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아는 만큼 보이고, 이해하는 만큼 들린다 (3)
-홀로, 오롯이, 존재의 격을 초월하면, 초월자가 될 수 있다… 주시하는 예언자는 그리 말했지.
검제놈이 말했다.
그리고 놈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문장이 내 귀를 통과한 순간,
사신의 낫이 지껄인 문장의 나머지 모자이크가 벗겨졌으므로.
[너는 오롯이 홀로선 자. 고로 계약의 자격이 없다.]
내가 머리를 울리는 문장을 곱씹는 사이 검제놈이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그 문장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네. 랭킹전에서 마력이 아닌 기묘한 힘으로 높은 경지를 개척한 자네를 목격한 순간 비로소 제대로 된 문장이 들리더군.
놈이 나에게 살랑거렸던 이유는 명확했다.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주시게.
-부탁을 하려면 무릎이라도 꿇어야지.
-무릎이 없어서 꿇을 수가 없네만. 재생된 후라면 얼마든지 꿇겠네.
-맨입으로?
이정용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이 세상을 구하고 싶겠지. 내가 돕겠네. 초월자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지 않은가.
-너도 별로 아는 거 없던데.
-자네보다는 많았네만.
그건 사실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놈은 나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세 번. 예언자는 세 번의 현신을 약속했네. 내 필요한 순간에 그를 불러낼 수 있어. 자네가 궁금한 것들을 내가 대신 물어봐 줄 수 있다는 의미일세.
파아앗.
월영검의 검날이 마지막 오크놈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알면서도 여전히 믿기 어렵군. 마력이 하나도 없는 일반인이 이리 손쉽게 오크를 사냥하다니.”
“일반인 아니고 무림인. 그리고 나 지금 졸라리 힘들거든?”
“그러게 내 다리는 남겨두지 그랬나.”
나는 놈의 대가리를 후려치고 놈의 몸통을 다시 옆구리에 끼웠다.
무겁다. 졸라리 무겁다.
몸통과 대가리밖에 없는데도 무겁다.
무겁고, 힘들고, 아파서 뒈지겠다.
조심스레 기운을 끌어올려 경공을 전개했다.
아주 느려 터진 속도였다.
무리해서 진기를 끌어올리기만 하면 기혈이 역류하는 터라 속도가 더뎠다.
뒤틀리고 터진 기맥을 방치한 채 계속 내력을 사용하는 행위는 제 손으로 주화입마 급행티켓 끊는 짓이다.
소주천 몇 번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주기적으로 밀려오는 격통을 떨치는 데에 검제놈과의 대화는 썩 도움이 되었다.
“검룡. 연인이 오해하겠어. 일염이 남긴 상처가 마치 키스 마크 같군.”
…이런 개소리는 빼고.
“그런 거 없다고.”
“허. 영웅이 호색한다는 옛말을 따라야지. 자네라면 따르는 여인들이 계룡성을 한 바퀴 돌고도 남을 텐데.”
“그 옛말 따르느라 그랬구나? 아내가 수십 명이라며?”
“서른세 명이네. 모두 내 사랑이지.”
“그게 사랑이냐? 사랑이란 자고로 모든 걸 다 쏟아부어도 부족하다 느껴지는 거라고.”
“자네에 대해 많이 연구했으나 로맨티스트인 줄은 미처 몰랐군.”
“야. 이건 상식이야. 커먼 센스, 몰라?”
“그래서, 연인이 있는가.”
“없다. 어쩔래.”
“허. 사랑을 책에서 배웠군.”
…소화야.
팔다리 다 잘랐는데 혓바닥 좀 자른다고 크게 잘못은 아니지 않을까.
꼬박 1박 2일이 걸린 검제놈과의 동행은 북한산 인근의 언덕에서 마무리되었다.
하루 더 걸렸으면 진짜 정들 뻔했다.
검제놈이 신호탄을 올리자 열 명의 대한길드 애들이 금방 달려왔다.
