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101화 (101/122)

101화. 아는 만큼 보이고, 이해하는 만큼 들린다 (2)

어쩐지 마력 모으는 시간이 유달리 좀 걸린다 싶었다.

그리고 놈은 내가 그 빈틈을 타 마혈을 짚기 위해 놈의 뒤로 돌아들 것까지 예상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정확하고 빠른 대응을 설명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한 수 앞만 봤겠냐고.’

이 역시 허초다.

놈이 대응하지 못했다면 실초가 되었겠지만.

월영검이 여유롭게 놈의 검을 막았다.

그대로 검을 회수하며, 동시에 내밀었던 왼팔을 거뒀다.

왼발을 축으로 크게 돌자,

단번에 놈의 정면으로 되돌아왔다.

놈이 휘두른 검이 거센 불길을 일렁이며 내 등줄기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나는 막지도 피하지도 않고 놈의 가슴팍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화려한 가죽 갑옷을 뚫어낸 내 진기가 놈의 몸에 스몄다.

내 왼손이 순식간에 네 개의 혈도를 짚었다.

상완혈과 하완혈, 건리혈

마지막으로 중정혈을 짚은 순간.

퍼억!

불길이 사라진 평범한 검이 내 등줄기를 때렸다.

‘놀랬을 거다. 이 새꺄.’

마단전을 봉해 마력을 막는 점혈.

나를 꽤나 연구한 듯해서 마혈 짚는 건 알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것까지는 몰랐겠지. 나도 엄청 오랜만에 써먹었으니까.

“…이것이 점혈인가?”

“이야. 별걸 다 아네. 대체 어디서 그런 걸 다 들었냐. 이제 마력이 없는 평범한 일반인의 기분을 좀 알겠냐?”

놈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졌다.

“그래, 아무리 네놈이 검제여도 이번에는 좀 놀랐……?”

와.

아니 내가 좀 놀랐네.

사라졌던 놈의 마력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놈의 검에 붉은 화염이 휘감겼다.

붉은빛이 옅어지며 금빛이 섞여들었다.

이 새끼 뭐냐.

지금 점혈을 풀어낸 거냐고. 혹시 이 새끼도 월악문 출신?

‘질문답변 시간은 뒤로 제끼고.’

놈의 검에 일렁이는 빛은 이제 거의 백색이었다.

막힌 혈도를 풀어내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다.

저게 청염이 되었다가 흑염이 되면 온전한 마력을 되찾을 터.

지금도 뒈지기 직전인데, 마력을 되찾은 놈과 다시 붙었다가는 필패다.

그전에.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검날을 희게 빛냈다.

초승달 모양의 흰 빛무리가 놈의 어깨를 조용히 지났다.

다시 한 번,

반대쪽 어깨를 지났다.

두 개의 팔이 덜컹, 덜컹, 바닥을 굴렀다.

분수처럼 솟구친 피가 두 팔을 붉게 덮었다.

얼굴을 굳힌 채 선 놈을 향해 내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자. 이제 차분히 대화 좀 해 볼까?”

***

나는 바위에 기대어 놓은 놈의 몸통…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놈의 얼굴이 창백했다.

쫀 건 아니고, 피를 많이 쏟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친김에 두 다리도 잘라내고 혈액순환이 잘되도록 두들겨 팬 뒤에 한참 버려두었다가 혈도를 짚어 지혈을 해줬다.

그러게 왜 점혈을 풀고 지랄이니.

능력이 되니까 네 몸이 피곤하지. 마혈 짚으면 얼마나 깔끔해.

점혈을 스스로 풀어버리는 놈이니 이 정도 해두지 않으면 내가 당할 것 같았다.

제 입으로 말했듯 대한길드의 최고 회복술사한테 힐 빵빵 받으면서 쑥쑥커 하루에 열 개씩 처먹으면 금방 자라겠지, 뭐.

결론적으로, 이정용은 월악의 제자는 아니었다.

그냥 또라이였다.

