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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98화 (98/122)

98화. 오롯이, 홀로 (4)

괴물화한 지현아를 치료하며 그의 선천진기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맑은 기운의 도움으로 지현아의 몸을 채우고 있던 마기를 뿌리치고 마핵을 파괴했었다.

그때와 반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그때와 반대로 하기만 하면…….

울컥.

다시 핏물이 올랐다.

결(結)로 형성한 기운의 덩어리.

진기(眞氣)와 마기(魔氣)가 뒤엉킨 그 기운의 덩어리가 서로 충돌하며 이곳에서 튀어오르고 저곳을 들이받으며 내 온몸을 제멋대로 휘젓는 중이었다.

기맥이 뒤틀리고 기혈이 역류하는 것은 모두 그 때문이다.

내 의지를 따르지 않는, 내 통제를 벗어난 기운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몸속을 내달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결(結)이 아니라 파(破)가 시전되게 생겼다.

괴물 몸뚱아리가 아닌, 내 몸속에서.

그렇게 되기 전에…….

열린 단심(丹深)을 통과해 단전으로 들어온 선천진기가, 단전을 휘젓던 기운의 덩어리와 부딪혔다.

부딪혔음에도,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선천진기.’

가장 맑은 기운은 무엇에도 스밀 수 있다.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고, 무엇과도 하나가 될 수 있다.

내 인도에 따라,

맑고 가느다란 선천진기가, 뒤엉킨 내기와 마기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 절반은 내력에 스미고,

그 절반은 마력에 스몄다.

그리고,

다시 엉켰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서로를 거세게 들이받던 이질적인 두 기운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선천진기라는 동질적인 기운을 나누어 받아 진기와 마기의 이질성이 약화되었기 때문.

네 바퀴.

다섯 바퀴.

여섯 바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두 기운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내기 사이로 마기가 스미고, 마기 사이로 내기가 스몄다. 스미고 뒤엉키고 스미고 뒤엉켜, 끝내,

하나가 되었다.

온전히 합쳐진 거대한 기운이 느릿느릿 단전을 휘돌기 시작했다.

내기도 아니고, 마기도 아니다.

선천진기는 더욱 아니다.

단전을 휘도는 기운에서 삼재혼원공 특유의 활달한 기운은 느낄 수 없었다.

불속성 각성자의 마력이 지닌 특유의 느낌, 마르고 버석버석한 느낌도 사라져 있었다.

선천진기가 지닌 청량함도 당연히 남아 있지 않았다.

결(結)은, 외기와 내기를 이어 붙여 한 덩어리로 만드는 기공.

내기를 중심으로 모여든 외기는 내기와 뒤엉켜 한 덩어리가 되지만, 각 기운의 특질은 그대로 유지된다.

내기는 그대로 내기고, 외기는 그대로 외기다.

하지만 지금은…….

각각의 기운이 지닌 특질이 사라졌다.

그 대신, 단전을 느릿하게 휘도는 이 기운은 제 나름의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녹인 버터처럼 부드럽고 촉촉한 느낌이 단전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니까.

결(結)이 아니다.

이 기공에 걸맞은 이름은…….

삼반공의 5절. 합(合).

…이라고 하기에는.

이 기공을 한 번 쓸 때마다 이런 식으로 선천진기를 소모해대면 내년쯤에 사망 예약이다. 그리고 내후년에 환생해서 내공 쌓기도 전에 또 뒈지…….

그럴 수는 없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하나로 합쳐진 기운을 조심스레 기해로 내보냈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기운이, 뒤엉켜 날뛰는 마력과 내력을 빨아들이며 임맥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독맥, 뒤이어 충맥과 대맥.

하나의 단전이 된 내 온몸 곳곳을 새로운 기운이 가득 채웠다.

그리고,

다시 흘러나갔다.

흘러나간 기운이 마력을 불러들여 더한층 크기를 키웠다.

그리고 다시.

또 다시.

기운이 기운을 부르고 그 기운이 다시 기운을 불렀을 때.

나는 눈을 뜨고,

가볍게 월영검을 뻗었다

스파아아아.

작은 파공성과 함께,

월영검에서 시작된 기운이 둥지의 틈새를 향해 뻗어 나갔다.

눈이 시리도록 새하얗게 빛나는 강기의 줄기가 틈새에 격중했고…….

콰가가가가!!!!!!

폭발했다.

공기가 아닌, 공간을 찢는 어마어마한 폭발.

그 폭발이 만들어낸 충격파가 내 몸을 정면에서 강타했다.

겨우 누르고 있던 기혈이 단번에 역류했다.

고통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피부가, 가죽이, 이내 뼈가 뒤틀리는 듯한 격통.

나는 한 움큼 피를 토해내며 있는 힘껏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내가 시전한 기공의 여파로 뒈지면 쪽팔려서 어디 말도 못 한다.

