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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86화 (86/122)

86화. 각자의 지옥 (4)

우산소의 주인장인 백발의 여자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침착했다.

보아하니 마력도 달랑달랑하고, 꽤나 위기 상황인 거 같은데.

그러니까…….

“우리 애 어디 있냐고.”

“안전한 장소에 있다우.”

“거기가 어디냐고.”

검 하나가 뻗어왔다.

나는 어깨를 젖혀 검끝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회피하고 곧바로 젖혔던 어깨를 거세게 휘둘러 놈에게 같은 공격을 돌려주었다.

어른들 대화를 방해하면 못 쓰지.

물론 놈은 내 검을 회피하지 못했다.

어깻죽지를 움켜지며 풀썩 뛴 놈의 자리를 환도를 쥔 놈이 재빠르게 메꿨다.

사람을 상대하는 훈련과 손발을 맞추는 훈련이 모두 잘 된 놈들이다.

느껴지는 마력도 하나하나가 최지수 이상.

‘이놈들이 보위대네.’

리태연이 이름만으로도 슬슬 기었던 그 보위대의 낯짝을 드디어 확인하니 하나도 안 반갑다.

“어르신.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우리 애 어디 있냐고.”

여자가 강철 방패를 만들어 날아오는 화염탄을 방어했다.

대답은 그 후에 나왔다.

“…저기 검은 날의 도를 들고 있는 자는 보위대 13대 부대장 차덕수디. 그 악행이 자네가 솜씨를 보여준 훈련소 백 소장보다도 못하디는 않을 걸세.”

요것 봐라?

몇 번 봤다고 나를 파악한 듯 구는데.

“그 왼쪽에 쌍검을 든 자는 김명찬이디. 그가 보위대에 들어가기 전 길주성의 성주로 있을 때 류민들의 땅을 강제로 탈취하여…….”

“저기요. 안사요.”

“그 앞에 검을 든 자는…….”

어느 조직에라도 나쁜 놈은 있다.

똥 묻은 개와 똥밭에 구른 개의 차이 정도일까.

이 여자가 말했던 대로, 제 입으로 나오는 말을 순순히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서은창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아니거든.

여자는 꿋꿋이 놈들의 악행을 나열했다.

오민주를 데려가 신분표를 발급해준 행보에 더해, 오늘 아침 성주와 협상해서 일반인 방패를 되돌려 보냈다는 소문이 짜하게 퍼졌을 것이다.

내 성미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했겠지.

리치놈을 혁명당에서 일부러 유인했다는 사실만 몰랐어도 아마 한 손 보태줬을 터.

내가 거악 박살내는 데 진심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조선국이랑 척 지고 싶지는 않거든.

그것도 너네 혁명당 돕느라 그럴 생각은 전혀 없…….

“그리고 저기 채찍을 든 자는 강계의 훈련소장으로 있으면서 도를 빙자해 여러 훈련생을 때려 죽…….”

었는데 말이지.

콰아아!!!!

채찍놈이 들고 있던 채찍을 떨궜다.

“어이쿠. 손이 떨려서.”

적(積)에 얻어맞은 채찍놈이 창백해진 얼굴로 달랑거리는 오른손목을 움켜쥐었다.

부하와 쑥덕이던 보위대장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남쪽 동무. 볼 일이 끝났으면 있던 장소로 돌아가라우. 그리허면 우리 조선국은 동무가 이곳에서 저지른 일에 책임을 묻지 않겄네.”

저지른 일? 책임?

웃기는 소리다.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이라고는 리치를 잡아준 것뿐이다.

고맙다고 앞구르기를 해도 모자랄 판에 책임이라니.

그리고.

‘일은 지금부터 저지를 거라서.’

내 예상과 달리 대장놈은 검을 들고 달려드는 대신 한 발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

이곳에서의 내 활약이 알려진 모양이다. 보는 눈이 많았으니까.

“나도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말이지.”

내가 한 걸음 다가서자 보위대 놈들이 병장기를 들어올렸다.

대장놈이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대꾸했다.

“조선국을 적으로 돌릴 셈인가?”

“너무 나가시네. 이건 개인적인 용무라우, 동무.”

내가 한 걸음 더 발을 내딛었다.

쏟아져 내리던 빗줄기가 단번에 다섯 개의 얼음창으로 변해 등줄기로 쇄도했다.

그 뒤를 따라 집채만한 바위가 날아오고, 오른쪽과 왼쪽에서 동시에 두 개의 화염탄이 쏘아져 나왔다.

합이 잘 맞는 연격이다. 하지만.

연환퇴(連環腿)로 얼음창을 연달아 걷어차자 조각조각 부서진 얼음이 뿌옇게 기화했다.

