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87화 (87/122)

87화. 각자의 지옥 (5)

“아이고. 선희 언니. 꼴이 이게 뭐냐. 아이고. 쯧, 쯧. 이거 어쩌냐. 일 났네, 일 났어……!”

여자가 공선희를 끌어안을 듯 잡아끌었다.

“내 괜찮허다. 철이는 잘 있디?”

“그럼. 한참 놀다가 씻고 2층에서 뻗어서 자고 있어. 애가 아주 명랑하드만. 지금 데려가신다고? 이 난리통에?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가지?”

여자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나를 돌아보며 휘둥그레 눈을 키우는 여자의 얼굴이, 뿌옇게 흐렸다.

”오메. 이 얼굴 봐라. 겁나 잘생겼네. 아이고. 세수라도 하고 있을 걸.“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뒤늦게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눈 옆에 몇 가닥 주름살을 매단 여자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치며 말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그래, 일단 들어와요, 들어와. 철이는 잘 자고 있어요.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성 상황 봐서 데려가는 거이 낫겄는디? 지금 성주군이 난리라면서. 괜히 돌아다니다가 눈 먼 화염탄 맞아 뒤지면 이 잘생긴 얼굴이 얼마나 아까워.”

여자가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속절없이 여자에게 끌려 들어가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흔한 이름이다. 뚜엣이라는 이름은.

아마 아닐 것이다.

기대하지 말자.

하지만, 만약,

‘엄마가 살아있다면…….’

***

나는 네 번 죽었고, 다섯 번 태어났다.

남보다 많은 삶을 살았으나 안온한 어린 시절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다.

검황은 어린 시절 마적에게 부모를 잃었다.

김은명은 폭격으로 부모와 함께 죽었고,

박승주는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곧 죽었다.

이번 생 역시 어렸을 적 오크의 습격으로 부모를 잃었다.

유일하게 그렇지 않았던 삶은 한지혁으로 살았던 생애뿐이다.

검황의 기억을 되찾기 전이었다.

그저 어린 아이었던, 정말로 어린 아이였던 나를 키운 엄마.

아버지라는 인간에게서 도망쳐 엄마에게 돌아간 나를 부둥켜안고 울었던,

내가 학교에서 싸움질을 하고 다쳐 돌아갈 때마다 나를 호되게 혼내면서도 결국 꽉 껴안아주던,

추석이면 소고기를 들통 가득 삶아 구수한 쌀국수를 만들어주던,

7등급짜리 성적표를 가져가면 실망스러운 기색을 애써 감추며 괜찮다고 나를 토닥이던,

한지혁의 엄마.

내… 엄마,

응우옌 티 뚜엣.

나는 여자가 권하는 대로 거실의 바닥에 앉았다.

여자가 감자 한 접시와 물컵을 가지고 돌아왔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작은 나무 탁자. 벽 옆에 차곡차곡 개켜 놓은 아이의 옷들. 그 옆에 놓인 검 두 자루.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 고아원을 혼자 운영하시나요?”

“그런 셈이지. …어, 나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선희 언니한테 들었어. 남쪽에서 왔다며. 나도 남쪽 출신이거든. 떠나온 지는 오래됐지만.”

목이 탔다.

나는 물컵을 들어 꿀꺽꿀꺽 물을 마시고는 다시 물었다.

“뚜엣… 이라는 분은 여기 안 계신가 봐요……?”

여자가 반색을 했다.

“그걸 그새 봤어? 그게 사람 이름인 건 어찌 안대? 젊은 사람이 얼굴만큼 아는 것도 많네. 선희 언니. 이런 청년을 어떻게 알게 됐수?”

“거야 뻔하디.”

“우산소? 하긴 나도 거기서 처음 언니를 만났으니.”

여자의 말이 헛돌았다.

나는 손바닥에 난 땀을 닦아내며 다시 물었다.

“뚜엣이라는 분은……?”

“아, 뚜엣. 내 엄마지. 아, 진짜 엄마는 아니고. 엄마나 마찬가지라서. 블랙데이 터졌을 때 내가 열한 살이었거든. 그때 엄마, 그러니까, 내 친엄마 돌아가시고 내가 멘탈 터졌거든. 그때 엄마, 그러니까, 뚜엣 엄마가…….”

알 것 같다.

이 여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남지호가 말했던 ‘은인’이 누구인지.

그 은인이 어떻게 되었다고 했더라. 그 은인이…….

‘진작 짐작하고 있었잖아. 이제 와서 왜 이러는데.’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른 듯 가슴이 아팠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그 분, 뚜엣이라는 분은. …돌아가셨나요?”