이정용의 꼴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몇 놈이 뒈질 뻔했지만.
“검제님! 이게 무슨, 세상에, 이런……!”
검제놈이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상급 괴물들이 무리지어 있어 그것들을 소탕하던 중 부상을 입었다. 검룡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귀성하지 못했을 터. 은인으로 모시거라.”
휘둥그레한 얼굴로 검제놈과 나를 번갈아 보던 놈들이 화들짝 놀라 허리를 접었다.
“모시겠습니다!”
서울성에 도착한 나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내상의 회복에 집중했다.
그리고, 사흘 후.
계룡에서 김강산이 달려왔다.
혼자 돌아갈 정도로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듯해 계룡에 연통을 보냈다.
서울성에 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는데…….
연통이 도착하는 데 이틀은 걸렸을 테니 또 받자마자 뛰쳐나온 듯싶었다.
김강산은 간략하게 정리한 상황 설명을 듣다 말고,
“내상??!! 기습??!!! 씨발, 염화검제 그 씹새끼가!!!!”
하고 외치며 염화검제를 찾아 뛰쳐나갔다가,
“형이 압살했네? 역시 내 림이 형! 이제 진짜 레알 팩트 한반도 최강이다!!!”
금방 함박웃음을 지으며 되돌아왔다가,
“야. 대한길드랑 전쟁할 일 있냐. 저거 괴물한테 당한 거고 내가 도와줬다고 입을 맞췄으니…….”
“뭐를 맞춰??!! 입??!!! 염화검제 그 씹새… 악!”
결국 대가리를 후려 맞았다.
검제놈과 의논한 결과 재앙의 둥지와 현무의 소멸은 당분간 함구하기로 결정했다.
둥지를 여는 방법은 찾았으나, 어차피 써먹을 수 없는 방법이었으므로.
-검룡. 청룡의 둥지를 열어 마지막 재앙도 소멸시킬 텐가?
-왜. 또 듀오 뛰자고? 무서워서 못하겠는데.
-아까는 미안했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네.
-응, 아니야. 절대 안 해. 두 번 둥지 열었다가는 내가 뒈지게 생겼다고.
놈이 내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모르나, 순도 100퍼센트 진실이었다.
-그렇다면 둥지를 열 수 있다는 사실을 함구하는 편이 좋겠군. 혹여 파천궁이 알게 되면 자네를 납치하러 파천궁주가 직접 행차하실지도 모른다네.
-지금 나 협박하냐? 정보 흘리겠다고?
-설마 이 염화검제가 그럴 리가. 그러니 검룡,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주게. 자네와 나, 협동하여 선을 이루세나.
아주 끈질긴 놈이었다.
김강산에게 이 모든 상황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주둥아리는 봉해 놨으니까.
다음날 아침, 나는 김강산에게 업혀 서울성을 떠났다.
회복하고 가려고 했는데 어차피 김강산이 왔으니깐.
자고로 사람이 아플 때는 집이 최고라고.
얼른 가서 이번에 얻은 마핵을 정하영에게 넘기고, 대환단 한 알 먹고 내상의 치료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사리원성으로 떠나기 전에 완전히 몸을 회복해 놔야 했다.
가면 또 할 일이 태산이니까.
윗마당 멀티가 제대로 돌아가기까지 손 갈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이건 또 뭔 일이여…….’
하루를 꼬박 달려 도착한 계룡성에서는,
또 귀찮은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헤헷! 명칠 선배님, 이제 패배를 인정하시죠?!”
“…그래. 졌다.”
“끼앗앗! 끼이잇!”
풀썩 뛰어오른 하하민이 열세 바퀴 공중제비를 돌았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명칠이 힘없이 두 팔을 떨어뜨렸다.
하하민의 성장세는 은영단 중에서도 돋보였다.
