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각자의 지옥 (1)
쿠웅. 쿠웅.
땅이 흔들렸다. 기분 탓이 아니라 진짜로, 놈이 바닥을 걷어찰 때마다 지축이 진동했다.
거대한 몸집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놈이 가까워졌다.
마치 산이 달려드는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등 뒤를 바싹 따르는 두 놈에게서는 공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웃기는 놈들.’
어쩐지, 웃음이 났다.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내가 다시금 바닥을 걷어찼다.
뒤따르는 녀석들의 발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촤라라락!
허공을 찢으며, 포크레인의 팔처럼 두껍고 길쭉한 놈의 팔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허리를 굽혀 공격을 회피하고 그대로 놈의 다리 사이를 통과하는 순간.
카앙!
김강산이 놈의 무릎을 향해 청염이 휘감긴 대도를 내질렀다. 뒤이어 서은창의 검이 같은 지점을 찔렀다.
하지만 놈의 무릎에 남은 것은 이쑤시개로 긁은 듯한 작은 상처뿐.
물러서는 김강산을 향해 놈이 발을 뻗었다. 동시에 서은창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허공에 뜬 채로 김강산이 쏘아낸 화염탄이, 놈의 발목에 직격했다.
놈이 움찔거리는 사이 서은창이 공격을 회피하고 오금을 찔러 들어갔다.
‘잘하고 있어. 그렇게, 조금만 더……!’
바닥을 걷어찬 내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검기로 희게 빛나는 월영검을 놈의 등줄기를 향해 내질렀다.
챙!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검이 튕겨 나왔다.
그 괭이갈매기에게도 꽂혔던 검이.
베기는 불가했지만 찌르기는 통했었는데.
거대한 몸을 덮고 있는 피부는 마치 철갑처럼 단단했다.
단순한 가죽이 아니다.
은근하게 느껴지는 찐득거리는 마력이 놈의 가죽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괴물을 만들다니. 미친 새끼들… 싸그리 죽여서 놔서 다행이지.’
그리고 이 본거지를 끈질기게 찾은 것도, 역시 잘한 일이다.
이 괴물이 그날 계룡에 나타났더라면.
내가 늦게 와서, 혹은 오지 않아서, 이 괴물이 동굴을 빠져나가 원산성을 공격했더라면.
배고픈 괴물의 발이 어디로 향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챙!
내가 내지른 월영검이, 다시 한 번 튕겨나갔다.
두꺼운 가죽은 마치 호신강기에 에워싸인 듯 단단했다.
그러나.
‘될 때까지 하면 된다고.’
챙, 챙, 소리를 내며 검기를 튕겨내던 놈의 등가죽에 드디어 균열이 생겼다.
나는 허공답보로 공중을 걷어차며 서른일곱 번째 검을 내질렀다.
스파앗.
작은 틈새를 가르며, 검끝이 놈의 몸통으로 파고들었다.
오른손으로 검자루를 움켜쥔 채 놈의 등 뒤에 바싹 매달려 왼손을 등줄기에 붙였다.
단전에서 출발한 진기가 단번에 기맥을 타고 올랐다.
그 진기는 등줄기에 붙인 손바닥을 통해 놈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이걸 마력… 이라고 해야 하나.’
괴물의 마기(魔氣)와 닮은, 하지만 그보다 더 짙고 무거운 마기가 진기의 길을 가로막았다.
진기는 끈적한 늪에 갇힌 듯 전진하지 못했다.
전진을 멈춘 내 진기에 놈의 마기가 찐득이며 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기껏 흘려보낸 진기가,
놈의 마기에 짓눌리고 잘려나가 끝내 소멸했다.
‘…적당히 해서는 안 되겠네.’
후우.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단전의 모든 기운을 끌어올렸다.
놈의 등줄기에 맞붙은 손바닥을 타고, 폭우처럼 진기가 흘러들어갔다.
가로막는 마기를 가르고, 들러붙는 마기를 쳐내며, 놈의 몸속으로 파고든 내 진기가 한 점으로 모여들기 시작…….
“악! 이 새끼가!”
문득, 김강산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추혼마인의 겨드랑이 사이로 보이는 김강산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도를 휘감은 청염의 기세가 처음만 못하다.
추혼마인이 거세게 발을 굴렀다.
김강산이 풀썩 뛰어 피하며 놈의 발바닥을 향해 대도를 휘둘렀다.
캉!
놈의 발과 부딪힌 대도가 가볍게 튕겨져 나갔다. 도에 불어넣은 마력이 약해진 모양.
도를 내던진 김강산이 양 손에 화염탄을 생성했다.
“어디 해보자고, 시체덩어리 새꺄!”
“산아, 위!!!!”
서은창의 검이 놈의 주먹에 격중하고, 놈이 주춤한 사이 김강산이 몸을 뒤로 젖히며 연달아 화염탄을 날렸다.
까딱했으면 대가리가 으깨졌을 아슬아슬한 상황.
‘…젠장. 믿어야지. 믿어야 하는데.’
시발. 믿을 때 잘 좀 하라니까.
두 번 믿다가 내가 먼저 뒈지겠다.
