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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94화 (94/122)

94화. 1주년 기념식 (2)

최지수의 뒤를 따라 은영단이 벌떡 일어났다.

“비켜주세요! 길 좀 터주세요!”

“씨발! 다 꺼져! 나 대표님 보러 갈 거라고!”

“하민아! 검, 검 놔라! 이바름! 손 내려! 화염구 떴다!”

얽히고설킨 난장판 위로 투명하게 빛나는 얼음의 다리가 나타났다.

“가랏, 우룡몬!”

검지를 쫙 편 빙화신녀가 눈을 찡긋이며 혼돈의 중심을 가리켰다.

감사의 인사도 잊은 채 최지수가 다리 위로 뛰어올랐다.

다리 건너편에서, 서림이 걸어오고 있었다.

여유 있게 웃으며,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월매에게 연신 어깨를 쪼이면서, 얼굴 창백한 김강산과 서은창을 양쪽 옆구리에 끼고,

서림이 걸어오고 있었다.

“대표니이이----이-----ㅁ----!!!!”

하하민의 앞을 가로막으며 최지수가 내달렸다.

“림아!!!!!!”

서림이 번쩍 손을 들었다.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있던 김강산이 얼음의 길 위에 엎어져 꿈틀거렸다.

김강산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서림이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지수 형!”

그 웃음이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최지수는 질끈 눈을 감으며 달렸다.

***

갑작스러운 계룡검룡의 등장으로 검룡상 제막식과 1주년 기념식은 흥분의 도가니를 넘어 광분에 휩싸였다.

은영단은 밤이 깊어서야 계룡문 본부의 회의실에 모일 수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검룡의 귀환을 목격한 감동에 대해 흥분에 들떠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헐거운 나무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히야. 혈귀단의 본진까지 끝장내시다니. 이제 발 뻗고 편히 자겠네.

-그러게 말이야. 세상에, 그 혈귀단을 정말로 멸! 하시다니. 그야말로 검룡스럽다, 검룡스러워.

-당연하지요! 대 계룡문의 계룡갓룡님 아니십니까!

최지수는 멀리에서 온 길드장을 비롯한 사절단들의 숙소를 살피고, 도착하자마자 흙바닥에 널브러진 김강산과 서은창을 각자의 방 침대에 눕혀놓은 뒤 마지막으로 회의실에 도착했다.

“지수 형!”

서림이 번쩍 팔을 들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얼굴에 웃음이 완연했다.

최지수가 마주 웃으며 서림을 향해 뛰듯이 다가갔다.

가슴과 가슴이 맞붙고, 최지수가 서림을 꽉 끌어안았다.

기분 탓이겠지만, 어쩐지 좀 마른 것 같았다.

“좀 쉬지 그러냐. 림이 너도 피곤할 텐데.”

“얘네 속도 맞춰주느라 쉬엄쉬엄 다녀서 암시랑토 않다우.”

“대표님! 말투 왜 그래요?”

“엄… 그러게. 그쪽 사투리가 옮았나.”

“사투리가 전염병입니까, 옮… 악!”

“이바름아. 한 달 안 봤다고 그새 말버릇이 나빠졌네?”

서림이 이바름을 향해 ‘더 처맞아 볼래’라고 말하며 오른손을 흔들자, 이바름이 재빨리 양팔을 들어올려 정수리를 가렸다.

흐뭇하기 그지없는 일상적인 광경이었다.

“1주년에 맞춘다고 무리했구나, 림아.”

“…몰랐는데?”

서림이 가볍게 어깨를 추켰다.

“하하. 그래. 몰랐겠지. 몰랐다고 하자꾸나.”

최지수는 시큰거리는 코를 지그시 눌렀다.

자꾸만 웃음이 새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서림이 돌아왔다.

혈귀단의 본진을 박멸하고, 추혼마인을 파괴하고, 어디도 다치지 않은 채. 두 팔과 두 다리가 다 멀쩡한 서림이 이번에도 건강하게 돌아왔다.

