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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97화 (97/122)

97화. 오롯이, 홀로 (3)

이정용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서림이 소주천과 결(結)을 반복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검룡이 가르침에 인색한 자는 아니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 사람에 한정된 범위야. 저 힘을 내가, 가질 수 있다면…….’

신이 될 수 있는 기회.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강렬한 유혹이었다.

그 기회의 문을 열 열쇠가 숨어 있는 자신을 향해 말을 걸었을 때, 이정용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저기요. 구경 많이 하셨으면 슬슬 나오시죠, 염화검제님?

검룡 정도의 고수가 자신의 존재를 몰랐다면 그것이 오히려 놀랄 일이었으므로.

***

“나를 찾아왔다고?”

“네.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나는 입술 끝을 끌어올리며 팔짱을 꼈다.

공기를 찌르는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놈의 것이 아니다.

나에게서 새어나오는 살기였다.

-엄마는 KKK단으로 몰려서 살해당했어.

남지윤이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남지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저 추측으로 끝났을 사실이었다.

KKK단이 존재한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리고, 불안과 불만이 들끓던 인간들에게 혐오의 이유를 마련해준 장본인이 내 눈앞에 있다.

이정용이 엄마를 죽인 것은 아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엄마의 가슴을 꿰뚫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놈은, 이 새끼는 그 죽음의 원흉이다.

그리고.

‘남지호를 죽였지.’

억누르던 살기가 다시 스멀스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각성자들은 기(氣)를 느끼지 못한다.

살기(殺氣) 역시 기(氣)의 일부.

아마 느끼지 못하겠지만…….

‘이 정도 경지에 오른다면 어떤 식으로든 가능해질지도 모르지.’

애써 입술 끝을 끌어올리며, 나는 최지수와 나눈 대화를 되새겼다.

-정보가 여러 번 꼬여 있어 발견하기 어려웠지만 대한길드에서 조직적으로 KKK단의 존재에 대한 거짓 정보를 퍼뜨렸다는 은창이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겠지. 걔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대한길드의 목적은 명확한 소수의 적을 만들어 혼란의 시대를 종식시키는 것이었던 듯하다.

-자신들 마음대로, 선을 그어서?

-그렇다.

최지수의 목소리와 얼굴이 모두 어둑했다.

-그 빌어먹을 계획은 성공했고 말이지.

-안산성 전투 이후 전국의 사망자가 확연히 줄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감소 비율이 최소 30퍼센트로 추정된다. 효과는 있었다고 판단해야지.

-소수를 희생시켜 세상의 안정을 얻었다는 거지?

최지수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 림아. 네가 그때 그 염화검제를 습격한 혈귀단원과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어렸을 때 잠깐 알던 아저씨야. 아주 어렸을 때 말이지. 기억도 잘 안 나는 사람이야. 그날은… 그냥 흥분해서 그랬어. 랭킹전 우승도 했겠다, 신나서 정신이 없었나 보지.

최지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혼란스럽구나.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선명한 적의 존재는 대살육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혈귀단이 종종 혈겁을 일으켰으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시대보다는 그쪽이 나았다.

정말로, 안다.

알고 있다.

지난 일을 따져 물으려 찾아온 게 아니다.

살기를 누르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어렵지도 않았다.

피부를 찌르던 서늘한 기운이 아릿하게 흩어졌다.

놈과 나의 주위에는 이제 어떤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살기도, 분명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이상하다고.’

살기는 욕망이나 기분이 아니라 의지에 의해 생겨나는 것.

랭킹전에서 이정용은 분명 나를 죽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랭킹전에서 빙화신녀와 비무를 할 때. 그 뒤로도.

놈에게서는 간헐적으로 살기가 스며 나왔으므로.

경쟁자를 사전에 제거하는 짓이야 구파일방 놈들부터 줄곧 해온 짓거리니 전혀 이상할 게 없지만.

이정용이 숨어 있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놈에게서 살기가 풍기지 않았으므로 두고 본 것뿐.

몇 시간을 줄곧 지켜보았는데 한 번도 놈은 살기를 흘리지 않았다.

아마, 마음을 바꾼 것이겠지. 그러니까…….

‘왜 바꿨냐고. 이놈아.’

설마 혈귀단의 습격을 막아내면서 성민들을 한 명도 희생시키지 않은 내 행적에 감동했다기에는…….

…그러면 캐붕인데.

이거, 참.

기분이 애매모호하다.

그렇다고 그때는 나를 죽이려고 했으면서 왜 이제 마음을 접었느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 찝찌름한 부분만 제외한다면.

