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각자의 지옥 (3)
곳곳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전투로 성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통나무를 엮어 만든 낮은 집이 화염구에 맞아 불타고, 진흙을 이겨 만든 집이 대지술사의 손짓에 강철검으로 변해 솟아올랐다.
성내를 지나는 작은 냇물이 얼음창으로 바뀌어 도망치던 이의 등을 관통했다. 그는 얼음창에 꼬챙이처럼 꿰여 즉사했다.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일반인이었다.
폭음과 비명 소리가 번갈아가며 울렸다. 나는 불길과 얼음과 바위 사이를 빠르게 내달렸다.
박살난 방위단 본부를 통과해 곳곳에서 화염이 솟구치는 장마당에 들어섰다.
매캐한 연기로 가득찬 우산소는 텅 비어 있었다.
오민주도, 백발의 여자도 보이지 않았다.
리치 사냥을 나섰던 한수길이 성으로 돌아간 것은 정오 무렵.
귀환 도중에 지체되었다 해도 여섯 시간 이상 전투가 이어졌다는 소리다.
그 말은,
성주군의 예상보다 혁명당이 훨씬 강했다는 의미.
원산성 전체에서 그 정도 전력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우산소의 주인이었던 백발의 여자뿐이다.
은거기인은 개뿔.
그 할망구가 혁명당이었을 줄이야.
‘싸움질할 생각이면 애를 못 맡는다고 말을 했어야지!’
김강산이 자신을 비춰보고 있는 애다.
오민주를 데려온 날부터 김강산은 악몽을 꾸지 않았다. 북쪽으로 올라온 뒤로 매일 꿔대던 악몽에서 벗어나 드디어 통잠을 자기 시작했는데.
겨우 PTSD에서 벗어나고 있는 와중에 부정적인 자극은 금물이다.
만약 애가 무슨 일 당했다면 우리 애새끼 멘탈이 바사삭…….
…그건 안 되지.
‘아이 씨. 피곤해 뒈지겠네.’
가는 데마다 매번 싸움판이다.
이게 주인공 노릇이라면 정말 사양하고 싶은데.
나는 혀를 차며 기감의 그물을 넓게 펼쳤다.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마력이 잡혔다.
내 발이 곧 바닥을 걷어찼다.
***
쏟아 붓는 소낙비를 뚫고,
축축하게 젖은 바닥에서 수십 자루의 철창이 솟아올랐다.
날카로운 창날이 단번에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화르륵!
흰 불꽃으로 빛나는 화염벽이 날아오던 철창을 녹였다.
몇 개의 철창은 얼음벽에 가로막혔고, 또 몇 개의 철창은 강철벽에 가로막혔고, 또 몇 개의 철창은 병장기에 맞아 목표물을 잃었다.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으나 공선희의 얼굴빛은 변하지 않았다. 공선희가 담담하게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콰가가가!!!
보위대 13대장 전영철이 화염벽을 세웠다. 얼음벽과 강철벽이 그를 뒤따라 정면을 가득 메꿨다.
하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
아까와 달리 철창은 날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생성된 것은 거대한 구덩이.
공선희를 포위하고 있던 보위대 13대의 열두 명 대원의 발밑의 흙이 사라졌다.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그들이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사라졌던 흙이 공중에 나타났다. 흙과 자갈은 단숨에 날카롭고 가는 강철 화살로 변해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솟구치는 이들의 머리 위로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막으라우!”
전영철이 다시 외치며 검을 들어올렸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화살을 막으려는 의도였으나,
콰직!!!
가느다란 화살은 검을 부러뜨리고 그의 어깨에 꽂혔다.
“진강이다! 막지 말고 피하라우!”
전영철이 외치며 화살을 뽑아냈다. 가슴팍의 주머니에서 빨간약을 꺼내 들이키자 어깨의 상처에서 피가 멎었다. 새 살이 차오르는 느낌이 생생했다.
화살비가 멎었다.
전영철은 손짓으로 탈출을 지시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보위대원들이 몸을 솟구치자, 멎었던 화살비가 다시 쏟아졌다.
“대장 동무. 어띠할까요!”
전영철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대기를 명령했다.
‘반란군 간나새끼들이 믿는 구석이 이거였기레.’
천수마괴(千手魔怪) 공선희.
특급으로 분류되는 적색분자였다.
강계성의 성주라는 자리에 올랐던 자이며, 강계의 란(亂)을 일으킨 반란 수괴.
