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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88화 (88/122)

88화.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다 (1)

서은창은 울고 싶었다.

서림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하던 살기.

탐색술로 느끼는 마력에 비하면 너무 흐릿해서 잘 감지되지도 않던 살기가 너무나 선명하게 감각되고 있었다.

자신의 등 뒤에 선 김강산에서 나오는 시퍼런 살기가 주변으로 마구 퍼져나가고 있었다.

울고 싶은 기분으로, 서은창이 다시 물었다.

“안 잡아먹어요. 우리 그런 사람 아니랍니다. 혹시 보신 분 있으시면 말씀만 해 주세요.”

한 명이 주춤주춤 손을 들었다.

“어… 쩌기 장마당 서쪽에서 그런 사람이 보위대와 전투를 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강산이 잡고 있던 순찰단원을 내던지며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야! 강산아!”

다급히 김강산을 부르던 서은창이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으며 물었다.

“그게 언제예요?”

“한참 되었을 꺼구만요. 두어 시간 전인가…….”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그리고 우리 진짜 혁명당 아니에요.”

꾸벅 인사를 한 서은창이 김강산의 뒤를 쫓아 서둘러 달려나갔다.

“같이 가자고! 산아!”

김강산은 벌써 한참 멀어져 있었다.

있는 힘껏 속도를 높이며 서은창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왜 저렇게 급해?’

산발적인 전투를 피해 서은창과 김강산이 숙소에 도착했을 때 방은 비어 있었다. 왔다간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김강산의 낯빛이 파드득 굳었다.

-형. 탐색술 써.

-어차피 사형은 탐색술로 잡히지 않는데?

-마력 가장 세게 튀는 곳 찾으면 돼.

타당한 추론이었다.

그의 사형이 가는 곳이 언제나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달려간 곳에서는 격렬한 전투의 흔적만 있을 뿐 서림은 없었다.

그 뒤에 향한 곳에서는 성주의 경호단과 혁명당이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뿐 역시 서림은 없었다.

그 후로도 사흘 굶은 구울처럼 뛰어다녔으나 아무 곳에서도 서림을 찾을 수 없었다.

-산아. 그냥 숙소 가서 기다리자. 사형이 어련히 알아서 찾아오겠지.

-…형은 그렇게 하든지.

김강산이 비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드러난 얼굴이 창백했다.

서은창은 그 절박함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혈왕을 죽이고, 그 혈왕에게 강림했던 어마어마한 마력을 지닌 존재까지 소멸시켰다. 서은창은 그 광경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 어려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의 재앙 백호를 소멸시킨 것도 사형이라고 했다. 심지어 김강산은 그 자리에도 있었다고 했는데.

‘왜 저렇게 걱정을 해?’

-사형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 또 지나가다가 어디 싸움판에 끼어들었나 보지.

-…형은 몰라서 그래.

-내가 뭘 몰라. 산이 네가 모르는 거 같은데. 사형이 세계관 최강이라고. 원산성 각성자들 중에 사형한테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도 없어. 이야, 나는 궁금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사형한테 상처낼 수 있는지.

서은창이 과장된 목소리로 주절거렸다.

김강산은 그 문장들을 귓등으로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다.

림이 형이 얼마나 강한지. 아마 자신만큼 잘 알고, 자신만큼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민주로 협박을 한다면?’

물론 어떻게든 빠져나올 거다.

하지만 정말로 어려운 상황에서, 오민주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협박한다면?

아니.

오민주까지도 필요 없다.

‘지나가는 일반인을 아무나 잡아다가 인질로 써도, 림이 형에게는 효과가 있을 테니까.’

그게 서림의 약점이었다.

서림에게 그토록 큰 약점이 있다는 걸 자꾸 잊었다.

평소에 전혀 그런 인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가, 괜히 형을 재촉해서… 내가, 또… 형을 위험하게…….’

오민주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그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자신이 어렸을 적 그러지 못했던 만큼.

하지만 그 과정에 서림이 다친다면.

팔이라도 잃는다면. 손가락 하나라도, 손톱 하나라도 잘못된다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아무것도.’

김강산이 이를 악물며 바닥을 걷어찼다.

빗줄기를 뚫고 솟아오른 한 줄기 섬광이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빙결 속성 공격과도, 백염과도 다른 그 빛.

더 희고, 더 환한……!

“형이다!”

김강산이 방향을 바꿔 달리기 시작했다.

***

나는 팔짱을 낀 채 무릎을 꿇고 손을 든 두 녀석을 노려보았다.