‘파트너로서는… 아주 적합해.’

나는 균열을 닮은 이 둥지를 박살낼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고,

놈은 둥지가 박살나면 튀어나올 재앙을 잡아 경험치를 쌓고 싶다.

즉, 목적은 다르지만 목표는 동일하다는 말씀.

적어도 지금은 믿어도 괜찮을 터.

나는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검제님, 우리 듀오 한 판 뛰실?”

.

.

.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엄마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자 동시에 남지호를 죽인 인간과 나란히 섰다.

“준비됐나.”

“그쪽은요?”

“진작 챔픽 끝냈네만.”

“세상 망하기 전에 게임 좀 하셨나 봐요?”

“…자네 같은 젊은이가 이런 표현을 이해할 줄은 몰랐군.”

“보육원이 옛날 학교 건물이라, 낙서가 많더라고요.”

나도 검제놈한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어…….

심지어 이놈 조금 신난 얼굴이다.

옛날 세상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서 심심했던 거냐.

“블랙데이 전에 후계자 수업으로 바쁘셨다더니, 다 개뻥이었나 본데요? 판타지 소설 읽으랴, 게임 하랴. 완전 백수 한량인데.”

“보통 사람을 흉내내 보았지.”

“어이구야. 취미도 고상하셔라.”

“보통 사람이 부러웠다네. 재벌 후계자로 살기도 나름대로 어려움이 많아서. 그런 드라마도 있지 않았던가. 재벌집 손주사위였나. 자네만큼 견문이 넓은 젊은이는 이것도 들어본…”

“됐고, 시작하죠.”

네 녀석 서사 전혀 듣고 싶지 않거든요.

내가 놈의 말을 끊으며 기운을 일으켰다.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월영검의 검날을 희게 채우고,

이정용이 나를 주시하며 타이밍에 맞춰 마력을 끌어올렸다.

엄청난 마력이 놈을 향해 몰려드는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력.

기생충놈의 격을 받았던 혈왕놈을 훨씬 뛰어넘는다.

마력의 크기만으로는 괭이갈매기와 거의 비등하다.

하지만 그쪽은 순진해 빠진 괴물이고, 이쪽은 노회하기 그지없는 인간.

아무래도 정면에서 들이댈 생각은 접어…….

‘측면에서도 들이대지 말자고. 나새끼야.’

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 놈의 쭉 뻗은 두 손바닥에서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열흘? 열흘 동안 그 짓거리를 했다고요? 그리고 열흘을 더 해야 한다고?

-파천궁의 보고서에서는 백이십 명 술사가 동원되어 보름 동안 마력을 불어넣었다 적혀 있었네만. 나 홀로 이십 일이면 굉장한 능력이지.

-그 괭이갈매기, 그놈들 기대보다 훨씬 쌩쌩했다면서요. 기껏 쌔빠지게 일찍 깨웠는데 마력 빵빵하면 그게 무슨 보람이래?

-…다른 생각이 있는 모양이군.

놈은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빨리 돌았다.

서은창에 최지수를 더해 놓은 놈이다. 그런데다가 뱃속에 능구렁이를 키운다. 재수 없는 놈.

-다 봐 놓고 뭔 소립니까. 저거, 타격 가능하던데. 괜히 마력 넣어서 재앙 키울 필요 없이 박살내면 장땡이겠는데?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검제놈의 말과 달리 분명 타격감이 있었다.

-다 봤지. 열세 번 공격하는데 다섯 시간이 소요되는 전 과정을 다 확인했고말고.

진짜 처음부터 봤네.

-타격은 가능했지만 피해는 없는 모습 또한 확인했지.

음… 제대로 보기까지 했네.

젠장. 부족한 내력 때우느라 소주천 돌리면서 해서 하루가 다 갔다.

더군다나 자연의 외기(外氣)의 양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꽃의 기운, 나무의 기운, 흙의 기운은 천천히 차오르기 때문.

덕분에 뒤로 갈수록 들인 품에 비해 결(結)의 기운이 약해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고.

-당연히 생각이 있죠.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검제놈은 말을 잘 들었다.

내가 지시한 대로 착실하게, 놈이 마력을 주변으로 흘려보냈다.

마력을 속성 공격으로 유형화하거나,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데 사용하는 것이야 수없이 봤지만 어떤 목적도 지니지 않고 그저 흘려보낼 수도 있는지는 몰랐다.

