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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100화 (100/122)

100화. 아는 만큼 보이고, 이해하는 만큼 들린다 (1)

이정용이 세운 화염벽이 날아오는 독창을 불태웠다.

그가 폭염(爆炎)과 일염(一炎)으로 갑주에 만들어낸 작은 상처.

검날만큼의 넓이의 홈에 내가 왼손을 댔다.

‘…됐다.’

계속 튕겨나던 기운이, 작은 홈을 통해 현무놈의 몸속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놈의 몸속에서 고요한 폭발이 일었다.

삼반공의 2절 파(破)에 속을 뜯긴 놈이 괴성을 질렀다.

즉, 드디어 놈의 대가리가 나왔다는 소리.

얼굴 보기 더럽게 힘든 놈이다.

뱀처럼 긴 대가리 두 개가 등딱지 양쪽에서 솟아올랐다.

“눈을 감게, 검룡.”

“검제님도요.”

놈과 눈이 마주치면, 정신계 공격에 걸려든다.

마비, 혼란, 정신착란…….

뭐. 눈이야 감으면 그만이니까.

짧은 대화와 끝남과 동시에, 염화검제와 내가 반대 방향으로 쇄도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기감의 그물을 넓게 펼쳤다.

놈의 길쭉한 대가리의 현란한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훤히 감지되었다.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월영검을 가득 메우고,

스파앗.

놈의 목줄기를 갈랐다.

잘려나간 대가리에서 솟구친 마력이 거세게 일렁였다.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려는 몸부림이다.

그대로 두면 단면이 재생을 시작하고 그 목과 목이 다시 이어지게 될 터.

‘손 놓고 구경할 생각은 없다고.’

나는 눈을 감은 채 일렁이는 마력을 향해 월영검을 연달아 휘둘렀다.

적(積), 적(積), 적(積), 다시 적(積)이 바닥에 떨어진 놈의 대가리에 격중하고 이내 산산조각냈다.

더 이상 거북뱀놈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이정용의 마력뿐.

나는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등줄기를 타고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밝아진 시야의 한가운데를,

검은 기운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믿는 게 아니랬는데.’

이정용의 검이다.

방금 전 현무의 방어막을 뚫어내던 검은 일염(一炎)이 서린 검이 내 목덜미를 겨누고 있었다.

‘…그래. 어쩐지 너무 일이 잘 풀린다 싶었다고.’

나는 떴던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치떴다.

“윽…….”

엄청난 격통 때문.

살점에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단백질이 녹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움켜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검끝을 타고 솟아오른 일염(一炎)이 일순간 내 목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짧은 접촉은 새끼손톱만한 구멍을 유산으로 남겼다.

졸라리 아프다.

미치고 팔딱 돌게 아프다.

하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이 머리 검은 짐승,

**해서 ***해가지고 **에 ***를 **어 ***하고 **해도 시원찮을 새끼의 검날이 여전히 내 목을 겨누고 있었으므로.

나는 피부가 타들어 가는 격통을 견디며 입술 끝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검제님. 왜 이러실까. 우리 잘 맞지 않았어요? 어? 나 듀오팟 뛰어본 거 중에 오늘이 합 최고였는데? 응? 자, 자, 이거 놓으시고… 우리 배운 사람들끼리 대화로 해결해 볼까요? 하. 하. 하. 이러지 마시고…….”

놈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물린 놈의 입에 웃음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나를 주시하는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하. 진짜 돌겠네.

힘들어 뒈지겠고, 아파서 뒈지겠다.

이놈이 왜 정신이 훼까닥 뒤집혔는지 몰라서 더 뒈지겠다.

현무놈한테 정신착란이라도 당했나.

분명 지금도 살기는 없는데 말이지.

살기는 없는데, 기세는 흉흉하다.

뭐에 빡이 쳤는지 모르지만 이러다가 갑자기 살기 띄우면서 뒈지라고 나오면 매우 곤란한 상황이다.

내상이 심각하다고, 내가.

