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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92화 (92/122)

92화.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다 (5)

공주의 뒤에 숨어 있던 여자애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올라간 눈꼬리와 동그란 코가 내 동생을 닮았다. 지금 그 애가 살아 있었다면…….

‘아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과거의 기억을 털어내며 나는 몇 시간 전 우겨 넣은 정보를 재빨리 훑었다.

공주의 딸. 네 살배기 아기씨.

한수길이 데릴사위라서 애 성은 제 할아버지를 따랐고. 이름이, 되게 촌스러우면서도 좀 익숙했는데.

안…덕… 뭐였던 거 같은데…….

“그럼요. 천사죠. 내가 천사가 아니면 누가 천사겠어. 그렇죠, 덕…만… 아기씨?”

아이가 손뼉을 치며 활짝 웃었다.

“천사님이 나럴 어띠 아시우?”

나는 최선을 다해 웃음을 띠며 필사적으로 대꾸할 말을 찾았다.

다행히 곱게 자란 네 살짜리 아이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일사천리로 제 할 말을 늘어놓았다.

“내래 다 봤수다. 이러엏게 반짝반짝하믄서 천사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

“덕만이는 바보라! 천사가 어띠 문을 망가뜨리니!”

제 입을 막던 공주의 손을 치워낸 남자애가 야무지게 반박했다.

“이도야! 덕만아!”

공주가 절박하게 외쳤으나 애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두 아기씨는 이내 내가 천사인지 악마인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양측의 입장은 ‘문을 망가뜨렸는데도 천사인가’와 ‘저렇게 예쁜데 천사가 아닐 수 없다.’였다.

…역시 얼굴원툴이 최고다.

장벽을 초월하는 얼굴 만세.

애들은 놀랍도록 해맑았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철도 없고 개념도 없고 상황 파악도 못하는 아이들.

딱 제 나이처럼 구는 아이들.

충분히 보호받고, 넘칠 만큼 사랑받은…….

‘이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지.’

다행히 두 아기씨는 내가 제 아버지와 보위대놈들을 후려 패는 모습은 보지 못한 듯했다.

나는 슬그머니 작은 적(積)을 날려 잘라낸 문짝 사이로 보이는 널브러진 보위대원을 구석으로 치워냈다.

“아저씨 천사 맞아. 볼래? 이렇게 빛이 나잖아.”

기운을 끌어올리자 단번에 월영검이 희게 빛났다.

“오오오!!!”

“보라, 오라바이. 내 말이 맞디? 어마이보다 훨씬 더 예쁜데 당연히 천사디.”

이도 아기씨가 탄성을 내지르자,

덕만 아기씨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공주님. 본의 아니게 죄송합니다.’

내친김에 검막(劍膜)까지 시연… 하자 긴가민가하던 이도 아기씨도 완전히 넘어왔다.

반짝이를 좋아하는 건 아이의 본능인가.

“그거! 그거도 해주시라요!”

“그게 뭘까? 덕만이 아기씨?”

“아까 그거! 막 반짝반짝 빛나고 막……!”

…산(散)?

저기. 나 많이 힘들다.

그거 내력이 무지막지하게 소모된다고.

내가 다시 말하지만 어제 아침부터 리치를 잡고 추혼마인을 잡고 보위대를 박살내고 너네 아버지를…….

하아.

말해 뭐 하겠냐.

검기만큼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힘겹게 내력을 끌어올렸다.

희게 빛나는 강기의 줄기가 벽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애를 쓰느라 하마터면 기혈이 뒤틀릴 뻔했다.

“우와… 우와와……!”

그래,

잘 풀렸으니 장땡이지.

“아기씨들. 천사 아저씨랑 같이 하늘나라 구경 갈래?”

두 아이가 눈을 빛내며 제 엄마를 돌아보았다.

공주가 나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천사님. 어른아입네다. 제발…….”

작게,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간절한 목소리는 공주의 그것도 아내의 그것도 아니었다.

엄마의 목소리.

두렵고 무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지키려는…….

-안전하게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저는 한입두말을 하지 않아요.

공주의 귀에 나직하게 속삭이며, 내가 공주를 등에 업었다.

매끄러운 이불을 찢어 공주를 둘둘 말아 내 몸에 붙이고 뒤이어 양팔에 아이들을 안아 올렸다.

“날아가오, 천사님?”

“그럼. 당연하지.”

들떠서 더욱 해맑아진 아이들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우유 비린내를 닮은 어린애 특유의 냄새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내가 유리창이 박살난 창문을 통해 뛰어내…….

리려다가 멈췄다.

이걸 잊을 뻔했네.

내 보도.

히히.

히히힛!

월영검 옆에 보도를 찔러 넣은 내가 다시 창문을 통해 뛰어내렸다.

이번에는, 진짜로.

“꺄아아아아가!!!!!”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비명이 아닌, 환호였다.

