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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80화 (80/122)

80화. 믿음의 의미 (2)

이번에도 내 추측은 맞았다.

다섯 방째 적(積)에 얻어맞자, 흐릿하던 마력이 선명해짐과 동시에 리치의 모습이 나타났으니까.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갈퀴와 촉수를 휘두르며 리치놈이 나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왼쪽 팔에 달린 갈퀴의 날카로운 날이 햇볕에 번쩍였다.

아직이다. 놈을 더욱 끌어들이려면…….

나는 기운을 끌어올리며 버티고 섰다.

놈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10미터.

5미터.

3미터.

파바바바밧.

흐믈거리던 촉수가 쫙 펼쳐졌다. 잿빛의 촉수 그물이 한순간 시야를 가렸다. 그와 동시에 놈이 왼팔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왼팔의 갈퀴는 몸으로 때우고, 오른팔의 촉수는 기공으로 막는다.’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며 월영검을 빠르게 휘두르자, 반투명하게 빛나는 검막(劍膜)이 생성되었다.

날아오던 촉수가 검막에 가로막히고, 동시에 갈퀴가 등줄기를 때렸다.

몸 전체가 지잉 울릴 정도로 강력한 타격.

호신강기로 막아내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이거 진짜 장난 아니네.’

촉수를 막기 위한 수단이 기공밖에 없다니, 내력의 소모는 어쩔 수 없겠다 싶다.

기생충놈이 나올까 염려되어 최대한 공력을 보전하려 했는데 말이지.

“그래, 어디 붙어 보자고.”

순식간에 10미터 바깥으로 내뺀 놈이 다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기서 말고. 저어기 저쪽에서.’

타앗.

내 발이 거세게 바닥을 박찼다.

그 사이 나를 따라잡은 리치가 촉수를 뻗었다.

허리를 굽혀 회피하며 곧바로 월영검을 휘둘렀다. 내 등줄기에 닿을 듯 다가온 촉수의 입이 적(積)에 격중당해 순간적으로 우그러졌다.

달리고. 싸우고. 다시 달리고. 다시 싸우고.

일 초가 십 분처럼 느껴졌다.

어깨를 뒤틀어 촉수를 피하고, 용조공(龍爪功)과 당랑각(螳螂脚)을 위주로 방어초식을 운용해 갈퀴를 최대한 회피하고, 채 회피하지 못한 촉수를 막(膜)으로 막아내며,

드디어 원산성 애들이 잠복한 지점에 도착했다.

“쏴!”

몸을 솟구치며 내가 외치자, 김강산이 준비하고 있던 화염구를 쏘아냈다.

그 뒤를 따라 서은창의 화간일광(花間一光)이 공간을 갈랐다.

뒤이어 얼음창과 얼음화살, 화염구와 화염탄이 리치를 향해 쏟아졌다.

근데, 왜…….

‘이거밖에 없냐?’

분명 아까까지 160명이 드글드글거렸는데. 북쪽에서는 엄청나게 비싸다는 마력증폭제도 준비했다더니.

남아 있는 인간은 30명뿐이다.

김강산이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다. 서은창은 창백하게 질렸고. 리 동무는… 저기 있네. 네놈은 왜 죽상이니.

설마 나 지금 뒤통수 맞았……?

‘아이 씨. 진짜 맞을 뻔했잖아.’

리치놈이 휘두른 갈퀴가 등줄기를 긁었다.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져 호신강기가 약해진 틈을 타다니 아주 비겁한 새끼다.

그래도 성주놈만 하겠냐고.

이 새끼가, 도와달라고 지랄을 할 때부터 이럴 심산이었던 거냐. 너는 이따가 두고 보자. 진짜, 내가…….

“형! 튀어! 이 새끼들 쨌어!”

응. 나도 눈 있어서 알어.

방향을 바꾼 리치놈이 김강산을 향해 쇄도했다. 여전히 엄청난 속도. 하지만…….

‘아까보다 느려.’

나와의 추격전과 방금 전 타격이 효과가 있었다. 역시 두들겨서 안 깨지는 그릇은 없는 법.

마력은 백호 못지않지만 놈은 재앙이 아니다. 그저 그런 상급 괴물일 뿐이다. 아니,

…내 마핵이지.

이만한 마핵 구하기 쉽지 않다. 그사이 사부작사부작 먹어 치워서 계룡에 남은 마핵도 얼마 없는데. 이거 잡아서 가져다주면 최지수랑 정하영이 얼마나 좋아하겠냐고.

‘아닌가? 또 위험한 짓했다고 잔소리 들을려나?’

어쩐지 웃음이 났다.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김강산! 서은창! 이 새끼부터 먼저 잡는다!”

“형 돌았……!”

콰아아!!!!

대꾸하면서도 김강산은 착실하게 화염탄을 쏘아냈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이번에는 백염이 아닌 청염이었다. 뒤이어 한바탕 원격 공격이 쏟아졌다.

쏟아지는 공격에 발이 묶인 놈을 향해 내가 쇄도했다.