나는 이를 짓씹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잠깐 흐트러진 사이, 놈의 마기가 내 진기 사이로 파고들어 있었다.
…그래, 해보자고. 시체덩어리 새꺄.
짙고 끈적이는 마기가 내 진기를 향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나는 그것에 대항하지 않고 기운을 나누었다.
나누되, 흩어지지 않게.
갈라지되, 끊어지지 않게.
곧.
수백 가닥으로 나뉜 진기가 거센 소용돌이가 되어 한 점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진기에 따라붙은 마기가 진기와 부닥쳤다.
아주 좁은 곳.
놈의 등줄기 속 티끌만한 공간에서.
소용돌이치는 진기가 진기와 충돌했다.
충돌로 쪼개진 진기가 마기와 충돌하고,
잘려나간 마기가 소용돌이에 휩쓸린 마기와 충돌했다.
삼반공의 2절, 파(破).
결(結)을 풀어내고, 합(合)을 깨뜨려,
유형(有形)을 파괴하는 무형(無形)의 기운.
충돌이 충돌을 부르고, 그 충돌이 다시 충돌을 불렀다.
순식간에 수만 배로 증폭된 충돌이 놈의 등줄기 깊숙한 곳에서 조용한 폭발을 일으켰다.
파지직.
고요한 폭음와 함께, 놈의 몸통이 크게 부풀었다.
그리고,
한껏 바람을 집어넣은 풍선처럼 터져나갔다.
갈기갈기 찢긴 시체조각이 허공을 뒤덮고,
사라진 몸통에서 분리된 두 다리와 두 팔, 동그란 대가리가 쿠웅 쿠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김강산이 번쩍 팔을 들어올렸다.
“끝났……?”
“좀 닥쳐라. 응?”
놈의 팔과 다리는 무너진 신전의 기둥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폭발로 사라져 버린 몸통과 이어져 있던 울퉁불퉁한 단면이 꿈직꿈직 움직였다.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며 풀려 나온 시체 조각들이 한 곳을 향해 모여들었다.
적(積)을 쏘아내 시체 덩어리들을 산산조각내자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먹만한 먹색의 구슬.
추혼마인의 몸속에서 느껴지던 어둡고 끈적이는 마기가 그 구슬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헐… 림이 형! 마핵이다! 우리 오늘 마핵 두 탕 뛰었다!”
“응. 아니야.”
나는 얼른 그 구슬을 집어 들었다.
파(破)로도 깨지지 않은 구슬이다. 이게 뭐 하는 물건인지는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고.
시체일 뿐인 좀비를 추혼마인이라는 괴물로 만든 열쇠가 바로 이 구슬이었다.
구슬을 향해 꿈직대며 몰려드는 시체덩어리들은 조금 전의 괴물과 달리 보통 좀비 정도의 강도였으니까.
나는 월영검을 휘둘러 연달아 적(積)을 쏘아내 꿈틀거리는 시체덩어리를 산산조각냈다.
서은창이 세우윤윤(細雨潤潤)을 연속으로 시전해 시체 덩어리를 잘게 쪼개고,
김강산이 백색의 화염구로 조각난 덩어리들을 불태웠다.
그리고. 끝.
진짜로 디 엔드.
더 이상 꿈틀거리는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진짜로 끝났지, 형?”
“그래. 진짜 끝났다.”
김강산이 피떡이 된 오른팔을 흔들며 헤실거렸다.
“…사형 따라다니다가 수명 줄겠습니다.”
푸욱 한숨을 내쉰 서은창이 까맣게 불탄 시체 조각을 발로 치우고는 철푸덕 바닥에 누웠다.
그거 치워봐야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데.
“오늘만 해도 말예요. 리치와 전투를 벌이고, 괴물은 백 마리쯤 잡았고, 좀비도 백 명쯤 소멸시키고, 그리고 추혼마인까지… 저 진짜 죽겠습니다.”
나는 녀석의 허리를 가볍게 걷어차며 대꾸했다.
“야. 은영단원이 이 정도는 익숙해져야지.”
“…제가 왜 은영단원입니까? 저는 엄연히 월악문의 문도로 다른 곳에 적을 둘 생각이…….”
“어. 월악문인데 동시에 은영단이야. 당연히 계룡문이고.”
마찬가지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김강산이 데굴데굴 굴러 서은창의 옆에 누웠다.
“어얼. 은창이 형. 신입이네? 하하민이 후배 들어온 거 알면 공중제비 다섯 바퀴는 돌겠는데? 걔 겁나 빡세. 2대 제자 훈련시키는 거 보면 나도 가끔 오줌 지린다니까?”
“…사양하겠습니다, 사형. 저는 역시 월악문의 문도로서……!”
“거절은 거절한다. 야, 김강산. 신입 힐포 먹이고 정신교육 좀 시켜라. 이 정도로 죽는 소리 하면 진짜 뒈진다고.”
“오케바리, 형아.”
동굴을 통과해 우리가 도착한 곳은 넓은 분지였다.