랭킹전 참가 티켓을 놓고 붙었을 때도 이미 하하민에게 졌었지만, 그때는 하하민이 죽어라 자힐을 하며 끝까지 붙들고 늘어졌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변명은 꺼낼 수조차 없이 확연한 실력차가 느껴졌다.
‘그렇게 사냥을 해대니까…….’
계룡성은 매우 평화로웠다.
지난겨울의 몰이사냥의 효과도 있었으나, 규칙적인 원정 덕도 컸다. 짜인 일정에 맞춰 두세 팀씩 연합해 주변을 미리미리 청소했다.
그리고, ‘검영회(劍影會)’의 존재도 한몫했다.
하하민이 회장인 그 모임은 겉으로는 사냥에 취미를 가진 미친 각성자들의 모임처럼 보였다.
검영회의 열성 회원들은 매일 모여 성 밖에 나가 괴물을 사냥했고, 한 달에 한 번 있는 정모에서는 논산이나 보령 등 꽤나 멀리까지 원정을 나갔다.
하지만 그 숨겨진 실체는 계룡검룡의 팬클럽이었다.
-림이가 알면 귀찮아할 텐데.
-그래서 열심히 훈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라는 단어의 앞뒤가 연결이 안 돼. 하민아.
-저희가 강해져서 대표님을 지켜드려야지요!
박명칠은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했다.
-선배님도 가입하실래요? 바름 선배랑 은조 언니도 가입했어요! 아, 은창이 오빠도요!
-강산이랑 지수 형은?
-산이 선배는 자신은 팬 따위가 아니라며 현실을 부정하면서 가입을 거절했고… 부대표님께는 비밀입니다. 사조직 어쩌고 친목질 어쩌고 하시면서 해산 명령 내리실 것 같아요. 우리 그런 데 아닌데… 우리 완전 열려 있는데……!
박명칠은 완곡하게 가입 권유를 거절했다.
정기 모임 때문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길어도 사흘이라지만 집을 비우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박명칠의 딸이 얼마 전 첫돌이었다.
최지수를 포함한 은영단 전원이 돌잔치에 참석해 축하를 건넸다. 나문덕은 자신의 금반지를 녹여 만들었다는 돌반지를 선물했다.
자신의 팀원, 그리고 아내의 가족들이 참석한 그 돌잔치의 돌잡이에서 박명칠의 딸 박은영은 검을 집었다.
-이야. 울 은영이도 아빠 닮아 각성하는 고야?
보육원에서 일하더니 콧소리가 자연스러워진 나문덕이 박은영에게 까꿍거렸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혓바닥과 눈동자를 보며 박은영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박명칠은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아내는 돌잡이에 검을 놓기를 꺼렸다.
박명칠의 장인과 장모는 청응파의 각성자였다. 그들의 소개로 아내를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방어전 도중에 괴물에게 죽었다.
계룡문이 창립되기 전의 일이었다.
유달리 높은 하하민의 목소리가 생각에 잠긴 박명칠의 귀에 들어왔다.
‘저 양반은 아직도 안 갔네.’
하하민은 어느새 훈련장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 앉아 있는 김영호는 거의 빨려들 듯한 표정으로 바쁘게 손을 움직여 하하민의 이야기를 받아 적고 있었다.
“대표님이 딱! 이렇게 얼굴이 싹 굳어서, 산이 선배한테 보령으로 돌아가라 했죠! 산이 선배가, 내가 등신이야? 그 말을 믿게? 이러니깐, 나를 딱 보면서!”
“뭡니까, 검룡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하민이 과장되게 목소리를 낮추고는 말을 이었다.
“하하민.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
“그 전투에서 두 분을 빼내려 하신 거군요. 역시, 검룡님다우십니다.”
“그죠? 진짜 우리 대표님이 짱이라니까요.”
“그럼요. 그럼요. 말할 필요가 없지요.”
김영호 자신은 격렬하게 부인하지만 하하민의 얘기로는 실질적인 검영회 회원이라고 했다. 박명칠은 하하민의 의견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하민이는 당연히 북쪽으로 가겠지.’