조선국의 30여 년 역사 속에서 가장 큰 반란으로 기록된 강계의 란 이후 공선희는 자취를 감추었다.
10년 동안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그를 두고 그때 강계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는 이도 있었다.
전영철이 알던 바와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 강력한 힘만큼 아리따웠던 얼굴은 이지러진 흉터 자국으로 가득했으므로.
하지만 진강(眞鋼)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대지능력자가 천수마괴 외 다른 사람일 리 없었다.
“대장님. 어띠…….”
전영철은 짧은 고민에 빠졌다.
특급 적색분자의 수급을 가져가면 폐하께서 크게 상을 내리실 터.
반란군은 완전히 기세가 꺾였다.
공주 역시 안전한 곳으로 모셨다.
‘이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디.’
아무리 대단한 천수마괴라도 그는 혼자다. 개인의 마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
반면 13보위대 전원이 이곳에 모여 있다. 빨간약도 넉넉하다.
전영철은 결정을 내리고 신호를 했다.
곧, 백색의 화염탄 두 개가 구덩이 위로 솟아올랐다.
그 뒤를 따라 수십 개의 금빛 화염탄이 쏘아졌다.
주위를 뒤덮은 빗줄기가 수백 개의 얼음창이 되어 솟구쳤다.
빗속으로 튀어오르는 화염탄과 얼음창을 향해 공선희가 손을 휘둘렀다.
그 손짓에 따라 떠오른 바위와 벽돌과 담장이 순식간에 강철벽으로 변해 구덩이를 덮었다.
연속적인 속성 공격이 강철벽을 때리고 녹였다.
공선희는 마력을 쏟아 부어 녹아내린 강철벽을 단단하게 보수하고 금 간 부분을 메웠다.
지금까지는 잘 버티고 있다. 하지만 조금씩 마력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10분. 그 이상은 어렵갔어. 그 안에 유격대장이 공주를 찾아내야…….’
원래 공선희는 이번 거사에 합류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공선희는 처음부터 이 거사에 회의적이었다.
강계의 란(亂)으로 명명된 실패한 혁명 이후,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 눈으로 보았기 때문.
-혁명은 피를 먹고 자라디요. 피를 흘리기를 두려워 하믄 혁명당이라 할 수 있갔습네까.
그녀의 염려를, 강만순은 단호한 어조로 무질렀다.
-강계의 영웅께서 어띠 작은 희생을 두려워하십네까.
-내래 영웅이 아닐세. 그리 부르디 말게나.
-…좋습네다. 공 동무께서 나설 필요도 없습네다. 거저 새로운 해방구가 열리는 모습을 지켜보시라우.
엄두병과 강만순이 이끄는 혁명당은 원정을 떠나 텅 텅 비어 있는 성벽을 장악하고, 뒤이어 방위단 본부와 순찰단 본부를 점령했다.
거기까지는 계획대로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번 거사의 핵심은,
성주의 아내이자 국왕의 둘째 공주인 안미령, 그리고 그의 두 아기씨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
안미령을 포로로 잡지 못하면 성주와 방위단과 순찰단을 모두 제압해도 조선국왕이 보위대를 이끌고 내려오는 순간 혁명은 실패였다.
10년 전 강계의 실패로 깨달은 교훈이었다.
하지만 순찰단과 경호단의 방어를 뚫은 엄두병이 공주가 거주하는 본성에 도착했을 때, 공주와 두 아기씨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그리고 성주가 귀성했다. 그들의 예상보다 반나절 이상 빠르게.
성벽을 방어하던 혁명당은 성주군에게 순식간에 뚫렸다. 심지어 성주군은 보위대와 함께였다.
강만순은 다급히 공선희에게 달려가 보위대를 막아달라 요청했다.
국왕이 그리 사랑하는 공주와 두 아기씨만 손에 넣으면, 인질을 대가로 협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공 당원께 어려운 부탁을 드리게 되었습네다.
-그런 말씀 마시오. 내래 혁명당에 투신한 뒤로 목숨을 아낀 적 없네.
혼자 힘으로 보위대를 막을 자는 이 원산성에서 공선희 자신밖에 없었다. 아니, 공성희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공주를 찾았다는 신호탄은 여전히 오르지 않았다.
보위대는 전면전을 피하고 시간을 끄는 기색이 역력했다.
‘버텨내야 한다. 내래 조금이라도 더 버텨내야 한 명의 동무라도 성을 탈출할 수 있다.’
공선희는 이 거사가 이미 실패했음을 알았다.