본성이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온 순찰단원들이 우르르 소리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공격 중지! 공격 중지!”

“공주님이시다! 모두 물러서라!”

놈들이 외치는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원산성을 가득 메운 낮은 지붕과 지붕을 걷어찰 때마다 내 몸이 둥실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

치열했던 원산성 전투로부터 열흘 후.

원산성 인근에서 협상이 개최되었다.

개척당 협상 대표 남지윤이 나무 탁자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탁자의 반대편에는 조선국 대표 3왕자 안명연이 앉았다.

3왕자는 왕립연구소에서 제작한 해독제를 원산성까지 직접 가지고 나온 참이었다.

“대표님. 해독제를 투약한 이들이 마력을 되찾았습네다.”

해독제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천막 바깥으로 잠시 나갔던 공선희가 되돌아와 남지윤에게 말했다.

“이제 된 것이디? 날래 내 누이와 조카를 내놓으라우.”

3왕자가 차갑게 말했다.

“기다리시우.”

남지윤의 지시를 받은 공선희가 협상 천막 바깥으로 사라졌다.

천막 바깥에서 주변을 방비하고 있던 리태연의 눈이 크게 뜨인 것은 잠시 후였다.

“안 간다! 내래 용용이 오라바이랑 검은 가닥이 파대가리 맹키로 희어딜만큼 살 거라우!”

“…내도 싫소. 어마이.”

안덕만 아기씨가 땅바닥을 구르며 발버둥을 쳤다.

안이도 아기씨가 자신을 안은 검룡을 껴안으며 그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야. 왕자가 울면 쓰냐?”

“내래 왕자 아니라우. 아기씨라우.”

“그래. 니 똥 굵다.”

리태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내 귀가 고장이 났는가.’

그 계룡검룡, 이제 원산성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는 그 계룡검룡이, 이도 아기씨에게, 까칠하기 그지없다고 소문이 자자한 이도 아기씨에게, ‘니 똥 굵다.’라고 말하며 이도 아기씨의 볼을 잡아 늘이고 있었다.

혁명당이 새벽의 습격을 감행한 날.

세 명의 남쪽 동무, 아니, 이제 ‘계룡삼룡’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들의 무위는 리태연의 각오와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방위단에서 당황스러울 정도로 손쉽게 패배하고 남쪽 동무가 상급 능력자임을 깨달았었다.

하지만 일으키는 자의 사냥에서 자신이 그들을 과소평가했음을 다시 깨달아야 했고,

그날 새벽, 계룡좌룡과 계룡은룡을 상대하며 다시 그들에 대한 평가를 상향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성에서 벌어진 전투를 목격한 이들의 설명은 믿기 힘들 정도였다.

-인간이가, 그기? 그 정도면 무신이디.

-그라요. 대장 동무. 다들 무신이랍네다.

하지만 본성에 남은 흔적들은 그들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했다.

성주님과 13보위대 전원이 성주님의 침실에 나무토막처럼 굳어 쓰러져 있었으니까.

다들 부상이 꽤 깊었으나 목숨이 위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계룡검룡이라는 자, 뒤늦게 이름을 알게 된 남쪽 동무의 실력이 그들을 아득히 뛰어넘는다는 의미였다.

“니들 미텼나. 폐하께오서 들으시면 기함하실 기다. 날래 가자우, 날래.”

미령 공주가 진땀을 흘리며 두 아기씨를 잡아끌었다.

‘아기씨들께서 어띠 저러시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두 아기씨의 모습으로 팽팽했던 협상장의 긴장감이 일순간 풀렸다.

리태연은 자신도 모르게 풀렸던 긴장을 다시 다잡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디 모르디. 3왕자마저 인질로 잡히신다면…….’

왕자의 호위대는 3보위대.

조선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가 3보위대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태연은 불안을 지울 수 없었다.

계룡검룡이 보여준 무위라면 무슨 일이라도 가능할 것 같았으므로.

하지만.

“아, 그만 처울고 가라. 응? 나중에 또 볼 수 있다니까! 내가 뭐랬냐고.”

“사형. 왕자님한테 처울고가 뭡니까.”

“왕자 아니고 아기씨라며!”

“아무튼 애잖아요.”

“…그래, 애지.”

리태연이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회담장은 화기애애했다. 아니, 혁명당측은 화기애애했고, 조선국측은 화기애매했다.

“암흑능력자의 능력을 썼나?”

“암시술? …이야. 그거 있으면 나도 참 좋겠네.”

3왕자가 일그러진 얼굴로 덕만 아기씨를 억지로 잡아끌었다.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이도 아기씨를 억지로 잡아떼어낸 계룡검룡이 아기씨를 미령 공주에게 안겼다.

“야. 안이도. 너 내가 뭐랬어. 회자정리, 다음은?”