아주 신박한 또라이.

“소설을 읽었네. 소설은 허구이지만 자네라는 증거가 존재하니 어느 정도의 진실은 담지하리라 기대했지.”

“실패한 것 같은데?”

“그래. 내력을 쌓는 일에는 실패했지.”

놈은 온갖 방법을 동원했으나 결국 기(氣)를 느끼지는 못했다.

대신 꽤 유용한 능력을 얻었다.

“마력으로 혈도를 뚫었다고?”

“소설에 나오는 삼매진화를 응용했다네. 자네가 아까 현무의 맹독에 견딘 방법도 그것이겠지.”

서은창 눈치에 최지수의 머리를 가진 재수 없는 놈.

허무맹랑한 내용이 9할 7푼이고 제대로 된 내용은 3푼밖에 안 되는 소설 나부랭이에서 진실을 건져내다니.

“그 소설 중에 검황 나오는 건 없디?”

“내가 읽은 만삼천팔백예순다섯 권 중 총 칠천백예순세 권의 책에 검황이라는 인물이 등장했네만.”

“아니, 그냥 검황 말고, 해동검황.”

“없었다네.”

“월악문은?”

“그 역시 없었네만.”

역시 소설이라는 게 다 그렇지.

그러고도 용케 주화입마 안 당했…….

아. 어차피 이 새끼는 내력 못 쌓았구나.

“검룡. 이렇게 된 이상 내 부탁…….”

대가리를 후려치자 놈이 가만히 입술을 여몄다.

“질문은 나, 대답은 네놈. 네놈 부탁은 네놈 답변의 성의를 봐서.”

“묻게.”

나는 놈의 창백한 뺨과 날카로운 코, 얇은 입술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음흉한 놈에다가 믿을 수 없는 놈이다.

‘기생충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처럼 물었다가는 소득 없이 손 털 게 뻔하다.

이럴 때는, 구체적으로 들어가야지.

“주시하는 예언자. 그게 너랑 계약한 기생… 아니 신의 이름이지?”

“기생신이라. 적당한 표현이군.”

음. 그거 아닌데.

그냥 말실순데.

놈은 순순히 긍정했다.

“너만 있지는 않을 거 아냐. 또 누가 계약자인지 알지?”

“모른다.”

내가 의심스럽게 노려보자 놈이 변명을 덧붙였다.

“기생신에게도 나름의 규칙이 있는 듯하더군. 나 역시 물었으나 규칙 위반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너 아까 거북뱀은 계약자 아니라고 장담했잖아.”

“내 추론이다.”

“근거는?”

“현무가 계약자였다면, 예언자가 나에게 귀띔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 않았지.”

“왜 귀띔해주리라 생각하냐? 너 좆되보라고 말 안했을 수도 있지.”

“그는 내가 오래 살아남아 널리 이름을 떨치기를 바란다.”

계약자의 성장이 곧 자신의 격으로 이어지는 건가.

그렇다면, 사신의 낫이 격을 포기하며 계약을 했고 어쩌고 했던 이유도 이해가…….

“그 기생신은 스스로를 초월자라 칭하더군.”

놈이 묻지 않은 것을 털어놓았다.

좋은 신호…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 계약자의 ■■, 내 ■■이 ■■■■에게 ■■될수록 자신의 격도 높아진다고.”

…는 개뿔.

안 들린다.

이놈은 분명히 주둥아리를 움직였는데, 안 들린다.

“장난까냐? 이번에는 모가지를 따줄까?”

“계룡검룡이 실행할 수 없는 협박을 하는 사람은 아닌 걸로 아는데.”

“너 내 사생팬이냐? 스토커야? 왜 이리 나에 대해 많이 알어?”

“누군가를 내내 좇기에는 바쁜 편이라… 허나 자네는 꽤나 파악하기 쉬운 인물이라서.”

내가?

나처럼 입체적이고 섬세하고 복잡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다시 말해봐. 아까 그 문장.”