그야말로 완벽한 1주년…….

“근데 지수 형. 계룡성 사람들 말투가 왜 이 모양이지? 갓룡? 검룡스럽네? 검하? 검럽은 또 뭐냐? 검룡이 더럽다고?”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서림이 어디 설명을 해 보라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딸꾹!”

하하민이 딸꾹질을 했다.

이바름이 다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박명칠이 필사적으로 서림을 외면하고, 조은조가 ‘화장실 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서림이 오른손을 들자 얌전히 제자리에 앉았다.

최지수는 올 게 왔음을 깨닫고 마른침을 삼켰다.

“네가 계룡을 떠나고 검룡과 계룡문이 완전히 갈라섰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계룡문과 검룡의 관련성을 암시할 수 있는 신조어들을 만들었다.”

“…저딴 말을, 일부러 만들어서 퍼뜨렸다고?”

“효과가 상당했다. 저 신조어들을 퍼뜨린 일주일 후부터 검룡이 계룡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비율이 74.3퍼센트로, 두 배 이상 높아져 17.3퍼센트의 ‘모르겠다’를 누르고…….”

준비한 대답을 술술 뱉으며 최지수는 서림의 눈치를 살폈다.

‘림이가 이해해 주려나.’

간단하게 말했지만 사실 간단하지는 않았다.

혈귀단 잔당의 처분에 관한 의견 차이로 검룡이 은영단과 크게 다투고 홧김에 계룡문을 떠났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계룡성에 퍼지고 주변의 성으로 흘러나갔다.

서림의 유명세가 워낙 높은 이유도 있었으나 다른 길드들이 정보원을 동원해서 그 소문을 열정적으로 퍼뜨린 영향도 컸다.

검룡이 최근에 데려온 서은창이 과거 혈귀단이었다는 정보까지 퍼져나가며 한때 계룡성민들까지도 불안에 휩싸였다.

최지수는 파괴된 계룡성을 재건하며 동시에 그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 고생들을 하나하나 열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랬다가는 저 마음 약한 서림이 또 자신의 탓을 할 것이 뻔했으므로.

“…뭐. 그래, 그렇다 치자고.”

다행히 서림은 자신의 설명을 납득한 모양이었다.

‘검하’는 ‘검룡스러운 하루’라는 의미고, ‘검럽’이 ‘검룡이 더럽다’가 아니라 ‘검룡 러브’라고 설명했을 때는 슬그머니 웃기도 했다.

“근데.”

최지수가 긴장하며 허리를 바르게 세웠다.

마지막 고비가 남아 있었다.

“검룡상은? 저거 돈 얼마 들었어?”

“네 예상보다는 많지 않을 거다. 동상의 재료 대부분이 검영회 회원들이 사냥한 괴물 사체로 구성되어…….”

“…검영회?”

“검룡의 그림자가 되고 싶은, 딸꾹! 사람들의 모임이! 딸꾹! 예요, 대표님. 제가 회장을, 딸꾹! 맡고 있습니다!”

하하민이 번쩍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하민아. 참으로 나이스 타이밍이로구나.’

서림이 하하민을 보며 할 말 잃은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돈을 안 쓰면 다냐고. 기회비용 모르냐? 저 사체 팔면 벌 수 있는 돈이 다 저거 건축하는 데 들어간 돈이라고.”

“그게 뭔데요? 먹는 겁, 딸꾹! 니까?”

“기회비용… 그래, 됐다. 멍청한 게 죄는 아니지. 아니니까…….”

서림이 긴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상황 종료의 신호였다.

“근드드 드프늠. 으그 즌쯔 믓읐느으.”

이바름이 뭉그러진 케이크를 집어 한 입 가득 욱여넣으며 말했다.

그에 질세라 조은조와 박명칠이 우걱우걱 케이크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바름 선배.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닙니까? 혼자 다 처먹으실 생각이세요?”