뾰족하게 솟은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분지의 주변을 두르고 있었다. 분지를 가득 메운 낡은 집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두 녀석이 힐포를 먹고 시체 구덩이 속에서 널브러져 있는 동안 나는 그 마을을 탐색했다.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황량한 바람이 스치는 낡은 집들은 살풍경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누더기 이불, 말라비틀어진 일미호 고기, 곰팡이가 슨 삶은 감자 따위가 나무 바닥의 여기저기에 던져져 있었다.
“혈귀단 놈들. 어지간히 팍팍하게 살았네.”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부서진 벽 옆에 떨어져 있던 먼지투성이의 복면을 발끝으로 걷어찼다.
이곳이 혈귀단의 은신처라는 것은 명백했다.
혈귀단 놈들이 뒤집어쓰고 다니던 붉은색, 녹색, 검은색, 청색의 복면이 마을의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으니까.
무너진 동굴 인근에서 발견된 몇 개의 복면에는 굳은 피와 썩은 살점이 들러붙어 있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대충 알겠군.’
계룡에서 혈귀단이 거의 전멸한 후 추혼마인의 제어가 풀리고, 남아 있던 놈들은 폭주한 추혼마인의 간식거리가 되었겠지.
자업자득이다.
.
.
.
혈왕놈의 거처는 분지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진흙을 이겨 만든 낮고 낡은 건물은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세간살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거의 없었다.
그곳이 혈왕의 거처라고 판단한 이유는, 지금 내 눈 앞에 놓인 한 권의 책자 때문이다.
작은 앉은뱅이 탁자 위에 단정하게 올려져 있던 그 책은 혈왕놈이 자신의 삶을 기록한 일기였다.
“…자서전이라도 낼 생각이었냐.”
네놈의 꿈이 이뤄졌다면 읽을 사람도 없었을 텐데.
책의 첫 번째 페이지는 ‘나는 한국에 돌아온 것을 후회한다.’로 시작했다.
굴곡이 많은 삶이었다.
아내를 잃고, 자식들을 잃고, 그로 인해 세상을 혐오하게 된 한 남자의 불행한 인생이 작은 종이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황미영에게 설득당한 동지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대로라면 나마저도 황미영에게 설득당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나의 복수는 영원히 불가능해진다. 이제 결단을 해야 한다.]
‘이 멍청한 살인귀가.’
손바닥 아래에서 종이가 구겨졌다.
나는 우그러진 종이를 펼치며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다음 블랙데이가 오면 내 복수는 완성될 수 있을까. 무척이나 가족들이 보고 싶은 밤이다. 나는 죽어서도 제인과 지혜와 지수를 만날 수 없겠지. 신이 있다면 그들에게 한 번 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를. 나는 자격이 없지만 그들은 다르니까. 그들은 억울하게 목숨을……!]
‘…네놈에게도 네놈의 지옥이 있었겠지.’
가슴 한 구석이, 약하게 쓰라렸다.
연민이다. 빌어먹을 연민.
나는 혈왕놈을 동정하고 있다. 이 거악 중의 거악, 천하의 살인마를.
…이래서 악인이 사연 팔이를 할 기회를 주면 안 되는데.
불쾌한 연민을 꽉 꽉 눌러 발가락 사이에 처박으며 나는 계속해서 책장을 넘겼다.
마음 같으면 당장 이 쓰레기만도 못한 종이를 불태우고 싶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찾아야 하는 내용이 있었으므로.
“어디 있냐고.”
혈왕놈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몰래 은신처를 나가 염화검제에 대한 테러를 계획한 몇 명의 흑귀대원에 대한 기록에서 다시 한 번 내 눈이 멈췄다.
남지호에 대한 이야기다.
[아직 때가 아니다. 대한길드는 아직 존재해야 한다. 대한길드와 염화검제가 세상의 마지막 희망이 되었을 때 그 등불을 꺼뜨려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 주는 내 마지막 선물이 될 것…….]
…아주 염병을 해라. 이 중2병 새끼가.
그리고, 드디어 찾던 내용이 나왔다.
[신이 나에게로 왔다. 나는 신에게 선택받았다.]
[사신의 낫께서 나를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나에게 계약을 제안하신 이유는 역시 신께서도 이 세상이 멸망하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이겠지.]
내 눈이 흘려 쓴 글씨를 노려보았다.
사신의 낫.
계약.
‘기생충이 누군가를 선택해 계약을 제안한다고? 그러면 백호놈도 기생충과 계약해서 그렇게……?’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귀를 통하지 않고.
머리를 바로 울리는 목소리.
상급 괴물의 정신계 공격. 혹은, 기생충의 등장.
‘시발, 또……!’
월영검을 움켜쥐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곧, 기운을 흩었다.
기생충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내가 과거에 들었던 것이었다.
줄곧 머리 한 켠을 떠나지 않고 있던, 지직거리는 소리로 덕지덕지 가려진…….
[신이라. 후. 후. 후. 아주 재미있어. ■■ ■가 이리 말하는 걸 듣다니. 역시 ■ 말대로 ■을 ■■해가며 이 ■■■■ ■과 ■■하기를 잘했어. 아주 잘했어. 후. 후. 후.]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모자이크가 벗겨진, 같으면서도 다른 목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