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씨앗 (2)
휘앵앵 불어온 바람이 공터를 휩쓸고 지나갔다.
세 명의 참관자가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바람을 뒤따랐다.
-빙화신녀님. 저 아빠한테 걸래요.
-어?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김강산 너는? 그대로 용용이?
-다들 림이 형을 아직도 모르네. 저 눈깔귀신한테 건다 이거지? 물리는 거 없다?
-좋아, 콜. 자, 여기 사인들 하시고. …이야, 세라 크게 가네? 오천 돈?
-검룡님이 아무리 강해도 맨몸으론 아빠 못 이기죠.
신 났네, 신 났어.
그리고 눈앞의 놈도 마찬가지 생각이겠지.
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패배보다 절대 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패배가 훨씬 인상적인 법.
내가,
한 번 팬 놈이 다시 덤비는 일도 딱 질색이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알록달록 색깔이 변하던 놈은 금방 안정을 찾았다.
“후회하지 마라.”
“걱정 마세요. 내가 원래 후회라는 양반이랑은 별로 안 친해서요.”
그리고.
빙화 신녀의 손에서 출발한 기다란 빙창이 하늘로 쏘아졌다.
“시-작-!!!!”
내 발이 거세게 바닥을 박찼다. 동시에,
박민교 역시 나를 향해 쇄도했다.
순식간에 놈과 내가 공터 중앙에 도착했다.
팟!
놈의 주먹이 매섭게 공기를 가르며 내 인중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왔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효율적인 궤적.
마력을 몽땅 신체 강화에 쏟아부었다더니 힘과 빠르기가 모두 대단하다.
지금까지 마주친 인간들 중 가장 낫다 느껴질 정도.
중심을 낮추며 상체를 뒤로 젖히자,
놈이 거세게 내지른 권이 아슬아슬하게 코끝을 스쳤다.
단순한 정권 지르기지만, 괭이갈매기놈의 꼬릿짓과 비견될 만큼 강맹한 공격.
그리고.
쉬익!
젖혔던 고개가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놈의 팔꿈치가 다시 한번 내 인중을 노리며 짓쳐들어왔다.
‘이 좁은 공간에서 방향을 바꾸다니.’
짓쳐들던 속도를 단번에 죽여 제자리에서 멈추고, 몸을 반대로 회전시켜 잃은 속도를 되찾았다.
내가 허리를 젖혔다가 제자리로 돌리는 짧은 틈에 이루어진 일이다.
‘피하기는 늦었군.’
퍼어억!!!!
놈의 팔꿈치가 내 왼팔과 격돌했다.
호신강기를 있는 대로 끌어올렸음에도 뼈가 울릴 정도의 위력.
하여튼 각성자 놈들이란.
무식하게 힘만 세서 큰일이다.
격돌의 충격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놈의 공격이 이어졌다.
수평으로 휘둘러진 왼주먹이 내 관자놀이를 노리며 날아왔다.
부딪히면 내 쪽이 손해다.
저놈은 뼈가 부러져도 금방 회복할 테니까. 그러니까,
안 부딪히면 장땡이지.
오른손으로 태극권(太極拳)을 운용해 놈의 공격을 흡수하며 왼손의 항룡장(亢龍掌)으로 복부를 타격하려는 순간.
놈이 무릎이 내 얼굴을 노리고 날아들…
-아빠!!! 얼굴은 안 돼!!!!!
다가 멈칫거리고는 명치로 방향을 바꿨다.
놈의 등줄기로 돌아들어 마혈을 누를 충분한 틈.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기면 제놈이 나를 봐줬다고 착각하겠지.’
나는 취원보(取猿步)를 운용하려던 마음을 바꿔 당랑각(螳螂脚)을 시전했다.
퍼버버버버버벅!
타격감은 있었는데 반응이 없다.
맷집이 대단한 놈이다.
그렇다면 반응할 때까지 두들기면 되지.
그 순간, 상체를 완전히 낮춘 놈이 내 양다리를 향해 덮쳐들었다.
콰당!
호신강기로 보호받고 있는데도 등이 얼얼했다.
이른바, 테이크다운.
‘이놈, 그래플러였어……?’
생각할 틈도 없이 백호놈의 꼬리처럼 단단한 놈의 팔뚝이 내 목을 졸랐다. 놈의 두 다리가 내 하체를 꽉 붙든 채 내리누르고 있었다.
콰아아!
응축한 호신강기를 단번에 폭발시켰으나 놈은 꼼짝도 하지 않았…
“아빠!!!! 검룡님 다치게 하면 절대 아빠 안 본다!!!”
었는데, 박세라의 목소리가 들리자 꼴딱 침을 삼켰다.
“이 정도면 잘 버텼다. 하지만 나에게 잡혔으니 비무는 끝났다. 순순히 항복하면 놓아주지. 아니면…….”