폭발에 휩쓸린 내 몸이 끈 떨어진 연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땅바닥에 처박히기 직전,

옆에서 튀어나온 손이 내 어깨를 잡았다.

나머지 한 손이 허리를 붙들었다.

염화검제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엉망이군. 그래서 재앙과의 전투가 가능하겠나.”

“…원래, 퉤, 혼자, 붙, 으려던, 거, 아녔, 나?”

입을 열자 핏물이 튀었다.

검제놈이 피를 토하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어내 정면을 향했다.

결(結)이 만들어낸 광경.

조금 어둑해진 하늘에 동그랗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찢어진 스케치북처럼.

구멍 뚫린 양말처럼.

…아니, 양말이라기에는 좀, 많이 크기는 하지만…….

나는 힘겹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구멍 너머로 보이는 세상을 가만히 응시했다.

연분홍빛 하늘이다.

비현실적인 색깔의 하늘 위로 손가락 같기도 하고 밧줄 같기도 한 모양새의 무엇인가가 뒤엉켜 있었다.

마핵처럼 온갖 색을 내며 스스로 빛나는…….

마른 나뭇가지에서 자라난 나무뿌리.

뿌리에 뒤덮인 오색의 열매.

열매의 껍질을 뚫고 튀어나온 윤기 나는 이파리.

그건 거대한 나무의 일부분 같았다.

일부이자, 전체 같았다.

셀 수 없이 많은 나뭇가지가 연분홍빛 하늘에 뿌리 대신 가지를 박고 열매를 드리우고 있었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지.

“우리가 둥지를 연 듯하군.”

“우리? 말은 바로 해야죠. 내가 열었지. 검제님이 한 게 뭐 있다고.”

“다 죽어가면서도 입은 살아 있군.”

죽기는 누가 죽냐.

이딴 내상, 소주천 몇 번 돌리면 다 회복…….

은 안 되겠지만.

검제놈이 혀를 차며 검을 뽑아들었다.

연분홍빛 하늘을 가리며, 검은 거대 거북이 막 그 구멍으로 뱀처럼 긴 대가리를 내밀고 있었다.

음.

지금은 정말 싸울 상태가 아닌데.

일단 역류한 기혈이라도 가라앉혀야…….

“내가 상대하고 있을 테니 운기조식을 하게나.”

이 양반이 운기도 알어?

내 뒷조사를 어지간히도 한 모양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또 놈이 대답했다.

“내가 검룡 자네에게 물을 것이 있어 사전조사를 했다네. 일단 저 재앙을 소멸시킨 후에 천천히 얘기를 나누세나.”

“콜입니다.”

물을 거.

나도 많다.

“합류하는 데 얼마나 필요하지?”

“십오… 아니, 삼십 분이요.”

그 사이 현무놈을 뱉어낸 구멍은 사라져 있었다.

하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름에 잠긴 회색이었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눈앞에 자리한 검은 언덕.

아니, 현무놈의 등딱지.

둥지에서 빠져나온 놈은 곧바로 양쪽 대가리를 등딱지 안에 감추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 등딱지의 크기가, 50미터쯤 될까.

미친놈마냥 날뛰던 괭이갈매기에 비하면 아주 얌전한 놈…….

은 아니었다.

어느샌가 무색무취의 맹독이 공기를 잠식했다.

이정용이 재빨리 검은 화염벽을 생성해 독을 불태웠다.

허공을 격하며 날아드는 뾰족한 철창들을 검으로 쳐내며 이정용이 말했다.

“현무는 처음인가?”

“네, 저놈 남방한계선이 서울이죠? 검제님은 구면이겠어요.”

“그렇지. 아무래도 자네 생각대로 된 듯하군.”

“왜. 저놈 마력이 평소보다 적어요?”

검제놈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모양이다.

“회복에 집중하게. 내 버티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을 테니.”

기왕이면 끝내기까지 알아서 좀 하지 그러냐.

검제놈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바닥을 걷어찼다.

검제놈의 검이 단번에 검은 불길에 휩싸였다.

20여 미터 떨어진 나에게까지 거북뱀놈이 뿌려대는 독기가 침투했다.

검제놈의 흑염이 독을 불태우고 등딱지에 부딪혀 허무하게 소멸했다.

‘장기전이 되겠어.’

나는 조금 떨어진 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 눈을 내리감았다.

곧, 단전에서 출발한 기운이 느릿느릿 기맥을 휘돌기 시작했다.

.

.

.

‘일단 급한 불은 껐고.’

처음부터 내력의 소모로 인해 생긴 내상은 아니었다.

이질적인 기운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위험이 초래되었을 뿐.

문제는, 선천진기를 또 갖다 썼다는 건데.

대충 확인해보니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양이었다.

기맥에서 날뛰는 검제놈의 마력을 방치했더라면 최소 주화입마, 일반적으로 사망이었을 테니 목숨 값이라 생각한다면 아주 적은 양이고.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쓸 일이 없었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많은 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꽝이네.’