나는 곁눈질로 거북뱀놈이 웅크리고 있었던 곳을 확인했다.

흐릿해지던 몸체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곳에 남은 건 내 주먹만한 마핵.

괭이갈매기보다는 작지만 리치놈의 유산보다는 세 배 가까이 크다.

설마 염화검제쯤 되는 놈이 치사하게 저 마핵 독차지하려고……?

그럴 리는 없고.

“하. 하. 하. 검제님. 혹시 설마 에이, 그건 아니겠지만, 혹시 마핵 때문에 그러세요? 제가 반띵하자고 그래서요? 에이. 농담… 은 아니었는데. 가지세요. 그래. 대한길드는 사람도 많으니까 마핵도 많이 필요하겠죠.”

나는 아무 말이나 마구 주절거리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언제 생성했는지, 놈의 전신이 얇은 불꽃의 막으로 감싸여 있다.

현무의 맹독조차 막아내는 방어막이다.

어지간한 공격으로 뚫을 수 있을 리 없다.

결(結)을 시전해 검을 쥔 손을 붙들고 빠져나…

가기에는 외기가 너무 희박하다. 아까 하도 결(結)을 써댄 탓이다.

이 몸으로 제대로 시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다른 방법은…….

‘젠장. 없잖아.’

이정용 이 새끼의 검이 너무 가깝다.

종이 한 장 차이도 아니다. 숨만 크게 쉬었다가도 목에 구멍 뚫리게 생겼다고, 지금.

내 상태가 좋았더라도 50:50인데 지금은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그러니까, 일단은…….

“염화검제님. 저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분명히 있다.

처음에는 꽤 분위기가 좋았으니까.

싱글벙글 웃으며 농담을 던지는 꼴이, 이놈도 검영회 회원인가 싶을 정도였다.

놈이 얼굴을 굳힌 것은,

-근데, 이놈 박살내면 신이 현신하지는 않을까요? 지난번 백호 잡을 때 모가지 땄더니 엄청난 놈이 튀어나오던데.

내가 그 얘기를 한 직후부터였다.

‘그냥 재앙이 아니라 현신한 신을 잡았다니까 충격을 받았나. 근데 그건 나도 생각이 안 난다고.’

억울하다.

마이 억울하다.

나는 억울함을 꾹꾹 눌러 참은 채 양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최선을 다해 웃었다.

눈꼬리를 끌어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검제님.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진솔하게 말씀해 보세요. 제가 평소 검제님을 마음속으로 존경해 왔습니다.”

“미인계라. 보기는 좋다만 넘어가지는 않겠네.”

안 통하네.

그래도 계속 입꾹닫이던 놈이 겨우 입을 열기는 했다.

“에이. 저희가 지금 막 생사를 함께한 동료가 되지 않았습니까요. 어디, 속 시원하게 말씀을…….”

이정용 새끼가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냈다.

“입 벌려.”

“어머나.”

“검룡. 두 번 말하기를 싫어한다지? 나도 마찬가지네.”

“옙.”

나는 활짝 입을 벌렸다.

놈의 왼손이 목구멍까지 알약을 쑤셔 넣고는 빠져나갔다.

꿀떡.

알약이 식도로 넘어갔다.

“뭔지 알지?”

“그럼요. 이번 달 우리 계룡연구소 신상, 판매량 1위를 기록한 ‘쑥쑥커’ 아닙니까. 이게 효과가 좋기는 좋나 봐요. 대한길드에서도 사드실 줄은 몰랐네요.”

“그래, 좋더군. 팔 하나 자라는 시간이 삼분의 이로 줄었어.”

“그죠? 우리 하영이가 좀 유능해요. 아, 하영이가 우리 연구소 소장입니다. 애가 좀 깐깐하기는 한데 실력은 끝내주죠.”

놈이 비열하게 웃었다.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입꼬리만 올리는 웃음이었다.

…나도 저렇게 비열해 보이려나. 이거, 자제해야겠는데.