“아니면, 뭐?”
놈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스쳤다.
설마 내가 숨이 막혀 켁켁거리기를 기대했냐.
그거 참, 기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해서 미안… 하지는 않고.
“이제 다 보여준 거 맞죠? 필살기 썼으면 이겼을 거라고 나중에 질질 짜지 말고 숨긴 거 있으면 지금 다 꺼내놓으세요.”
“…이 건방진 애송…”
“네에, 내가 건방진 건지 겸손한 건지는 비무 끝난 뒤에 판단하자고요.”
놈의 얼굴이 와드득 구겨졌다.
곧, 나를 짓누른 놈의 팔과 다리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 마력으로 벼려진 순수한 힘이 으깨버릴 기세로 나를 짓눌렀다.
있는 대로 끌어올린 호신강기가 그 압력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기세 좋게 지껄이기는 했지만 오래 버틸 수 있는 힘은 아니었다.
물론 오래 버틸 필요도 없다.
‘무슨 올림픽 경기 하냐.’
비무가 아니라 생사결이었으면 너는 이미 다섯 번도 넘게 뒈졌다.
지금도 파(破)를 시전하기만 하면 아무리 단단한 모가지라도 단번에 박살날 터.
내 두 팔은 놈의 등 뒤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중이다.
물론 그럴 생각까지는 없다.
하지만 약간 맛을 보여줄 필요는 있겠지.
‘거악까지는 아니지만, 소소악쯤은 되니까.’
내가 북쪽에 다녀온 한 달 사이 최지수는 김제-계룡 방면의 검룡고속도로를 완공하고 확장 작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음 코스는 계룡-대구 방면과 계룡-서울 방면.
-헌데, 금오산의 산적들이 껄끄럽구나.
-왜? 내가 박살내고 올까?
-…한 달 만에 왔는데 제발 쉬도록 해라, 림아.
최지수의 설명에 따르면 서문길드가 금오산채를 암암리에 지원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악어와 악어새 같은 좋은 공생 관계다.
산적놈들은 삥 뜯어서 좋고, 길드는 의뢰비 비싸게 받을 수 있어 좋고.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놈이 찾아온 덕에 손쉽게 해결되었다.
참 고맙기도 하지.
내 손바닥이 내 목을 조르는 놈의 양쪽 팔꿈치에 닿았다.
기맥을 타고 오른 기운이 손바닥을 통해 놈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동시에,
단전에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아직 내상에서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이다.
‘아무튼 나새끼의 몸뚱아리란.’
나는 마음속으로 혀를 차며 놈의 몸속으로 흘려보낸 진기의 운용에 정신을 집중했다.
놈의 얼굴이 파드득 굳었다.
이질적인 기운의 침입을 감지한 모양.
근데.
“…허튼짓……!”
이미 늦었거든.
콰직. 콰지직.
놈의 두 팔꿈치에서 고요한 폭발이 일었다.
삼반공의 2절 파(破).
아무리 놈의 몸뚱아리가 단단해도 현무의 그것과는 비할 수조차 없다.
“으윽!”
놈의 두 팔꿈치가 박살났다.
가루가 된 뼈와 가죽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음.
딸에게 보여주기에는 조금 험악한 광경…
“꺄아아아!!! 검룡님!!!!”
“내가 뭐랬어? 우리 형이 당연히 바른다니까!”
“역시 용용이!!! 화끈하다!!!”
…큰 문제는 없어 보이네.
내 하체를 결박하고 있던 다리를 풀며 놈이 벌떡 일어났다.
“팔 떨어졌는데. 계속 싸우게요?”
“팔이 없어도 다리는 남았지.”
오.
실력은 떨어지지만 기백은 있네.
둘 다 없는 것보다 훨씬 낫지.
“피가 많이 나는데?”
“이쯤이야 괴물을 막으며 수 없이 겪은 일이다.”
놈의 잘려나간 팔뚝이 곧 쇳덩이로 뒤덮였다.
약간 기괴한 느낌이지만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다.
“기다려주어 고맙네.”
응급처치를 마친 놈이 나를 향해 포권…을 하려다가 손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두 쇳덩이를 부딪는 것으로 포권을 대신한 박민교가 나를 진중하게 응시했다.
기백은 여전했다.
하지만 기색은 처음과 달라져 있었다.
꼭 후려맞아야 배우는 놈들이 있는데 권왕놈이 바로 그 유형인 모양이다.
“가르침을 부탁드리네. 검룡.”
“부탁하는 자세치고는 건방진데.”
“…그 입이 불필요한 적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듣기 싫은 말 들었다고 등 찌를 일부터 생각하는 놈이랑은 처음부터 한 편 먹을 생각 없거든요.”
음. 아무 말인데.
아무리 내 무위에 감명을 받았어도 그리 깨달은 표정을 할 것까지야.