만약 이 방법으로 균열을 없앨 수 있다 해도 쓸 수 없는 방법이다.

계룡 인근에만 균열이 세 개인데 그거 소멸시킬 때마다 선천진기 가져다 쓰면 비명횡사 각이니깐.

나는 아쉬움을 누르며 격렬한 공방을 이어가고 있는 검제놈과 재앙놈을 응시했다.

“검룡! 회복했으면 합류하게!”

이정용이 외쳤다.

곧이어 그가 화염탄을 날려 현무가 생성한 진강창(眞强槍)을 박살내고, 검에 불길을 일으켜 짙은 독무를 단번에 불태웠다.

저거, 저거.

아무래도 살살 싸우는 거 같은데.

재앙이랑 붙는데 힘을 아껴서 어디다가 쓰려고…….

설마… 나?

“검룡, 뭐 하나! 아직 회복이 덜 되었나?!”

놈이 나를 재촉했다.

하하. 설마.

설마 내 뒤통수를 치겠어?

나를 해하고 싶었다면 운기조식하기 전에 했겠지.

더군다나 여전히 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 일단 거북뱀부터 박살내고 생각하자고.’

나는 놈들을 향해 다가갔다.

두어 발 가까워졌을 뿐인데 짙은 독이 호신강기를 뚫고 기맥으로 스몄다.

아무리 기존보다 약화된 상태라 해도 재앙은 재앙.

삼매진화로 침투하는 독기를 태워내며 이정용의 옆으로 다가갔다.

흑빛으로 빛나는 얇은 불꽃의 막이 놈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흑염을 호신강기처럼 사용해 독의 침투를 막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놈들을 향해 다가서자,

스촤아아아!

땅이 솟구치고, 수백 개의 강철침(鋼鐵針)이 되어 나에게 쇄도했다.

상급 대지술사가 흔히 만들어내는 강철이 아니다.

딱 한 번, 마력증폭제를 처먹은 최지수가 만들어냈던 진강(眞鋼).

아마 그보다 몇 배는 단단할 터.

월영검을 빠르게 휘둘러 검막을 형성해 강철침을 막아내며, 현무놈의 등딱지 위에 올라선 이정용의 옆에 도착했다.

“현무의 공격은 대지속성과 맹독이네. 모든 공격에 독공이 함께한다고 보는 편이…….”

“대충 알아요.”

“얘기가 쉽겠군.”

“순간이동은 못 쓰네요?”

“자네가 둥지를 힘으로 부숴낸 덕이야.”

“뭐, 그것도 알…….”

콰직!

허공에서 생성된 철창이 검제놈의 등줄기를 향해 날아들었다가 휘두른 검에 박살났다.

나에게 날아든 철창도 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철창이었던 그것은 단번에 검은 맹독으로 변해 주변을 에워쌌다.

…독을 바른 창이 아니라, 독으로 만들어진 창이었냐고.

마비독이었다.

농도 짙은 맹독이 호신강기 사이로 파고들고,

마혈에 짚인 듯 몸이 파드득 굳었다.

나는 삼매진화를 일으켜 기맥에 침투한 마비독을 불살랐다.

그리고 주변의 독무를 흩어내기 위해 월영검을 거세게 휘두…….

르려다 멈췄다.

이정용이 형성한 불길이 한 발 먼저 맹독을 불태웠기 때문.

이 정도 수준 되는 놈이랑 듀오 뛰는 건 처음인데.

…솔직히 편하기는 하네.

현무의 등껍질에서 짙은 독무가 폭사하듯 퍼져나오고, 뒤이어 땅에서 솟아오른 강철창이 독무 사이로 쇄도했다.

수십 자루의 독검이 독을 뿌리며 산화하고, 다시 화살이 날아들었다.

물리공격은 0. 제로.

현무놈은 등딱지 안에 머리와 꼬리를 숨기고 오직 속성 공격만 시도했다.

‘이게 현무의 방식이라고 했지.’

지금까지 접한 모든 대지술사들의 속성 공격은 어린애 장난이라고 여겨질 정도의 강맹하고 빠른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각성자들이 습득한 속성 공격이 바로 재앙을 따라한 것이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꽤 상대할 만한데?’

희게 빛나는 검망(劍網)이 독창을 가두고, 소멸시켰다.

연이어 날아오는 화살비를 검막(劍膜)으로 방어하고,

등딱지가 뿜어낸 독무를 적(積)으로 흩었다.

이정용도 전혀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공격력은 확인했으니, 방어력을 확인해 볼까.’

끌어올린 진기가 월영검의 검끝에 희게 맺혔다.

콰앙! 콰아! 콰콰콰가!!!

적(積), 적(積), 적(積), 그리고 적(積).

월영검이 순식간에 연속적인 적(積)을 쏘아냈다.

열다섯 방 강기 연격은 모두 정확히 같은 지점을 타격했다.

격렬한 폭음이 귀를 강타했다.

그리고…….

‘안 통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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