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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79화 (79/122)

79화. 믿음의 의미 (1)

“멈추시라우.”

그에게 향하는 내 발을 리태연이 가로막았다. 막 왼손을 들어 올리려는데 한수길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 대장. 내래 듣갔네.”

역시 눈치 빠르기가 쥐새끼 같다.

눈 많은 곳에서 제 아랫사람이 망신당하는 꼴을 보여줄 수는 없다는 거지.

방어단과 순찰단, 경호단 애들이 흘깃흘깃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공터 멀찍이 출정을 구경하러 나온 일반인들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오고 있다.

말하자면, 이야기하기 딱 좋은 장소다.

“성주님.”

“왜 그러하느냐.”

이 새끼, 말투 봐라.

반존대를 섞어 쓰던 집무실에서와 달리 완전 하대다. 사람들 시선에 더럽게 신경 쓰는 놈이다.

그래, 그렇다 이거지.

맞춰 주기는 어렵지 않다만…….

‘값은 내야 할 거야.’

나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 예의를 표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방패들이 일으키는 자에게 생명력을 흡수당하는 동안 능력자들이 원거리 공격을 퍼붓는다는 작전을 준비하셨겠지요?”

“그러하다.”

하나 둘 시선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던 수군거림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느릿느릿 가라앉았다.

고요해진 공터에 한수길과 내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혹시 그 괴수와 직접 대면하신 분께서 세우신 작전일까요?”

“당연한 소리를…….”

내가 놈에게 바싹 다가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크게 쪽팔리고 싶지 않으면 내 말 듣는 게 좋을 겁니다, 성주님. 정아 동무랑 재미 좋으시더라고요?

그동안 지켜본 결과 성주놈은 아내에게 꼼짝 못했다.

성주놈의 아내가 왕의 둘째딸, 즉 공주더라고.

웃기는 건 성주놈이 아내에게 쩔쩔매면서도 아내 몰래 첩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잠입해 있는 며칠 사이에도 정아에게 세 번이나 찾아갔었다. 그 정아라는 여자도 꽤나 만만치 않아 보이기는 했는데.

이 원산성도 상황이 꽤나 복잡하더라고.

‘뭐, 거기까지는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고.’

-그걸 어떻게……!

-에이. 지금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해요? 성주님이 지금부터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가 중요하지.

-…거래. 말하시우. 내래 그리하디.

-역시 잘 통할 줄 알았어. 그러면 이렇게 얘기하세요.

나는 가볍게 눈을 찡긋이며 성주놈에게서 떨어졌다.

성주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저것도 능력이다, 진짜.

성주놈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제 내 직접 확인해보니 그 괴수가 더욱 성장했다. 하여, 비능력자를 방패로 사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리 동무. 방패들을 다시 투옥하라.”

“예! 성주님! 당장 이행하겠습네다!”

리 동무가 발을 구르며 경례를 붙였다.

이거시 바로 정보의 힘이디, 리 동무.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방패 없이 그 괴수를 어찌 막디?

-더 성장했다는데 어쩌긴 어쩌. 살던 대로 살아야디. 아니면, 네가 방패 노릇 할 끼가?

-결국 헛딧이었네. 헛딧이어꾸마.

잠시 멈췄던 한수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대신, 이 분께서 방패 역할을 수행해 주시기로 약조하셨다. 일으키는 자를 소멸 직전까지 몰아붙이신 분이시디.”

소멸 직전… 까지는 과장이지만 생각대로 풀리기만 한다면 못할 일은 아니다.

그 리치를 그대로 방치하면 나중에는 국왕인지 폐하인지 하는 새끼가 보위대 백 명을 이끌고 와도 손도 못 댈 상황이 될 터.

아무리 내 땅, 내 사람이 아니라 해도 그런 대괴물을 외면할 수는 없다. 분명히…….

‘꽤 큼직한 마핵이 나오겠지.’

히히.

히히힛!

한수길이 나를 소개하듯 팔을 뻗자, ‘일으키는 자를 소멸 직전까지 몰아붙이신 분’을 향해 박수가 쏟아졌다. 그 뒤를 따라 호기심과 감탄, 의심의 시선들이 몰려들었다.

-저게 누고? 얼굴은 멀끔헌데 저리 비리비리해서 어째 검이나 제대로 휘두르갔어?

-성주님이 저렇게까지 말씀허시는데 설마 그럴깐.

-방어단이 호되게 당했다는 야그를 들었네. 그게 저자인가보오.

-그거랑 방패랑 같간? 까딱 잘못하면 우리 모다 일으키는 자에게 피를 빨려 걷는 시체 신세가 된다레!

