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82화 (82/122)

82화. 믿음의 의미 (4)

리치를 잡고 리태연을 원산성으로 돌려보낸 뒤, 우리는 원래 계획했던 대로 혈귀단의 본진을 찾아 산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따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손발이 좀 고생했다.

리치의 영토 너머는 그야말로 괴물의 왕국이었으니까.

오랜만에 인간의 냄새를 맡은 오크가 떼로 몰려나왔고, 고독을 즐기던 오우거가 맨발로 달려나왔다.

등 뒤에서 가위팔이 나오는 오우거도 목격했다. 오크랑 오우거 사이에 종을 초월한 사랑이 싹튼 모양이다.

뭐라고 불러줘야 하나.

크우거? 우거크?

놈은 이름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

내 월영검에 무릎이 잘리고, 기울기 시작한 몸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김강산의 도에 어깨가 날아가고, 서은창의 화간일광에 관자놀이를 꿰뚫렸으니까.

간간히 애들에게 쉬는 시간을 주고 나도 운기를 하느라 시간이 배는 더 걸렸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안전하게 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 동굴의 입구를 발견한 것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잡풀과 나무로 에워싸인 절벽 중간에서 가늘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그 앞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했다.

애들이 뻗어 헥헥거리는 동안 나는 재빨리 소주천을 돌렸다.

그리고.

콰아!! 콰아아!!!!

적(積)을 몇 번 날리자 절벽이 무너지며 동굴이 나타났다.

바람 소리 같던 그 소음은 우리가 동굴 안으로 발을 디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를 긁는 불쾌한 소리로 바뀌었다.

캬아악. 캬악. 캬륵. 캬아악. 캭.

동굴의 모퉁이마다 쇠사슬에 발목을 묶인 좀비들이 검은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죽은 인간을 일으킨 것은 리치겠지만, 좀비의 발목에 묶인 검은 쇠사슬은 분명 인간의 솜씨였다.

“혈귀단 새끼들. 진짜 취향 거지같네.”

…설마 좀비 수집이 취향이겠냐.

계룡에서 도망친 혈귀단 잔당들은 리치의 밥이 되었다.

그야말로 뿌린 대로 참 잘 거뒀다.

김강산이 툴툴거리며 도를 휘둘렀다.

또 하나의 좀비가 동강나 재가 되었다.

검은 연기가 좁은 동굴을 가득 채우고, 시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김강산. 불태우지 말고 조각내라고. 이러다 질식사하겠다.”

“질…식사? 식사 말이야? 저녁은 뭐 먹을까? 내가 미호만두 맛집 알아놨는데 거기 어때, 형?”

“…말을 말자.”

나와 김강산이 잡담을 하며 좀비를 하나둘 박살내는 동안 서은창은 조용했다.

서은창이 굳은 얼굴로 검을 내질렀다.

그 손에서 펼쳐진 낙화난무(落花亂舞)의 검세가 좀비를 아홉 조각으로 갈랐다.

뒤이어 세우윤윤(細雨潤潤)의 마검기가 아홉 조각을 다시 그 네 배로 나누고,

꿈틀거리는 시체 조각 위로 월하송송(月下松松)이 쏟아졌다.

서은창이 다진 고기처럼 짓이겨진 좀비의 시체를 뒤꿈치로 으깼다.

“창이 형. 그거 아직 움직이는데?”

“…아직 한 턴 남았어.”

서은창이 짧게 대꾸하며 천뢰낙우(天牢落雨)의 초식을 펼쳤다. 소나기처럼 쏟아진 검격에 드디어 꿈틀거림이 멈췄다.

“아이고. 창이 형. 그러다 뻗으시겠수다. 거저 푹 쉬고 있으시라우. 그러게 속성 능력도 좀 키워놓디. 원래 몰빵은 안 좋다니까 그라우.”

김강산 이 녀석, 신 났네. 신 났어.

그래도 눈치는 좀 살피는 게…….

무리겠지. 그럼.

“서은창. 지금 이거 끝내고 오늘 잡은 리치 마핵 먹자. 그거는 속성능력에 투자 좀 해라.”

“…감사합니다, 사형.”

“형! 나는!”

서은창놈은 가만히 대답하는데, 눈치 없는 김강산이 눈을 번쩍였다.

“너 마핵 먹어도 효율 낮다며. 하도 많이 처.먹.어.서.”

“낮은 거랑 없는 건 다르거든? 사랑하는 림이 형아!”

“…그래. 많이 처먹어라.”

“아싸!”

그래, 너도 리치 잡느라 힘썼으니까.

그나저나…….

‘저놈은 왜 저리 풀이 죽어 있냐고.’

서은창의 얼굴이 창백했다.

보나마나 쓰잘데기 없는 생각에 빠져 있는 꼴이었다.

“야. 서은창. 왜 죽상이냐.”