이어진 선풍각(旋風脚)에 바위가 박살나고,

왼손의 권강(拳剛)과 오른손의 검강(劍剛)이 각각 두 개의 화염구에 부딪혀 폭발했다.

폭발의 잔해 사이로,

불길 휘감은 환도가 내 허리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월영검을 비스듬히 휘둘러 환도를 쳐내고,

단번에 우상단으로 내질렀다.

어깨를 움켜쥔 환도놈이 신음을 삼키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 사이로 파고든 내 발이,

“너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어느새 채찍놈의 앞에 도착했다.

“동무가 진짜 강계성의 훈련소장이었냐? 그게 언제 일인데?”

“동무는 누구길래 나럴 이리 겁박하디? 대조선국의 보위대가 두렵지도 않은가?”

채찍놈은 박살난 손목을 움켜쥐고서도 당당했다.

놈이 지껄인 그대로, 대조선국의 보위대라는 조직의 이름이 놈을 당당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놈들을 나는 20톤 트럭 1000대에 꽉 채울 만큼 알고 있다. 700년 전의 소림의 땡중부터 원산성 장마당의 자유사냥꾼들까지.

그놈들의 공통점은 모두 나에게 후려 맞았다는 것.

“내가 누군지는 알 거 없고. 질문에 대답이나 하시라고요, 동무야.”

나는 한쪽 입술 끝을 들어올리며 비스듬히 웃었다.

내 적이 될지도 모르는 놈들한테 내가 내 정보를 질질 흘리고 다닐 필요는 없다.

그리고, 네가 언제 거기 있었는지는 아주 중요하거든.

나한테 말고, 네 모가지한테.

내 살기를 느꼈는지 놈은 나불거리던 입술을 꾹 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여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자는 십삼 년 전부터 십 년 전까지 훈련소장으로 근무했디. 내래 그때 강계성의 성주로 있었소. 저자를 분명히 기억하오.”

13년 전부터 10년 전까지.

김강산이 훈련소에 있었을 때와 상당히 겹친다.

네놈이구나.

내 김강산의 유년을 악몽으로 물들인 책임을 물어야 할 새끼가.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세상이 이렇게 좁거든.

입술을 파들거리던 놈이 다시 고개를 쳐들며 지껄였다.

“거래, 내 강계에 있었소. 내래 누구보다 성실히 역할을 수행……!”

퍼어억.

놈의 얼굴을 후려친 내 왼손이 놈의 문장을 잘랐다.

놈이 방어를 위해 팔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보위대라고 움직임이 빨랐다.

하지만 놈의 방어는 내 손을 막았을 뿐 손에서 발출된 강기는 당연히 막지 못했다.

오른쪽 뺨이 피곤죽이 된 놈이 재빨리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속도와 방향 모두 흠잡을 곳 없다. 솜씨가 없는 놈은 아니지만.

오른발을 크게 내딛으며 왼손을 내질렀다.

놈이 허리를 비틀며 공격을 회피했다.

‘그거 허초거든.’

물론 네놈이 반응하지 않았으면 실초가 되었겠지만.

파앗.

월영검의 검끝이 놈의 어깨를 파고들어 반대쪽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검을 뽑아내지 않은 채 왼손으로 놈의 목줄기를 쥐었다.

“어띠 이러시오! 동무와 어떤 상관도 없는……!”

놈의 어깨에 박혀 있는 월영검을 비틀자 놈이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흘렸다.

“왜 그랬냐?”

“무슨……!”

“훈련소에서 말야. 왜 애들을 학대했냐고.”

어린 애들이다.

11살의 1월 1일에 빌어먹을 졸업시험을 치르니까, 모두 10살 이하의 아이들이다.

“…나도 훈련소를 졸업했소. 내래 어띠 생도들을 학대하것소? 나는 생도들이 용맹한 능력자로 재탄생하도록 도움을 주었을 뿐이오.”

놈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떨어졌다. 부릅뜬 눈이 안광으로 번쩍였다.

이건 아마 진심이겠지.

납작하게 눌린 제 삶에서 뽑아낸, 아주 납작한 진심.

그리고 그 진심이,

지옥을 만들었다.

파앗.

박혀 있던 월영검을 뽑아냈다.

검날의 넓이만큼의 지름을 가진 구멍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동무. 내래 잘못헌 거이 없소. 내래……!”

절절한 문장을 쏟아내던 놈의 입술이 일순간 정지했다.

놈의 목줄기를 꿰뚫은 검을 뽑아내자, 빗줄기 사이로 피분수가 솟구쳤다.

철퍽.

