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1주년 기념식 (1)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투자다. 투자.
더 큰 미래자산으로 돌아올 거다.
“아! 안 먹어? 진짜 안 먹어? 딱 3초 준다. 삼, 이, 이 반에 반, 이 반에반에반, 이 반에반에반에반, 이 반에반에반에…….”
이 반에반에반x13까지 헤아렸을 때,
떼굴떼굴 눈알을 굴리던 리 대장이 두 손을 조심스레 내밀어 마핵을 가져갔다.
그거 유리 아니라고요, 아저씨.
어지간한 힘으로는 잘리지도 않어.
“리 대장 같은 사람이 오래 살아남아야죠. 그래야 원산성 성민들이 더 안전해질 테니까, 그래서 주는 거예요.”
“…그런, 고작 그런 이유로……!”
리 대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눈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 휴먼다큐 감동 실화 타이밍이다.
나는 팔을 내밀어 리 대장의 넓은 어깨를 가만히 짚었다.
내 입술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가 다른 조직에 속해 있지만 뜻은 다르지 않아요.”
“계룡, 검룡님, 제, 목숨을 바쳐, 사람들을, 지키, 지키겠습네다……!”
리 대장은 결국 고블린 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목숨까지는 바치지 말고. 이 나라 사람들은 무슨 껌벅하면 목숨을 바쳐? 아주 애들 교육이 개판이야.”
“흐윽, 목숨을 아껴! 사람들을, 흑! 지키겠, 습네다!”
“그건 좀 양아치 같은데… 농담이고. 오래 살아남으라고요.”
그건 내 진심이었다.
그리고 나는 몇 가지 조언을 덧붙였다.
사람 너무 믿지 말아라, 괴물 상대로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 상대하는 훈련도 해라… 뭐, 그런 기초적인 것들.
멀리에서 리 대장을 찾는 부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 대장이 눈물 콧물을 닦아내고 깊숙이 허리를 접었다.
“이 은혜는 잊디 않겠습네다.”
“당연하지. 무려 마핵을 먹였는데 잊기만 해봐라, 내가 확…….”
“예?”
“…에이, 농담이지, 농담.”
리 대장이 곧 우거진 나무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 포석이 어디에 도움이 될는지는…….’
살다보면 알겠지.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다.
소중한 존재가 안전하고 평화롭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
계룡문은 내 약점이다.
하지만.
구울이 약점을 찾았다고 두억시니에게 덤비지는 않지.
토끼가 호랑이 앞에서 호랑이 불알 깨물겠다고 뛰어들지는 않…….
“좋냐? 어? 저 새끼 마핵 주니까 좋아? 형은 맨날 뭘 그리 퍼주고 다… 악!”
김강산이 머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엎어졌다.
“김강산, 서은창.”
“…웨.”
“넵, 사형.”
나는 몸을 돌려 둘을 돌아보았다.
녀석들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았다.
나 역시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양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진심으로 웃었다.
웃으며, 내가 말했다.
“집에 가자.”
***
검룡이 혈왕을 죽인 장소.
그곳에는 50미터가 넘는 거대한 건축물이 흰 천에 덮여 있었다.
계룡검룡의 동상이었다.
동상 앞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계룡문의 창립 1주년 기념식에 초대된 사람들이 동상 앞 광장에서 제막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대장을 받지 못했음에도 그저 동상을 구경하고 축하연에 참여하고 싶어 몰려온 각성자들과 일반인들이 계룡성의 모든 골목과 숙소와 주점에 바글거렸다.
김영호는 바삐 움직이며 아는 얼굴들을 찾아 안부를 묻고 소식을 들으며 온갖 정보를 수집하는 중이었다.
계룡문과 함께 혈귀단과 맞서 싸워 유명해진 보령회 회장 김선규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김영호는 이내 자리를 옮겨 무등길드의 두 길드장 중 하나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무등우협님! 아이구야. 먼 길 오셨네요.”
“하하. 아닙니다. 편하게 왔습니다.”
“아. 혹시 검룡고속도로를 이용하셨습니까? 사흘 전부터 시범운영에 들어간다고 좌룡께서 말씀하셨는데…….”
“역시 계룡문과 가까이 지내신다더니 소식이 빠르시네요. 길이 잘 닦여 있고 괴물의 습격이 없으니 절로 속도가 붙더군요.”
무등우협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진 김영호는 곧 말 붙일 다음 얼굴을 발견했다.
