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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99화 (99/122)

99화. 오롯이, 홀로 (5)

안 통할 것 같았다.

괭이갈매기한테도 잘 안 통한 적(積)이, 방어력으로는 한반도 제일로 꼽히는 거북뱀의 갑주에 통할 리가 없지.

놈이 다시 독창, 진강화살, 독무 3종 세트를 시전했다.

그리고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내 공격도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물론, 이정용의 공격도.

결국 우리는 놈의 등딱지 위에 선 채 공격을 멈췄다.

작전타임 시간이다.

“모가지를 빼내야 이 전투를 종결할 수 있는데. 꿈쩍하지를 않는군.”

이정용이 둘러친 검은 화염벽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철창을 녹이고 독을 불태우고 있었다.

좀 부럽다. 아니, 많이 부럽다.

김강산은 어느 세월에 이 수준이 되려나.

1일 1마핵이라도 먹이면 될까. 안 되겠지.

“아니, 그쪽은 처음부터 이 새끼 잡으러 오신 거 아녜요? 어쩔 생각이었어요?”

“순간이동이나 정신계 공격을 하려면 머리를 빼내야 하지. 그때를 노릴 계획이었네.”

음…….

합리적인 변명이다.

마력을 주입하여 놈이 깨어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힘으로 둥지를 박살냈기에 생긴 변수였다.

공격의 위력은 약해졌지만, 그래서 놈이 버티기로 들어서 버렸다는 것.

밤새 공격한다면 결국 이쪽이 이긴다.

그래도, 빨리 끝낼 수 있다면 그편이 낫다.

‘속도 엉망이고 말이지.’

문제는,

놈을 박살낸 다음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뱉었다.

“근데, 이놈 박살내면 이놈이랑 계약한 신이 현신하지는 않을까요? 지난번 백호 잡을 때 모가지 땄더니 엄청난 놈이 튀어나오던데.”

불어라.

뭐라도 불라고. 이 음흉한 놈아.

이정용은 무엇인가 알고 있을 것이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이놈은 계약자거든.

서울 성에 있던… 주시하는 예언자의 신전.

김영호와 최지수가 입을 모아 말하기를, 그 신전은 오직 서울성에만 있었다. 알려진 신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정용이 그 신전을 세운 것은 3차 블랙데이 직후.

괴상한 신전의 이름도 그렇고, 블랙데이에 계약했다는 혈왕놈의 기록도 그렇고.

주시하는 예언자.

그건 아마…….

‘이정용이 계약한 기생충의 이름이겠지.’

놈에게 계약과 기생충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순순히 대답해 주리라 기대하지는 않으나 거짓이 섞인 대답이라 해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아직 모자이크 처리된 단어들을 벗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놈이 어떤 말이라도 뱉어낸다면, 그것이 나에게 이해의 계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

이정용의 대꾸는 바로 나오지 않았다.

계약이 무엇인지 되묻지도 않았다.

분명 알고 있다.

무어라 대꾸할지 고민하고 있다.

나는 추측을 확신으로 변경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 그거 잡느라 뒈질 뻔했다고요. 살아남은 게 천운이었죠.”

“…백호가, 계약자였다고?”

역시.

계약에 대해 알고 있구나.

어째선지 놈은 동요하고 있었다.

견고하던 화염벽이 약해지고, 얇아진 천장을 뚫고 얼음 화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재빨리 검막을 생성해 쏟아지는 화살을 방어하고 삼매진화를 일으켜 맹독을 불태웠다.

“아저씨, 벽!”

정신을 차린 이정용이 다시 화염벽을 두텁게 세웠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아주 서늘했다.

“…검룡.”

“왜요. 뭐가 문젠데요.”

“현신한 신을 죽였다고?”

한 번이 아닌데, 검제놈아.

“안 그랬으면 내가 여기 없었겠죠.”

“자네도 계약자인가? 아니, 그럴 수 있나? 안 될 텐데……. 그런 식으로는… 빌려줄 힘이…….”

그랬으면 좋겠네.

나도 계약자였으면 참 좋겠네.

놈이 횡설수설하자 다시 화염벽이 약해졌다.

“검제노… 아니, 님. 일단 이 상황부터 정리하고 차분히 얘기하죠? 그래서, 이놈 잡으면 신이 튀어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아마 아니겠지.

그러니까 이정용이 이 거북뱀을 잡으러 혼자 왔겠지.

하지만 돌다리도 두들기는 게 좋다.

더불어 계약자라는 놈들이 얼마나 정보를 알고 있는지 확인도 하고.

“아닐세.”

“확실해요?”

“이 세상에 확실한 게 있기는 하나?”

거 참.

맞말이네.

“좋아요. 일단 잡아보죠, 이 거북뱀.”

***

이정용은 검을 쥔 채 제 옆에 나란히 선 미청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해사한 얼굴이 핏기없이 창백했다.

희고 가느다란 턱선 위에 핏자국이 눌어붙어 있었다.

