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다 (2)
한수길은 몇 가지 방법이 떠올렸으나 썩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자에게 진룡보도를 주기로 약조했었다. 방패도 없이, 일으키는 자의 사냥에 성공할 리 없다는 오판에서였다.
그자를 오래 보지 않았지만, 그런 약조를 잊을 자는 분명 아니었다.
보위대가 떠나기를 기다려 성에 난입해 보도를 내놓으라 소란을 벌일 게 확실했다.
‘이 아까운 것을. 왕국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보도를.’
한수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암살자의 목록을 떠올렸다.
몇몇 암살자의 이름을 떠올렸으나 역시 그자를 확실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릿속을 떠돌던 이름을 모두 지우자 하나의 이름만 남았다.
조선국 최고이자 최악의 암살자, 독황(毒皇).
독황에게 의뢰를 맡기려면 원산성의 1년 치 예산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계룡검룡이라는 자가 남쪽으로 내려가 버린 뒤라면 출장비 명목으로 몇 배의 돈을 요구할 게 뻔했다.
‘그래도 일 처리는 깔끔허니까니.’
마음을 정한 한수길이 안미령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그자가 오면 순순히 보도를 건네고, 좋게좋게 남쪽으로 내려보낼 작정이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독황에게 암살 의뢰를 하면…….
‘보도는 수급과 함께 회수하면 그만이디.’
하지만, 그가 남쪽에서 온 상급능력자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
“계 동무. 참으로 고맙네. 내 이 은혜를…….”
“절대 잊지 마시고요, 아주 오래 갚으세요.”
공성희가 희미하게 웃었다.
뚜엣의 뜰로 데려온 김강산이 어쩐지 으스대는 말투로 ‘계룡검룡’이라고 나를 소개한 뒤로, 공 동무는 내 성이 계씨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면 김강산은 계 룡좌룡인가. 최지수는 계 룡우룡?
음… 정정해주기에는 귀찮다.
“그럼, 당연하디. 어띠 잊겠는가. 당연하고말고.”
공선희는 내 전제조건을 쉽게 통과했다.
-리치 있잖아요. 여기 말로는 일으키는 자. 그 괴물이 원산성에 나타난 건 우연이 아니에요.
-…거럼, 누군가가 일부러 끌어들였단 말인가? 그런 끔찍한 짓을 대체 누가 했단 말인가?
-당신네 혁명당원이요.
물론 처음에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겠지.
하지만.
-언니. 사람 속은 모르는 거야. 사람 수 만큼의 지옥이 있어.
남지윤이 가만한 목소리로 공선희를 설득했다.
결국 공선희는 남지윤에게 설득당해 생존한 혁명당원들이 모여 있던 은신처를 찾아갔다.
100여 명의 혁명당원이 몸을 숨긴 은신처는 뚜엣의 뜰에서 멀지 않았다.
공선희가 들어가자 피떡을 한 채 늘어져 있던 사람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권한 없는 당원이라더니 역시 개구라였다.
그 정도 무력을 가진 이가 이런 세상에서 권한이 없을 리가 없지.
심문인지 탐문인지는 순식간에 끝났다.
인적 없는 산중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얌전히 생활하던 조신한 리치를 끌어낸 것은 혁명당 정치국장과 부국장이 주도한 짓이었다.
공선희가 만들어낸 철창이 단번에 둘의 심장을 꿰뚫었다.
화끈한 노인네였다.
공선희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알려주어 고맙소.
-뭘요.
-…계 동무는 이제 남쪽으로 돌아가오? 듣자하니 계룡문이라는 곳에서 왔다더니.
-뭐, 슬슬 내려가야지요. 집에 일도 있고.
-…한 번만 우리 혁명당을 도와주면 안 되겠소? 붙잡힌 동지들, 동지들의 탈출만 도와준다면…….
나를 응시하는 우울한 시선에서 한 가닥 기대가 엿보였다.
언제 그 소리가 나오나 했는데.
남지윤에게 이미 간절한 부탁을 받았다.
나를 끌어들이려고 오민주를 남지윤에게 맡겨놨나 싶을 정도였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공선희가 머리가 그렇게 빠릿빠릿 돌아가는 편은 아니었다.
-내일 아침 혁명당원들을 모두 처형할 거야. 정치국장과 부국장이 잘못된 행동을 했지만, 혁명당이 모두가 그런 건 절대로 아냐. 너 엄청 강하다면서… 그 사람들을 구하는 것까지만 도와주면 안 될까… 정말, 정말 미안한 부탁이지만… 이렇게 북쪽에서 남쪽 동무를 만난 것도 큰 인연인데.