“얼마든지. …계약자의 ■■, 내 ■■이 ■■■■에게 ■■될수록 자신의 격도 높아진다고 말했다네.”

역시 안 들린다.

진짜 안 들린다.

열일곱 번 같은 문장을 반복하게 시켰으나 여전히 안 들렸다.

기생충 놈들의 말도 아닌데, 이정용의 목소리가 지직거리는 모자이크에 가려 안 들린다.

“제대로 들리지 않는 모양이군.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네. 자네 덕분에 깨닫게 되었어.”

나는 대꾸하지도 되묻지도 않았다.

대신 생각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이해하는 만큼 들린다.

그게 놈들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여기에도 적용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런 게 가능…….

…을 따질 단계는 진작 지났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이정용이 침묵을 깼다.

“검룡. 백호의 초월자를 만났다고 했지.”

“그래.”

“그가 가장 처음에 한 말이 무엇이었나?”

[계룡검룡 서림이여.]

놈들은 항상 그렇게 지껄이며 등장했다. 그놈도, 저놈도.

계룡검룡이라는 이름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고, 언제부턴가 그것이 나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사람들의 말에는 힘이 있으니까.

하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저 흩어질 뿐이다.

하지만 천 명의 입은 성을 무너뜨릴 수 있고,

만 명의 입은 성을 세울 수도 있다.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그런 힘이 있…….

꼴깍.

나는 침을 삼켰다.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기 때문.

모자이크가 걷힌 완전한 문장이.

“…야. 아까 그거. 다시 말해봐.”

염화검제가 나를 주시하며 천천히 문장을 되풀이해 읊었다.

“계약자의 이름, 내 이름이 지성체들에게 회자될수록 자신의 격도 높아진다. …이리 말했다네.”

이정용이 내뱉는 문장이 내 귀에 온전히 들어왔다.

놈의 힌트 덕이다.

그것이 내 앎을 더하고, 내 이해를 넓혔다.

나를 올려다보던 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 정도면 내 성의가 증명되었겠지.”

“뭐. 그럭저럭.”

“이제 내 부탁을 말해도 될까.”

와.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야. 내 질문 안 끝났거든.”

“…묻게나.”

가장 필요한 걸 까먹다니.

하마터면 김강산스러운 짓을 할 뻔했다.

아까 이놈이 분명 중얼거렸었다.

나는 계약이 안 된다고.

짐작하는 이유는 있다.

기생충의 근원은 마력이지만,

내 힘의 근원은 내력이다.

그 근원이 다르므로.

근데…….

그러면 나는 앞으로 어째야 하냐고. 젠장. 더러운 세상이다.

느릿하게 껌벅이는 놈의 눈동자가 여전히 나를 관찰하듯 훑어보고 있었다.

몸통과 대가리만 남은 주제에 꽤나 의연하다.

재수 없는 놈.

“검룡. 할 말이 없으면, 이제 내 부탁을 말하겠네.”

“응. 안 돼.”

재수 없는 놈이 나를 주시했다.

돌려 말하고 뜻을 숨겨도 어차피 다 내 의도를 파악할 놈이다.

차라리 까놓고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터.

나는 가볍게 어깨를 추키며 입을 열었다.

“그놈이, 나에게 계약의 자격이 없다던데.”

검제놈의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훑었다.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하던 놈이,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 자네의 힘이야말로 어떤 곳에도 기대지 않은 그 스스로의 힘이니까.”

잠시, 어둑해진 사위처럼 침묵이 내려앉았다.

낮은 이정용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주시하는 예언자. 그자에게 나도 초월자가 되려면 어찌해야 하나 물었었지. 그는 이렇게 대답하더군…….”

***

나는 이정용의 몸통을 옆구리에 끼고 현무놈이 남긴 마핵을 주머니에 넣고 마(魔)의 삼천(三川)을 빠져나왔다.

괴물이 들끓는 곳에 이정용놈을 던져놓고 오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일었으나 지금까지는 잘 참고 있는 중이었다.

