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믿음의 의미 (3)
리 동무의 말과 달리 상황은 전혀 복잡하지 않았다.
내가 리치를 유인하기 위해 자리를 뜨자마자 한수길은 순찰단과 방위단에게 후퇴를 지시했다. 제 예상보다 리치가 너무 성장해서 잡을 수가 없다나 뭐라나.
그 과정에서 리 동무가 후퇴를 거부했고, 경호단장이 명령 불복종 어쩌고 하며 검을 빼 들었는데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고 결국 저들끼리 사라졌다… 라는 것이 서은창의 대략적인 설명이었다.
용케 김강산 녀석이 도를 휘두르지 않고 참았다 싶다.
기생충이 무섭긴 무서웠던 거겠지. 김강산은 괭이도마뱀에게 기생했던 놈에게 죽을 뻔했으니까.
그러니까 이 서른 명 방위단은 성주놈의 지시를 어기면서 리치를 잡겠다 남은 놈들이었다. 이 썩어빠진 성에서 그나마 건질 만한 놈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담으며 기감의 그물을 넓게 펼쳐 주변을 확인했다.
‘일단 걸리는 놈들은…….’
쥐새끼 한 마리가 날쌔게 사라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남겨둔 전령이겠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급하기는 급했던 모양이다.
“진짜로 튀었네.”
“…또 안 믿으시죠. 제가 탐색 끝냈다니까요.”
서은창이 가볍게 툴툴거렸다. 김강산이 크게 씩씩거렸다.
“이 새끼들 존나 무개념이네. 지들이 방치해서 키운 리치 잡아주겠다는데 이걸 토껴?”
나는 둘을 버려두고 리 동무를 응시했다.
살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침에 공터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까지 선명했던 살기는 이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분명 그때부터였다.
내가 일반인 방패들을 돌려보내면서부터.
어수룩하고 우직하고 성실하고 착한 녀석이다.
괴물과의 싸움에서는 길드장 수준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주제에, 대인전 능력은 그 10분의 1도 되지 않는.
“리 동무. 성주가 뭐라고 하면서 토꼈어요?”
내 언어 선택을 지적하려다가 포기한 리 동무가 침음을 삼키고는 대답했다.
“방패 없이 일으키는 자를 소멸시키기는 무리라고 하셨습네다. 여기에서 희생자가 생기면 절대로 안 될 일이라 하시며 퇴각을 명하셨습네다.”
“리 동무는 왜 안 따라갔어요? 성에 돌아가면 겁나 깨질 텐데?”
“…이 괴수에게 죽은 류민들이 수백입네다. 이번에 잡디 못허면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빼앗기고 걷는 시체가 될디… 그걸 생각허니…….”
대충 어떤 놈인지 알겠다.
앞일 생각 안하고 사는 놈이다. 이런 놈들은 보통 명줄이 짧다. 지금만 해도, 깨지는 수준이 아니라 명령 불복종으로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 성주놈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그런 성주놈이 다급하게 돌아간 이유는…….
“리 동무. 이제 어쩔 거예요? 우리 쫓아오려고?”
“…그리해야디요. 내래 성주님의 지시를 어겼으나 이제 일으키는 자의 사냥을 마쳤으니 기존에 내리신 명령에 따라 혈귀단의 본거지를 찾으러 가신 성주님을 옹위허여…….”
최지수만큼 말이 길다.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리 동무가 입을 다물었다.
“너네 성주님 지금 혈귀단 본진 안 갔어요. 성으로 돌아갔을 걸요.”
리 동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기 상황이 꽤 복잡하더라고.
네놈처럼 단순무식한 놈들은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단순한 위화감이었다.
-암흑능력자들의 은거디에 보물이 그리 많다하수다레. 언제까지 거저 두고 보실 생각이십네까? 그 암흑능력자들 모다 남쪽에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신디가 한참인데레.
-이 에미나이래 못하는 말이 없간. 일으키는 자래 거그 딱 디키고 있어 통과하려면 여간 힘들디.
정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돌아누웠다. 한수길이 슬그머니 정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는 지붕에 뚫어 놓은 작은 구멍을 통해 그 남녀의 짓거리를 엿보며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손가락만 빨겠습네다. 남정네가 이리 결단력이 없어서야.
한수길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일 때마다 정아가 한수길을 부추겼다. 지붕 위 내가 듣기에는 마치 한수길이 성을 비우는 상황을 만들어내려 하는 듯 들렸다.
보통의 애첩이 지껄일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아를 미행한 것은 그 위화감 때문이었다.
불확실한 건 명확하게. 찝찝한 건 깔끔하게.
정아는 골목을 돌고 돌다가 어딘가에서 푹 꺼지듯 사라졌다.
