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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90화 (90/122)

90화.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다 (3)

마력을 감추고 은밀히 숨어 있던 공선희가 탐색술을 펼쳤다.

순찰단 본부 주변에 득실거리던 능력자들은 대부분 본성을 지키기 위해 달려갔다. 남은 능력자들은 모두 하급이었다.

조금 전 본성에서 나타난 눈부신 빛줄기, 유성우처럼 쏟아진 그 빛줄기가 본성 주변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 덕택이었다.

사람이 만들어냈다고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대단허이. 참으로 대단해.’

계룡검룡이라는 남쪽에서 온 능력자의 실력이 대단하리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희망이라는 생각으로 염치불구하고 도와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방금 자신이 목격한 무위는 상상초월이었다.

그런 무위를 가진 자는 지금껏 조선국의 국왕 단 한 명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그토록 대단할 줄은 내 미처 상상조차 못했디. 그러니 그리 자신만만했군.’

-그게 작전이라고요? 지금 장난쳐요?

공선희의 포로 구출 작전을 들은 계룡검룡은 못마땅하다는 반응이었다.

-공주를 납치해서, 포로로 잡힌 혁명당원이랑 교환하자고요? 왕이 그 협상에 응할 거라고 생각해요? 진심? 레알?

-그 방법밖에 없다우.

자신 역시 도박이라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탈출만 시킨다고 끝이 아니었다.

붙잡힌 동지들은 분명 왕립에서 특수제작한 마력억제제에 중독되어 있을 터.

그 해독약도 받아내야만 했다.

더불어, 그대로 두면 강제노역형에 처해질 게 분명한 혁명당원의 가족의 안전도 보장받아야만 했다.

-협상 카드가 너무 기운다고요. 이게 통하면 그게 협상인가? 협박이지.

-계 동무는 잘 모르디만, 국왕이 둘째 공주를 특히나 사랑한다네. 아마 버리디는 않을 걸세.

-사랑, 좋지. 좋은데…….

계룡검룡이 가볍게 어깨를 추키며 대꾸했다.

-버리지 않는다고 협상에 응한다는 보장은 없다고요. …아, 내가 여기서 뭐하냐. 최지수 마렵다, 진짜.

공선희는 이마를 짚는 계룡검룡의 뒷말을 못 들은 척 외면했다. 이어진 소리는 사실 이해도 안 갔다.

눈치를 살피던 계룡검룡의 사제라는 능력자가 다행히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만약 왕성이 이 협상에 응한다면 반감을 가진 이들에게 좋은 신호가 되겠지요. 왕족만 납치하면 무조건 반란이 성공한다는 신호요.

-그렇디.

-예. 왕성에서 그걸 생각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협상에 응하는 척하면서 다른 수단을 동원할 가능성이 높아요.

-…다른 수단이라면?

-국왕을 비롯한 보위대의 최고 고수들이 잠입해 공주를 탈환할 수도 있겠고, 혁명당의 당 간부들을 체포해 그들과의 협상을 요구할 수도 있겠고요. …이런 말이죠, 사형?

그 설명은 잘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타당했다.

-이제 상황 파악이 좀 되실?

-알갔다레. 허디만… 내래 동지들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소.

공선희가 결연하게 대답했다.

-누가 포기하래? 내가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계룡검룡이 비스듬히 한쪽 입술을 들어올렸다.

-카드가 안 맞으면, 맞추면 되지.

그렇게 말하며 계룡검룡이 꺼낸 작전은 참으로 황당했다.

계룡문의 세 능력자가 본성을 공격할 테니 순찰단이 본성으로 몰려오면 그 틈을 타 붙잡힌 동지들을 구출하라니.

-본성은 보위대가 방어하고 있소. 순찰단이 움직일 리가…….

-할머니. 우리 형 모르죠? 모르면 가만히나 있든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악! 형, 왜 때려!

-너야말로 노인 공경 모르냐? 엉? 누가 말 그딴 식으로 하래?

‘본인이야말로 노인 공경이 아니라 노인 공격을 하시디 않았수.’

물론 공선희는 그 말을 꺼내놓지 않을 정도의 인내심은 갖추고 있었다.

붉은 머리의 날카로운 인상의 능력자가 머리를 움켜쥐며 알았썽, 형아, 잘못했엉,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광경을 보며 공선희는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아무튼 그건 내가 알아서 하고. 포로 구출, 가능하죠?

-…당연히 가능허디.

사실 보위대가 순찰단을 도우러 달려오지 못하게 발만 묶어 준다면 포로 구출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계룡검룡의 사제가 번쩍 손을 들었다.

-가족은 어찌합니까, 사형?

-어차피 순찰단 본부 잠입할 수 있는 애들은 마력 조절할 수 있어야 되잖아. 나머지 애들이 흩어져서 가족 데리고 나오면 되겠네.

이번에는 붉은 머리의 사내가 손을 들었다.

-성 방위대는? 얘네들 허접이라 일반인 데리고 방위대 못 따돌릴 텐데?