나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케이크를 향해 최지수가 손을 뻗었다.

문득, 한 가닥 의문이 가슴을 스쳤다.

“림아. 이것을 선물로 받았다고?”

“그렇다니까, 지수 형. 염화검제랑 할 말이 있어서 서울성에 들렀는데, 염화검제가 서울성에 없다고, 헛걸음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주더라니까?”

평소와 다르게 설명이 길었다.

서림이 턱을 치켜들며 덧붙였다.

“뭐, 그러면, 뭐, 내가, 대한길드 주방에 들어가서 월영검 뽑아들고 케이크 다 내놓아라, 안 내놓으면 너네들 다 뒈질 줄 알아라, 뭐 이랬겠냐?”

순간적인 정적이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정적을 끊어낸 것은 버릇이 나빠진 이바름이었다.

“어… 그거 되게 현실적인 장면이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표님! 주방장을 협박하는 대표님이 정말 멋! 지! 다고 생각합니다!”

이바름이 대표로 또다시 머리를 후려맞았다.

최지수는 캐묻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날.

케이크를 선물 받았으면 어떻고, 탈취…해 왔으면 또 어떠…냐.

최지수가 희고 부드러운 크림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림아. 혈귀단의 본진이 장벽 너머에 있었다고 들었다. 그곳에서는 또 무슨 일이 있었느냐.”

가볍게 어깨를 추킨 서림이 대꾸했다.

“혈귀단은 완전히 박멸했고, 추혼마인도 박살냈어.”

“고생했다. 고생했어.”

“그리고 조선국이랑 좀 문제가 생겼는데 잘 해결했어. 지수 형, 알지? 북쪽에 있다는 나라.”

“그래. 지부장님께 들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그건 나중에 따로… 말하자면 길거든. 아무튼 잘 해결되기는 했는데.”

자신을 살피는 서림의 시선이 느껴졌다.

최지수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림이가 내 눈치를 본다고. 이건 보통 사고를 친 게 아닌데.’

“내가…….”

심지어 말을 머뭇거렸다.

케이크를 탈취한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멀티를 먹었거든. 아, 이게 원래 멀티는 앞마당이 국룰인데 어쩌다보니 좀 멀리에다 먹었네.”

심지어 변명을 덧붙였다.

그런데.

‘멀티가 뭐지.’

최지수는 박명칠에게 멀티가 무엇인지 물어보려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박명칠이 알 리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용용아! 너 양다리 걸쳤다고?!”

“저기요. 왜 말이 그렇게 됩니까. …이 아지매 누가 불렀어?”

“림아, 네가 없는 사이 빙화신녀께서 계룡문에 입문하셨다.”

“헐. 죄송. 빙화신녀님. 잘 부탁드립니다.”

빙화신녀가 멀티, 즉 본진 이외의 장소에서 자원을 채취하는 확장 기지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명한 뒤 겨우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래서 오민주랑 혁명당 애들을 데리고 원산성을 나왔는데 걔네가 반역도니까 갈 데가 없잖아.”

“역시 대표님! 북쪽에 가셔도 오지랖 쩌셨… 악! 아… 오랜만에 대표님한테 대가리 후드려 맞으니까… 오히려 좋아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하하민을 바라보며 서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서쪽으로 갔지. 조선국이 서쪽은 다 버렸거든. 그중 가장 상태 나은 성을 골라서…….”

그렇게 과거 혁명당, 이제 개척당으로 이름을 바꾼 이들은 사리원성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일주일 동안 성벽을 보수하고 일단 성과 가까운 곳에 있는 괴물 서식지를 소탕해서 급한 불은 껐지만 아직 주변에 위험요소가 아주 많고 안전한 성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환경…….

이라는 얘기였다.

최지수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서림에게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한동안… 그 사람들과 함께하겠다는 거냐?”

서림이 어깨를 추키며 대꾸했다.

“지수 형. 나 계룡검룡이라고. 그냥 검룡 아니고, 계룡검룡.”