둥지의 틈새를 깨뜨리며 얻은 부상이 꽤나 심각해 보였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검을 휘두르고 있다.

‘신이 현신한 백호를 소멸시켰다고. 검룡이 그 정도의 경지인가?’

거짓말이 아니다.

검룡은 거짓을 말하는 자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방금 전 목격한 무위 또한…….

혼란스러웠다.

랭킹전에서 빙화신녀와 비무를 하는 검룡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 혼란이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염화검제를 이토록 당황케 하지 못했다.

주시하는 예언자가 계약을 제안했을 때에도 염화검제는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정리하고, 계약을 수락했다.

검룡이 물을 것이 있어 자신을 찾아왔다 밝혔을 때.

염화검제는 적당한 대답을 해주고 검룡과 좋은 관계를 쌓아 무공을 가르쳐달라 부탁할 생각이었다.

검룡을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진작 결정을 내렸다.

한때 제거할 생각도 했었으나 그런 생각은 이미 지웠다.

‘얻을 게 많은 자야.’

랭킹전 결승전에서 검룡과 비무를 한 뒤로 이석주의 실력이 부쩍 늘었다.

그의 후계자이자 사랑하는 아들은 계룡문의 성장세를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은 듯했다.

어쩌면 검룡은, 그의 아들의 경쟁자가 아니라 동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검룡은 그 정도 되는 그릇이 되는 이였다.

검룡은 혈귀단에게 공격을 당한 보령을 버리지 않았다.

성동격서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보령을 지원했고, 결국 구원했다.

이석주는 그 일에 꽤나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석주가 검룡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검룡은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될 터.

이번 계룡문의 1주년 기념식에 이석주를 보낸 것은 계룡문의 사람들과 관계를 쌓고 오라는 의도도 숨겨져 있었다.

이석주가 계룡문과 좋은 관계가 된다면. 그래서 대한길드와 계룡문이 좋은 관계가 된다면.

검룡은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치기를 꺼리지 않을 터.

홀로 오롯이 설 수 있는, 그 힘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오늘 이곳에서 검룡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계룡검룡을 그리도 칭송하는 이유를 알겠군.’

짐작했던 대로, 아니, 짐작 이상으로 대단한 무위였다.

하지만 이정용이 오늘 감탄한 이유는 그 무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력을 더 이상 주입하지 않고 둥지를 부수면, 약화된 재앙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

검룡의 행적을 보았을 때, 둥지에서 깨어난 순간이동을 해서 이곳을 벗어나는 일만은 막고 싶었을 터.

순간이동에는 많은 마력과 집중이 필요하다.

필요한 마력을 얻지 못한 채 깨어난 현무는 예상대로 순간이동을 사용하지 못했다.

아주 짧은 시간에도 검룡은 수없이 많은 판단을 내리고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겼다.

신뢰하기 어려운 관계인 자신에게, 제 안위를 맡긴 채 운기조식을 하는 과감성까지.

‘이자를 온전히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다면……!’

검룡은 자신에게 물을 것이 있다고 말했다.

염화검제는 검룡과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그 질문이 계약에 대한 것임을 짐작했다.

주시하는 예언자의 신전.

서울성에 그 괴상한 초월자의 이름을 딴 신전을 지은 것은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바라서였다.

예언자는 모든 질문에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다른 계약자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이 신전을 보고 염화검제 자신이 계약자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을 터.

그자가 자신에게 접촉을 시도하기를 바라며 신전을 세웠다.

동료가 될 수도 있다.

적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 계약자가 가진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5년이 넘도록 그를 찾아와 계약에 대한 질문을 하는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계룡검룡.

이자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검룡이 계약자가 될 수가 있나.’

홀로 오롯한 힘을 가진 자다. 마력을 갖지 않은 자.

계약은 마력의 성장을 촉진하고, 초월자의 마력을 빌려 쓸 기회를 줄 뿐.

‘계약에 대한 건 어찌 알았을까.’

모든 것이 물음표였다.

자신의 힘으로 제어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절대로, 자신의 손에 쥘 수 있는 자가 아니다.

현신한 백호를 소멸시켰다면, 자신이 주시하는 예언자의 힘을 빌린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터.

‘동료일 때는 든든하겠지. 그러나 그 마음이 영원할 리 없다.’

염화검제는 지금껏 그런 이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지금이야말로 제어할 수 없는 자를 제 손 안에 쥘 수 있는 기회였다.

아마, 마지막 기회가 될 터였다.

“아저씨. 준비됐죠?”

검룡이 염화검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염화검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챔픽 끝냈네만.”

“아저씨. 그런 드립은 처음만 재미있는 거라고요. 보리찹니까. 얼마나 우려드시려고.”

검룡이 투덜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염화검제의 가는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왜 웃고 지랄입니까. 정 들어요.”

“정 들면 좋지 않은가. 계룡문과 대한길드가 친구가 된다면 한반도는 평화로워질 테지.”