한숨을 푹 내쉰 서은창은 잠시 침묵하다가 내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니 겨우 입을 열었다.

“…사형. 역시 어머니께서 옳으셨습니다. 그때 혈귀단을 떠나지 말 걸 그랬어요.”

“이 형이 미쳤냐? 미친 혈귀단…악! 아프다고, 형아!”

김강산이 정수리를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넌 낄끼빠빠 좀 하자. 제발.

“생각이 어떻게 돌면 그런 결론이 나오냐.”

“…제가 떠나고, 혈왕이 더욱 폭주했잖아요. 제가 어떻게든 계속 혈귀단에 머물러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되게 두지는… 악!”

했네, 자책.

“잘못한 놈들은 제 잘못도 모르는데 왜 네놈이 반성하고 있냐고.”

“…그래도, 제가 조금 더 노력했으… 악! 사형! 잘못! 악! 했습니다!”

내가 서은창의 동그란 대가리에서 쓰잘데기 없는 자책을 쫓아내는 동안 김강산이 두 마리인지 두 명인지 모를 좀비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했다.

매캐한 연기가 다시 동굴을 채웠다.

그리고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우리는 좀비를 불태우고 조각내며 연기의 움직임을 따라 동굴을 통과했다.

동굴은 복잡하고 커다란 미로 같았다.

“형. 그냥 다 박살내고 지나가면 안 돼?”

“어. 안 돼.”

김강산이 입술을 실룩이더니 다시 부지런히 도를 휘둘렀다.

죽은 후에도 쇠사슬에 감긴 좀비가 되어 생도 사도 아닌 어딘가에 묶여 있는 것은 지나치게 끔찍한 일이다.

“너무나다타불… 아멘천신보살…….”

머리에 매달린 혹 덕분에 조금 얼굴이 풀린 서은창이 검을 휘두르며 천신교의 법문을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천신교 신부였다고 하더니 법문을 외는 모양이 익숙해 보였다.

…글쎄. 신이 있을까.

있다 해도 이 세상을 이 모양으로 방치한 신이, 내가 무엇인가를 기도한다고 들어줄 정도로 전지하거나 전능하거나 선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

어쨌든 동굴을 울리는 서은창의 목소리는 나쁘지 않았다.

“캬아아! 캬아!”

하는 좀비놈의 괴성보다야.

훨씬 낫지. 백배는 낫…….

음. 그 정도는 아니고.

혈귀단놈들이 목적 없이 이 좀비들을 여기에 가져다 두었을 리는 없다.

‘추혼마인의 재료겠지.’

녹귀대주 놈이 눈물콧물을 짜내며 털어놓은 바로는 추혼마인은 좀비가 된 인간을 재료로 만든 전투 기계라고 했으니까.

추혼마인(抽魂魔人).

혼을 뽑아낸 괴수 인간.

하지만 이름을 아무리 그럴싸하게 붙여봤자 그저 시체덩어리일 뿐.

…이겠지?

아니면 피곤한데.

“형.”

김강산이 작게 속삭였다.

서은창이 꼴딱 침을 삼키며 검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동굴 안쪽에서 크르릉, 크르릉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좀비들이 만들어내던 소리와는 울림통이 다르다.

아까의 소리가 치와와의 끙끙거림이라면 지금 이 소리는 야생 늑대랄까.

‘이게 추혼마인이겠군.’

나는 소리에 집중하며 앞장섰다.

바람은 등 뒤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앞쪽에 입구가 있다. 아니, 출구라고 해야 할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좀비들이 만들어내는 칠판을 긁는 듯한 괴성을 소리 사이로, 추혼마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상한데.’

이름을 아무리 그럴듯하게 붙였대도 좀비를 덕지덕지 꿰매 붙여 만든 시체덩어리 수준일 거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야 정상이다. 실제로 지금 사방에서 캬악거리는 좀비들에게서는 어떤 마력도 느껴지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놈은…….

투욱. 툭.

동굴 천장에서 돌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동굴 벽에서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뒤이어,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동굴이 거세게 흔들렸다.

벽이 부스러지고, 후두둑거리며 천장에서 돌과 바위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형? 갑자기……!?”

“닥치고 화염탄. 서은창, 화간일광.”

“좀비는? 동굴 무너뜨리지 말라며?!”

“그건 아까 얘기고!”

30미터.

20미터.

이제 10미터.

순식간에 거리가 줄어들고 있다.

마력도, 내력도 아닌 순수한 물리적인 힘이 미로처럼 꼬인 동굴을 박살내며 우리를 향해 달려들고 있다.

‘인간의 생명력을 감지할 수 있나 보군.’

땅을 두들기는 발자국 소리는 이제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동굴을 울리는 진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후두둑.

20여 미터 높이의 동굴 천장이 부서지며 자갈과 바위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정면의 동굴 벽을 깡그리 박살내며,

거대한 무엇인가가 달려들었다.