“하지만 지금 그곳에 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최지수는 문장을 잘라내며 입을 다물었다. 서림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것 같았기 때문에.

돌아본 서림은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웃고 있었다.

“계룡문이, 꼭 계룡만 지키라는 법은 없잖아?”

최지수는 더 많은 사람들을 돕게 될 그 결정이 기뻤고, 동시에 염려되었다.

‘그러면 림이 너는, 앞으로 더 얼마나 짐을 짊어지겠다는 거냐.’

남모르게 한숨을 삼키는 최지수의 귀에 빙화신녀의 황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용용이, 진짜 행동 빠르네? 이게 이렇게 순식간에 결정할 일이야? 너네 계룡문 만들 때도 이랬어?”

“…림이가 아주 친절해졌다는 사실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이게 친절하다고?”

“저기요, 빙화신녀님. 이게 내 계룡문 스타일이거든요. 굴러온 돌이 적응하시죠.”

빙화신녀의 혼란스러운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내며, 최지수는 계룡문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날을 떠올렸다.

정확히 1년 전.

서림의 뒤를 따라 김강산과 셋이서 곡사파의 본부에 뛰어들었을 때.

-웬 놈이냐! 청응파냐?!

-아니.

-그럼, 입암파의 찌끄레기구나!

-아닌데.

‘림이가 귀를 후비며 대꾸했었지.’

-계룡문이라고, 모르냐?

‘…나도 그곳에서 계룡문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는데 그들이 어떻게 알았겠느냐, 림아.’

그때와 달랐다.

훌쩍 떠났으나, 돌아와 지난 한 달 동안 있었던 일들을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이전의 서림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을 털어놓지 않았었다.

그저 그 등을 따라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어느새 높은 곳에 도착해 있었을 뿐.

‘…동료로, 인정받은 기분이군.’

물론 자신이 서림과 나란히 설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 어깨에 진 짐을 어느 정도는 나눠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움켜쥐었던 주먹에 힘을 빼며 눈앞의 서림을 응시했다.

입가에 케이크 크림을 묻힌 서림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왜. 또. 뭐.”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그런다.”

“새삼스레 무슨?”

“대표님! 저도요! 저는 사랑해요!”

“저도 사랑합니다, 대표님.”

“용용아! 나도 사랑해!”

“다들 왜 이래? 돌았냐?!”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 타임에 서림이 얼굴을 구기며 빽 소리를 쳤다.

옆으로 보이는 귓볼이 발그스름하게 붉어져 있었다.

***

숲은 깊었다.

나는 기감의 그물을 넓게 펼친 채 천천히 나아갔다.

곳곳에서 괴물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이 씨. 귀찮아 뒈지겠네.”

계곡에서 기어 나온 금혈어 두 마리가 그 배에 달린 스무 개의 다리를 빠르게 움직여 나를 덮쳐들다가 월영검에 동강나 널브러졌다.

기감의 그물에 걸리는 괴물의 숫자로 치면 혈귀단 놈들의 본진이 있던 곳 못지않았다.

그곳과 마찬가지로 주기적인 소탕 작전 없이 방치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어난 괴물들은 결국 언젠가 인간의 성으로 몰려들게 된다.

때문에 미리미리 숫자를 줄여 놓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곳은,

‘손을 쓰기에는 이미 늦었나.’

얼마 전에 연천성을 지났다.

연천성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였다. 그 아래 동두천성과 포천성도 마찬가지였다.

계룡문 1주년 기념식을 다음날,

내 얼굴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길드장들에게 얼굴을 비춰주고 나는 곧바로 계룡성을 떠났다.

그리고 곧장 이곳으로 향했다.

포천과 동두천, 연천을 꼭짓점으로 한 ‘마(魔)의 삼천(三川)’으로.

‘그놈이 여기 있을 거라 이거지.’

염화검제 이정용.

그놈에게 물을 말이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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