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씨앗 (1)
‘무적권왕이 왜 계룡에 왔지?’
박명칠은 자꾸 움츠러드는 가슴을 억지로 펼쳤다.
권각술(拳脚術)로는 염화검제와도 비견된다는 그 무적권왕.
계룡문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불패도께서 귀띔해준 바로는, 계룡문에 길드라는 명칭을 허용하는 데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사람이라고 했다.
돌아온 서림은 그 얘기에 신경도 안 썼다.
-제까짓 것들이 뭔데 허가를 하고 말고 지랄이야. 그딴 거 줘도 안 쓴다고.
그렇게 말하기는 했는데.
그 서림은 지금 계룡에 없었다.
‘…림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습격을? 에이. 서문길드가 아무리 쪼잔해도 길드인데. 혈귀단도 아니고…….’
박명칠이 긴장을 가라앉히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앞으로 대 계룡문의 방위단장을 맡아야 하는 자신이 길드장이 나타났다고 쫄아 붙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없었지만…….
‘이거, 내가 맡아도 괜찮은 거 맞아?’
박명칠은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무표정한 얼굴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 초대받지 않은 침입자의 시선은 박명칠을 지나쳐 최지수에게서 멈췄다.
“네가 우룡이냐?”
“그렇습니다. 서문길드의 무적권왕께서는 무슨 일로 계룡문에 방문하셨습니까.”
“너 따위에게 할 말 없어. 검룡에게 안내해라.”
박민교의 태도는 아주 무례했다.
‘림이가 있었으면 대가리 박살났을 새끼가.’
박명칠은 혼자서 떠올린 생각에 흠칫 놀라 눈알을 굴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박민교가 서림을 이기는 그림은 절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길드장이다.
청응파였던 시절, 불패도가 와이번 무리에게 습격을 당한 계룡을 도우러 왔을 때 그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했었는데.
광장 건너편에서, 하하민이 소리를 지르며 날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새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뭐야! 뭔 일이에요, 부대표님!”
그 뒤로 이바름과 조은조가 소식을 달려오고,
오늘 성벽 방어 당번이던 빙화신녀와 서은창이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대표님 뵈러 왔다고요? 저기요, 길드장님. 대표님 얼굴 그거 세상의 빛이자 평화라고요. 원한다고 막 그렇게 아무 때나 뵐 수 있는 거 아니라고요, 그거. 나도 대표님 얼굴 뵙고 싶어 뒈지겠다니깐? 어디서 아스팔트에 긁힌 것처럼 생겨먹은…….”
최지수가 황급히 하하민의 입을 막았다.
좀 늦은 타이밍이었다.
“계룡문이 예의라고는 쌈 싸먹은 건방진 놈들의 소굴이라는 소문은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그걸 내 귀로 확인하게 될 줄이야.”
박민교가 일그러진 얼굴로 씹어 뱉듯 말했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아 있었다.
당장이라도 권을 내지를 듯한 박민교를 향해 최지수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길드장님. 저희 문도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최지수가 하하민의 뒷목을 지그시 눌렀다.
“읍! 으읍! 읍읍읍!”
빙화신녀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얼른 정색을 하고 얼굴을 굳혔다.
‘일부러 한참 말하도록 둔 거 같은데.’
박명칠은 문득 떠오른 추측을 얼른 부정했다.
‘에이. 림이도 아니고, 지수인데. 지수가 그런 애는 아니지.’
어느새 아까의 긴장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
최지수는 몰래 한숨을 삼켰다.
검룡에게 안내하라고 날뛰던 박민교는 빙화신녀와 서은창이 차례로 마력을 개방하자 등등하던 기세를 꺾었다.
그리고 비교적 얌전하게 회의실로 따라 올라왔다.
그 뒤로 줄곧 비슷한 대화를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는 중이었다.
‘할 일이 태산인데. 이런 자를 상대하고 있어야 하다니.’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아련한 눈빛으로 응시하던 최지수는 이내 체념하며 회의용 탁자의 정면에 앉은 무적권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며칠 전 아수라 현진현이 박살낸 나무 탁자를 대신해 새로 들여온 대리석 탁자였다.