인연이지.
그럼. 인연이고말고.
남지윤 너는 이게 얼마만한 인연인지 결코 모르겠지만.
나는 공선희의 부탁을 수락했다.
성주군과 혁명당 둘 모두 똥밭에 구른 개새끼라는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택을 포기하기보다는 차악이라도 선택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믿을 만한 사람이 있으니까.’
엄마의 뜻을 이어받은 남지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제 아이들처럼 돌보고, 그것이 복수보다 더 나은 일이라 여기는 남지윤이 혁명당에 있으니까.
-포로 빼내는 것까지. 거기까지만 도와드릴게요.
-고마우이! 너무 고마우이… 계 동무.
나는 실패한 혁명가의 음울한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어 정면을 향했다.
비는 그쳤으나 바닥은 여전히 축축했다.
회색으로 젖은 건물의 벽에 옅은 주황빛이 비춰들고 있었다.
“감사는 이만 됐고요, 마력은 괜찮으신지?”
“거의 회복되었네. 여차허면 자네가 준 약물도 있으니.”
“준? 저기요. 말 똑바로 하실래요?”
“거래, 빌려준 약물이디. 내 잊디 않겄네.”
이 할매가. 떼먹기만 해봐라.
아주 혁명당이고 뭐고 다 개박살 나는 거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방위단이 지키는 성벽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
이른바, ‘대탈출’의 스타팅 포인트다.
공선희가 이끄는 10여 명의 혁명당원이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우리도 가자.”
내 발이 소리 없이 바닥을 디뎠다.
김강산과 서은창이 내 등 뒤로 바싹 따라붙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본성.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사형. 공주님 납치라니요. 제가 혁명당을 돕자고 할 때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러면 뭐, 성주놈의 악행을 하나하나 나열하면서 모가지 베는 거라도 상상했냐? 광장에 모여든 십만 명의 사람들이 너한테 막 환호하고?”
“아니, 꼭 환호까지는 아니지만…….”
서은창이 심란한 표정으로 뒷목을 긁었다.
애새끼 생각하는 수준이 그렇지.
혁명.
얼마나 멋진 말이냐, 이거야.
약자들이 힘을 모아 억압하던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거리로 뛰쳐나와서 꽃 던지면서 만세 부르고. 환호하고.
하지만 그 뒤는?
난장판이다.
프랑스 혁명 뒤에 나폴레옹 제국이 나왔고, 소련의 공산당 혁명 뒤에 스탈린이 나왔다.
안 만나봐서 모르지만, 분명히,
“조선국 세운 국왕놈도 지가 혁명했다고 할 걸.”
“…설마요.”
서은창이 현실을 부정하다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무튼 눈치 빠르고 머리 좋은 놈은 제 인생이 피곤하다.
김강산 봐. 얼마나 맘 편하게 사냐고.
“왜? 난 공주님 납치 좋은데. 누구 구하고 지키는 것보다 훨씬 재밌는데?”
이놈은 나 안 만났으면… 생각을 말자.
우리는 성방위단이 철통같이 방어하고 있는 성벽을 가뿐히 뛰어넘어 곧 본성 앞에 다다랐다.
“준비됐냐?”
“오오케이.”
“옙. 사형.”
내가 거세게 바닥을 걷어차자, 김강산이 화염구를 쏘아 올렸다.
어슴푸레한 새벽의 어둠을 뚫고 하늘 높이 솟아오른 백색의 화염구가 거센 폭음을 내며 폭발했다.
“습격입네다!”
“칩입자! 어디냐!”
어디긴. 네 머리 위지.
내 발이 허공으로 떨어지기 직전, 서은창이 바위를 내던졌다.
바위가 정점에 다다른 순간 그것을 걷어찬 내 몸이 다시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허공답보(虛空踏步).
본성의 벽 한 번 차 주고.
다시, 허공답보(虛空踏步).
본성의 벽 또 한 번 차 주고.
다시, 허공답보(虛空踏步).
내 몸이 순식간에 본성의 벽을 타고 올라 성 꼭대기의 뾰족한 첨탑 끄트머리에 닿았다.
그것을 걷어차며 나는 마지막으로 뛰어올랐다.
200미터가 넘는 높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성 안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몇몇의 보위대놈들이 서은창과 김강산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보위대놈들이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헤 벌리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본성을 방어하던 경호단원들도. 순찰단원들도.
전날 부서진 가게의 벽을 세우려고 이르게 일어난 만두가게 주인도.
