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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78화 (78/122)

78화. 별 거 아닌 꿈 (3)

백발의 여자가 철제 책상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커다란 책상이 나무토막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왼팔로 책상을 받친 채 여자가 책상 아래 깔려 있던 얇은 카펫을 옆으로 치웠다. 곧 넓은 석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르릉.

마력으로 석문을 움직인 여자가 곧 지하 통로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여자가 가볍게 손을 휘젓자 석문이 닫혔다.

시멘트 바닥의 흙먼지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먼지 조각이 얇은 카펫을 들어 올려 석문을 덮었다. 뒤이어 철제 책상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조용히 제자리에 안착했다.

방은 조금 전과 완전히 같은 모양으로 되돌아왔다.

방의 주인, 백발의 여자가 없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

.

.

여자는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는 슬라임을 가볍게 해치우며 미로처럼 뒤엉킨 지하 통로를 한참 동안 이동했다.

여자가 걸음을 멈춘 곳은 커다란 바위의 앞이었다.

톡. 토독. 토도도독. 톡톡. 토독. 토독. 톡.

여자가 바위를 두들기자 건너편에서 대답이 되돌아왔다.

토도도독. 톡. 토독. 톡. 토도도독. 톡.

뒤이어 바위가 움직였다.

석문의 앞을 지키는 두 보초에게 눈인사를 한 여자가 좁은 통로를 지나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곳곳에 선 보초들이 여자를 향해 경례를 했다.

낡은 나무문 안에서는 두 사람의 열띤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혁명당 원산지구 유격대장 엄두병과 정치국장 강만순.

강만순의 은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아 동무에게서 연통이 왔더이다. 성주의 원정 날짜가 보름 후로 결정되었답디다. 방위단 전체와 순찰단 절반을 이끌고 간다니 성이 텅 비겠디요.

-모다 강 동무의 탁월한 작전 덕분임매.

-허허. 탐욕스러운 성주 덕택이웨다. 암흑각성자들의 은신처에 보물이 쌓여 있다는 소문에 하마이 쉬이 넘어 갈 줄은 내래 예상 못 했디요. 거래, 대장 동무. 거병할 준비는 어띠 되어 가고 있음매?

강만순이 엄두병에게 물었을 때 여자가 문을 두들겼다.

파란 플라스틱 탁자를 가운데 두고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여자를 보았다.

엄두병이 벌떡 일어나 여자를 맞았다.

“공 성주님.”

“성주라니, 그리 부르디 마시라우.”

“성주님을 성주라고 부르지 뭐라 부릅네까.”

“성이 없는 성주가 어찌 성주입네까. 내 거저 일반 당원일 뿐이오.”

백발의 여자, 공선희가 권하는 자리에 앉자 엄두병이 다급하게 물었다.

“공 성주님… 예, 공 동무과 논의드릴 게 있어 연통을 드렸습네다.”

“거게 무엇이디요.”

엄두병이 소리를 낮추며 은밀하게 말했다.

“어제 훈련소의 란리래 성주가 꾸민 계략이 아닐까웨.”

공선희가 가만히 엄두병을 응시했다. 그러자 강만순이 설명을 덧붙였다.

“어제 훈련소를 습격한 괴한을 잡는다고 오늘 순찰단이 거리에 쫙 깔렸디요. 우리 당원들 몇이 잡혀 들어가디 않았습네까.”

“혹여 우리의 거병이 알려딘 거일까 염려이 깊습네다.”

공선희의 시선이 엄두병과 강만순을 차례로 훑었다.

엄두병은 혁명당으로 몰려 아버지를 잃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저 술을 좋아하고 말이 많은 농부였다.

강만순은 한때 보위대 소속이었다. 그는 창창한 미래를 스스로 걷어차고 이 나라를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혁명당에 투신했다.

혁명당의 원산지구 총책임자인 엄두병과 강만순은 성주의 이번 원정을 틈타 혁명을 일으키려 준비하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훈련소의 난리가 순찰을 강화하기 위한 성주의 계략이라면 어디선가 정보가 새어나갔다는 의심은 타당했다. 하지만.

“어제 훈련소의 사건은 성주가 꾸민 딧이 아니오.”

“예? 어찌 그리 단언하십네까.”

공선희는 어제와 오늘 그에게 다녀간 이들을 떠올렸다.

두 능력자가 숨기고 있는 마력도 꽤나 대단했으나, 그 앞에 서 있던 미남자에 비하면…….

‘아무 마력도 느껴디디 않았디.’

능력자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무엇인가가 있다.

공선희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강계성은 시베리아 벌판에서 끊임없이 괴수가 밀려드는 조선국의 최전선이었다. 공선희는 그곳에서 수만, 수십만의 괴수를 베고 수십 번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강계성의 성주가 되었다.

그를 살아남게 만들어준 것은 바로 그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이성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선뜻한 느낌.

