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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95화 (95/122)

95화. 오롯이, 홀로 (1)

이정용에게 물을 말이 있었다.

그래서 빡빡한 귀갓길에서 일부러 길을 우회해 서울성에 들렀었다.

서울성 5성벽을 넘고 4성벽을 넘고 3성벽을 넘었다.

2성벽의 방비는 듣던 대로 아주 철저했다.

-습ㄱ……!

물론 내 발을 잡을 수준에 미치려면 한참 멀었지만.

성벽을 방어하던 대한길드의 길드원을 김강산이 신나게 두들겨 팼다. 서은창이 슬며시 그 모습을 외면했다.

열여덟 명째 길드원이 나가떨어졌을 때에서야 말이 통할 만한 녀석들이 나타났다.

-계룡검룡님. 무슨 일이십니까. 공식적으로 방문 요청을 하셨으면 진작에 모셨을 텐데…….

-내가 좀 바빠서요. 하하. 밤중에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저, 염화검제님을 뵈러 왔는데요.

중년의 남자가 연신 이마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염화검제님께서는 지금 서울성에 계시지 않습니다. 저희도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는 상황이라 알려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말씀해 주세요.

이정용 그놈이 나를 피한다고 생각했다.

남지호를 향해 놈이 날린 흑염을 내가 막으려 했으니, 나와의 만남을 꺼릴 수도 있으리라.

워낙 속이 시커먼 놈이니 종잡기가 어려웠다.

-참마도께서 이틀 전 계룡으로 떠나셨습니다. 참마도님께 직접 여쭤보시는 건 어떨까요……?

남자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앞뒤 상황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 김강산이 덥석 물음표를 던졌다.

-참마도? 걔가 계룡에 왜?

잠시 눈알을 굴린 남자가 이내 대꾸했다.

-계룡문 창립 1주년 행사를 한다고 계룡문에서 초대장을 보내셨는데요. 혹시 검룡께서 모르시는 일이셨습니까?

-헐! 형아! 우리 1주년이… 악!

눈치 빠른 서은창이 재빨리 김강산의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얼른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기념식에 참석하실 손님들께 대접할 케이크를 부탁드리려 염화검제님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랭킹전에서 맛본 케이크가 아주 인상적이더군요.

-케이크… 말씀이시지요?

-예. 케. 이. 크. 말입니다.

-그게, 재료가 구하기 힘든 것들뿐이라, 저희도 자주 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김강산이 이번 북행길에서 득템한 보도를 뽑아들었다. 날카롭게 번쩍이는 도날이 단번에 불길에 휩싸였다.

서은창은 눈치 빠르게도 그런 김강산을 막지 않았다.

-림이 형.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하잖아? 뭘 귀찮게 하나하나 말로 하고 그러냐. 안 그래도 피곤해 뒈지겠는데. 형 원래 스타일대로 대가리부터 박살내고 얼른 케이크 털어서 집 갑시다. 선빵필승인데 뭘 그렇게… 악!

나는 김강산이 충분히 멘트를 치기를 기다려 뒤통수를 후려쳤다.

-하하. 우리 애가 불속성이다 보니 성격이 워낙 불같아서.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고말고요. 그러믄입죠. 얼마든지 괜찮지요. 예, 케이크. 그럼요. …정호야! 당장 길드 베이커리 가서 케이크 있는 거 다 가져와라!

그 뒤는, 뭐.

알다시피.

기념식 다음날 길드장들을 만났다.

길드장들은 계룡문을 길드로 승격시켜 길드 연합에 끼워주겠다고 제안했다.

-됐어요.

나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지남천에게 이미 들은 얘기였다.

혈귀단을 박살내기 전이었다면 반겼을 제안이었다.

계룡문을 무시하거나 주제도 모르고 견제하려 드는 놈들에게 길드라는 이름표는 꽤 매력적인 방패였으니까.

그때라면 그랬겠지만.

‘이제는 필요 없어.’

계룡성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대한길드보다 계룡문이 더 강한 것 아니냐는 소리도 심심찮게 나왔다.

물론 사실은 아니었으나, 계룡문의 무력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은 분명했다.

길드 연합은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는 느슨한 연맹.

이제 와서 굳이 거기에 끼어 불필요한 규칙에 얽매일 필요는 전혀 없었다.

-감히 계룡문 따위가! 감지덕지해도 부족할 판에!

-저기, 수리수리아수리씨. 감히라는 단어는 그런 데다가 붙이는 게 아닙니다만.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주둥아리는 살아서……!

콰앙!

현진현의 주먹이 탁자를 내리쳤다.

단단한 탁자가 단번에 박살나고, 주변으로 나무 조각이 비산했다.

-이거 비싼 거예요. 비용은 화성길드에 청구하겠습니다.

