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96화 (96/122)

96화. 오롯이, 홀로 (2)

콰아아!!!!

월영검의 검끝에서 쏘아낸 적(積)이 바위를 박살냈다.

굉음과 함께 집채만한 바위가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그뿐.

“안 되네.”

마기가 흘러나오는 한 점.

그곳은 적(積)의 타격을 전혀 받지 않았다.

흰 강기의 구슬은 마치 허공을 지나듯 그 점을 지나쳐 그 뒤에 놓인 바위를 박살냈을 뿐.

‘통하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활동기가 아닌 지금도 짙은 어둠이 일렁이는 균열과 달리 눈에 보이는 형체는 없다. 마기의 양 역시 비교할 수 없도록 적다.

하지만 그 기운만은 블랙데이의 균열에서 느껴지는 느낌과 완전히 같다.

마기가 휘도는 곳은 ‘점’을 중심으로 한 지름 10여 미터의 공간.

아마 이곳이, 재앙의 둥지일 터.

이 둥지를 없앨 수 있다면…….

‘균열을 없애는 것 역시 가능할지도.’

내 환생의 시작과 동시에 나타난 그것.

이 빌어먹을 세상의 원인.

균열을 없앨 수만 있다면.

나는 다시 기운을 끌어올렸다.

박살낼 유형(有形)이 없으니 파(破)는 시도해 볼 수도 없고.

적(積)이 안 통한다면, 다음은…….

월영검을 가득 메운 기운이 주변으로 흘러나갔다.

줄기줄기 뻗어나간 진기가 내 의지에 따라 먼지처럼 작은 조각으로 나뉘어졌다.

진기(眞氣)는 외기(外氣) 속으로 스며들고, 외기는 진기를 향해 모여들었다.

곧,

하나로 뒤엉킨 진기와 외기가 백회와 승장, 장강과 회음을 통해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으로 흘러들어왔다.

삼반공의 3절, 결(結).

두 가지 기운이 폭우처럼 기맥을 휩쓸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하나의 단전이 되어 뒤엉킨 기운을 필사적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고요한 파공성과 함께,

월영검을 에워싼 빛줄기가 섬광처럼 쏘아져 나갔다.

느껴지지만 보이지 않는 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점.

결(結)로 형성된 기운이 그 점에 닿는 순간.

콰아아아아!!!!!!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응축된 진기가 수천 조각으로 흩어져 허무하게 소멸했다.

하지만,

‘…닿았다.’

그대로 점을 통과해 바위를 박살냈던 적(積)과는 다르다.

결(結)은 분명 점을 감각했다.

점과 부딪쳤고, 폭발했다.

그렇다면,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고.”

나는 다시 기운을 끌어올렸다.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월영검을 희게 빛냈다.

.

.

.

정수리 위에서 내리쬐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었다.

“으악악!!! 악악!!!”

나는 머리를 움켜쥐며 바닥을 뒹굴었다.

젠장에다가 제기랄을 더하고 시발을 곱하면 지금 내 기분이다.

‘…이놈의 내력! 쓰레기 같은 나새끼의 내력!’

저걸 박살낸다고 끝이 아니다.

아마 재앙이 나오겠지.

재앙은 블랙데이에만 활동한다는 원칙은 이미 깨졌다.

괭이갈매기놈이 버젓이 보령에 나타났으니까.

아마, 어떤 덜떨어진 놈들이 그놈의 둥지를 박살냈겠지.

…지금의 나처럼.

즉, 이 둥지를 박살내면 재앙이 튀어나온다는 의미다.

주작은 4차 블랙데이에 뒈졌고 백호는 나한테 뒈졌으니.

남은 건, 청룡(靑龍)과 현무(玄武).

놈들의 활동 지역으로 보면 이것은 현무의 둥지일 가능성이 99.99퍼센트다.

뱀처럼 긴 목과 꼬리를 가진 검은 거북.