-그거야 보위대 놈들이 싸그리 나한테 몰려오고 나면 니들이 가서…….

거침없이 계획이 세워졌다.

‘계룡문이라는 곳은 대체 어떤 곳이기에……?’

공선희가 반쯤 넋을 놓은 사이 작전이 완성되었다.

완벽한 작전이었다.

계룡검룡이라는 자가 감당해야 하는 위험이 너무 크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형 좀 빡센 거 아니야? 그냥 나는 형한테 붙어 있을래.

-산아. 적당히 해라… 사형한테 대체 뭐가 빡세냐. 객관적으로 보면 보위대랑 성주 목숨이 위험하지.

-됐고, 김강산. 좋게 말할 때 말 듣자. 응?

-…눼. 형님.

짧은 회의는 그렇게 종료되었다.

‘그거이 희생도 자만도 아니었군.’

공선희가 손짓을 하자, 숨어 있던 탈출조가 은밀히 순찰단 본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입자… 으억!”

본부 입구를 지키던 순찰단원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곧, 탈출조가 지하 감옥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

“이거이 무슨 짓이오.”

보도를 움켜쥔 성주놈이 내뱉었다.

꼬올깍.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내 목에서 울린 소리였다.

어쩌겠어, 군침이 도는데.

서늘한 느낌이 전혀 없는 것이, 만년한철(萬年寒鐵)은 아닌데 말이지.

재료가 무엇이면 어떠냐.

어차피 내 물건인 것을.

내가 손을 들어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네, 성주님. 좋은 아침이죠? 약속대로 그거 받으러 왔어요.”

“이 새벽에, 이런 식으로? 진룡보도를 받으러 왔다? 내래  그 말을 믿으라는 거요?”

“뭐, 믿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시고요. 내가 일정이 급하거든.”

“무슨 수작인가. 내래 보도를 주겠다 약조하였네. 어띠 이리 예의도 없이 찾아들어 협박을 하오?”

“그게 말이야. 어제까지는 내가 진짜 보도만 받아 갈려고 했거든요. 근데 사정이 좀 바뀌었어요. 그래서 공주님도 좀 모셔 가려고.”

이번에 내가 맡은 배역이 용사가 아니라 공주님을 납치하는 나쁜 용이라서 말이지.

나는 예의 바르게 용건을 밝혔으나,

“역시 반동 분자였군. 내래 그 제안은 사양하겄소.”

차갑게 거절당했다.

“그게, 성주님은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제까지는 반동 분자가 아니었거든요. 근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이게, 사람 일이 모르는 거더라고. 내가 오래 살아도, 이게 참.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더니.”

한수길이 얼굴을 구겼다.

“대체 남쪽 동무가 왜 조선국에 일에 관여허오? 지금 물러나면 내 폐하께 아뢰디 않으리다.”

“그놈의 폐하. 너네 북쪽 동무덜은 다른 이름 내세우디 않으면 말을 못 하디? 세 살 박이 어른아도 니보다는 났갔디. 거저 자신의 일은 자신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법이라우, 북쪽 동무.”

구겨졌던 한수길의 얼굴이 이내 제자리를 되찾았다.

놈의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할 말을 찾고 있는 눈치였다.

내가 그 표정을 한두 번 봤겠니.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다.

바깥에서 성을 지키고 있던 보위대가 올라올 때까지.

그럴 줄 알았다.

첫 만남부터 꽤나 조심성이 있어 보였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해 상대도 안 되는 상대방에게 덤벼들지는 않을 만한 놈.

그래서 이 작전이 가능하리라 확신했다.

화려한 등장.

맹렬한 전투.

긴박한 대치.

이 대치는 더 길어질 필요가 있었다.

빼내야 할 인간이 한둘이 아니라서.

‘이쯤이면… 공선희가 이끄는 탈출조가 도착했을 거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 휘앵앵 바람이 불었다.

습기가 묻은 바람 사이로 은은한 폭음이 들려왔다.

탈출조가 잠입한 순찰단 본부 방향이었다.

포로로 잡힌 혁명당원들이 그곳에 잡혀 있었다.

날이 밝으면 성민들을 광장에 모아 놓고 그들을 처형할 예정이었다.

공포로 지배하는 일이 이렇게 어렵고 피곤하다.

도망 못 치게 마력억제제 투약해야지, 감옥에 가뒀으니 지켜야지.

거기 들어가는 품이 얼마냐고.

나라면 죽일 놈들, 진작에 모가지 날렸다.

‘그 덕에 구출할 기회가 생겼지만.’

공포 정치, 땡큐베리 감사다.

한수길의 시선이 유리창이 박살난 창문을 향했다가 곧 나에게 돌아왔다.

한결 여유로워진 얼굴이었다.

“성동격서로군. 허긴, 아무리 자네가 상급 능력자라도 고작 셋만으로 보위대를 상대하기는 불가능하갔디.”