이거. 애들이 익히면 탐색술 대용으로 꽤 유용하게…

“대지속성 각성자가 사용하는 탐색술도 원리는 비슷하다네. 이 방식을 응용하면 대지속성이 아니라도 탐색술을 쓸 수 있지. 원하면 가르쳐 주겠네.”

놈이 다정하게 웃으며 친절하게 말했다.

내 말풍선이 바뀌었나? 아닌 거 같은…

“궁금해하는 얼굴이라 대답해줬을 따름이네. 검룡께서 워낙 계룡문의 각성자들을 알뜰살뜰하게 챙기시니.”

이놈. 내 머리에다가 CCTV 심어 놨냐.

왜 이렇게 사람 생각을 읽고 난리냐, 기분 나쁘게.

거기다가 대놓고 살갑게 구는 꼴이 아무래도 나에게 기대하는 게 있는 모양이다.

기대하는 건 네놈 자유인데.

주는 건 내 마음이다.

그렇다면, 뭐…….

‘마음 편하게 둥지부터 박살내 볼까.’

곧,

월영검을 채운 진기가 주변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까와 같은, 삼반공의 결(結).

다른 점은,

바닥난 자연의 외기(外氣)의 자리를, 검제놈이 흘려보낸 마력이 채운다는 것뿐.

괴물의 마기와도, 균열에서 풍기는 마기와도, 지금 저 틈새에서 스며 나오는 마기와도 다른,

각성자 특유의 마기가 둥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만지면 버석거리는 소리가 날 듯한 가볍고 바싹 마른 기운.

최지수에게 단전을 만들어주려고 시도했었던 진기도인(眞氣導引)에서 느낀 적 있는,

불속성의 마기(魔氣).

그 마기가.

먼지처럼 작게 나뉜 수백만 조각의 진기에 뒤엉켰다.

뒤엉켜 하나가 된 기운의 덩어리가, 내 의지에 따른 진기의 움직임에 따라, 다시 내 기맥으로 되돌아 왔…….

울컥.

핏물이 올라왔다.

나는 어금니를 짓씹으며 진기의 운용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과연, 염화검제라 이 말이지.’

내기가 끌고 온 놈의 마기가 끔찍하도록 많았다.

온 마력을 다 쏟아부으라고 말은 했지만…….

한 줄기 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승장과 백회, 회음과 장강을 통해 되돌아온 기운의 덩어리, 내력과 마력이 뒤엉킨 잡탕밥 같은 그 기운이 기맥을 마구잡이로 내달리는 중이었다.

수문이 열린 댐처럼,

아니, 숫제 댐을 무너뜨릴 기세로 기운이 날뛰었다.

‘…지나치게, 이질적인 기운이라서인가.’

기존의 결(結)로 결합했던 기운은, 외기라고는 했지만 결국 자연의 기.

시간을 들여 운기조식을 하면 그 외기는 결국 내기가 된다.

하지만, 마기는 다르다.

다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위험이 따른다는 것도.

하지만 시도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균열을 없앨 수 있다면.

이 세상을 예전으로 돌릴 수 있다면.

애들은 학교에 가고, 환자는 병원에 가고, 노인이 누워있을 수 있는 침대가 있는, 한지혁의 세상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죽은 뒤,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있다면.

“쿨럭!”

새빨간 피가 튀어나왔다.

나를 주시하던 이정용이 재빨리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계속, 해……!”

“검룡. 지금 상태가 좋지 않네. 그토록 무리할 필요는……!”

“제발, 닥치고, 해……!”

멍청아.

어차피 늦었다고.

지금 그만둬봤자 활화산처럼 제멋대로 기맥을 터뜨릴 듯 내달리는 이 잡탕 기운은 처치불가다.

어차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목적이라도 달성해야지.

지금의 문제는…….

‘마력과 내력의 이질성이 지나치게 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아마 될 것이다.

되어야만 한다.

뚝. 뚜욱.

인중으로 흘러내린 코피가 턱을 타고 내려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귀에서도 축축한 액체가 새어나왔다.

눈꼬리를 타고 같은 녀석이 흘러나왔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맛이 났다.

찐득한 피를 삼키며, 나는 눈을 내리감았다.

단심(丹深)을 열자,

단전 깊숙한 곳의 문을 통해 선천진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선천진기(先天眞氣).

무공 여하와 각성 유무와 무관하게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것.

사용하기 위한 내력이 아닌, 타고난 생명력 그 자체.

나조차도 잃은 선천진기를 되찾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러니까,

‘아주 조금만, 아주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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