어떤 것으로도 파괴하지 못한다는 등딱지에 대가리를 숨기고 맹독과 빙결 공격으로 상대를 녹여 죽이고 얼려 죽이는 비겁한 놈.

지금 이곳에서 현무마저 소멸시킨다면 네 재앙 중 세 놈이 사라진 채로 5차 블랙데이를 맞을 수 있다.

블랙데이의 공포는 균열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들보다 저 재앙 때문이 더 컸다.

순간이동을 써대며 포위를 무위로 돌리고,

이곳저곳에 나타나 광범위한 속성 공격으로 한순간에 모든 방어를 무력화하는,

어떤 이들은 신의 현신이라 여기며 두려워하는 공포의 대상.

이 거북뱀놈을 이곳에서 박살내면 이전보다 훨씬 수월한 블랙데이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마지막 하늘이 어쩌고 죽음이 뒤덮고 어쩌고 하는 소리 때문에 불안한데, 조금이라도 위험 요소를 줄일 수 있다면 나야 땡큐지.

괭이갈매기놈은 내가 소멸시켰다.

그동안 빡센 수련을 거듭했으니 이 거북뱀의 소멸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

하지만…….

‘이놈이 뒈지고 또 기생충이 튀어나오면……?’

재앙은 혈왕놈처럼 작은 그릇이 아니다.

기생충의 격을 받은 백호를 내가 어떻게 소멸시켰는지는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뒈질 뻔했다는 사실뿐.

…어쩔 수 없네.

나는 움켜쥔 머리카락을 놓고 상체를 일으켰다.

바닥에 앉아 팔짱을 꼈다.

내 주변, 현무의 둥지는 완전히 폐허였다.

연속적인 기공으로 흙은 파였고 바위는 모두 박살났으며 나무라고는 한 그루도 남지 않았다.

마치 핵폭탄이 터진 듯한 황폐한 풍경을 한 바퀴 휘돈 내 시선이 둥지의 경계 너머를 향했다.

“저기요. 구경 많이 하셨으면 슬슬 나오시죠?”

***

높게 자란 두터운 거목 뒤에서 걸어 나온 염화검제 이정용이 서림을 향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이군, 계룡검룡.”

“그런가? 몇 달 안 지났는데.”

“그 몇 달 사이 대단한 일을 했더군.”

“혈귀단 놈들 박멸한 거? 걔네들이 겁도 없이 계룡을 찔렀으니 당연한 결과였죠.”

염화검제는 가볍게 어깨를 추키며 대꾸하는 눈앞의 미청년을 가만히 응시했다.

‘계룡검룡. 오롯이 홀로 존재하는 자. 어쩌면, 인간을 초월해 신이 될 수도 있는…….’

랭킹전에서 빙화신녀와 서림의 비무를 관전했을 때 그의 머릿속에 비로소 온전히 나타났던 문장.

오래전 주시하는 예언자가 말했던, 그 문장.

[오롯이 홀로, 존재의 격을 초월하면 되거든.]

그 문장을 이해한 뒤로 염화검제는 계룡검룡의 힘의 근원을 탐구했다.

어떤 각성자들과도, 어떤 괴물과도, 재앙과도 다른 이질적인 힘.

‘이게 그 힘의 근원이라고……?’

그 근원을 알아내는 일은 염화검제의 예상보다 훨씬 손쉬웠다.

계룡검룡은 각성자가 아니라고 소리쳐 외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필사적으로 숨기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도 감히 떠올리지 못했을 뿐이다.

이정용 자신이 깨닫기 전에 그랬듯이.

-희망보육원에 있을 때 보육원의 원생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단전을 만들고,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여 내력을 쌓고, 내공을 활용해 무공을 펼치는…….

-잠깐. 잠깐.

계룡에 파견한 몇몇 정보원이 가져온 정보들은 대동소이했다. 그리고 그 정보는 이정용을 오랜만에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건, 무협소설의 설정이잖나.

-예, 검제님. 황당무계한 소리로 들리실 테지요. 소설에나 있는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모두가 같은 말을 하더군요.