“그렇게 됐지. 진짜 좋은 분이셨는데.”

“…베트남 분이신가봐요.”

“이야. 젊은 사람이 그런 것도 알어? 언니! 요즘에도 베트남을 아는 사람이 다 있네?”

“제가, 찾는 사람이 있어서요. 혹시 그분이 아니실까 해서…….”

“뚜엣? 찾는 사람은 아닐 텐데. 엄마가 아는 사람은 내가 다 알어. 내가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잊을 리 없지.”

다시 싸움터로 돌아가려는 듯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공선희가 문득 끼어들었다.

“남쪽 동무. 얘가 그 새살 시작하면 밤을 새도 부족할 거라우. 그거이 야가 가장 좋아하는 새살이디.”

“오늘 밤 이곳에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밖이 난리통이라…….”

여자와 공선희가 시선을 교환했다.

공선희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얼마든지. 이야. 이런 얼굴은 천 년이라도 보겠네. 어차피 철이도 자니깐, 여기 1층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가. 이부자리는 허름하지만.”

“자리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아하! 뚜엣 얘기가 궁금하구나? 그래, 그게 있잖아…….”

.

.

.

이야기를 마친 여자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눈두덩이가 벌겋게 부은 남지윤을 보며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코끝이 찡하게 저렸다.

눈이 시큰거렸다.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수 없이 많은 죽음 중 하나를 우연히 전해 들은, 지나가는 행인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혹은.

예고 없이 엄마의 이름을 발견한,

불확실한 희망에 들떴다가,

그 희망을 단숨에 빼앗긴…….

그런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있을까.

모르겠다.

전혀, 자신이 없다.

나는 시큰거리는 눈을 검지로 눌렀다.

“그… 뚜엣이라는 분께서 KKK단이라는 오해…를 받아 돌아가셨다고요.”

엄마의 마지막은 혈왕이 남긴 기록과 다르지 않았다.

외국인으로 구성된 테러 조직, KKK단.

그 KKK단을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된 살육.

그 살육의 한가운데에서 두 딸을 잃은 남자는 혈왕이 되었다.

남지호는 거짓 정보를 퍼뜨린 염화검제에게 복수하겠다고 나섰다가 내 눈앞에서 죽었다.

“뭐, 그렇지… 그때는 세상이 참말로 험했으니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엄마는 각성자도 아니었다고.”

“그래요. 그렇겠지요.”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또 내뱉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았다.

무엇인가에 가로막힌 듯 가슴이 답답했다.

가까스로 숨을 들이쉰 내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지윤 씨는. 엄마의 복수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까?”

네 오빠 남지호처럼.

그리고, 지금의 나처럼.

남지윤은 복수를 위해 혈귀단에 들어간 남지호를 말리겠다고 장벽까지 넘었다.

하지만 남지호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그 남지윤이, 희미하게 웃었다.

“혈귀단처럼?”

“…네.”

“남쪽에서 온 미남자 동무가 혈귀단을 쫓고 있다는 소문이 장마당에 파다하더라고. 어때, 그 씹새끼들은 어떻게 됐어?”

“전멸했습니다.”

남지윤은 남지호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흑귀대의, 남지호의 동료가 알려 주었다고 했다.

“혈귀단 새끼들… 그래, 잘됐네.”

남지윤은 씁쓸하고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으로, 그가 중얼거렸다.

“복수…….”

“네. 복수.”

엄마를 해한 자.

거짓 정보를 믿고 자신의 혐오를 마음껏 발산한 자. 그런 모든 사람들.

그리고.

거짓 정보를 퍼뜨려 혐오를 양산하고, 그 혐오가 만들어낸 괴물을 안산성에서 거꾸러뜨리고, 그 보상으로 자신의 명성과 현재의 권력을 손에 넣은…….

“하하.”

남지윤이 소리를 내서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잠시 후 웃음을 멈춘 남지윤이 가만히 말했다.

“복수? 그걸 해서 어디다 써. 다른 누구보다도, 엄마가 가장 싫어할 텐데. 우리 엄마가 자주 하던 말이 있었거든.”

“…뭐였나요, 그게.”

나는 남지윤이 할 말을 짐작했다.

내가 분노에 씩씩거릴 때마다 나를 끌어안으며 엄마가 속삭였던 말.

‘지혁아. 사람에게는 각자의 지옥이 있단다.’

남지윤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오래전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눈빛으로 그가 말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지옥이 있다고 했지.”