“시작합니다?”
“그래.”
다시, 놈이 쇄도했다.
다리는 남았다는 놈의 말대로 속도는 여전했다.
콰아아!!!!
권으로 형성한 적(積)에 얻어맞은 놈이 주춤거렸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실력차를 깨달았으면서, 패배를 확신하면서도, 도전하는 자 특유의 각오가 놈의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30년 동안 괴물과 맞선 길드장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나는 입술 끝을 들어올리며 웃었다.
그리 결연한 각오로 도전한다면.
나 역시 진지하게 상대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곧,
쇳덩이 하나가 내 인중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카아앙!!!
왼손의 권강과 부딪힌 쇳덩이가 굉음과 함께 튕겨나갔다.
활짝 벌려진 놈의 가슴팍을 향해 내가 오른손을 뻗었다.
“소용없다!”
그렇겠지.
두 손을 잃었으나 그 몸체의 강건함은 여전했으니.
검기로도 뚫기 어려울 가죽을 권강으로 뚫어낼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오른손에 들어찼다.
응축된 진기가 희게 빛났다.
이 진기를 한 점을 중심으로 응축하는 것이 적(積).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진기를 운용하면…….’
손끝을 타고 뻗어 나온 진기가 길고 곧은 직선을 그렸다.
월영검을 닮은 백색의 검이 내 손끝을 타고 솟아올랐다.
진기로 형성한, 한 자루 검.
기(氣)는 형(形)을 따르기 마련.
권기(拳氣)는 그 권을 닮아 넓고 단단하며,
검기(劍氣)는 그 검을 닮아 뾰족하고 날카롭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초절정의 경지에 해당하는 소리.
화경의 고수는 형(形)에 갇히지 않으며.
현경의 고수는 형(形)에 얽매이지 않는다.
즉, 형태를 벗어난 정형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소리다.
단지 효율이 떨어져 굳이 사용하지 않을 뿐.
하지만…….
‘오늘은 보여줄 필요가 있으니.’
왕방울만한 눈을 더욱 홉뜨며 박민교가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동시에, 놈의 두 쇳덩이가 내 정수리와 명치를 노리며 날아왔다.
동시에, 내가 기(氣)의 검(劍)을 휘둘렀다.
먼저 닿은 것은 당연히 내 검이었다.
팔꿈치 아래가 사라진 놈의 팔은 어린애의 그것처럼 짤뚱했으므로.
검날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날카로운 검기가 놈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응집하던 기운을 흩어내자, 유형화된 진기가 놈의 허벅지 안쪽을 갈가리 찢으며 무형으로 되돌아갔다.
푸슉.
놈의 구멍 뚫린 허벅지에서 피가 솟구쳤다.
균형을 잃은 채 놈이 오른손의 쇳덩어리를 거세게 휘둘렀다.
왼팔로 그 공격을 밀쳐내며 한 번 더 팔을 뻗었다.
다시금 솟아오른 기의 검이 놈의 반대쪽 허벅지를 마저 찢어발겼다.
두 다리를 잃은 놈이 균형을 잃고 앞쪽으로 기울었다.
승패는 결정되었으나 놈은 여전히 투지를 잃지 않았다.
힘과 속도 모두가 확연히 약해진 두 쇳덩어리가 내 관자놀이와 인중을 노렸다.
콰앙! 콰아아!
양손에서 쏘아져 나간 권강이 쇳덩이와 격돌하고,
충돌의 충격으로 공중으로 떠오른 놈에게 파고들며 연속적인 권을 내질렀다.
퍼버버버버버법벅벅벅!
권강이 복부를 격하고, 격하고, 다시 격했다.
서른여덟 번 연속적인 권에 얻어맞은 놈의 커다란 덩치가 웅장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놈이 짤뚱해진 팔과 피범벅이 된 다리를 大자로 벌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졌네. 내가 졌어. 무적이라는 이름이 부끄럽군.”
“에이. 그러면 불패도님이랑 나란히 이십 년 전에 개명했어야죠.”
너네 둘 다 1회 랭킹전에서 이정용한테 졌었다면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놈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탐색하는 듯한 눈빛이다.
제 팔을 박살내고 제 허벅지를 찢은 기술이 대체 무엇일지 고민하는 게 분명하다.
당연히 놈으로서는 처음 보는 기술일 터.
그러라고 일부러 눈에 띄는 기공을 썼다.
내가, 각성자가 아니라고 확신하도록 만들기 위해.
파(破)에 당하고서도 이게 대체 뭔가 싶었겠지.
하지만 눈으로 선명하게 보이는 기(氣)의 검(劍)조차 외면하기는 어려웠겠지.
툭 튀어나온 왕방울만한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권왕놈이 드디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검룡. 방금 그 기술은 뭐지? 마력이, 아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