기이한 자와의 마주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늘 다시 방문한 그는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훈련소에서 사라졌다는 여자아이가 분명한, 자신의 목적에 방해가 될 것이 분명한 짐덩이를 데리고 우격다짐으로 신분표를 내어 놓으라 우겨댔다.

기묘한 기운을 지닌 미남자에게 꿈이 무엇이냐 물은 것은, 어린 여자아이를 구해 데려온 그에게서 자신의 젊은 시절이 얼핏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핍박받는 이들을 구하겠다는 원대한 꿈.

공선희는 동지들과 함께 꿈을 꾸었고, 웃었고, 동지들을 잃었다.

젊은 자신을 닮은 그에게 가벼운 충고를 해줄 생각이었다.

그런 허망한 꿈을 좇지 말라고. 그런 꿈을 좇다 보면 발밑이 어느새 허방이 되어 있으리라고.

하지만 공선희의 예상은 빗나갔다.

-내 애들하고 평화롭게 사는 거죠. 내가 좀 살아봤는데, 그게 최고더라고.

그렇게 대답하던 이의 얼굴은 마치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낸 사람 같았다.

고작 스무 살 남짓의 젊은이가 만들어낸 표정이라고 여기기 힘든 복잡한 미소가 매끈한 얼굴에 잠시 맺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 동무. 무신 생각을 그리 하십네까.”

“…훈련소장을 죽인 자를 알고 있소.”

“정말입니까? 대체 누구입네까? 그럴 만한 사람이 대체 어디서 솟아났더래요?”

“백 소장이 만만한 인물이 아니디 말입니다. 훈련소 교관들이 모두 보건소로 실려갔다디요.”

“…혹시 공 성주님… 아니, 공 동무이 손을 쓰신……?”

엄두병이 슬깃 공선희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선희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렇다면은… 대체 뉘라는 말씀임매?”

“어제 신분표 제작을 의뢰한 세 명의 뜨내기가 있었디. 그자들의 기세가 대단했디요.”

“아니, 얼마나 대단허길래 성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랍디까?”

“그런 치들이 어띠 갑작스레 원산성에 나타났을까요? 혹 왕성이 또 수작을 부리는 건… 그 정도 실력이라면 위장한 보위대라고 봐야……!”

공선희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장한 보위대가 아이에게 신분표를 만들어주려 그토록 애쓸 이유가 없다. 그때 그자들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만약 자신이 그 작업을 거절했다면 작업실에서 피를 보았을 것이다.

“그건 아니오. 내 보증허디. 그저 다른 용무 중에 우연히 들른 자들이오. 사냥꾼들의 얘기로는 암흑능력자들을 쫓고 있다더군.”

“…남쪽에서 왔군요. 통로가 어디 있기는 있는감매. 그치들, 요즘 통 안 보이더매.”

엄두병이 클클 웃으며 강만순의 말을 받았다.

“그 호로자식들이 눈앞에서 사라디니 속이 다 뻥 뚫리대요. 확 마 다 뒈져버렸으면 원이 없갔네.”

“엄 동무. 그치들이 수급하던 빨간약이 똑 떨어져서 아주 곤란하다더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디.”

웃음을 멈춘 엄두병이 공선희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훈련소 소장을 텨죽였으믄 저짝이랑 무슨 원한이 있을까와? 이짝으로 끌어들이믄 큰 힘이 될 텐데레.”

강만순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디오, 엄 동무. 자팃하다 정보가 흘러나가면 위험하다우. 거저 저짝이 아닌 것이 다행이디.”

엄두병이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선희는 강만순의 말이 옳다 여기며 가슴속에 싹트는 희미한 기대를 억눌렀다.

‘그자가 만약 이쪽에 서준다면, 만약 그러하다면 더할 나위 없는 우군이 되겠디만…….’

***

정면에 뿌리박힌 서은창의 얼굴이 창백했다.

벌어진 입에서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형. 저 사람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겁니까?”

나는 숨을 내쉬며 느릿하게 주변을 훑었다.

갑옷을 입고 자신의 병장기를 갖춘 각성자들이 원산성문 앞 공터에 도열해 있었다.

서쪽에 모인 100여 명 각성자의 선두에 선 리태연의 진중한 얼굴이 보였다. 아마 저들이 방위단일 테고.

동쪽에는 50여 명 각성자이 각을 맞춰 도열해 있었다. 아마 저들이 순찰단.

그리고 그 뒤에 장마당에서 잠시 마주쳤던 자유사냥꾼 놈들 50여 명이 나를 힐끔거리면서 수군거리다가 눈이 마주치고는 입을 딱 다물었다.

성 방어를 위한 필수 인력만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겠다더니 과연 사실이기는 했다.

인원은 많았다. 비록 고수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나에게 제발 같이 가달라고 매달린 이유가 이래서였다 싶다.

까딱 잘못하면 그 리치에게 생명력을 빨리고 모두 좀비 신세가 되어 어우어 어우어 하면서 숲을 돌아다니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 거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고.

능력부족도 죄지만, 악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건 문제가 다르지.’

내 시선이 순찰단에게 끌려나온 이들을 향했다.

