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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84화 (84/122)

84화. 각자의 지옥 (2)

나는 그 목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모자이크는 사라졌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신이라. 후. 후. 후. 아주 재미있어. ■■ ■가 이리 말하는 걸 듣다니. 역시 ■ 말대로 격을 희생해가며 이 덜떨어진 놈과 계약하기를 잘했어. 아주 잘했어. 후. 후. 후.]

…기왕이면 싹 다 걷어 주면 안 되겠니.

인심 쓰는 김에 크게 좀 쓰지.

참 치사한 놈들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이해하는 만큼 들린다고 했었지.’

나는 책자의 남은 뒷부분을 빠르게 훑었다.

기생충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았다.

이제 김강산의 백팩에 들어 있는 추혼마인의 동력원인 암핵(暗核)을 만드는 과정에서 겪은 수천 번의 실패와 단 한 번의 성공 과정이 남은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최근에 쓴 듯한 마지막 몇 페이지에는 내 계룡문에 대한 막연한 분노도 서술되어 있었다.

[인간은 희망을 가질 자격이 없는 존재다. 검룡이라는 자가 이 진실을 빨리 알았더라면 계룡문이 성전을 겪을 일은 없었겠지. 죽음 속에서 진실을 깨닫게…….]

죽음 속에서 진실 깨닫는 건 너나 많이 하시고.

나는 책을 덮고 왼손에 쥐었다.

산매진화를 일으키자,

낡은 종이가 불길에 휩싸여 이내 재가 되었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회색의 먼지를 가만히 노려보며 나는 새로이 들리게 된 문장을 떠올렸다.

아직 온전한 문장은 아니었다. 여전히 몇몇 부분은 가려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계약이라고 했다.

[내가 계약에 충실하지 않으면 패널티가 부과되거든. 사실 이미 많이 받았지만.]

패널티 어쩌고는 또 뭔 소리인지 모르겠으니까 일단 치우고.

지금까지 내가 확인한 계약자는,

백호와 혈왕.

백호놈에게서 기생충이 튀어나왔으니 인간이 아니어도 계약이 가능한 듯하고.

당연히 그 격을 감당할 수 있도록 강해야 하고.

근데, 왜…….

“나는 안 되는 건데!!!!”

모자이크가 절반만 풀린 문장을 곱씹으며 나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너는 ■■■ ■■ ■ 자. 고로 계약의 자격이 없다.]

왜 나는 자격이 없는 건데. 알려주려면 화끈하게 알려주지 이게 뭐냐고. 이 시발 기생…….

“형! 왜! 뭐야, 또!”

황급히 달려온 김강산이 놀란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시바아아알!!! 내가 왜 자격이 없어!!! 내가, 검황이, 검룡이!!!!”

김강산이 심각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짚었다.

“형. 이번에는 진짜로 돌았냐?”

“너라면 안 돌게 생겼냐? 개나 소나 하는데 왜 나는 안 되냐고! 내가 자격이 없을 리가 없는데!”

“무슨 헛소리 하십니까, 사형?”

“나랑 계약합시다! 나한테 관심 졸라리 많은 거 다 안다고요! 내가 응? 얼마나 잘났냐고! 얼굴 되지, 인품 되지, 실력? 끝내준다고!”

“형! 정신차려! 지금 누구한테 지껄… 악!”

“그래, 대박 세일, 계룡검룡 서림과 계약할 대박적 기회! 싸게 해 드릴게요! 원 플러스 투로 좌룡과 우룡도 서비스로 드립니다! 서은창도? 까짓 것, 원 플러스 쓰리 간다!”

덥석, 김강산이 나를 끌어안았다.

“이제 추혼마인도 잡았으니까 얼른 집 가자. 하영이가 상담도 잘한다더라.”

“사형. 미쳐 돌았어도 미치기 전이랑 별로 차이도 안 나니까 걱정 마십시오.”

“별로? 아냐, 형. 저어언혀 차이 안 나. 완전 똑같애.”

…이거 욕이지.

이놈들 지금 나 욕하고 있는 거 맞지.