“쏴!!!”

거세게 바닥을 박차며 내가 외쳤다.

김강산의 화염탄이 그것에 명중했다. 폭발의 열기가 사라지기도 전에 서은창의 화간일광이 날아가 박혔다.

마지막으로, 내가 쏘아낸 강기의 구슬이 격중했다.

콰아아아!!!!

격렬한 폭발과 함께 동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며 내달리는 내 뒤를 김강산과 서은창이 바싹 쫓았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가자 곧 작은 구멍이 보였다. 주먹만한 구멍을 향해 권격을 내지르자,

퍼어어억!

벽이 터져나가며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저게 추혼마인?”

“그렇겠죠, 사형?”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는 두 개. 팔도 두 개.

사람의 형태였다.

몸으로 벽을 뚫으며 달리던 힘이나 얼핏 보기에도 거대했던 덩치는 인간의 그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웠으나.

“안 끝났겠지, 형?”

“말해 뭐 해.”

맨몸으로 동굴을 박살낸 놈이 동굴 좀 무너졌다고 죽을 리가 없다.

좀비로 만들어낸 괴물이니 좀비처럼 산산조각내야 끝날 것 같고.

방금 화염탄과 화간일광(花間一光)과 적(積)이 모두 완전히 같은 자리에 명중했는데 별다른 타격도 없는 걸 보니 어지간한 공격은 통하지도 않을 것 같고.

내가 손짓하자 둘이 재빨리 다가왔다.

“최대한 붙잡고 있어. 기공에 시간 좀 걸리니까.”

“옙, 사형.”

대답이 없어 김강산을 올려다보니, 녀석이 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너는 뭐가 좋아서 그리 쳐웃냐?”

“형이 튀라고 안 하고 공격하라 하니깐. 아까 리치 잡을 때도 그렇고. 처음에 리치 마주쳤을 때도 형이 튀라고 안 하고 공격하라 한 거 알아? 나 엄청 완전 쩔게 좋은데, 형아.”

허, 참 나.

좋을 것도 많다.

“믿어줄 때 잘해라.”

“예압, 형님!”

나는 잠시 김강산을 올려다보다 이내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내 염려보다, 애들은 강하다.

애들은 내가 설화놀이를 하며 서은창과 시시덕거리고 있을 때 혈귀단의 적귀대에 맞서 계룡을 지켜냈다.

나를 끌어내기 위해 보령을 먼저 습격한 혈귀단의 수작을 깨부술 수 있었던 것도 김강산과 최지수, 서은창을 비롯한 은영단의 활약 때문이었다.

내 불안에는 근거가 없다.

단지, 내 문제일 뿐.

-저 검에 맞았다면 아무리 사형이라도 죽었을 겁니다. 내가 사형을 구했어요. 내가, 사형을…….

심장이 멎고도 한참 동안 설표의 몸은 따뜻했다.

하지만 결국 식었고, 끝내 딱딱해졌다.

나의 가장 크고 또 유일한 공포는,

내 소중한 이들이 나를 떠나는 것.

죽음과, 죽음과, 죽음과, 산더미처럼 쌓인 죽음 위에서 나 홀로 살아남아, 그들의 죽음을 곱씹는 것.

죽어도 다시 태어나고 또 다시 태어나, 영원히, 홀로…….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떠오르는 기억을 지우려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가 정신을 깨웠다.

‘…믿어야지. 이렇게 좋아하는데.’

내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언제까지고 내 등에 서 있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들은 믿어주는 만큼 자라고, 다치면서 크는 법이니까.

강해지기를 바라면서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그러니까, 믿어야지.

내가 힘들어도 믿기 위해 애써야지.

‘…네가 항상 하던 얘기가 이거겠지, 최지수.’

지금은 애들이 삐끗해도 내가 잡아줄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그럴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다섯 번째 하늘이 열리면 대체 세상이 어떻게 뒤집힐지 예측할 수 없다.

그전에.

애들이 삐끗하면 내가 잡아줄 수 있을 때에…….

내 짧은 상념을 뚫고, 무너진 동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을 쫓아내며 정면을 응시했다.

몸을 깔고 있는 바윗덩이를 자갈처럼 내던지며 놈이 몸을 일으켰……?

“헐… 형. 미쳤네.”

“사형. 저기에 인간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작법에는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만.”

그래.

나도 동감이다.

붉은 태양빛을 받아 주홍색으로 물든 추혼마인의 몸체는 10미터를 가뿐히 넘었다.

몸통에 두 팔과 두 다리와 대가리가 붙어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인간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그야말로 괴물이다.

바위처럼 둥근 대가리에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다.

아마 뇌도 없겠지.

조금 전까지 동굴의 일부였던 돌조각들을 모두 털어낸 놈이 곧 우리를 발견했다.

“형!”

“사형.”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을 걷어찼다.

동시에,

놈이 쇄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