“어이구. 아주 광고를 해라. 계룡문 왔다고 플래카드라도 붙이지? 그냥 가슴팍에 이름표 붙여! 계! 룡! 좌! 룡!”

“어! 그거 완전 좋다! 이번에 내려가면 현아 누나한테 해달라고 할까? 키메라 힘줄로 하면 간지 쩔겠지?”

내가 오른손을 슬며시 들어 올리자 김강산이 목을 움츠리며 헤실헤실 웃었다.

두 놈은 내가 자리를 비운 고작 두 시간 동안 원산성을 아주 열정적으로 들쑤시고 다녔다.

-어엇? 동무 계룡검룡이디요! 계룡좌룡이 찾던!

-…네?

-붉은 머리 화염능력자랑 키 큰 검수의 일행 아닙네까?

얼마나 들쑤셨는지 그런 소리를 다섯 번도 넘게 들었다. 혁명당이고 순찰단이고 일반인이고 가리지도 않고.

그래.

김강산이야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애새끼 개념 없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근데…….

‘서은창 네놈은 대체 뭐 하고 있었냐고.’

조선국이랑 혁명당 싸움에 끼어들지 않으려 하는 이유까지 기껏 다 얘기해 줬더니만.

내가 서은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서은창놈이 슬며시 외면했다.

“애새끼가 미쳐 날뛰면 형이 돼서! 말려야지. 그걸 가만히 놔두냐? 엉?”

“헤헤. 사형. 제가 가만히 놔둔 건 아니고요. 산이가 어디 제 말을 듣나요.”

“형이라는 놈이 그것도 못해?”

“에이, 사형도 참. 센 놈이 형이라면서요. 저 산이랑 비겼잖아요. 형 아닙니다. 우리 친구예요, 친구.”

“맞네! 우리 친구네. 은창… 악! 형아!”

결국 김강산은 대가리를 후드려 맞았다.

그러고도 헤실헤실 웃었다.

김강산이 왜 그랬는지는 뻔했다.

김강산의 눈이 조금 부어 있었다. 내 걱정해서 울면서 빗속을 뛰어다닌 놈한테 화를 낼 수도 없고.

“니들 한 번 더 이러면 진짜 혼난다.”

“사형. 이미 아주 많이 혼났는데요. 때린 사람은 기억 못 한다더니. 저희 열일곱 대씩 맞았습니… 아니요.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사형.”

서은창이 굽신거리며, 김강산이 헤죽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근데 형. 계룡문이라고 얘기하면 왜 안 돼? 내가 계룡좌룡이다, 내 형이 그 대단한 계룡검룡이다, 이걸 왜 얘기하면 안 되냐? 나 진짜 이름표 붙이고 싶은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가 이마를 짚었다. 서은창이 고개를 저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저 정신머리 없는 애새끼를 어찌할꼬.

‘계룡문의 이름은 숨기고 싶었는데.’

조선국은 외부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파천궁도 정보원 파견을 중지했으니까.

김강산이 들쑤시기 전까지는, 원산성의 능력자 누구도 내 얼굴을 보고 계룡검룡이라 부르지 않았으니 아마 사실일 터.

하지만 모르는 일이다.

조선국과 계룡문 사이에는 장벽과 지뢰 지대가 놓여 있지만, 그래서 쉽게 대규모 공격을 시도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조선국이 계룡문을 적으로 여기면 내가 피곤해지겠냐, 안 피곤해지겠냐?”

“조선국 별 거 아니던데. 쳐들어오면, 그까짓 것. 박살내면 되지.”

“…말을 말자.”

30년 동안 유지된 왕국이다.

원산성의 능력자들은 고만고만한 실력이었으나 보위대는 그보다 몇 수는 위였다.

그 대장놈은 길드장 정도의 실력자로 보였다. 놈들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죽어라 달려들었으면 아마…….

뭐. 그쪽이 다 뒈졌겠지만.

무엇보다,

동료는 꼭 다다익선(多多益善)이 아니기도 하지만, 적은 분명히 소소익선(小小益善)이다.

“근데요, 사형. 뭐가 문젭니까. 오늘 강산이가 좀 날뛰기는 했지만 아무도 안 죽였어요. 그리고 조선국이랑만 싸운 건 아녜요. 혁명당도 공평하게 팼다고요. 우리는 엄연히 중립이었다, 이 말입니다.”

“맞아, 형아.”

“조선국 입장에서는 원산성의 반란을 잘 진압했고, 혁명당은 제 코가 석자인데요. 설마 그 정도 부상 입었다고 복수하겠다면서 계룡으로 쫓아 내려오겠습니까?”