한바탕 한풀이를 하고 나니 기운이 까라졌다.

김강산이 흐물거리는 나를 받쳐 들었다.

***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석양이 사라진 숲속으로 짙은 어둠이 깔렸다.

말간 어둠 위로 빗방울이 스몄다.

토닥토닥 내리던 비는 금방 굵어져 어느새 빗줄기가 되었다.

봄비였다.

옷에 덕지덕지 묻은 시체 조각들이 봄비에 씻겨 내려갔다.

발이 바닥에 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가벼운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몇 걸음 앞에서 구울을 불태우는 김강산의 등을 응시하며 걷던 서은창이 내 옆으로 가까이 붙었다.

“사형. 왜 리 대장을 돌려보내셨습니까.”

“걔 괜찮은 애 같아서. 성주가 지랄해서 사형이라도 시키면 아깝잖아.”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닐 텐데.

꼴깍.

서은창이 침을 삼켰다.

“…혁명당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리 대장이 우리를 따라오는 편이 나았을 텐데요.”

차분한 목소리였으나, 그 속에는 내 결정에 대한 원망이 느껴졌다.

그렇겠지.

서은창 너라면 그렇게 생각하겠지.

“왜. 혁명이 성공했으면 싶냐?”

서은창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따라 빗방울이 떨어졌다.

“사형도 보셨다시피 원산성의 성주는 아주 악질입니다. 조선국은 더하고요. 아무리 우리와 무관한 장벽 너머의 땅이라 할지라도, 악을 멸하고 약자를 지킨다는 월악문의 문훈을 생각하면…,”

“그래서, 조선국을 멸하자고? 요즘 마력이 확확 느니까 막 나라 하나 정도는 쉽게 박살낼 것 같고, 그래? 나라가 오크냐? 내장산채야?”

“아니요. 당연히 그런 말씀을 드린 건 아닙니다, 사형. 저는 조선국이 아니라 원산성을…,”

“그 원산성이 조선국 땅이잖냐, 이 망충이 사제야.”

나는 어린 사제를 올려다보며 내친김에 말을 이었다.

“내가 성주 목을 딴다 쳐. 그러면 조선국왕이, 아아, 정의로우신 계룡문께서 우리 원산성에 정의구현해주셨습니다. 이러겠냐? 복수 때문에 맛탱이 간 사람들을 그렇게 봐온 애새끼가. 까딱 잘못하면 전쟁이라고, 이거.”

서은창의 목소리가 끊겼다.

침묵 위로 비가 떨어졌다.

“뭐. 그래. 다 깨부순다고 치자. 그래서, 조선국을 깨부수면, 그다음에는? 너 여기 사람들 책임질 수 있냐?”

“…아니요.”

“그러면 가만히 있어.”

또, 서은창의 목소리가 끊겼다.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힘 있는 눈빛으로 서은창이 나를 곧게 응시했다.

“그래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사형.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

서은창이 이럴 줄은 알고 있었다. 앞뒤 맥락은 다 덮어놓고, 일단 도와주겠다고 덤빌 줄 알았다.

서은창을 처음 마주쳤을 때도 이 녀석은 김강산에게 위협을 당한다고 제멋대로 착각하고는 나를 덥석 돕겠다 덤볐으니까.

최지수 같은 놈이다.

최지수의 뇌 용량을 좀 줄이고 눈치를 좀 더하면 서은창이 나오겠지.

그래서 혁명당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추혼마인을 잡고, 소주천을 몇 바퀴 돌리고, 애들이 회복하기를 기다려 천천히 출발했다. 이쯤이면 혁명당의 난리인지 지랄인지가 모두 진압됐겠다 싶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가 조금 전 막 얘기를 꺼낸 참이었다.

-오늘 원산성에서 한바탕 난리 났을 거야. 지금은 뭐, 거의 끝났겠지만. 괜히 끼어들어 일벌이지 만들지 말라고. 우리는 내일 돌아갈 거니까.

-내가 애냐? 나도 앞뒤 생각하고 움직인… 아! 민주는?