이른 새벽 농장 일을 나가려 일어난 농부도.
순찰단 본부에 갇혀 있는 붙잡힌 혁명단원들도.
그들의 가족들도.
모두,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음.… 사실 누가 누군지는 멀어서 안 보이지만.
아마 그렇겠지?
-정체를 밝히라! 어데서 온 간나…….
누군가가 김강산을 향해 외치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었다.
대꾸하는 김강산의 목소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내가 지상과 너무 멀어진 탓이었다.
‘하지만 뭐라고 지껄였을지는 뻔하지.’
어쩐지 웃음이 났다.
새는 웃음을 막지 않은 채 나는 한층 더 기운을 끌어올렸다.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검날을 희게 빛내고 있었다.
그 끝에 맺힌 것은, 적(積)으로 형성한 수백 개의 작은 강기의 구슬들.
서늘한 바람이 뺨을 때렸다.
본성 뒤로 펼쳐진 동해 위로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떠올라 있었다.
주홍색 아침노을을 뚫고, 붉은 태양이 막 바다 위로 그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태양의 낼름거리는 혓바닥이 출렁이는 바다를 핥아 먹었다.
물씬, 짙은 바다 내음이 코를 파고들었다.
동해의 일출이다.
수능이 끝나면, 남지호는 정동진에 가자고 했었다.
그 남지호는 내 엄마의 원수를 갚겠다고 염화검제에게 덤볐다가 죽었다.
엄마는 돌아가셨고, 남지윤은 그 엄마의 이름을 붙인 고아원을 운영하는 혁명당원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숨을 들이마시며, 그 바다를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작은 파공성이 허공을 울리고.
수백 개의 강기의 구슬이 그만한 수의 빛줄기가 되어 새벽의 어스름을 가로질렀다.
빛의 향연 속에서,
나는 진기의 운용에 정신을 집중했다.
검을 떠난 강기들은 회전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세게 회전하며 주위의 외기를 빨아들였다.
삼반공의 4절, 산(散).
내기(內氣)를 흩어 외기(外氣)를 흡(吸)하는,
삼반공 최고의 광범위 기공.
그리고.
‘…비주얼이 끝내주지.’
별똥별의 꼬리처럼 하늘을 가르며 땅을 향해 날아간 강기의 구슬들이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달했다.
폭음은 들리지 않았다.
산(散)은 폭발하지 않고 꿰뚫기 때문에.
팟. 푹. 파앗. 퍽. 캉. 스팟. 컁. 쿵. 찍. 따.
작은 파공성과 함께.
강기 한 줄기가 서은창을 향해 쇄도하던 보위대 부대장의 팔에 격중했다.
잘려나간 왼쪽 팔꿈치를 붙잡으며 다급히 물러서는 놈에게 따라붙으며 서은창이 세우윤윤(細雨潤潤)을 펼쳤다.
또 다른 강기 한 줄기가 김강산의 뒤를 노리던 보위대장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짧은 비명과 함께 주저앉은 놈의 어깨를 향해 김강산이 도를 내질렀다.
노렸던 두 놈에게는 확실한 데미지를 입혔으니 일단 급한 불은 껐고.
저 정도 부상을 입은 상태면 김강산과 서은창이 어느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이지는 말라고 했는데… 뭐. 말은 듣겠지.’
나는 연신 남의 피를 흩뿌리며 활약을 펼치고 있는 내 애들에게서 시선을 떼어내 아래를 향했다.
엄청난 속도로, 내 몸이 본성의 첨탑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첨탑에 꿰인 꼬챙이가 되기 직전.
내 발이 공중을 연속으로 걷어찼다.
중력이 몸을 끌어내리는 힘을 거절하며 연신 허공답보를 시전했다. 떨어지는 속도가 완연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콰아아!
왼손으로 권강(拳剛)을 쏘아내 방향을 바꾸자, 아슬아슬하게 첨탑이 어깨를 스쳤다.
다시 허공답보를 시전하고 연달아 권강을 쏘아냈다.
콰장창!!!
발출된 강기의 반탄력에 방향을 바꾼 내 몸이 드디어 목적지에 착지했다.
기술점수 10점 만점에 100점.
예술점수 10점 만점에… 5점.
내가 객관적인 편이라.
나는 두 바퀴 앞구르기로 깨진 유리 조각을 자연스럽게 털어내며 재빨리 일어났다.
박살난 유리창의 안쪽.
본성의 가장 높은 방, 성주놈과 공주님의 침실에서,
아름답게 번쩍이는 보도를 움켜쥔 성주놈이 매서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