“해룡의선님! 아이구야. 먼 길 오셨네요.”
혈귀단의 습격을 방어하고 혈왕의 목을 벤 검룡과 계룡문의 업적,
세상 사람들에게 ‘계룡대첩(鷄龍大捷)’라고 불리는 그 전투는 계룡문을 견제하던 이들이 단번에 숨을 죽이게 만들었다.
이제 계룡문을 충청의 중소문파로 여기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게 그 증거지.’
계룡문의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보염련 회장 곽선우, 청주성주 처철수, 공주성의 무영문 문주 김경민, 논산성 황산벌파 회장 박지은 등 충청의 중소문파들은 물론이고,
해룡의선, 무등우협, 아수라, 해동검이 모두 초대장을 받고 계룡에 나타났으니까.
염화검제는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으나 대신 아들인 참마도 이석주를 사절단의 대표로 계룡에 보냈다.
불패도는 이전부터 계룡문과 형제나 다름없었고, 계룡대첩에서 계룡문과 함께 싸웠다던 빙화신녀도 거의 계룡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계룡문을 은근히 못마땅해 하던 해동검마저 계룡대첩 이후 완전히 태도를 바꾸어 계룡문을 길드로 격상하자는 편으로 돌아섰다고 했다.
그동안 일곱 길드 중 혈귀단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길드가 강원길드였으니 그만큼 혈귀단에 대한 원한이 깊었을 터였다.
사절을 보내지 않은 길드는 서문길드뿐이었다.
하지만 대세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속이 좁아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다며 무적권왕을 비웃었다.
이대로라면 계룡문이 계룡길드로 격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문제는, 그 검룡이 계룡에 없다는 사실뿐.
‘우룡의 수완이 대단했어.’
계룡우룡이 있어 그 빈자리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최지수는 계룡문과 검룡의 연결고리가 여전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김제와 계룡을 잇는 고속도로에 ‘검룡고속도로’라는 이름을 붙인 것부터, 꽤나 많은 돈을 들였다는 동상의 건립까지.
계룡문의 1주년 기념식에 일곱 길드 중 여섯 길드가 참석했다는 사실은 최지수의 수단이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검룡이 이대로 계속 자리를 비운다면…….’
계룡문의 빠른 성장세는 검룡이라는 신화적인 인물이 있어 가능했다.
검룡이 없는 계룡문은,
그 빨랐던 성장만큼 순식간에 쇠퇴할지도 모른다.
김영호는 눈에 들어오는 북적이는 사람들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가만히 팔짱을 꼈다.
지금은 입 안에 혀처럼 굴고 있지만, 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계룡문에 대한 칭송이 모두 진심은 아니었다.
계룡문의 쇠퇴가 시작되면 어떤 이는 등을 돌리고,
어떤 이는 등을 찌를 터.
‘…대체 북쪽에서 또 무슨 사건을 벌이고 있습니까, 검룡님.’
-검룡님은 왜 안 보이신데?
-수련에 들어가셨다던데. 원래 자주 그러신다며.
-그래도 1주년 기념식이니까 이따가는 나오시겠지? 그 얼굴 뵈려고 강릉에서 일주일을 달려왔다고!
-에이. 당연하지. 설마 오늘 같은 날에 잠깐 시간 못 내시겠냐.
아까 지나치며 들었던 기대에 찬 사람들의 대화를 떠올리며 김영호가 이마를 살짝 구겼다.
우룡의 실책일까.
차라리 밝히지 않는 게 나을까.
-오늘 제막식에서 림이가 계룡에 없다는 걸 밝힐 생각입니다.
-그렇죠. 계속 숨기기는 어렵겠지요.
-그렇다기보다는… 이제 림이가 혈귀단의 꼬리를 잡지 않았겠습니까.
검룡이 북쪽으로 떠나고 한 달이 지났다.
그 촉급하고 행동 빠른 검룡이 지금까지 혈귀단을 찾아내지 못했을 리 없다는 데에는 김영호도 동의했다.
-혹시 지금까지 그래서 그 사실을 감추셨습니까? 검룡의 행보에 방해가 될까봐서요?
-겸사겸사라고 할까요.
‘계룡문이 공격을 받을까봐 훌쩍 떠난 검룡이나, 검룡에게 방해가 될까봐 그 사실을 숨긴 우룡이나 모두 제정신은 아니야.’
김영호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 목록에 얼른 한 명을 덧붙였다.