지하 통로였다.
개미굴처럼 구불구불한 통로를 한참 따라간 끝에 도착한 곳은 성 바깥의 작은 마을이었다. 단층 건물 안에 정아가 있었다.
낡은 벽에 빛바랜 글씨가 적혀 있었다.
피로 쓴 듯한 글씨는 검붉은 색이었다.
[인민은 혁명의 씨앗이고, 혁명의 과실은 인민의 것이다]
성주의 애첩이 혁명당의 스파이.
한 술 더 떠서, 한수길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대충 각이 나왔다.
성의 무력대를 끌어내기 위해 혈귀단의 본진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을 혁명당이 퍼뜨렸고,
한수길은 그 소문에 속아 넘어간 척 무력대를 이끌고 성을 나왔다가,
이때다 싶어 봉기한 혁명당을 싹쓸이하는,
그런 계획.
지하조직을 박살내는 중급 과정이다.
일부러 놈들의 함정에 걸려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세력을 드러낸 놈들을 한 방에 끝장내는.
어느 쪽에도 관여할 생각은 없다.
남의 나라, 남의 성 세력다툼일 뿐이다.
성주놈이 악(惡)이라 해서 그 적인 혁명당이 선(善)일까.
‘…그럴 리가.’
혁명은 실패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스파이가 발각되었는데 발각된 사실조차 모르는 조직의 혁명이 성공하는 일은 불가능하므로.
그러니까, 원산성의 성민을 위해서는 리 동무 같은 애가 엄한 곳에서 뒈지면 아깝지.
지금 돌아가면 나름대로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순찰단장 장소민.’
겉으로는 성주놈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듯 굴지만 그 여자가 성주에게 쏘아대는 살기가 상당하더라고.
이건 한수길도 모르는 거 같던데.
“너네 성주님 지금쯤 꽤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을 텐데. 얼른 가서 성주님 도와줘요. 혹시 알아요? 잘했다고 지시 불복종한 거 용서해 줄지.”
성주놈이 꽤 속이 좁아 보여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리 동무가 입을 헤 벌린 채 데록데록 눈알을 굴렸다.
“…어, 음, 왜, 무슨……?”
얘가 이해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복잡한가.
나는 가볍게 어깨를 추키고는 대꾸했다.
“뭐. 안 믿으면 말고.”
***
“이, 일으키는 자를, 소멸, 시켰습네다. 성주님.”
구르듯 한수길의 앞에 도착한 순찰단장 장소민이 가쁘게 숨을 내쉬며 내뱉었다.
한수길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되물었다.
“직접 확인했간? 네 눈으로?”
“예, 제 두 눈으로 분명히 확인했사옵네다. 일으키는 자가 스러디고 그 보위대를 사칭한 간나새끼가 이따시만한 마핵을 꺼내는 것까디 모다 확실허게 확인했사옵네다.”
“…마핵꺼정…….”
한수길이 침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일석삼조의 묘수라고 생각했던 그의 계획은 시작부터 덜컹거렸다.
일으키는 자를 사냥하고.
혈귀단의 본진을 털고.
혁명당의 뿌리를 뽑는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이 정도로 성을 비웠는데 혁명당이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앞으로 혁명당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의미였다.
단 하나 찝집한 점은 훈련소의 백 소장을 살해한 범인을 찾지 못했다는 것.
분명 혁명당의 짓이었다. 혁명당의 꼬리를 잡을 절호의 기회였는데.
성을 탈탈 털었음에도 교관들이 진술한 아리따운 여성 능력자는 체포하지 못했다.
‘어차피 이번 작전만 끝나면 혁명당은 뿌리채 뽑혀 나올 테니…….’
일이 끝나면 첫 번째로 때려죽일 후보는 이미 정해놓았다.
자신의 애첩, 정아.
그렇게 총애했는데 감히 배신을 하다니.
자꾸만 정보가 새는 것이 수상쩍어 되짚어 올라가니 그곳에 쥐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후로는 그 구멍을 통해 여러 정보를 역으로 흘렸지만.
쉽게 죽일 생각은 없었다.
벌거벗은 채로 사흘 동안 성을 끌고 다니고 성문 앞에 매달아 와이번에게 산 채로 뜯어 먹히게 만들어 주리라 결정했다.
하지만 모두 이번 작전이 계획대로 풀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잘 풀리던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오늘 아침부터.
그 남쪽의 간나새끼가 급발진해 방패들을 놓아주라 협박을 했다. 일단 계획대로 원정을 나서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수습하기는 했으나.
정아가 자신의 애첩이라는 사실을 어찌 알았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설마 저 간나새끼도 혁명당인가. 하디만 혁명당이 정아 그 년으로 협박할 리가 없는데레. …모르디. 워낙 점조직이 되나서 서로를 모르는디도.’