현진현놈이 씩씩거렸다.

그 와중에 검은 뽑지 않았다.

내가 무섭기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러게 되도 않은 자존심만 좀 내려놓으면 저 살기에도 편할 텐데.

-무인이라는 분이 아가리로 파이트하시는 습관이 있으신가 본데. 저는 아니라서요.

아수라 현진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진정하게, 아수라. 어허. 당장 자리에 앉으시게!

-불패도님. 놔두시죠. 기껏 재미있는 구경하게 생겼는데요. 나는 떠오르는 신성, 계룡검룡에게 걸겠습니다.

해룡의선 원찬우가 차분한 얼굴로 불패도를 말렸다.

눈이 번쩍이는 것이, 재미있는 구경이라는 말이 농담 같지는 않았다.

해동검 은아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해룡의선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저도 계룡검룡에게 십만 돈 가겠습니다.

-받고, 이십만 돈.

-…무등길드는 삼십삼만 돈 겁니다.

다들 제정신은 아닌 듯싶었는데 계산은 정확했다.

현진현에게 건 길드장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결국 현진현이 불패도에게 못 이긴 척 자리에 앉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어수선한 길드장들의 모임은 어색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되었다.

나는 다른 길드장들을 따라 회의실을 나가는 이석주를 붙잡았다.

-참마도. 잠깐 얼굴 좀 보자고.

-…저 말씀이십니까?

회의 내내 녀석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비무 때와 마찬가지, 아니, 그보다 두 배는 더했다.

‘이놈도 설마 검영회 회원은 아니겠지.’

하하민이 신이 나서 주절거린 바로는 길드와 문파를 초월한 어쩌고저쩌고했는데.

혼자 남은 이석주가 나를 향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성민의 희생 하나 없이 혈귀단을 전멸시키시다니요. 그 무위와 의협에 감동하고 또 감동…….

-됐고. 니네 아빠 어디 가셨냐?

-예?

-내가 앞으로의 활동과 관련해서 긴히 의논할 게 있어서 그래. 온 세상 성민, 올 더 피플의 미래를 위해서 말이야.

머릿속이 꽃밭인 이석주는, 이정용이 보름 전에 홀로 괴물 사냥을 떠났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어디로 가셨는데?

-…그게, 목적지를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길드 내부에서도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무슨 일 당하실 분은 아니시지만, 너무 오래 걸리시니… 돌아오시는 대로 계룡문으로 연통을 보내겠습니다.

타이밍이 아주 딱이었다.

사리원 성으로 떠나기 위한 준비에는 열흘가량이 걸릴 예정이었다.

멀티에 가져갈 힐포와 마력증폭제를 만들고, 적어도 보름 이상 자리를 비울 은영단 없이도 성 방어가 잘 돌아갈지 확인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나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바로 이정용을 찾으러 나섰다.

지남천이 녀석의 사냥터로 점찍은 곳이 바로 여기, 마(魔)의 삼천(三川)이었다.

-염화검제가 정말로 사냥을 떠났다면 아마 마의 삼천으로 향했을 걸세. 그곳만큼 괴물의 밀도가 높은 곳은 이 남쪽 땅에는 드무니.

남쪽에서는 보기 드문, 완전히 버려진 땅.

포천성과 연천성과 동두천성. 폐허가 된 세 성을 꼭짓점으로 하는 삼각형의 지역.

-세 성 모두 2차 블랙데이 전까지는 꽤나 번성했지. 서울에 균열이 특히 많이 생성되었잖나. 서울 시민들이 경기도로 많이 흩어졌으니까. 경기 북쪽 3성 인구가 100만 명을 넘을 적도 있었다네.

지남천의 기억으로는, 차차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현무… 북의 재앙이 그 지역에 자주 출몰했지. 블랙데이마다 성이 한 번씩 파괴되었으니. 3차 블랙데이에 파괴된 포천성을 마지막으로 재건되지 않았네.

마의 삼천은 지남천에게 들었던 대로 괴물로 가득했다.

‘뒈지지만 않는다면 경험치 올리기에 딱이기는 한데 말이지.’

그건 어디까지나 김강산이나 서은창 수준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지 이정용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날, 남지호를 향했던 흑염에서 느껴지던 마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놈이 마력을 숨기고 있는 줄은 알았으나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다른 길드장들의 마력이 화경이라면, 이정용은 현경의 고수.

그것도 아주 높은 경지의 고수다.

그에 비하면 나는…….

깨달음은 처음부터 현경의 경지였으나,

단전에 쌓인 내공은 아직도 화경을 벗어나지 못했다.

삼반공의 3절 결(結)과 4절 산(散)은 그 현경의 깨달음을 담아 창안한 무공.

그만큼 위력적이지만, 내력 파먹는 하마나 다름이 없다.