-…그 훈련을 통해, 내공이라는 것을 얻은 자가 있나?

-없습니다.

-그 훈련 방법을 정리해 보고하라. 그리고 …세상에 남아 있는 무협소설을 찾아오도록.

-소설은 얼마나 필요하실까요?

-가능한 한 많이.

곧 박살난 도서관과 폐허가 된 아파트 이곳저곳에 방치되어 있던 무협소설들이 이정용의 마호가니 책상 옆에 가득 쌓였다.

이정용은 만 권의 책을 탐독하고, 그나마 티끌만큼의 신뢰성이 있는 내용들을 분석하고, 정리하고, 서림이 보육원의 원생들에게 전수하려다가 결국 포기했다는 그 훈련 방법에 따라 가부좌를 틀고 기(氣)를 느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실패했다.

아무리 해도 기는 느껴지지 않았고, 단전은 생성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체념할 수는 없었다.

‘순순히 포기하기에는 보상이 지나치게 크지.’

신이 될 수 있는 기회.

만약 주시하는 예언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필멸자의 운명에서 벗어나 신이 될 수만 있다면.

괴물이 들끓고 죽음으로 뒤덮인 이 멸망은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그 기회를 내준 축복일 터.

‘오롯히 홀로 존재하는 힘은 당장 얻을 수 없으니…….’

이정용은 ‘존재의 격’을 ‘초월’하는 데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오롯이 홀로’라는 주시하는 예언자의 말이, 힘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힘의 격에 대한 표현이기를 기대하면서.

이정용은 자신의 마력이 인간의 한계에 거의 다다랐다고 느꼈다.

언젠가부터 마핵을 흡수해도, 상급 괴물을 잡아도, 마력이 거의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

더 시도해볼 만한 대상은 이제 재앙뿐이었다.

계룡검룡이라는 자가 보령에 나타난 백호를 닮은 괴물을 해치웠다는 정보가 들어왔을 때.

이정용은 대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그 상급 괴물이 진짜 백호일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설마 하는 의혹이 확신으로 바뀐 것은, 파천궁의 ‘이른 개화’ 작전 보고서를 손에 넣은 후였다.

120명의 술사를 동원하고 50킬로그램이 넘는 마핵을 쏟아 부어 재앙의 둥지를 블랙데이와 같은 짙은 마기로 채워, 재앙을 깨우는 작전.

어렵게 손에 넣은 그 작전 보고서의 결말은 ‘실패’였다.

이르게 재앙을 깨웠으나, 그 재앙의 마력은 블랙데이의 70퍼센트에 달했다.

재앙을 깨우는 데에 들어가는 노력과 재앙을 놓쳤을 때 발생 가능한 피해를 고려하면 작전을 폐기한 파천궁의 결론 역시 타당하다고, 이정용은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계약이 있다.’

이정용은 기대성과와 손실위험을 신중하게 계산했다. 마(魔)의 삼천(三川)으로 향한 것은 그 계산의 결과였다.

둥지를 찾아낸 이정용은 ‘이른 개화’ 작전의 내용대로 둥지의 중심, 재앙의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하는 ‘틈새’에 마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준비해온 50킬로그램의 마핵의 절반. 그만큼의 마력으로 둥지를 채우는 데에 열흘이 걸렸다.

‘길드의 술사들을 데려왔다면 이미 둥지를 열었을 것을.’

그의 예상보다 마기가 짙어지는 속도가 더뎠다.

‘하지만 아직 계약에 대해 밝힐 시기가 아니니.’

둥지만 열린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정용은 재앙을 소멸시킬 자신이 있었다.

남(南)의 재앙 주작(朱雀)은 자신보다 마력이 낮았던 무등길드의 전대 길드장에게 소멸했다.

서(西)의 재앙 백호(白虎)는 아직 햇병아리인 계룡검룡에게 소멸했다.