뭐. 익숙한 반응들이다. 조금 후면 완전히 달라지…….

성주놈의 새끼가. 왜 그 얘기 안 해.

어디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내가 슬그머니 주먹을 쥐고 흔들어 보이자 눈치를 살피고 있던 한수길이 냉큼 오른손에 쥐고 있던 대도를 들어올렸다.

“…감사의 표시로, 일으키는 자의 사냥을 마친 후, 이 진룡보도를 이분께 드리기로 약조하였다!”

-진룡보도를? 저거 성주님께서 목숨만큼 아끼시는 그 보도 아닌감?

-기러니끼니. 국왕 폐하께서 결혼식 날 하사허신 보도라던디.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지.’

짙은 검은 빛이 일렁이는 대도.

딱 봐도 도날의 예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저 따위 놈이 쓰기에는 너무, 너무너무 아까운 녀석이다.

공식적으로 선언도 해놓았으니 내가 들고튀었다고 뒤집어씌울 수는 없을 테고.

어디, 힘 좀 써 볼까.

***

“뭔 괴물이 이렇게 많냐.”

김강산이 투덜거리며 화염구를 쏘아내 달려드는 구울 열 서너 마리를 통구이로 만들었다.

세우윤윤(細雨潤潤)을 시전해 도망치려는 고블린 여섯 마리를 한꺼번에 격살한 서은창이 김강산의 말을 받았다.

“이 정도면 보통이지, 뭘 그래.”

“보통? 이게 보통이면 일반인들이 어떻게 살어.”

“그러니까 다들 그렇게 성 안에 들어가고 싶어 하잖아.”

“계룡 사람들은 다 성 안에 있는데? 그래도 계룡문은 성 바깥 사냥 주기적으로 나가서 빡세게 관리하는데?”

“그러니까 다들 계룡성민이 되고 싶어 안달… 그래, 니 똥 굵다. 계룡문 최고다. 됐냐.”

김강산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화염탄을 날려 급강하하던 히포그리프의 날갯죽지를 박살냈다.

30년 묵은 리치 사냥 작전은 원래 계획에서 조금 수정된 채 진행되는 중이었다.

나는 달려드는 삼미호, 오크, 구울, 고블린, 세이렌, 히포그리프 따위를 적당히 박살내며 잠시 후 손을 맞춰야 하는 원산성의 각성자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방위단, 순찰단, 경호단으로 구성된 원산성의 각성자들은 나름대로 훈련을 받은 움직임이었다.

그중 가장 활약하는 것은 100여 명의 방위단.

평소 역할이 성벽을 방어라더니 괴물 상대로 썩 실력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한 놈이 일검으로 오크 무릎을 정확히 찌르고, 옆에 있던 두 놈이 양쪽의 네 팔을 봉쇄한 사이, 다른 한 놈이 관자놀이를 박살냈다.

본부에서 나와 붙었을 때는 아주 허접인 줄 알았는데 사람 상대로 싸운 경험이 적어 그랬던 듯했다.

그에 비해 50여 명의 순찰단은 싸우는 모양새가 영 서툴렀다.

가진 마력은 전반적으로 순찰단이 더 높은데도 오크 한 마리 제대로 잡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사람 상대만 싸워 본 놈들인가.’

그리고 10여 명의 경호단은…….

한수길 주위를 경계하고 있을 뿐 검을 뽑지도 않았다.

…뭐 하자는 건지.

그래도 방위단의 활약 덕분에 일행은 수월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아무튼 평소 방치하던 성 밖 괴물을 소탕한다는 것만으로도 무의미한 작전은 아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수색과 전진을 반복하며 남하한 끝에 드디어 좀비 구울과 마주쳤다.

“정지하라우!”

장소민 순찰단장이 날카롭게 지시했다.

펼쳐 놓은 기감의 그물에는 아직 리치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근처에 있겠지.

리치는 구울이 아니다.

자신과 상대의 능력을 비교하여 위험을 파악한다는 의미. 특히 저 리치처럼 오래 산 놈은 더욱 그렇겠지.

하지만 리치 역시 괴물이다.

눈앞에 왔다갔다하는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외면할 만큼 이성적인 존재는 아니다.

그러니까, 유인해야지.

원산성 애들이 뒤로 물러나 진형을 잡기 시작했다.

“형은 여기까지 와서 그래야겠냐?”

김강산이 입술을 삐죽였다.

최지수가 없으니 김강산이 비슷한 잔소리를 하려 들었다. 김강산 주제에.