“그런데 자네 상처는 전혀 낫지 않는군.”

“…하하. 제가 좀 특이체질이라.”

“알지. 많이 들었지. 힐포도 안 통하고, 회복술사의 힐도 거의 안 통한다던데.”

“그래서 힘들죠. 아이고. 인생이 왜 이렇게 피곤한지.”

그래.

네놈 때문이다.

염화검제놈이 이렇게 신박한 또라이일 줄 알았으면 이놈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둥지 안 깨고 돌아…

가지는 않았겠지만.

균열을 소멸시킬 방법을 찾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냥 돌아가냐고.

실제로 방법도 찾았다.

써먹을 수가 없어서 그렇지.

잠시 말을 멈추었던 이정용 새끼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나온 질문은 꽤나 의외였다.

“자네. 각성자가 아니지?”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시네. 제가 각성자가 아니면, 뭐겠어요?”

“글쎄. 신인가?”

“허. 신한테 하는 짓이라기에는 너무 싸가지 없는 거 아닙니까?”

“내가 신의 팔도 자를 수 있는지 궁금해서.”

저기요.

뭐라고요?

“걱정 말게나. 대한길드 최고의 술사를 불러 일주일 내내 힐을 퍼부어 주지. 쑥쑥커도 많이 준비되어 있으니 검룡 자네가 각성자라면 금방 자랄 걸세.

“…아닙니다! 저 각성자 아니에요! 확인 안 하셔도 됩니다!”

“늦었네.”

놈이 왼손을 들어올렸다.

오른손에 움켜쥔 검은 여전히 내 목줄기를 겨누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들어올린 놈의 왼손이 검은 불길에 휘감겼다.

불길이 형체를 이루며 모여들었다.

곧 놈의 왼손에 내 목을 겨누고 있는 것과 동일한 형체가 형성되었다.

검처럼 길고 날카로운, 극한까지 응축한 불꽃.

흑염(黑炎)으로 벼린 일염(一染).

호신강기로는 절대 막아낼 수 없다.

이대로 외팔이 검수로 전직……?

하면 장르 변경이라고.

‘그럴 수는 없지.’

나는 죽을힘을 다해 기운을 운용했다.

놈이 가볍게 왼팔을 휘두르자,

검고 날카로운 불꽃이 허공을 절반으로 가르며 내 오른쪽 어깨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거세게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단번에 내 손에 맺혔다.

늘어뜨린 내 두 손으로부터 수십 개 강기의 구슬이 쏘아져 나갔다.

그것이 향한 곳은, 내 전신.

콰가가가가가!!!!!

수십 개의 적(積)이 있는 힘껏 끌어올린 호신강기와 부딪혀 일순간에 폭발했다.

폭발의 격돌에 내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리고, 놈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아주 작은 빈틈.

내 발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취원보(取猿步)의 보법을 밟았다.

아주 간발의 차이로, 놈이 휘두른 일염(一炎)이 내가 서 있던 허공을 갈랐다.

공기를 태우는 불길 사이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정용 새끼가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도박이 통했군.’

내 기감을 믿었다.

오늘 마주친 뒤로 단 한 번도 살기를 피우지 않은 놈을 믿었다.

그 시커먼 속은 모르겠지만, 내 죽음은 오늘 놈의 계획에 없으리라는 내 추측을 믿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타앗.

내 왼발이 바닥을 걷어찼다.

오른발을 깊숙이 뻗으며 동시에 월영검을 뽑았다.

만만한 놈이 아니다.

싸움이 길어지면 필패.

빈틈을 쑤셔 단번에 끝내야 한다.

카앙!

놈의 무릎을 향해 뻗은 월영검을 놈이 가로막았다.

검을 감싼 청염이 나를 덮쳐들었다.

‘흑염이 아니군. 역시, 죽일 생각은 없다는 건가.’

…근데.

팔도 안 된다고. 다리도 어깨도 다 안 된다고.

‘내 팔은 내가 지킨다.’

놈의 검과 부딪힌 월영검이 크게 튕겨져 나갔다.