물론 탁자의 값은 화성길드에서 지불했다.
무적권왕의 커다란 손바닥이 대리석 탁자를 가볍게 내려쳤다.
“내 딸은 언제 오나!”
“예. 전달했으니 곧 도착하실 겁니다.”
“뿌리가 없으니 예의도 없군. 어디 서문길드의 외동딸을 끌어가려고?”
“하하. 말씀드렸다시피 박세라님께서 서문길드라는 사실을 입문신청서에 기록하시지 않으셔서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알았더라면 당연히 길드장님께 먼저 알려드렸지요.”
최지수는 능숙하게 거짓말을 뱉는 자신에게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이런, 림이라도 옮았나.’
얼마 전 계룡문에 입문한 박세라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화염전사. 나이에 비해 뛰어난 검술 실력과 특출난 마력.
하하민이 2대 제자 중 자질이 가장 빼어나다 입이 마르게 칭찬하는 아이.
‘검영회의 열성 회원이라지.’
계룡문 입문 희망자에 대한 정보 조사는 1차로 이일삼, 2차로 이이사를 통과하고 최종적으로 최지수를 거쳤다.
서림은 몰랐으나, 최지수는 계룡문 창립 이후부터 줄곧 그 과정을 지켜오고 있었다.
서림이 곡사파를 박살내며 이야기했던, ‘올해 사람 죽인 놈’을 걸러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최지수는 입문을 희망한 자가 숨긴 악행을 찾고, 그가 계룡문에 적절하지 않은 인물이라면 가차 없이 그 신청서를 반려 처리했다.
하지만 박세라는 정보를 조사할 필요도 없었다.
최지수는 이미 그녀를 알고 있었다.
무적권왕의 무남독녀 외동딸.
무적권왕이 길드와도 바꾸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사랑한다고 했다.
1퍼센트의 가능성을 뚫고 부녀가 나란히 각성한 경우는 서문길드가 유일했다.
여러 연구와 증거를 통해 각성이 유전되지 않음은 이미 확인되었다. 염화검제의 137명의 자식 중에서도 각성한 자는 참마도 이석주뿐이었다.
열다섯에 각성한 그날부터 서문길드의 제2인자이자 후계자가 된 박세라가 ‘박라세’라는 가명으로 제출한 입문 신청서를 받아 들었을 때 최지수는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때 워낙 바쁘기는 했지.’
검룡고속도로를 개통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윤성득이 이끄는 활빈당이 큰 역할을 했으나 도로를 따라 초소를 설치하고 도로 인근의 괴물 서식지를 소탕하는 작업은 결국 계룡문, 특히 은영단의 몫이었다.
어디 그뿐이었으랴.
검룡이 은영단과 다투고 계룡문을 영영 떠났다는 소문을 가라앉히고, 검룡과 계룡문의 관계가 끈끈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갖가지 방법들을 동원해야만 했다.
그래도.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다니.
자신답지 않은 일이다.
서문길드가 계룡문에 위협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라고.
‘…확실히, 림이가 옮았구나.’
최지수는 마음을 다잡았다.
서림의 과감성과 그 엄청난 행동력은 서림이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최지수는 잘 알았다. 자신 같은 사람은 촘촘히 조사하고 하나하나 따져 행동을 결정해야 허방을 디디지 않는다.
문제는…….
하나하나 따져 봐도 큰 문제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정신차려라, 최지수. 영웅 옆에 있다고 네가 영웅인 줄 아느냐.’
최지수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뺨을 후려치며 박민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계룡문이 요즘 잘 나간다고 내 길드가 만만하나? 하루아침에 세운 성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법이야!”
“말이 심하십니다. 대표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말을 뱉어놓고 최지수는 마음속으로 반대쪽 뺨을 후려갈겼다.
길드장 앞에서 이리 뻣뻣하게 굴다니.
아무래도 림이가 옮았다.