“위험하면 바로 튈 거지? 쟤네가 계룡문도 아닌데 목숨 걸 거 아니지?”

“내가 돌았냐. 너네야말로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공격하는 척만 하고 마력 그대로 보존하라고. 알아들었냐?”

“넵, 사형.”

“김강산, 대답.”

“…알았다고.”

리치놈은 잡을 수 있다.

어렵지만, 내력은 꽤 소모되겠지만, 상대할 방책은 여럿이었다.

문제는…….

“그런데, 사형. 진짜 혈왕 때처럼 그런 존재…가 또 나올까요?”

“기생충.”

“형은 어떻게 그걸 기생충이라고 부를 생각을 했냐. 마력이 진짜… 후덜덜하던데. 난 혈왕이랑 백 번 붙으면 붙었지 그거랑은… 백호 때는 진짜… 아우.”

“그거 아니고, 기생충.”

“알았다, 알았어. 기생충. 됐어?”

김강산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제 어깨를 감쌌다. 그 어깨를 몇 번 두들기고 가볍게 대꾸했다.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지. 지금까지 괴물이고 사람이고 수백 마리는 죽였는데 딱 두 번 나왔으니까.”

아무리 기생충이라도 그 정도 격을 가진 존재가 아무에게나 들러붙지는 않겠지. 혈왕놈의 경우에도,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조차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필요조건은 아마…….

‘마력이 높은 놈이라야 해.’

리치의 마력은 백호 못지않았다. 커다란 마핵이 기대될 정도였으니까. 몇 퍼센트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기생충놈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0은 아니다.

“하여튼 조심하라고. 원산성 애들 경계 늦추지 말고.”

“그러게 형은 왜 사서 고생을 하냐. 그냥 우리끼리 슬쩍 지나가… 악!”

“이 새끼가. 맘에도 없는 소리 하네.”

“…걱정되니까 그러지. 차라리 내가……!”

“그 실력으로?”

그 사이, 원거리 공격을 위한 준비가 완료되었다.

전사들이 술사들을 보호하고, 술사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둥그렇게 섰다. 한수길은 전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멀거니 서 있었다. 전투에 참여할 태도는 전혀 아니었다.

리치는 뭐 하나. 저 새끼 안 물어가고.

곧 리태연이 다가와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작전이라 말할 필요도 없는 아주 간단명료한 작전이었다.

113명의 ‘방패’를 숲에 풀어놓고, 리치가 ‘방패’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동안 술사들이 원거리 공격으로 리치를 타격하여 소멸시킨다.

그 방패의 역할을 내가 맡기로 하면서 작전에 약간의 수정이 필요했다.

놈이 소멸될 때까지 도망치지 않고 얌전히 공격을 받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준비 완료되었습네다. 정말로 혼자서 가능하겄습네까.”

리태연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아침에 한수길을 설득해 방패들을 돌려보낸 후부터 리태연의 태도가 꽤나 말랑해졌다.

“화력이나 잘 퍼부으쇼.”

“…조심하시라우, 동무.”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바닥을 걷어찼다.

김강산과 서은창의 긴장된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등 뒤로 멀어졌다.

달려드는 괴물 좀비와 사람 좀비들을 때려잡으며 기감의 그물을 넓게 펼쳤다.

그렇게 5분가량을 숲 속을 뛰어다니던 중 목표물을 발견했다.

흐릿한 마력의 덩어리.

투명화 마법을 쓴 놈이 내 주위를 기웃거리다가 곧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사라졌다고 느껴질 정도로 빠른 속도.

하지만.

콰아아!!!

적(積)으로 형성된 강기가 놈의 몸과 격돌하며 쇄도하는 속도를 늦추었다. 나는 경공을 시전해 후퇴하며 연속적으로 강기의 구슬을 날렸다.

희게 빛나는 강기의 구슬이 시간차를 두고 놈에게 닿아 연이어 폭발했다. 적은 내력으로 만들어낸 적(積)이라 피해가 크지는 않겠지만…….

‘투명화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거다.’

그때도 그랬다.

투명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동하는 것뿐.

본격적으로 공격을 하거나 큰 데미지를 입으면 자동으로 투명화가 풀리는 듯했다.

그때는 내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굳이 도박을 걸면서 싸울 필요가 없어 놈을 살려두고 물러났지만.

‘이번에는 다르다고.’

지금 컨디션은 최상이다.

너덜너덜하던 단전도 다 회복되었고, 질질 새던 내력도 빵빵하게 기맥에 들어차 있다.

원산성의 각성자들의 화력지원도…….

음. 이건 별로 기대가 안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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