내 일천한 내력으로는 펑 펑 기공을 쏴대는 일은 삼가야 한다. 그래서 항상 효율적으로 내력을 쓰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만약 이정용과 검을 맞댈 일이 생긴다면, 내력을 아껴가며 싸우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다. 전력을 다해도 승리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상대…….

왜 내가 이딴 계산을 하고 있지.

‘혈왕놈처럼 살인귀라도 될 셈이냐, 나새끼야.’

그저 대화를 하러 왔을 뿐이다.

놈과 검을 맞댈 생각은 없다.

없어야 한다.

“키야아악!”

우거진 잡풀 속에서 오미호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사람이 기껏 사색에 빠져 있는데 말이지.

아무튼 괴물 놈들이란.

뒷발로 땅을 걷어찬 놈이 침이 떨어지는 아가리를 벌리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갈퀴처럼 날카로운 앞발이 햇볕에 번쩍였다.

그리고, 곧,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다.

놈의 뒤에 따라온 세 마리 삼미호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신세가 되었다.

“뭐가 이렇게 많냐고.”

나는 가볍게 투덜거리며 다시 걸음을 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 섰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 이곳이 아마…….’

-검룡. 지금 마의 삼천으로 향할 셈인가?

이야기를 마치고 떠나려는 나를 지남천이 붙잡았다.

-당연하죠. 제가 시간 낭비 딱 질색인 거 아시면서. 아, 애들한테는 영약 찾으러 갔다고 해주세요. 또 괜히 걱정할라.

지남천이 이마를 구겼다.

-내가 한 이야기는 귀담아들었겠지?

-그럼요. 마의 삼천은 괴물이 졸라리 많은 지역이다. 어쩌면 그곳에 재앙의 둥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때요, 잘 들었죠?

-…검룡. 자네가 서의 재앙 백호를 소멸시켰다는 사실은 나도 안다네. 하지만 그 뒤로 사흘간 사경을 헤매지 않았나. 후유증이 없어 천만다행이었네만,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네.

나도 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사실도 나는 안다.

백호를 잡으며 선천진기를 꽤나 사용했고, 그것은 끝내 채워 넣지 못했다는 사실.

간단히 말하자면, 수명이 줄었다.

뭐, 이미 환골탈태를 했으니 칼 맞아 뒈지지 않으면 150살은 훌쩍 넘어서까지 살 테고. 그 중 4분의 1정도 줄어도 100살 넘게 사니까 남들 수명보다 훨씬 길지 않느냐 싶기도 하지만…….

…최지수나 김강산이 알면 길길이 날뛰겠지.

하하.

하하하.

하루이틀 잔소리로 끝나지는 않을 거다.

-걱정 마세요. 길드장님까지 왜 그러세요. 지수 형 옮았어요?

-…검룡. 제발 몸조심하시게나. 자네는 이제 세상의, 모든 세상 사람들의 희망이야.

세상의 희망이라.

좀 간지럽고, 좀 민망했다.

그리고 솔직히 기분이 좀…….

좋았다.

‘소화 네 말대로 내가 허명에 휘둘리기는 하지.’

가벼운 헛웃음을 흘리며, 나는 넓게 펼쳤던 기감의 그물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다시 펼쳤다.

더 좁게, 대신 훨씬 섬세하게.

가늘게 뻗어나간 기의 그물들이 잘게 흔들렸다.

공기가 움직이고 있다.

바람 때문이 아니다. 이 기감의 그물에 잡히는 선뜻하고 찐득거리는 느낌은…….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었다.

긴장된 가슴이 쿵쿵거리며 울렸다.

‘…이게 둥지라고?’

오랜만이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익숙한 느낌이 기감의 그물에 감각되고 있었다.

괴물의 마기와는 다른, 특유의 마기(魔氣).

농도는 옅으나 종류는 확실히 그것이었다.

그 마기는, 하나의 점을 중심으로 느릿느릿 그 주변을 휘돌고 있었다.

한 점.

기둥이 굵고 가지가 두껍게 자란 빽빽한 나무 사이의 허공.

눈으로 보기에는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는 장소다.

높은 침엽수와 커다란 이파리를 매단 활엽수가 울창하게 자라고, 그 이파리 사이로 가느다란 햇살이 들이치고, 나무 그림자 아래 잡풀이 무성하고, 바위 아래 파란 이끼가 낀,

그저 평범한 산의 풍경이다.

하지만, 기감의 그물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균열 같은데.’

마기를 뿜어내고,

그럼으로써 이미 지상에 자리한 괴물의 힘을 강화하고,

또한 괴물을 뱉어내는,

활동기의 균열.

‘이걸 없앨 방법을 찾아낸다면, 균열을 소멸시킬 수 있을지도.’

꼬올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내 목구멍에서 만들어낸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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