정하영에게 상담이라도 받아야 할 성싶었다.
“네놈들이 내 딸을 꼬드겼지! 내 딸이 집을 나갈 애가 아닌데! 네놈들이 내 딸을 꼬드겨서 서문길드를 훌렁 먹어치우려고!”
“계룡문에서 서문길드를 굳이 탐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곳에 있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는 것은 그곳에 없습니다만.”
“뭐, 뭐가 어째! 이 새파랗게 어린놈의 새끼가!”
그렇게 최지수가 자신의 뺨을 번갈아 후려치고 있을 때, 박세라가 도착했다.
서문길이 소파에서 튕겨나가듯 일어났다.
“세라야… 아이고, 얼굴이 반쪽이다. 옷은 꼴이 그게 뭐꼬… 아 계룡문 이 새끼들은 아한테 밥도 옷도 안 주나! 얼굴에 흙이… 우리 공주님 얼굴에……!”
그 급작스러운 변화에 최지수가 놀라던 중.
박세라가 와락 소리를 쳤다.
“머카노! 존나 쪽팔리그로!”
“세라야… 아빠는, 세라가 걱정돼갖고…….”
“아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안 했나!”
“세라야… 아빠가 명색이 길드장인데 네가 계룡문이면, 사람들이 아빠를 뭘로 보겠노.”
“…됐다, 치아라.”
“왜? 왜 계룡문이 그리 좋노?”
“…검룡님이 계신다 아이가. 아직 몇 번 뵙지도 못했다.”
“하. 금마가 뭐 그리 좋노? 그 계집애처럼 맨들맨들한 낯짝이 그리 좋나?”
“허이구야. 아빠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처맞는다.”
최지수는 전혀 예상 못한 장면을 조용히 외면했다.
‘딸 앞에 장사 없군.’
그 성질머리가 대단하다던 박민교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쩔쩔매고 있었다.
“아빠. 나 여 있는 거 우예 알았노. …쪽팔리구로 사람 풀었나?”
“아이다! 절대 아이다!”
“그러면 우예 알았는데!”
“…1주년 기념식 구경하러 왔던 애들이 우리 공주님을 봤다더라.”
“아! 주호 아저씨, 진짜! 비밀로 하랬더니!”
“그러지 말고, 아빠랑 같이 가자. 응?”
“싫다! 내 검룡님이랑 결혼할 거다.”
“…결혼?”
“아빠가 아빠보다 센 사람이랑 결혼하라며!”
“그건 그냥, 너 어렸을 때 그냥 농담으로…….”
“길드장 입이 그렇게 가벼워서 우야노? 아빠 뱉은 말은 지켜라!”
“기라믄 세라 너. 아빠가 검룡을 비무에서 이기면 아빠랑 같이 돌아갈 끼가?”
“헝! 아빠가 검룡님을 이기겠나? 그래, 아빠가 이기면 간다! 대신 검룡님이 이기면 다시는 딴소리 하지 마라!”
박민교가 울 듯한 눈으로 최지수를 바라보았다.
어째 목소리가 좀 떨리는 듯했다.
“우룡. 검룡은……?”
“검룡님이 아빠 친구가!”
“…우룡. 검룡님은 언제쯤 귀성하시나?”
최지수는 힘겹게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워낙 바쁜 분이시라. 숙소를 마련해 드릴 테니 기다리시겠습니까?”
“…부탁하네.”
‘설마 자신이 비무에 이기리라고 생각하나.’
어쩐지 박민교가 불쌍했다.
***
김강산의 등에 업혀 계룡에 도착했을 때 나를 맞아준 것은 최지수를 비롯한 은영단과…….
무적권왕 박민교였다.
“비무를 요청하네, 검룡!”
박민교가 포권을 하며 비장하게 외쳤다.
일주일 사이로 길드장을 두 놈이나 박살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언제 내 인생이 내 맘대로 풀렸냐.’
최지수에게 요약 설명을 듣기는 했으나, 그게 왜 비무로 결론이 나는지는 모르겠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냐고.