…그 보위대 내가 몇 시간 전에 붙어 봤는데요. 소식이 좀 느리시네요.

“에이. 성동격서라니요. 그럼 내가 고작 소리만 지르다가 나갈까봐? 성주님 아직 나를 모르시네. 거, 인터넷이 없어서 그래. 옛날이었으면 계룡검룡, 검색하면 100억 뷰 영상 수두룩 빽빽했하게 떴을 텐데.”

“실력은 뛰어나디만 자신을 과신하면…….”

스파앗!

월영검의 검날이 놈의 문장을 잘라냈다.

아슬아슬하게 검기를 회피하는 동작이 예상보다 빨랐다.

놈의 마력이 단번에 증폭한 탓이었다.

‘북쪽에도 마력증폭제가 있겠지.’

그쯤이야 진작 예상했고.

어깨를 뒤채 월영검의 공격을 회피한 놈이 무엇인가를 내던졌다.

그것을 향해 검을 내리긋자,

작은 폭발음과 함께 뿌연 연기가 내 주변을 가득 메웠다.

형태는 암독무를 닮았지만,

크응. 킁킁.

암독무는 아닌데.

놈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지금까지 중 가장 호기로운 목소리였다.

“하핫! 왕립연구소에서 개발한 축능무의 맛이 어떠냐!”

“…그게 뭔데?”

한 모금 들이마셨으나 어떤 느낌도 들지 않는다.

“괜히 애쓰디 말라.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네놈의 마력은…….”

아하.

마력억제제구나.

하도 신경을 안 쓰고 살았더니 완전히 잊었다.

나는 놈이 지껄이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오른발을 내디뎠다.

놈이 황급히 보도를 휘둘러 복부를 노린 월영검을 가까스로 방어했다.

“마력이……?!”

나라면 지껄일 사이에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를 텐데 말이지.

놈의 보도와 부딪힌 월영검이 반원을 그리며 튕겨나갔다.

활짝 열린 어깨를 거세게 휘두르자,

카캉!

놈의 보도가 다시 검날을 가로막았다.

날카롭게 벼린 검기에도 흠집 하나 없는 좋은 도다.

‘아주 좋아.’

놈이 당황을 감추며 뒤로 두 걸음 후퇴했다.

전열을 가다듬을 생각이겠지만.

‘나는 기다려줄 생각이 없거든.’

아래에서 올라오던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조금 전부터 사라졌다.

그 대신, 기감의 그물에 보위대원들이 가까워지는 느낌이 선명하게 잡혔다.

침입자를 해치우기 위해, 김강산과 서은창을 따돌리고 보위대원이 모두 본성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들이 지켜야 하는 0순위는 공주와 그 자식들이니까.

보위대장의 판단은 옳다.

침입자는 단 한 명.

그 침입자를 빠르게 해치우고 다른 곳을 수습하면 된다는 판단은 합리적이다.

‘…그 침입자가 내가 아니었다면, 말이지.’

나는 깊숙이 왼발을 내딛으며 물러서는 성주놈에게 따라붙었다.

놈이 재빨리 왼손을 내밀었다.

증폭한 마력만큼 두터운 빙벽(氷壁)이 순식간에 내 앞을 가로막고,

동시에 공중에서 생성된 얼음창이 내 정수리를 노리며 떨어져 내렸다.

등 뒤에서 시작된 서늘한 냉기가 단번에 등줄기를 파고들었다.

물통도 없이 만들어낸 빙결 공격치고는 대단한 수준이다.

어제 내린 비로 공기 중에 습기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도 있겠지.

하지만.

‘어림도 없지.’

끌어올린 호신강기를 응축해 터뜨리자 등줄기를 덮은 얼음이 작은 파열음을 내며 폭발했다.

삼매진화를 일으켜 몸속에 파고든 한기를 태우며, 왼손의 권강(拳剛)으로 정수리를 보호했다.

내뻗은 월영검의 검끝이 빙벽(氷壁)에 닿는 순간,

콰아아!!!

단번에 적(積)을 터뜨렸다.

산산조각난 얼음이 수증기로 되돌아가며 주변을 뿌옇게 에워쌌다.

뻗었던 월영검을 회수하며 왼발을 축으로 크게 회전했다.

놈이 휘두른 보도의 날카로운 도날이 뒤늦게 날아와 내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허공을 둘로 쪼갰다. 도날이 지나간 공간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물론 나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대로 월영검을 수직으로 휘두르자,

희게 빛나는 검날이 놈의 왼쪽 손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카캉!

단단한 얼음방패가 그 공격을 가까스로 방어했으나,

나는 이미 놈의 등 뒤로 돌아간 후였다.

내력을 실은 검끝이 놈의 등줄기를 빠르게 훑었다.

마혈을 짚인 놈이 이내 통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으차차!”

옆으로 쓰러지는 놈의 멱살을 붙잡아 바닥에 예쁘게 눕혔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문이 박살나고, 네 개 화염탄이 나를 향해 날아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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