놈의 질긴 가죽 이곳저곳이 찢겨져 있었다. 리치답게 피는 흐르지 않았다.

‘그래도 상처는 입고, 고통은 느끼지.’

나는 호신강기를 최대로 끌어올려 화염공격과 빙결공격을 몸으로 때우며 놈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희게 빛나는 월영검의 검날이 폭발로 약해진 놈의 무릎 가죽을 꿰뚫었다.

화르륵!!!

날아온 화염구가 리치놈의 등줄기에 직격했다. 등가죽에 그을린 자국을 남긴 불덩이가 순식간에 소멸했다.

“이 새끼가! 당장 멈추라고! 저기 우리 형 안 보여?!”

김강산이 리태연의 멱살을 잡았다.

“지금 사냥을 끝내지 않으면 모두 죽소. 화력을 집중하는 편이 당신네 형을 위해서도 나을 텐데.”

놈의 무릎에 박힌 월영검을 비틀어 뽑아내며 내가 외쳤다.

“나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쏴!”

김강산 녀석이 얼굴을 구기며 무어라고 욕설을 했다. 저 새끼가. 형 바쁜 틈을 타서 형을 씹네.

그리고 곧 청염구와 청염탄을 연달아 내던졌다. 푸른 화염이 무서운 기세로 공기를 불태우며 내 등 뒤로 날아들었다.

…이 새끼 이거. 감정 담았네.

취원보로 방향을 전환해 단번에 리치놈의 등 뒤로 돌아갔다.

해파리처럼 흐늘거리던 촉수가 가까워진 생명의 냄새를 느끼고 나를 쫓아왔다.

하지만 역시, 아까만큼의 속도가 아니다.

나는 월영검을 크게 휘둘렀다.

월영검의 1미터 길이, 그 검날의 두 배인 2미터 지름의 흰 원이 순식간에 내 앞에 생성되었다.

손목을 뒤틀어 연달아 월영검을 휘두르자 막(膜)이 망(網)으로 바뀌며 둥근 구 형태를 이루었다. 그 안에 갇힌 촉수의 숫자는 열두 개.

희게 빛나던 커다란 원구의 크기가 줄어들고, 또 줄어들었다. 그만큼 원구를 감싼 기의 막은 두터워졌다. 그리고 결국.

파아앗.

결국 작은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그 안에 갇힌 열두 개의 촉수와 함께.

재생하겠지. 하지만, 재생하기 전에 박살내면 된다. 끝내 재생한다면, 다시 박살내면 된다.

콰아아아!!!!!

김강산의 청염탄이 놈의 어깨에 직격했다. 폭발로 짓이겨진 어깨 가죽을 뒤따른 화염구가 불살랐다.

내 검이 그 상처를 헤집었다.

리치놈의 속살이 단번에 잘라낼 만큼 물렁살은 아니다. 하지만 찌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푹. 쫘악. 푸욱. 쫙. 푸욱. 푹. 푸부부북.

순식간에 열세 번 찌르기가 놈의 어깻죽지를 파고들었다. 너덜너덜한 어깨를 들어 올려 놈이 갈퀴를 휘둘렀다. 그 순간 서은창이 쏘아낸 화간일광이 놈의 등줄기를 강타했다.

놈이 멈칫하는 틈을 타 어깨를 비틀어 갈퀴의 공격을 회피하며 다시 망(網)을 시전했다. 여덟 개의 촉수가 잘려나갔다. 아까 잘려나갔던 열두 개 촉수가 슬금슬금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끝이 없겠는데.

“신호하면 다 퍼부어!”

김강산놈이 또 욕설을 뱉으려다가 내가 월영검을 든 오른손을 들어올리자 멈췄다.

“하나!”

오른발을 축으로 크게 회전하며 놈의 왼쪽 어깨를 연달아 찔렀다. 등 뒤에서 얼음창이 날아왔다. 땅을 걷어차 허공으로 솟구치자 발밑으로 지나간 얼음창이 놈의 목줄기에 직격했다.

리치의 가죽을 뚫기에는 턱없이 약한 얼음창이 조각조각 부서져 기화했다.

“둘!”

놈의 촉수, 이제 열 개 남은 촉수와 반쯤 자라난 열두 개 촉수가 내 발을 노리고 공중을 향해 내뻗어졌다. 허공답보로 다시 한 번 몸을 솟구친 내가 아래를 향해 월영검을 휘둘렀다.

주먹만한 강기의 구슬이 놈의 메마른 정수리에서 거세게 폭발했다. 한 방은 서운하니까, 서비스도 추가.

공중을 한 바퀴 회전한 내 발이 다시 한 번 허공을 걷어차고 놈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내려섰다.

나를 잃어버린 놈이 정면에 보이는 김강산 등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셋!”

외치며, 내가 놈의 등을 향해 총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동시에, 놈을 향해 속성 공격이 퍼부어졌다.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가 아니다. 순간이동처럼 빠르게 느껴지는 놈의 이동 속도는.