“가자…삘…받…?”

“뜻은?”

“다음에 다시 형아 만난다!”

검룡이 두 아기씨의 머리를 차례로 헤집었다.

“그래. 내가 살아보니까, 인연이 있으면 만나더라고.

“…감사했습네다. 덕분에 편하게 있다 갑네다.”

미령 공주가 검룡을 향해 목례를 했다.

인질로 잡혀 있던 사람의 얼굴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짙었다.

그렇게 어수선하게 회담이 끝났다.

리태연은 원산성으로 귀성하는 일행의 가장 선두에서 분주히 괴물의 접근을 살폈다.

그의 작은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궁금하다우. 어띠허여 나에게 그러했는디…….’

계룡검룡을 다시 만난다면.

기회가 생긴다면.

굳이 성주와 분란을 일으키면서도 일으키는 자의 방패로 준비되어 있던 사람들을 돌려보내게 만든 이유를 묻고 싶었고,

성주의 위기를 알려주어 자신을 도운 이유를 묻고 싶었다.

그의 말을 따라 다급히 성으로 향했을 때 성주는 순찰단장 장소민을 비롯한 혁명당원들에게 기습을 당하고 있었다.

리태연은 성주를 도운 공을 인정받아 지시 불복종에 대한 징계를 피했다.

그리고, 충분히 죽일 수 있었던 보위대원을 모두 살려준 이유 또한…….

-대장 동무. 3시 방향, 500미터 전방에서 상당한 마력이 탐지되었습네다.

-괴수일레?

-모르겠습네다. 지금 확인…….

-되었다. 내래 확인하갔다.

리태연은 평소 그러했듯이 가장 앞서서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자란 짙은 침엽수림으로 막 발을 내디뎠을 때,

“리 대장, 하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채 오른손을 흔드는 그가 나타났다.

계룡검룡이었다.

***

“아까워! 아깝다고!”

“이 새끼가.”

“아깝다고! 아까, 악! 그래도 아, 악!”

김강산이 방방거리다가 대가리를 후려 맞고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입술이 불만스럽게 실룩였다.

“사형. 그래도 마핵은 진짜 저도 좀… 산이 말에 동의… 하지 않습니다! 사형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그럼요, 그럼요. 헤헤.”

서은창이 헤실거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회담은 잘 끝났다.

그리고,

원산성으로 돌아가는 사절단을 향해 입술을 삐죽이는 김강산과 헤실거리는 서은창이 마력을 잔뜩 개방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리태연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괴수이 습격한 줄 알았습네다만…….”

“응. 리 대장한테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좀 모셨어요. 어때, 시간 괜찮죠?”

“…그러하옵네다.”

그 사이 리태연의 말투가 극존칭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썩 마음에 드는 놈이었다.

그래도… 이건, 역시 아까운데…….

주머니 속 마핵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이미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만큼 작게 잘라 놓은 마핵이었다. 리치에게서 나온 마핵 중 100분의 1 정도.

이 정도 투자는 해야지.

그래도… 날아가면 말짱 꽝이라고.

…투자라는 게 다 그렇지.

그래도… 그래도!

“계룡, 검룡님. 그, 하실 말씀이라는 거이……?”

리 대장이 더듬더듬 물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주머니 속 마핵을 내밀었다.

“대장님. 마핵 먹은 적 없죠?”

“그런 기회는 아직 얻지 못했습네다다만.”

“자. 이거, 선물.”

리 대장의 찢어진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목젖이 꼴딱꼴딱 소리를 내며 울렸다.

“…어띠 저에게, 이런 귀중한 것을 주십네까.”

“리 동무가 마음에 들었거든. 괴물과 맞서 싸우는 그 용맹함이… 저기요. 안 가지게요? 도로 가져가?”

“저는 폐하의 신민입니다. 폐하께오서 저를 기르시고 또한…….”

마핵 앞에서 이 정도 충심이라니.

내가 국왕이면 이놈한테 성 하나 떼 줬다.

“알어, 알아요. 누가 너네 폐하 배신하래?”

“그리허면, 어띠?”

“선물이라니까? 나 한입두말 하는 사람 아니라고. 리치 잡을 때 리 대장도 이 정도 공헌은 했잖아.”

선물이다.

프레젠또 아니고, 선물(先物).

미래에 받을 자산의 대가… 라고나 할까.

물론 그 자산을 넘겨줄 리 대장 본인은 모르겠지만.

앞으로 조선국과 자주 마주치게 될 거다.

적이 될지, 동료가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으나.

‘나에게 호의를 품은 이를 그 안에 심어둔다면.’

조선국이 동료가 되면, 동료가 강해지니 좋고.

조선국이 적이 되면, 그야말로 숨겨둔 수…….

마핵을 쥔 내 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다.

누구 인내심 시험하냐고요. 아저씨.

확 걷어 가버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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