과거 강계의 난을 일으킨 반동 중 하나가 북한에 침투한 남쪽의 간나새끼였다.
그 후 남쪽 출신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땅굴을 막아 남쪽과의 접촉을 단절했다. 그게 10년 전의 일이었다.
만약 저들이 남쪽에서 우리 대조선국에 파견한 간첩이라면 이것은 큰 사건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저들을 잡으면 큰 공이 될 터.
리치를 찾아 남하하는 한 시간 여 동안 한수길은 남쪽에서 온 삼인방을 탐색하며 계산을 거듭했다.
리태연의 말대로, 실력이 가늠되지 않는 자들이었다.
얼굴로 먹고살아도 될 듯한 미남자는 마력이 아예 느껴지지 않는데도 기기묘묘한 방식으로 괴수를 사냥했고, 허여멀건한 사내는 그 마력에 비해 엄청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날카로운 인상의 붉은 머리 사내는…….
‘저 나이에, 청염이라니.’
보위대에서도 푸른 불꽃을 만들어낸 이들은 많지 않다 들었다. 그것도 저렇게 자유자재로 형성하는 수준은 한 손에 꼽혔다.
한수길은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일으키는 자의 사냥.
혈귀단의 본진에 있을지도 모르는 보물.
둘 모두 부차적인 목적일 뿐이었다.
이번 계획의 최종적인 목적은, 숨어 있는 혁명당 놈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밝은 햇볕 아래 비추이는 것.
그를 위해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쯤이면 폐하께서 특별히 보내주신 보위대가 인근의 부성에 도착했을 것이었다.
‘일단 저들과 멀어져 보위대와 합류해야갔어.’
그렇게 판단한 한수길은 서림이 리치를 유인하기 위해 사라지자마자 자리를 떴다.
아무리 대단한 자들이라도 남은 전력으로는 그 대괴수의 사냥에 성공할 리 없었다.
그 자리에서 죽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는다 해도 큰 부상을 입을 터.
그로써 자신의 계획에서 변수는 사라진다… 라고 생각했는데.
리태연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것은 예상 밖이었다.
혁명당의 뿌리를 뽑은 뒤 리태연도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한수길이 정소민에게 물었다.
“…피해는? 부상자는?”
“전혀 없었습네다. 엄청난 실력의 상급 능력자였습네다.”
“그 정도란 말이디.”
장소민이 흥분이 남아 있는 듯한 목소리로 빠르게 물었다.
“거러면 성주님. 이제 혈귀단의 본딘으로……!”
“아니. 성으로 돌아간다.”
“어띠하여… 말씀허신 계획은……?”
“명령이다. 더 이상의 질문은 불허헌다.”
입술을 깨문 장소민이 품에서 꺼낸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붉은 신호탄이 하늘을 갈랐다. 동시에, 장수민이 검을 뽑아 한수길에게 쇄도했다.
카캉!
장소민이 내지른 검은 한수길의 도에 가로막혔다.
펄쩍 뛰어 거리를 둔 장소민의 주위를 경호단원들이 포위했다.
“지금 이게 무슨 수작인가!”
“…성에는 쉽사리 돌아갈 수 없디.”
짓씹듯 내뱉은 장소민이 왼손을 휘젓자, 바닥에서 수십 자루 철검이 솟아올랐다.
한수길이 보도를 휘둘러 날아오는 철검을 쳐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렇게 가까이 숨어 있는 쥐새끼가 있었다레.’
***
화르륵!
청염을 휘감은 김강산의 대도가 좀비의 허리를 수평으로 베어냈다.
하체에서 분리된 좀비의 상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캬아아! 캬아!”
고온으로 단면이 녹아내린 좀비가 거세게 팔을 휘두르며 아가리를 벌렸다.
“뭐 하냐. 얼른 저승으로 안 모시고.”
“오오케이, 형님.”
동굴 바닥으로 내던져진 상태로도 팔을 휘저으며 캬악거리는 좀비를 향해, 김강산이 다시 한 번 도를 휘둘렀다.
이내 좀비의 상체와 하체는 완전히 불타 재로 변했다.
잿더미와 함께 녹아내린 쇠사슬이 찐득이는 액체가 되어 동굴 바닥에 거뭇하게 고였다.
“형. 이거 혈귀단 새끼들 짓이겠지?”
“아니면 누구겠냐.”
김강산의 말에 대꾸하며 내가 월영검을 휘둘렀다.
적(積)으로 만들어낸 작은 강기의 구슬 여섯 개가 좀비의 머리와 팔다리, 가슴팍에 부딪혀 작은 폭음을 내며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