100명은 훌쩍 넘는 사람들.

이마며 뒤통수에 피딱지가 앉은 이들도 여럿이고, 옷 아래 드러난 손과 발에 멍이며 상처를 달고 있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밧줄로 팔과 허리를 묶어 서로 엮어 놓은 모습이 굴비를 꿰어 놓은 듯했다.

찬찬히 그들을 살피던 중 아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오민주의 부모.

얼굴이 피멍과 핏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오민주가 훈련소를 탈출한 건으로 순찰단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겠지.

그야말로 자업자득이다.

그러나.

‘…쟤들은 아니잖아.’

밧줄 사이사이에 오민주 나이 또래로 보이는 어린애들이 몇몇 보였다. 손목이며 발목이 비썩 마르고 배만 톡 튀어나온 것이 음식을 훔쳤다가 잡힌 게 아닐까 싶은데.

저 꼬맹이들이, 죽어 마땅한 악행을 저질렀다고? 리치에게 생명력을 빨려 좀비가 되어 죽어도 죽지 못한 상태로 세상을 떠돌 만큼의 악행을?

그럴 리가.

‘이게 그 ‘방패’라는 거군.’

훈련소장의 목을 딴 다음날부터 며칠 간 나는 성주의 뒤를 쫓았다.

의심스러운 놈을 그냥 둘 수도 없고. 이거 좀 알아보라고 몇 마디 하면 알아서 척척이었던 최지수도 없고.

김강산이나 서은창에게 시켰다가는 정보 수집은커녕 사고 수습을 해야 할 판이고.

집 나오면 이렇게 개고생이다.

방위단장 리태연이 한수길의 화려한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나는 그 지붕 위에서 퍽퍽한 미호 뒷다리 꼬치를 씹고 있었다.

젠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데.

나는 계룡의 일호 꼬치를 그리워하며 퍽퍽한 고기를 꿀떡 삼키며 얼른 기감을 돋웠다.

-리 동무. 방패는 잘 준비되고 있나?

-…죄수들의 숫자가 충분하지 않사옵네다. 현재 감옥에 수감된 흉악범의 수로는 유의미한 타격이 이루어질 때까지 시간을 벌기가...

-쯧. 쯧. 리 대장은 다 좋은데 그거이 문제라우.

-예?

-흉악범만 방패로 사용하라는 법이 어디 있디?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 모르오? 지금까지는 소 도둑만 잡았디만, 필요하다면 바늘 도둑도 잡아야디.

한수길의 목소리가 은근했다.

그에 비해 리 동무의 반응은 영 어정쩡했다.

-하디만, 글카면…….

-허면, 그 대괴수를 그대로 방치하자는 말인가?

-…그런 말씀이 아입네다.

-그러면 가서 실행하게.

단호한 한수길의 지시에 대응하는 리 동무의 태도는 조금 의외였다.

-그럴 수는 없습네다.

한수길은 몇 번 을르고 몇 번 회유하다가 곧 리 동무를 내보냈다.

우리 리 동무.

명령에 불복종하는 이 시대의 참 군인이었다.

하지만.

리 동무가 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놈이 집무실의 문을 두들겼다. 순찰단장 장소민이라는 젊은 여자였다.

-지시하신 대로 이행하겠습네다.

성주놈은 방금 전의 지시를 되풀이했고, 장소민은 그런 성주를 향해 경례를 붙였다.

그래도 설마설마했다.

생사람을 리치밥으로 제공하는 것만 해도 내 수용 범위 바깥이다. 그런데, 저런 어린애까지?

하하하.

하하.

하… 시발.

내 땅도 아니고 내 사람도 아니다.

눈 감고 귀 막고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말이지.

‘이건 너무 심각하게 거악이잖아.’

서은창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목소리에 은은한 분노가 묻어 있었다.

“사형. 이거 어떻게 할까요.”

황미영 그 사람, 애 참 잘 키웠네.

그래. 아무리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이라도 이걸 그냥 둘 수는 없지.

협행멸악(俠行滅惡) 구약보세(求弱保世)를 문훈으로 삼는 월악의 개파시조로서도, 지키는 검을 들기로 약조한 계룡문 대표로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

…기는 한데.

“야. 우리가 사파냐? 도적놈이야? 검부터 뽑아들고 생각하게?”

서은창은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들려는 기색이었다.

눈알을 굴리며 기색을 살피던 김강산도 은근슬쩍 도자루에 손을 가져가 댔다.

“솔직히 형이 할 말은 아니지.”

“…동의합니다. 사형.”

이 새끼들이.

파르르 떠는 서은창을 진정시키며 나는 천천히 공터를 휘둘러보았다.

순찰단과 방어단 사이로 화려한 갑옷을 입은 성주 한수길이 막 등장하는 중이었다.

괴물도 없는데 대도를 꺼내 손등에 핏줄이 서도록 움켜쥐고 있는 꼴이 우스울 지경이다.

…어쩌겠어. 저게 여기 성주인데.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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