그 뒤에 이어지는 말도 나는 알았다.

나는 숨을 삼키며 내 엄마를 그리워하는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지옥을 만든 것도 사람이고.”

엄마는, 아빠가 없다고 놀리는 아이들과 싸우고 올 때마다 내 손을 잡으며 말하고는 했다.

-지혁아. 사람은 각자의 마음속에 지옥을 하나씩 지니고 있단다. 그 지옥을 만든 것도 사람이지만…….

“그 지옥을 없애는 것도 사람이야.”

-그 지옥을 없애는 것도 사람이야.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하지만 엄마의 거칠고 따뜻한 손이 내 가슴팍을 매만지는 감촉은 아주 좋아했다.

엄마가 내 가슴팍을 매만지며 말했다.

-자. 이렇게 하면 지옥이 없어진단다. 없어져라, 없어져라, 없어져라…….

‘…없어져라, 없어져라, 없어져라.’

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말을 마친 남지윤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이런 엄마가, 복수? 그럴 리가 없잖아. 지혁이 오빠… 아, 엄마 친아들이야. 1차 블랙데이에 죽었거든.”

“그것참… 안됐네요.”

“그렇지. 이상하게 좋은 사람은 빨리 죽는 거 같더라니까. 지혁이 오빠가 살아 있었으면 우리 오빠가 그렇게 미친놈이 되도록 두지는 않았을 텐데.”

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맞장구를 치는 경험은 아마 그리 흔하지는 않을 거다.

“그런가요.”

“응. 그 오빠가 성격이 어지간해서… 아닌가? 오히려 지혁이 오빠가 혈귀단에 들어갔을까? 아, 모르겠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아하핳! 당연하지! 네가 어떻게 알어?! 하하하!”

남지윤의 MBTI가 엔프피였나.

제 허벅지를 내리치며 웃은 남지윤이 겨우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지혁이 오빠가 죽고 나서 엄마가 고아들을 돌보셨거든. 엄마가 죽을 애들 여럿 살리셨지. 나도 그렇고.”

이후 엄마가 죽고, 혈귀단에 들어간 미친 오빠를 말리기 위해 북쪽까지 쫓아온 남지윤은 ‘뚜엣의 뜰’에서 고아들을 돌보는 혁명가가 되었다.

‘엄마가 쓸쓸하지는 않았겠어.’

엄마에게 남지윤과 남지호라는 가족이 있어 다행이었다.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얼마든지 가족이 될 수 있으니까.

나에게도 가족이 있지.

계룡문. 은영단.

특히 최지수와 김강…….

응? 김강산?

‘…젠장. 김강산이랑 서은창!’

눈물이 쏙 들어갔다.

엄마의 삶에 정신이 팔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깜박 잊었다.

나와 헤어진 것이… 어… 벌써 두 시간 전.

서은창이라면 몰라도, 김강산이 숙소에서 얌전히 기다릴 애가 아닌데.

‘망했다.’

벌떡 일어나는 나를 남지윤이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어디 가?”

“저, 애들 좀 더 데리고 올게요!”

“응?”

***

백색의 불길을 휘감은 대도가 쌍날검과 격돌하는 순간, 쌍날검이 허무하게 부러졌다. 뒤이어 대도가 상대의 어깨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동시에, 붉은 머리의 사내가 쓰러지는 검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목줄기에 도날을 바싹 가져다 댄 사내가 어깨에 피를 흘리는 검수를 치켜들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날릴 듯한 흉흉한 기세였다.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원주성의 순찰단원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야. 길 터.”

“…혁명당의 간나새끼가!”

붉은 머리의 사내, 김강산이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혁명당이고 씨발이고 나 그거 아니라고.”

“개소리!”

“혁명당 그거 아니고. 나 계룡문의 좌룡이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너네랑 싸울 생각 없어. 계룡검룡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 있나?”

순찰단원들이 웅성거렸다.

서은창이 얼른 앞으로 나서며 설명을 덧붙였다.

“엄청 잘생기고, 엄청 성질 더럽고, 검술이 인간 같지 않은 사람이요. 키 180 정도에 호리호리한 몸매에, 검은색 검집을 차고 있는데요. 위에는 키메라 힘줄로 짠 티셔츠를 입었고 바지는… 산아?”

“오크 가죽 바지. 검은색.”

“예.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보신 분?”

서은창은 친근해 보이도록 웃으려 애를 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등 뒤에 선 김강산에게서 서늘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사형… 대체 어디 갔냐고요. 이러다가 산이가 사람 죽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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