시체가 된 전 강계훈련소의 소장의 몸뚱아리가 물 젖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과 부딪히는 반동으로 튀어올랐던 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다시 하강했다.

“…김 동무!”

“이 간나 새끼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인디 알고는 있나!”

“보위대원을 해하였습네다! 대장 동무, 명령을……!”

보위대장이 팔을 들어올렸다.

제멋대로 외쳐대던 놈들이 단번에 잠잠해졌다.

상대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놈이다.

덤볐다가는 꽤나 많은 시체를 치우게 되었을 텐데.

보위대장의 서늘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시선을 마주보며,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한순간 끓어올랐던 가슴이 느릿느릿 가라앉았다.

“보위대는 국왕 폐하께서 직접 임명하신 폐하의 기사다. 보위대원을 해한 죄는 가볍디 않디.”

“이건 개인적인 용무라니까? 저런 새끼를 보위대에 직접 임명하신 너네 폐하도 책임이 큰데?”

보위대 놈들의 살기가 일순 짙어졌다.

위대하시고 령도하시는 폐하의 충심 어린 사냥개라더니 과연 그런 모양이다.

뭐, 꼭 검을 들겠다면 사양하지 않겠다만.

“다시 마주치는 날, 오늘의 책임을 묻갔소.”

묵직한 살기를 흘리며, 놈이 제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결국 여기서 나랑 붙어봐야 진다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리다.

이것으로 상황 종료.

“할매. 애 찾으러 갑시다.”

여자가 단호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럴 수 없디. 내 이곳에서 보위대와 동귀어진할 각오가 되어 있…….”

“동귀어진은 무슨. 당신네 혁명 이미 망했어요. 보고도 몰라요?”

“…혁명당 동무덜이 한 명이라도 성을 탈출할 수 있도록 내 이곳에서… 으윽!”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여자가 정수리를 움켜쥐며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래봤자 하나도 안 무섭고.

“저기. 나도 참을 만큼 참아줬거든?”

희게 빛나는 월영검을 흔들며 내가 말했다.

“자, 골라. 후드려 처맞고 끌려갈래, 좋게 말할 때 앞장설래.”

“이거이 좋게 말한…….”

“어. 좋게 말한 거야, 그거.”

내 기색을 살피던 보위대장이 이때다 싶었는지 재빨리 끼어들었다.

“천수마괴 공선희. 반역도의 계획은 모다 실패했다. 지금 순순히 항복하면 내 국왕 폐하께 선처를 구하디. 네 지은 죄가 깊디만 국왕 폐하께서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실디도…….”

콰아아!!

적(積)을 쏘아내자 놈이 다급히 말을 멈추며 검을 들어올렸다.

강기의 구슬이 검을 감싼 푸른 불길과 격돌해 거세게 폭발했다.

폭발의 충격에 보위대장놈이 휘청이며 두 걸음 물러섰다.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지 말라고 내가 말 했냐, 안 했냐.”

“…안 했소만.”

아, 말 안 했구나.

그래도 미안하지는 않고.

나는 여자를 응시하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내가 말했다.

“삼 초 줄게. 그 안에 정해. 삼…….”

어금니를 짓씹으며 여자가 양손을 휘저었다.

발밑에서 솟아오른 강철벽이 단번에 놈들을 가두었다.

굳은 표정의 여자가 나를 앞서 달려 나가며 손짓했다.

“날래 가자우. 어르나 찾으러.”

***

거센 빗줄기가 뺨따구를 후려쳤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흩날렸다.

짧은 질주 끝에 도착한 곳은 원산성 외곽이었다.

멀리에서 화염탄 터지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릴 뿐 주변은 고요했다.

잘 관리된 작은 마당으로 비가 내렸다.

몇 그루의 고추나무와 호박넝쿨, 푸른 이파리를 벌린 채 땅에 뿌리박은 배추밭이 푸르게 젖어 있었다.

감나무의 두꺼운 이파리에 빗줄기가 떨어질 때마다 진녹색의 잎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안전한 곳이라우. 믿을 만한 사람이 꾸리는 진또배기 고아원이디. 내래 어르나를 아무 데나 내팽개치는 그런 사람은 아니…….”

“됐고, 내 눈으로 확인하겠다고.”

“그러시라우.”

어르신이 나지막하게 대꾸하며 앞장서 마당을 가로질렀다.

“지윤 동무. 내 어르나 데리러 왔다레.”

안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나왔다.

누군가가 무어라고 말했다.

그 소리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2층짜리 건물의 현관문.

그 옆에 세로로 걸려 있는,

비에 젖은 나무 문패.

신음처럼, 내 입이 문패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아주 오랜만에 흘러나온 그 이름은 내 귀에조차 설게 들렸다.

“…뚜엣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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