‘아. 좌룡. 가장 미친 자를 빠뜨릴 뻔했군.’
김영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착석해 위를 올려다보았다.
흰 천으로 덮인 50미터짜리 동상은 자신이 상상했던 이상으로 거대해 보였다.
신화를 만드는 작업.
영웅적인 일이 그것으로 끝나면 그것은 그저 ‘사건’일 뿐, 자산이 되지 못한다.
다른 사건들에 밀려나간 과거의 사건은 결국 잊혀진다.
영웅적인 일을 해낸 이가 진정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계속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김영호가 생각하기에 계룡문 창립 1주년에서 계룡검룡의 동상 제막식을 곁들인 것은 아주 끝내주는 아이디어였다.
끝내주는 아이디어라고 생각은 했지만…….
‘검룡께서 저걸 보면 뭐라고 하실지 도무지 모르겠군.’
제 얼굴은 저보다 백만 배는 낫다며 강짜를 부릴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돈지랄이냐며 난장을 피울 것 같기도 했다. 혹은 아무 관심 갖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계룡우룡님이시다!!!!”
“계룡문 만세!!!”
사람들의 우뢰와 같은 환호를 받으며 계룡우룡이 단상에 올라서고 있었다.
제막식의 시작이었다.
.
.
.
“…림이가 현재 계룡에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림이는…….”
최지수는 광장에 모여든 수백의 인파와 광장 바깥을 메운 수만의 인파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끊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광장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계룡문과 서림과의 긴밀한 관계를 암시하기 위해 ‘검룡’이라는 호칭 대신 ‘림이’라는 호칭을 일부러 사용한 것처럼, 미리 계산된 의도적인 연출이었다.
숨을 들이마신 최지수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혈귀단, 계룡을 습격한 악적을 박멸하기 위해 은영단의 좌룡과 함께 잠시 계룡을 떠났습니다. 림이는 지금 혈귀단의 본거지를 찾고 있…….”
일순간 웅성거림이 일었다.
-혈귀단의 본거지? 요즘 그래서 검룡님께서 안 보이신 거야?
-와… 마무리까지 갓벽하네. 진짜 갓룡이다.
기대했던 반응에 안심하며 최지수가 다시 연설을 이어갔다.
“하지만 림이가 없어도 여전히 계룡문은 그 뜻대로 계룡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지수는 또 한 번 뜸을 들이고는 이내 마지막 문장을 말했다.
“계룡성민께서, 그리고 계룡문의 벗들께서, 계룡문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 주십시오.”
마지막 문장에는 최지수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사실 더 솔직한 마음으로는 ‘계룡문’이 아니라 ‘검룡’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 달라 말하고 싶었으나 그건 효과적인 연설이 아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서림이 질색할 것이 뻔했다.
-약해 빠진 새끼들이 나를 지켜? 지들 몸이나 건사하시지?
서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림아. 아무리 너라 해도 혼자서 모든 짐을 질 수는 없다. 부디 나에게 그 짐을 나누어 주려무나. 내가 믿음직하지는 못하겠지만…….’
들을이가 없는 진심을 마음속으로 삼키며 최지수가 짧은 연설을 마무리했다.
단상 위로 환호와 박수와 환성이 날아들었다.
잠깐의 소란이 잦아든 뒤 사회를 맡은 화공자 정일형이 정해진 멘트를 했다.
“그럼 다음으로는 검룡상의 제막식이 있겠습니다.”
최지수가 동상 아래로 걸어가 흰 천의 끄트머리를 쥐었다.
기념식이 진행되는 내내 최지수의 어깨에 얌전히 앉아 있던 월매가 푸드덕거리며 날개를 펼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월매는 검룡과 계룡문이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마스코트였다. 그 효과가 톡톡했는데…….
-월매야! 돌아오너라! 이거 끝나야 대환단 준다!
최지수가 애타게 월매를 불렀다.
하지만 월매는 멈칫하지도 않고 그대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때.
광장 멀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잘생겼다는 말이 들린 듯도 한데. 설마… 아니, 그래도… 설마.’
최지수는 검룡상의 제막식 중이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드디어 최지수의 귀에도 들어왔다.
-허얼…….
-…미쳤다. 진짜 미쳤다.
-검룡님! 제발 손 한 번만 잡아… 꺄악!!!!
-잘생겼어요!! 계룡갓……!
림이다.
림이가 돌아왔다.
“림아!!!!!!”
최지수가 단번에 단상에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