그러기에는 내가 바보온달 역할에 어울리지가 않는데.
-형. 내상은?
김강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멀쩡해.
사실 멀쩡까지는 아니었지만.
서울성에서도 푹 쉬었고, 오는 길에도 김강산에게 업혀 내내 운기에 집중했다.
덕분에 대충 급한 내상은 회복했다.
이 정도면 박민교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하지.
저게 검제놈도 아니고.
뭐…….
도전을 받아주는 것도 챔피언의 책무니까.
하지만, 맨입으로는 안 될 말씀이다.
나는 팔짱을 끼며 박민교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왜요?”
챔피언은 파이트머니가 좀 비싸거든.
박민교는 똥 씹은 얼굴로 조은조의 뒤를 따라갔다.
곧 완성된 계약서가 도착했다.
금오산채의 산적놈들 소탕. 기한은 한 달.
검룡고속도로의 확장에 방해가 되는 놈들이다.
권왕놈이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완전소탕입니다. 헛수작 부리지 마세요.”
“헛수작? 나 무적권왕을 뭘로 보고.”
내가 건 것은 연구소에서 새로 개발한 ‘쑥쑥커’ 40박스.
무엇을 얼마나 걸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이길 거니까.
우리는 곧 본부에서 멀지 않은 공터에 도착했다.
한 달 전에 서은창과 비무를 했던 그곳이다.
-형. 왜 이쪽으로 가? 훈련장으로 가야지. 보는 눈이 많아야 제맛이지.
김강산이 간절하게 주절거렸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형 아직 내상 다 안 나았구나. 지수 ㅎ…….
-왜 그러느냐. 산아.
-아냐, 지수 형. 산이가 배 아프대. 오는 길에 계속 설사했거든.
아혈을 잡힌 김강산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야. 내상 다 나았으니까 쓰잘데기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계룡문의 이름은 이미 떨칠 만큼 떨쳤다.
내가 박민교를 박살낸대도 별로 놀라운 소식은 아닐 터.
대신 잃을 수 있는 것은 많다.
서문길드는 길드 연합의 일원이다. 괜한 악감정을 남길 필요는 없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면 없던 악의도 생기니까.
특히 박민교처럼 허세 쩌는 놈들은 더 그렇다.
‘조용히 패는 편이 낫지.’
잠시 후.
공터의 구석에 세 명의 참관자가 나란히 서서 도란도란 속삭이는 이야기가 바람을 타고 내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용용이에 오백 돈.
-나도 림이 형.
-…저도, 검룡님이요.
-야. 너 뭐냐? 그러면 내기가 안 되잖아.
-김강산, 확, 마. 애가 쫄았잖아. 세라야, 니네 아빤데? 길드장인데? 진짜? 진짜 용용이한테 걸어?
-…어, 네. 아빠죠. 근데요. 빙화신녀님도 길드장인데 검룡님한테 지셨잖아요.
길 가다가 헤드샷을 맞은 곽예린이 과장되게 울먹이는 표정으로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박민교와 오래 알다보니 박세라와도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애가 몰래 계룡문에 입문했는지는 몰랐지만.
휘앵앵 불어온 바람이 공터를 휩쓸고 지나갔다.
비무의 규칙대로 20미터 떨어져 선 박민교가 두 손을 맞잡아 포권을 했다.
“한 수 가르쳐 주겠네. 검룡.”
내가 입술 끝을 비스듬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허리춤에 찬 월영검을 풀어 김강산에게 던졌다.
“야, 받아.”
박민교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관자놀이에 선 핏줄을 불퉁거리며 박민교가 이를 갈듯 말했다.
“검룡이, 검 없이 싸우겠다고?”
“그쪽은 무기 없으니까. 나중에 핑계대는 거 딱 질색이라.”
“…사람을 깔봐도 정도가 있다.”
깔보는 게 아니라 수준을 맞춰 준 건데.
눈높이 교육이라고.
뭐. 잠시 후면 싫어도 깨닫게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