요즘 박명칠 최대의 고민이었다.
계룡문의 1주년 기념식 다음날, 서림은 은영단을 모아 북쪽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 열흘이 닷새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북쪽이라니. 너무 멀어. 은영이가 이제 돌인데… 내가 원정길에 일이라도 당하면 남은 은영이와 희재는 어떻게 하나.’
서림은 꽤 위험할 거라면서, 무서운 놈은 남으라는 말을 덧붙였다. 서림의 입에서 나온 ‘위험’이 그저 말뿐일 리는 없었다.
김강산과 서은창에게 들은 장벽 너머의 상황은 단순히 위험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리기 어려울 정도로 참담했다.
생각에 잠긴 박명칠이 계룡문 본부에 도착했다.
돌아온 지 하루 만에 또 자리를 비운 서림 대신 최지수가 대표실에서 박명칠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대표님, 림이는?”
“아직입니다.”
그들은 지난 한 달 동안 습관이 되어 버린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사흘만에 서림의 소식이 도착했다.
[할 일이 있어서 서울성에 있어. 쓰잘데기 없는 걱정하지 말고. 열흘쯤 후에 돌아갈 테니까, 하영이한테 느긋하게 준비하라고 해.]
서울성의 사자가 가져온 서찰은 서림의 편지였다. 알아보기 어려운 악필은 서림의 필체가 분명했다.
물론 최지수는 즉시 서림의 지시를 정하영에게 전했고, 서림의 말과 달리 즉시 김강산을 서울성에 보냈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이렇게 서신을 보내준 것만 해도 고맙지요.”
“맞아. 우리 대표님께서 이제야 철이 드셨나봐.”
박명칠이 고개를 끄덕이며 최지수의 말에 격렬하게 동의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나를 따로 보자고 했어?”
“명칠 선배.”
“네, 부대표님.”
“선배님께 계룡성 방위단장 자리를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방위단장?”
박명칠이 되물었다.
처음 듣는 직책이었다.
계룡문의 임원은 지금껏 대표와 부대표, 그리고 팀장밖에 없었다.
은영단도 필요에 따라 붙인 이름일 뿐, 사실 은영단원 모두도 1팀에서 20팀으로 나눠진 팀의 팀장 중 하나씩을 역임하고 있었다.
“앞으로 계룡을 비우는 일이 많아질 듯하여 새로 만들었습니다. 계룡문 전체를 지휘하여 계룡성 방어를 책임지는 자리입니다. 유성길드에서도 도와주겠으나 어디까지나 도움일 뿐, 그 책임이 막중하지요.”
“…부대표님이 맡아야지. 그걸 내가 어떻게……?”
“명칠 선배가 적임입니다. 저희 중 가장 오래 계룡성을 지키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선배를, 아니, 형님을 따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니, 그래도, 지수 너는? 설마……?”
최지수가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림이와 함께할 생각입니다.”
“…보육원 애들은?”
“계룡성에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형님께서 계룡성을 지켜주실 텐데요.”
“나 아직 승낙 안 했는데.”
“예. 이제 승낙하십시오.”
얼떨떨하고, 동시에 고마웠다.
최지수가 몰아붙이듯 말했으나, 사실 성에 남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리라.
박명칠이 막 고개를 끄덕이려던 참이었다.
최지수가 표정을 굳혔다.
“선배. 잠깐 나가봐야겠습니다.”
박명칠은 황급히 최지수의 뒤를 따라 계단을 뛰어내렸다.
곧, 최지수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곧바로 광장을 가로질러 계룡문 본부 앞에 섰다.
불그스름한 얼굴.
사자 갈기처럼 휘날리는 억센 머리카락.
왕방울처럼 튀어나온 눈.
어지간한 오크보다 큰 덩치.
분노를 굳이 감추지 않고 어마어마한 마력을 뿜어내며 다가온 사람은,
서문길드의 무적권왕(無敵拳王) 박민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