홀로 오롯이 존재하는 검룡의 힘은 분명히 탐이 나지만, 현재 지닌 힘만으로는 자신이 검룡보다 확실히 앞선다.

‘충분하겠지. 혹시나 위기가 닥친다면 또 수가 있으니.’

주시하는 예언자와 계약하며 약속받은, 세 번의 현신.

-이 계약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너를 통해 나는 네 세상과 연결된다. 너는 나로 인해 내 세상과 연결된다. 염화검제 이정용, 너는 다른 필멸자보다 더욱 내 세상에 가까이에 존재하게 된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정용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했고, 이제 한계에 부딪혔다.

-그게 전부인가?

[하여튼 욕심이 많다니까. 그 점이야말로 네 최고의 덕목이지.]

-그게 전부냐 물었다.

[대범하기까지.]

균열 속의 입은 클클거리며 웃은 뒤 이정용이 기다리던 대답을 내놓았다.

[네가 부르면 내 진체의 힘을 빌려줄 수 있어. 딱 세 번뿐이니까 현명하게 쓰라고, 친구. 죽기 전에 이 계약에 내가 ■■한 ■은 벌어줘야지.]

계약자의 마력에 따라 한계가 생기기에 100퍼센트의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했다.

하지만, 신의 힘이다.

등장만으로도, 존재만으로도,

손이 떨리고 등골에 식은땀이 돋게 만들던,

염화검제라 불리는 자신으로 하여금 난파된 배에서 나무판자 하나를 붙잡고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던져진 듯한 끔찍한 막막함을 느끼게 만든,

그 엄청난 기운,

그 어마어마한 힘의 일부만 빌릴 수 있다면.

현무의 소멸은 결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은 격을 초월한 존재에 한 발 다가갈 터.

오늘 역시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로 마핵의 마력을 ‘틈새’에 흘려보내는 작업을 하던 이정용은,

마(魔)의 삼천(三川)에 흩뿌려놓은 작은 불꽃을 꺼뜨리며 다가오는 이의 자취를 감지했다.

그는 틈새에 흘려보내던 마력을 끊어내고 곧바로 모습을 숨겼다.

‘검룡. 저자가 왜 이곳에……?’

이정용은 마력을 숨긴 채 서림이 틈새를 향해 흰빛의 공격을 퍼붓는 모습을 주시했다.

저런 식으로 둥지가 열릴 리 없었다.

세계의 틈새이자 재앙의 쉼터인 둥지가 저런 식으로 열릴 리 없었다.

자신의 공격 역시 전혀 통하지 않았었다.

틈새를 겨냥한 검은 허공만 갈랐고,

활염(活染)은 공기만 불태웠으며,

흑염(黑染)도 역시 틈새를 허무하게 통과했다.

‘이른 개화’ 보고서에 적혀 있던 내용대로였다.

둥지를 감싼 보호막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마핵의 마력을 흘려보내 마기를 높이는 방법밖에 없다.

그래야만 했는데.

‘…공격이 통하다니.’

검룡이 두 번째로 쏘아낸 빛줄기는, 자신의 모든 공격이나 검룡의 첫 번째 공격과 달랐다.

그것은 틈새를 통과하지 않았다.

그것은 틈새와 격돌해, 폭발했다.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고.

그 뒤 끈질기게 틈새를 공격하는 검룡을, 염화검제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관찰했다.

가부좌를 틀고 두 손을 무릎 위에 가만히 올린 채 눈을 내리감는 자세.

그가 원생들에게 알려주었다던 수련법의 ‘운기조식’ 자세를 취한 검룡이 십오 분 뒤 벌떡 일어나 다시 검을 쥐었다.

검이 새하얀 빛을 뿜어내고, 빛나는 줄기줄기가 폭발하듯 터졌다가 일순간 검룡을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그리고.

눈부신 빛의 덩어리가 되어 틈새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찰나의 순간.

아주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정용이 서늘한 눈빛으로 서림을 응시했다.

‘저것이 바로,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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