“힘겨워 보이는군, 검룡. 내 다리만이라도 남겨두었으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니새끼가 내 팔 자르겠다고 지랄염병 안 떨었으면 처음부터 아무 일도 안 생겼거든.”

진짜로 그럴 생각이었다.

좋게좋게 대화하고 알아내야 할 것 알아내고 상큼하게 제 갈 길 갈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게 풀리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이럴 계획은 절대로, 절대로 없었다.

대가리만 달린 몸통을 껴안고 들끓는 기혈을 힘겹게 가라앉히며 괴물들에게 쫓긴다는 거지같은 계획이 나에게 있었을 리가.

둥지를 파괴하면서 마력과 내력을 융합한 결(結)을 시전하느라 생긴 내상은 꽤나 심각했다.

아니, 그 뒤에 바로 요양했으면 이 지경은 아니었겠지.

튀어나온 거북뱀을 잡고,

그 뒤에 이 참신한 또라이를 상대하느라 뒤틀린 기맥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한 채 기운을 써대야만 했다.

“야리뿌따야삐야!!!”

“오르으으으크크크!!!”

내 등을 쫓는 세 마리 오크놈들이 질러대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아무튼 끈질긴 놈들이다.

내 옆구리에 낀 놈처럼.

나는 이정용의 몸통을 대충 내던지며 월영검을 뽑았다.

바닥을 몇 바퀴 구른 몸통이 바위에 걸려 멈춰섰다.

배를 바닥에 붙인 이정용이 대가리를 치켜올렸다.

“몸통과 머리밖에 남지 않았는데 더 섬세하게 다뤄주게. 이래봬도 재벌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곱게 자란 몸일세. 이러다가 내가 죽기라도 어쩌려고 그러나.”

“어쩌기는. 구울놈들한테 염화검제 살 뜯을 기회 주는 거지.”

“그리하면 대한길드의 힘이 대폭 약화되겠지. 참마도는 아직 길드를 이끌 동량으로 자라지 못했어. 자칫 내분이라도 발생하면 서울성이 무너질지도 모르지.”

움직일 수 있는 게 그뿐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참 쉴 줄을 모르는 주둥아리다.

대한길드 놈들은 제 길드장이 이렇게 말이 많은지 꿈에도 생각 못 할 거다.

“딱 좋네. 그러면 계룡문이 한반도 일짱 먹어야지. 네놈 대가리 잘라다가 서울성벽에 걸어놓으면 참 꼴 보기 좋겠다.”

“전쟁이겠군. 많은 이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겠어.”

“아닐걸. 네 목 잘린 거 보고도 대한길드에 남아 있는 애새끼들이 얼마나 있을 것 같애?”

“내 길드를 얕보았다가는 큰코다칠 걸세.”

“다쳐 봤자 콧등 깨지는 수준이지, 뭐. 대신 네놈들 대가리는 박살나는 거야.”

놈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첫 번째 오크놈이 도착했다.

구르듯이 달려오는 놈의 무릎을 월영검이 반갑게 맞이했다.

무릎이 댕강 잘린 놈의 몸뚱아리가 나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었다.

꾸웨엑 꾸웨엑 거리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관자놀이에 검을 꽂아 넣었다.

검을 뽑아내기 바쁘게 다음 놈이 달려들었다.

이번 놈은 앞뒤 없이 가위팔부터 뽑았다.

단번에 뒤로 돌아들어 가위팔과 등줄기의 접합부를 찔렀다.

“그것이 보법이라는 것이군. 이리 옆에서 보니 알 듯하네. 거 참, 신묘해. 마치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듯 보이는데.”

“혀까지 자르기 전에 입 좀 다물어라.”

“검룡.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게. 평생 스승으로 모시겠네.”

검제놈이 또 개소리를 지껄였다. 놈은 벌써 서른여덟 번째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런 놈인 줄은 알았지만, 진짜…….

‘더럽게 끈질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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