젖혀진 어깨를 단번에 접으며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놈의 왼손에서 피어오른 화염탄이 내 가슴팍을 향해 날아왔다.

권강(拳剛)으로 파훼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

‘…베기 직전인데. 아깝게시리.’

놈의 어깨에 닿기 직전이었던 검을 회수하며 재빨리 취원보(取猿步)를 운용했다.

내가 서 있던 공간을 일직선으로 가른 청염탄이 허공을 뚫고 한참을 나아가 절벽에 부딪혔다.

절벽이 박살났다. 아니, 산이 쪼개졌다.

나 각성자 아닌 거 아는 새끼가 저런 걸 내던지면,

뒈지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이 정도로 그 계룡검룡이 죽을 리 없지 않은가.”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야. 너 이 새끼 내 머릿속에 CCTV 넣어 놨냐?”

“이제 말을 놓기로 했는가. 내가 그리 친근해졌나?”

“너라면 팔 박살내겠다고 덤비는 새끼한테 꼬박꼬박 존댓말 하겠냐?”

“허어. 동방예의지국의 무인이 이리 예의가 없어서야.”

“이 정도면 공자님도 눈이 뒤집힐 걸? 네놈이 달려들기 전을 생각해 보라고.”

“그때도 웃어른을 대하는 바른 태도는 아니었다만.”

내가 지금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인데 내 앞에서 나이를 따지고 지랄이니.

놈과 나는 입으로 공방을 주고받으며,

동시에 검으로도 공방을 주고받았다.

내지른 월영검을 빗겨 막은 놈이 손목을 비틀어 검을 빼내고는 내 어깨를 향해 휘둘렀다.

재빨리 어깨를 젖혀 공격을 회피하고 단번에 접으며 우상단을 찔렀다.

빙글 돌아 내 공격을 피한 놈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불길 휘감은 검이 무릎을 향해 날아들고, 동시에 놈의 왼손에서 피어오른 푸른 일염(一炎)이 왼쪽 어깨를 향해 날아왔다.

어깨를 비틀어 회피하자, 일염이 휘어지며 따라붙었다.

호신강기로 막을 수 없는 압축된 불길이다.

나는 두 다리로 바닥을 디디며 빠르게 월영검을 휘둘렀다.

검이 지나간 길을 따라 희뿌연 막이 형성되고,

곧 기의 그물, 검망에 갇힌 일염이 소멸했다.

“야! 현무 잡을 때는 이거 마력 모으는 데 시간 존나 걸렸잖아!”

이 새끼가.

아까 일부러 나 기운 빼려고 시간 끌었지.

“그건 흑염이었네만. 지금은 청염이잖나.”

변명은 또 합리적이네.

혓바닥이 긴 놈이다.

놈이 긴 혓바닥을 놀렸다.

“즐거워서 나도 모르게 길어졌군. 이제 끝내겠네.”

“마감 시간 안내하냐? 친절하기도 하셔라.”

그리고.

끝을 결정하는 사람은 네놈이 아니라, 나거든요.

놈의 검이 검은 불길에 휘감겼다.

검에서 뻗어 나온 흑염이 공간을 불사르며 쇄도했다.

‘이거. 살기 없는 거 맞냐. 내 기감 고장 난 거 아냐?’

어마어마한 불길이다.

검은 불꽃이 허공을 불태우고 지나간 자리의 모든 것이 그대로 소멸했다.

내가 서 있던 자리, 그곳은 재조차 남지 않은 동공(洞空)이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닿지 않았다.

자고로 필살기에는 빈틈이 생기는 법.

잠깐의 틈새였으나, 내가 놈의 등 뒤로 돌아들어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으므로.

나는 놈의 등줄기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 순간.

카캉!

놈이 내 어깨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주 신속하고, 아주 정확한 대응.

필살기를 시전하려다가 빈틈을 찔린 놈의 대응이라고 볼 수는 없다.

‘역시, 흑염이 어그로였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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