끊었다.
“잡생각이 많군.”
“내가 원래 생각이 깊어요.”
“과한 생각은 스스로를 갉아먹는 법이디.”
“고민이 부족한 사람은 타인을 갉아먹지요.”
여자의 눈이 잠시 번쩍였다.
“아이는, 네, 남쪽으로 데려갈 겁니다. 아이가 원한다면요.”
“…원하디 않는다면?”
“뭐, 지금부터 방법을 찾아봐야죠.”
어차피 혈귀단의 본거지를 찾으면 김강산과 서은창을 떼어낼 생각이었다.
김강산이 순순히 내려가지는 않을 테지만, 아이를 계룡에 데려다 주라는 핑계는 썩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래. 일단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신분표부터 해결해 볼까.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한 번 구해준 애를 내버리는 양아치는 아닙니다. 그래, 신분표 가격은 얼만가요? 미성년인데 설마 성인이랑 같은 값 받으실 건 아니죠? 그렇게 바가지 씌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반값 어때요, 콜?”
나는 여자를 응시하며 양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환하게 웃었다. 전날은 전혀 통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좀 통한 느낌이다.
표정이 없던 여자의 눈에 옅은 웃음이 묻어 있었으니까.
“돈은 받지 않것네.”
“어르신. 역시 훌륭하신 분이셨군요. 혹시 그러면 어제 저희가 낸 돈도… 꽤 비싸더라고요. 덕분에 지금 빈털터립니다. 착한 일 했으니까 선행 할인 이런 거… 네. 안되겠지요. 네. 농담이었습니다. 나가 있겠습니다.”
주절거리며 철문을 나서려는 나를 여자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자네.”
“네! 역시 생각해보시니 할인해 주시……?”
여자는 웃지도 고개를 젓지도 않은 채 물음표를 던졌다.
“자네의 꿈은 뭔가?”
“꿈? 꿈이요?”
아주 오래간만에 듣는 단어다. 어쩌면 처음일지도.
그런 추상적인 미래를 얘기하기에는 언제나 당장 산적한 일이 태산이었다. 꿈같은 건, 최지수와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
목표도, 목적도 아닌 ‘꿈’이라…….
여자는 재촉하지도,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이 판국에 꿈이 별 게 있겠어요?”
양쪽 입술 끝을 들어올리며, 내가 말했다.
“내 애들하고 평화롭게 사는 거죠. 내가 좀 살아봤는데, 그게 최고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