퍽이나 그러겠네, 네놈이.

김강산은 평소의 캐릭터대로 별관심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 와중에 오민주를 떠올린 것이 오히려 의외였다.

눈치가 빠르고 수다쟁이인 작은 아이와 그 사이 퍽 정이 든 모양이었다.

아마 자신의 어린 시절을 겹쳐 보는 듯했다.

-우산소 주인한테 맡겼잖냐. 오늘 난리 날 게 뻔해서 일부러 그쪽에 부탁했다.

-그 여자가 그렇게까지 강해?

우산소의 주인은 잠시 곤란한 얼굴을 했으나 결국 부탁을 수락했다.

-강하지. 성주보다 훨씬 강하지. 난리통에 애 하나 지킬 능력은 완전 차고 넘치지.

-…형보다?

-그런 사람이 있겠냐.

김강산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 농담이라고. 바로 납득하지 말라고.

문제는 이놈이다.

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협행멸악(俠行滅惡) 구약보세(求弱保世)로 태교 당한 서은창.

‘어떻게 말해야 이놈이 충격을 좀 덜 받을까.’

약(弱)이 곧 선(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사형. 이건 어떨까요? 이번 혁명만 돕는 겁니다. 성주를 끌어내리고 원산성이 독립할 수 있도록 사형이, 우리 계룡문이 조금만 힘을 보태주면…….”

발밑에서 튀어 오른 물방울이 정강이를 적셨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가 정수리를 타고 내려와 등으로 흘러내렸다.

온몸이 물에 잠긴 듯 축축했다.

굳은 의지를 담은 서은창의 눈빛이 나를 곧게 응시했다.

적당히 둘러대 넘어갈 얼굴이 아니다.

과연 월악의 마지막 제자다운 의기였다.

‘어쩔 수 없나. 진실은 때로 아픈 법이니까.’

복잡한 마음으로 내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아까 잡은 리치. 30년 묵었다고 다들 지껄이지만 사실 그 괴물이 원산성 인근에 나타난 지는 세 달밖에 안 됐다지. 너도 장마당에서 들었지?”

“네, 뭐…….”

“그게 왜 갑자기 이쪽으로 이동했을까?”

“그거야, 근방에 생명력을 흡수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까……?”

“리치가 먹을 거 없다고 집 옮기는 거 봤냐?”

“…아뇨.”

리치의 별명은 지박령이다. 한 번 자리 잡은 지역을 좀처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리치가 정착하지 않고 생명력을 찾아 오크처럼 떠돌았더라면 이 세상은 이미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청응파에게 의뢰받은 리치 소탕은, 청응파에서 호위 의뢰를 맡은 이들이 리치의 영토에 실수로 발을 디뎌 리치를 끌어내는 통에 생긴 난리였다.

들어가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

즉, 누군가가 리치의 영토에 들어갔다는 의미다. 생명력에 반응한 리치가 이동을 시작했고, 리치의 활동 범위에 또 생명력이 포착되었고, 생명력을 흡수한 리치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고, 또 생명력을 흡수하고…….

“…제가 활빈당 활동을 할 때 실수로 리치 땅에 몇 번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큰일 터지기 전에 막느라 진땀 좀 흘렸죠. 헤헤. 그러니까 자유사냥꾼들이 실수로…….”

“그건 그냥 네놈이 멍청한 거고.”

서은창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의도적으로 끌고 왔군요. 혁명…의 기회를 만들려고.”

아무튼 눈치 빠삭한 놈이다.

혁명당이 원산성 인근으로 리치를 유인해 왔다는 것은, 정아를 미행해 도착한 혁명당의 은신처에서 들었던 대화 중 일부였다.

정아 동무가 다부진 어조로 말했다.

-정치국장 동무. 일으키는 자의 사냥에 동원되는 능력자가 결정되었습네다.

-얼마요?

-놀라디 마십시오. 방위단 대부분과 순찰단의 2/3, 그리고 경호단의 절반입네다.

-호오. 호재군, 호재야.

-잘되었습네다. 아주 잘되었어요.