염화검제가 진심으로 웃으며 진심으로 말했다.

이토록 매력적인 이는 실로 처음이었다.

대단한 무위.

널리 신뢰받는 행적.

정확한 판단과 과감한 실행력.

저 해사한 얼굴, 그 머릿속에 들어 있는 무공에 관한 지식까지.

‘…곁에 두어야겠군.’

홀로 오롯한 힘은, 검룡을 곁에 두고 제 사람으로 만든 뒤에 차근차근 알아내면 될 일이다.

“치이인구우우? 딸기케이크 오백만 상자 가져오면 생각해 볼게요.”

“딸기케이크가 마음에 들었나 보군.”

“뭐, 상큼하니 달달한 게, 맛은 있더라고요.”

“귀성하는 대로 딸기 생산량을 늘리라 지시하겠네…….”

가볍게 대꾸하며, 염화검제는 결정을 내렸다.

‘날아오르려는 새를 곁에 두려면, 날개부터 꺾어야지.’

***

어두운 흑빛의 화살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독화살.

화살에 독을 묻힌 독화살이 아니라, 화살 자체가 독으로 만들어진 화살이다.

놈과 십여 분간 맞붙다 보니 이제 강철화살과 독화살을 구분할 수 있었다.

독화살은 샤롸롸롸롸, 소리가 나고,

강철화살은 스앗앗앗앗, 소리가 난달까.

아무튼 이번에는 독화살이다.

그렇다면, 독이 퍼지지 않게, 검망(劍網)으로 상대해야지.

월영검이 지나간 길에 남은 검기가 커다란 반원을 형성했다.

내 몸을, 그리고 내 등 뒤에 선 검제놈을 모두 방어할 수 있는 크기.

화살의 뾰족한 끄트머리가 검망에 닿는 순간, 화살은 형체를 잃고 독무가 되어 흩어졌다.

그 독무가 퍼져나가기 직전.

반원이 온전한 구(球)가 되어 닫혔다.

흩어지려던 독무는 검망 속에 갇힌 채 소멸했다.

거의 동시에,

수십 자루 강철검이 사방에서 날아왔다.

빠르게 월영검을 휘둘러 다섯 자루 강철검을 막아내고, 취원보를 시전해 이정용의 등 뒤로 돌아가 월영검을 우하향으로 내리그었다.

카캉! 카카캉!

여섯 자루 강철검이 힘을 잃고 바닥을 굴렀다.

다시, 머리 위로 검을 들어올려 수평으로 휘둘렀다.

카카카카캌캌캉!

이정용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히던 여덟 자루 강철검이 월영검에 맞아떨어졌다.

‘거의 다 됐네.’

양손으로 움켜쥔 이정용의 검날에 어마어마한 마력이 맺히고 있었다.

-검제님이 껍질에 상처만 내주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능하겠어요?

-해보지.

이미 놈에게 파(破)를 시전하려 시도했었으나 실패했다.

거북뱀의 갑주에는 기(氣)가 스미지 않았기 때문.

등껍질의 표면을 감싼 반탄강기(反彈罡氣) 비슷한 방어막이 내 기운을 튕겨냈다.

아까 둥지를 박살낸 그 결(結)이라면 이 방어막도 뚫을 수 있을 터.

하지만 임시로 땜질해놓은 단전과 기맥은 결(結)을 시전할 상태가 아니다.

제대로 된 기공은 파(破) 한 번 시전하는 것이 한계다.

그리고,

‘능력 있는 파트너랑 듀오 뛰는데 나만 고생할 필요는 없지.’

내가 이정용의 앞에서 비켜나자,

놈이 움켜쥔 검을 등딱지를 향해 거세게 내리꽂았다.

검보다 먼저 닿은 것은, 검 주위에 일렁이던 흑염(黑染).

엄청난 마력을 응축한 검은 불꽃이 놈의 등딱지에 닿는 순간,

콰아!

작은 폭발이 일었다.

등딱지의 방어막에 막혀 튀어오른 불꽃의 조각이 다시 폭발하고, 작은 불티가 또다시 폭발했다.

한계까지 온도를 높인 좁은 공간에서 연쇄적인 폭발이 터지고 또 터졌다.

폭염(爆炎)이다.

과연 한반도 최강이라는 염화검제의 명성에 어울리는 한 수…….

였지만, 거북뱀놈의 방어막을 뚫지는 못했다.

그리고 검을 채운 마력도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이정용이 가볍게 검을 치켜들고는,

다시 거세게 내리꽂았다.

검끝은 연쇄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한가운데를 정확히 겨냥했다. 그 검끝으로 검기를 닮은 검은 기운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폭염(爆染)에 이은, 일염(一染).

모든 것을 녹인다는 흑염을 압축하고 또 압축한 가느다란 불길이 놈의 방어막에 닿았다.

그리고, 이내 파고들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정용은 뒤로 물러선 채로 화염벽을 세워 방어막을 만들었다.

이젠 내 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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