‘하지만, 꼭 따라잡지 않아도 되더라고.’

서은창의 마검기가 놈의 가슴팍을 후려치고, 김강산의 화염탄이 턱주가리에 명중했다. 뒤이어 몰아치는 속성 공격에 결국 놈의 전진은 가로막혔다.

그리고.

스파앗!

희게 빛나는 월영검이 놈의 등줄기를 꿰뚫었다.

마핵이 있는 곳. 아주 강한 마력이 느껴지는 지점의 1미리 옆.

‘이걸 박살낼 수는 없지.’

거세게 파고든 월영검이 가죽과 근막을 찢고 매끄럽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한 번 더. 한 번 더. 또 한 번 더.

파바바바바바바바바밧밧밧.

월영검이 놈의 등줄기에 동그란 구멍을 만들었다.

놈이 귀가 째지는 비명을 지르며 도주를 시도했지만.

“이게 어디서.”

내 연환퇴에 걷어차여 무릎이 부러졌다.

덜렁거리는 무릎을 거세게 내리밟으며 마지막 일검을 내질렀다.

너덜너덜한 살점을 깊숙이 파고든 월영검이 한 가닥 남은 힘줄을 끊어내는 순간, 흐들대던 촉수가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주, 죽였다!!!! 일으키는 자를, 죽였어!!!!”

“참말로? 참말로 일으키는 자가 소멸했디?!!”

“…세상에, 내래, 내 눈으로 이런 광경을…….”

흥분과 감격에 휩싸인 목소리들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그 속에는 리태연의 것도 있었다. 하지만 김강산과 서은창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 역시도.

나는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바닥에 널브러진 놈의 거체를 주시했다.

‘꼭 이럴 때 뒤통수를 치던데.’

기생충 놈들.

다시 일어나려면 일어나보라지. 내력은 충분히 보전했다. 단지, 얼마만한 놈이 나타나는지가 문제일 뿐. 괭이도마뱀 때만한 놈이냐. 아니면 혈왕 때만한 놈……?

“…안 나오네?”

김강산이 껑충 뛰어 다가왔다.

“끝난 것 같은데, 형?”

“그러게.”

“사형. 어째 실망하신 얼굴입니다.”

“무슨 헛소리냐.”

실망이라기보다는, 조금 허무한 기분이다.

이 기생충 놈들이 두려워 계룡을 버리고 나왔는데 말이지. 이놈들이 튀어나오는 규칙이라도 알아내야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할 수 있는데.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놈의 등가죽에 만들어진 구멍을 파헤쳤다. 근육과 뼛조각을 조심스레 헤쳐내자 탁구공을 닮은 동그란 마핵이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빛, 흰빛, 붉은빛, 푸른빛, 황금빛…….

말랑하고 따뜻한 둥근 구체 속에서 온갖 빛깔이 뒤섞여 휘돌고 있었다.

처음도 아니지만 볼 때마다 좀 묘한 느낌이다. 마치 이 작은 구 속에 세계 전체가 들어 있는 듯한 느낌.

“진짜 있네?”

“이 새끼. 또 내 말 안 믿었고만.”

“아니, 그냥…….”

머쓱한 표정으로 뒷목을 긁는 김강산 뒤로 리 동무가 다가왔다. 끝나고 나니까 탐나지? 그래. 그럴 거다.

마핵이 어디 흔하냐고.

중급 이하 괴물한테서는 절대 안 나오고, 상급 괴물이어도 마력이 아주 많은 놈들에게서만 나온다. 일정 정도 이상의 마력을 지니지 못하면 생명력이 끝나는 순간 마핵이 부서진다나, 뭐라나.

지난번에 죽을 똥을 싸면서 두억시니를 잡았을 때도 마핵은 남지 않았다.

재앙은 소멸하면서 항상 마핵을 남긴다지만… 두 번 할 짓은 아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탐나도 이건 절대 안 넘긴다. 이 새끼, 어디 말이라도 얹어봐라. 내가 아주 박살을…

“감사합네다!”

낼 필요는 없겠네.

리 동무가 넙죽 허리를 접었다.

“일으키는 자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인민들이 고통을 겪었는지 이루 말할 수 없습네다. 은인께서 원산성에 큰 은혜를 베푸셨습네다.”

리 동무의 목소리에 어쩐지 눈물이 배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너도 감동했니, 내 무위에.

뭐. 마핵을 탐내지 않으니 그걸로 됐고.

나는 마핵을 김강산에게 던져주고는 팔짱을 꼈다. 김강산과 서은창이 마핵에 묻은 리치놈의 지저분한 체액과 뼛조각을 털어내고 닦아냈다.

마핵은 마핵이고, 리 동무랑은 할 말이 있지.

“왜 사람이 이거밖에 안 남았어요? 나머지는 어디로 사라졌지?”

“참말로 죄송합네다.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서…….”

마핵을 조심조심 백팩에 넣은 김강산이 씩씩거리며 그 말을 받았다.

“형. 이 새끼들, 처음부터 리치 잡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형 가자마자 튀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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