작은 나무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로 옅은 탄성이 퍼졌다.

탄성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들창코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정치국장이었다.

-방위단이 그리 자리를 비운다면, 일으키는 자를 성 안으로 유인하는 방안은 어떤가? 처음 그 괴수를 둥지에서 끌어냈을 때처럼 미끼를 잘 풀면…….

나는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들창코의 목이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은 탁자에 둘러앉아 있던 남은 네 사람 덕분이었다.

-…국장 동무. 그거이 희생이 과합네다. 우리 린민들이 일으키는 자에게 더 이상 생명력을 빨려서는 아니되오. 내래 처음부터 일으키는 자를 국장 동무가 유인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정아 동무는 그리 맘이 약해서 어디 혁명 하갔소. 희생 없는 혁명은 없다우. 작은 희생으로 큰 혁명을 이룰 수 있다면 희생당한 원혼들도 억울하디 않을 걸세.

-만약 성 안으로 일으키는 자를 끌어들인다면 내래 공 동무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갔습네다! 공 동무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크게 분노하실……!

난장판이었다.

국장 동무가 내놓은 거지같은 방안은 부결되었다. 나머지 네 사람의 극렬한 반대 덕분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아니라, 그놈들에게.

다른 결론이 나왔더라면, 혁명당 놈들의 모가지를 내 손으로 땄을지도 모른다.

‘그 개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혁명당을 도와줄까도 생각했었지.’

서은창에게 했던 말대로, 조선국을 멸망시키는 일은 불가능하고, 또한 무의미하다.

하지만.

‘경고를 보낼 수는 있지.’

그동안 견제받지 않았던 권력에게, 그래서 썩어버린 권력에게 창 한 자루 날리는 정도는 가능하고, 또한 유의미했다.

그러나 그 반대 세력이 이 모양이어서야 모두 헛짓거리일 뿐이다.

결국 나는 어디에도 관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저 처음 계획대로, 혈귀단의 본진을 찾아 남아 있는 떨거지들의 모가지를 베고 추혼마인을 박살내면 그뿐.

그리고 그 목적은 120퍼센트 달성했다.

추가로 기묘한 구슬도 손에 넣었다.

더욱 중요한 건, 기생충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다는 사실.

‘아무래도 서울에 가봐야겠어.’

다음 목적지도 정해졌겠다, 이제 이 원산성을 뜰 일만 남았다.

우리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겠다고 결정한 오민주를 데리고, 성주놈이 약속한 보도를 가지고 말이지.

화르륵.

김강산의 대도를 감싼 불길이 굵은 빗줄기를 가르며 달려드는 오크의 무릎을 베어냈다.

서은창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걸음을 옮기며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빗줄기 사이 멀리, 희끄무레하게 원산성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지금쯤이면 혁명이든 반란이든 모두 진압되었을 것이다. 한수길은 그들의 계획을 알고 있……?

“형. 아직 싸움 안 끝났는데?”

원산성의 두터운 성벽 안 곳곳에서 불길이 오르고 있었다.

붉고 흰 화염이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쏟아지는 비를 뚫고 솟구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서은창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전쟁이군요. 사람들이 많이 다치겠어요.”

“…형. 민주는 괜찮겠지?”

김강산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하하.

하하하.

그러게나 말이다.

…그 할망구가. 와. 진짜 이렇게 뒤통수를 치네.

“야. 내가 먼저 가서 오민주 찾아올 테니까 너네는 숙소에 얌전히 있어라.”

“예. 사형.”

“왜? 왜, 형? 아까는 민주 괜찮다며?”

“그건 아까 얘기고.”

내 발이 거세게 바닥을 걷어찼다.

기운을 끌어올려 경공을 전개했다.

서은창이 멀어지고, 김강산이 내 뒤로 멀어졌다.

“혀어어어엉!!!! 민주 절대애애애 지켜어어어-----!!!!”

이 새끼가.

지키고 싶으면 지가 튀어가야지.

…내가 계룡에 돌아가면 애들 달리기 훈련부터 빡세게 돌린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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