“맞아, 형아.”

“사형은 참 보기와 다르게 걱정이 과해요.”

“맞... 악! 왜 때려?!”

…걱정이 과하다, 라.

나 역시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건 당연하다.

계룡문이 나에게 그만큼 소중하니까.

김강산이 오늘 펜타킬할 기세로 미쳐 날뛴 것도, 최지수가 항상 나를 걱정하느라 안달복달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겠지.

서은창이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우리, 내일 아침에 돌아가기로 했잖습니까. 여기 사람들도 계룡문 같은 이름은 곧 잊어버릴 걸요.”

걱정하던 기생충 문제는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

제 계약자의 위기 상황에서 튀어나오니, 뜬금없이 등장하지는 않을 터.

그래서 돌아가기로 했었지.

내일 성주한데 들러 내 보도를 찾아온 뒤에.

그랬었는데 말이지…….

“…이 판에 관여하실 생각입니까, 사형? 언제는 둘 다 똥밭에 구른 개새끼라더니?”

그랬었지. 그 생각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너네 생각은 어떠냐.”

“나는 콜!”

김강산이 재빨리 콜을 외치고는 망충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형. 우리 어디 편이냐? 조선국도 거악인데, 혁명당도 거악이라며?”

“둘 다 거악이지. 최악과 차악 정도의 차이랄까.”

“아하!”

김강산이 무릎을 쳤다. 전혀 못 알아들은 표정인데.

서은창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저도 찬성입니다. 하지만 그자들, 리치를 끌어들인 자들의 처분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게 일부의 단독 행동이 아니라 혁명당 전체의 뜻이었다면 저는 반대…….”

“야. 나를 뭘로 보고.”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 내 사제님이.

***

한수길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침실로 들어섰다.

그의 아내, 위대하시고 령도하시는 국왕 폐하께서 사랑해 마지않는 안미령 공주마마께서는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깨어 있었다.

한수길이 얼굴에 만면에 웃음을 띠며 안미령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그가 안미령을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공주. 먼저 주무시디 않고.”

“성주께서 귀성하지 않으셨는데 내 어띠 잠을 자겠습네까.”

“어르나들은?”

“벌써 자디요. …어띠, 반란은 진압되었습네까?”

“아무 걱정 마시오. 반동분자들을 모다 체포하였으니.”

“…도망친 이들이 있다고 들었습네다만.”

“제까짓 놈들이레 숨었다 해도 공주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수레. 내일 제 동지들을 공개 처형하는 자리에 나타날 거외다.”

만약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대로 좋다. 혁명당이 동지를 그리 쉽게 버린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 되니까.

앞으로 원산성에서 혁명당을 따르는 머저리들은 다시 볼 수는 없을 터.

한수길은 안미령의 부드러운 손을 가만히 매만졌다.

이 순진한 공주마마 덕에 자신이 이 자리에 올랐다.

연줄도, 무력도, 모두 이 공주마마 덕분에 얻었다.

수백 명 보위대원 중 하나일 뿐이었던 자신이 5개 주성 중 하나인 원산성의 성주가 된 것은 이 순진하고 마음 여린 공주님께서 호위대로 배속된 자신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수길은 안미령을 단 한 순간도 편안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그녀의 앞에서는 언제나 불편했고, 조심스러웠으며, 위축되었다.

그는 그럴 때마다 다른 여자를 찾았다.

자신의 말에 고개를 처박고, 무릎 꿇을 순순한 여자들.

그 여자들 중 혁명당원의 첩자가 있었던 것은 불운이었고, 동시에 행운이었다.

‘내일 아침 정아년을 처형하고 나서 나머지 년들도 모두 처리해야갔어. 그리고 다시는 첩을 두지 말아야디.’

한수길은 몇 번이나 했던 다짐을 반복하며 안미령의 손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자신이 첩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국왕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성주의 자리는 물론이고 어깨 위 모가지를 보전하기 어려울 터였다.

그리고, 불안 요소가 남아 있었다.

정아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남쪽에서 올라온 잘생긴 젊은이.

오늘 새로 들어온 정보로는 계룡문이라는 조직의 계룡검룡이라고 했다.

자신의 염려와 달리, 반란군은 아닌 듯했지만…….

리태연을 따라 그곳에 남았던 방위단원들의 이야기로는 일으키는 자를 손쉽게 사냥했다고 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위였다.

불안해하는 안미령을 달래 침대에 눕힌 한수길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계룡검룡이라는 상급능력자의 입을 다물게 만들 방법을 고민했다.

‘뭣보다 뒤처리는 깔금허게 해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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