공주는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보위대가 지금껏 자신을 상대하고 있을 리 없었으므로.
붙잡힌 혁명당원의 미래는 명확했다.
강계에서 그랬던 대로,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광장으로 끌려나와 처형당할 것이다.
강계성의 성벽을 가득 메우며 꽂혀 있었던 수백 명 동무들의 잘린 목을, 그 얼굴들을 공선희는 줄곧 잊지 못했다.
‘내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버틸 터이니 한 명이라도 더 탈출 하라우.’
공선희의 이마에 맺혀 있던 땀이 흉터로 가득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는 없었다.
쩌억. 쩌어억.
강철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비가 오는 날이다. 물 젖은 대지를 강철로 변환하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많은 마력이 소모되었다.
‘상황이 이리 꼬일 줄 알았다면, 그에게 말이라도 꺼냈을 것을.’
자신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공선희는 혈귀단을 쫓아 남쪽에서 올라온 정체 모를 미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을 후회했다.
혁명의 정보가 샐 지도 모른다는 강만순의 염려와 달리, 공선희는 그자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전날 밤 우산소에 나타나 일으키는 자를 사냥하는 원정에 함께하기로 했다며, 오늘 하루만 아이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보름 동안 아이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눈치를 살피느라 바쁘게 돌아가던 눈동자는 나이다운 호기심으로 반짝였고, 얼마나 잘 먹였는지 살이 포동하게 올랐다.
무엇보다도, 그늘이 사라졌다.
-철아.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 형이 저녁에 올 테니까.
-싫다우. 내래 형아랑 같이 가겠수다!
아이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그래도 된다고 믿어야 할 수 있는 행동이다. 투정을 부려도,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신뢰 관계를 고작 보름 만에 형성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안 돼. 형들 오늘 위험한 데 간다니까.
단호한 목소리로, 하지만 다정한 얼굴로 아이를 달랜 그가 허리를 펴고 공선희를 바라보았다.
-어르신. 오늘 이곳은 안전하겠지요?
마치 계획을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공선희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가는 톡톡히 치르겠습니다.
-필요 없다우.
그때, 오늘의 거사를 털어놓고 솔직히 도움을 요청하는 편이 나았을까. 만약 그랬더라면 무엇인가가 달라졌을까…….
콰아아아!!!!
뚜껑처럼 구덩이를 덮은 두꺼운 강철벽이 폭발했다.
연이은 공격에 버텨내지 못한 것.
원래의 모습대로 모래와 자갈이 되어 쏟아져 내리는 강철벽의 흔적 위로 보위대가 하나둘 몸을 솟구쳤다.
가장 먼저 뛰어오른 보위대가 얼음창을 쏘아냈다. 뒤이어 화염탄이 날아왔다.
공성희가 생성한 강철방패가 두 속성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허공을 수직으로 가른 환도가 공성희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공성희가 뒤늦게 검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차피 그곳에서 죽었어야 하는 목숨이었다. 이미 오래 살았디.’
공성희는 죽음을 예감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카캉!
그 대신, 날카로운 쇳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야. 난리 났네, 난리 났어.”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푹 젖은 젊은 미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자신이 조금 전까지 떠올렸던, 남쪽에서 온 각성자.
오른손에 쥔 검이 새하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가 손과 발을 기묘하게 움직일 때마다 공격을 시도하던 보위대가 검과 주먹과 발에 격중당해 나가떨어졌다.
“고수다! 덤비디 말고 포위하라우!”
보위대장이 외치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그가 공선희 앞에 멈춰 섰다.
‘이자가 왜 나를 도와주나? 설마 당 상부에서 보낸 지원이었나? 아니디. 지금껏 아무 이야기가 없디 않았나. 하디만 그렇다면 왜 나럴… 만약 이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은……!’
갖가지 생각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공선희는 작은 희망과 미련으로 비에 잠긴 그를 응시했다.
공선희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그가 입술 끝을 비스듬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야. 이 빌어먹을 할망구야.”
공선희는 막 내뱉으려던 문장,
‘혁명당을 도와주시오. 지금 붙잡힌 혁명당원들을 구해야 하오. 아까운 목숨들이 처형대에서 사라딜 거요.’라는 문장을 꿀꺽 삼켰다.
매끈한 이마를 구기며 짝다리를 짚은 그가 팔짱을 꼈다.
“우리 애는 어쩌고 여기서 이 지랄 염병을 떨고 있어요? 우리 애, 뭔 일 있으면 혁명이고 나발이고 다 끝장인 줄이나 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