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105화 (105/122)

105화. 씨앗 (3)

지남천이나 곽예린도 넌지시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용용이 너는 그렇게 마력 숨기면 불편하지 않냐? 너 사실 마력 없는 거 아냐? 아니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지? 그래, 내가 헛소리했네.

-검룡. 자네의 힘은 대체… 아닐세. 괘념치 말게나.

내가 대충 얼버무리니 둘 모두 캐묻지는 않았지만.

딱히 각성자 행세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근데 살다 보니까 이게 꽤 쏠쏠하더라고.

내가 각성자라고 착각해서 각성억제제 내던져 놓고 의기양양한 얼굴 하고 있는 애새끼들 후들겨 패는 게 꽤 재미지기도 하고.

그래서 곡사파를 박살낸 즈음부터는 각성자인 척 행동했다.

주변 애들 입단속도 시켰다.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누구나 당연히 나를 각성자라고 여기고 있으니까.

인간이란 자신이 그려 놓은 대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관념대로 타인을 판단하는 법이니까.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는 눈은 드물다.

드물기 때문에 사실을 보고서도 스스로 본 것을 의심한다.

그러므로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각성자인 척하는 것은.

하지만.

지성체들에게 계약자의 이름이 회자됨으로써 초월자의 격이 높아진다면.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정말로 그러한 힘이 있다면.

‘…무공도 되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무공을 잃어버린 세계다.

자연에 흩어진 이 기(氣)를 느끼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

서은창의 어머니, 월악의 제자 황미영은 본디 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했다.

하지만 블랙데이 이후 그 내력은 점차 줄었고, 결국 사라졌다.

며칠 전 이정용 역시도…….

-검룡.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인데. 내가 자네 어깨를 자르려 한 일을 마음에 담고 있나.

-야. 닷새 전 일을 벌써 털었겠냐? 너라면, 어? 잊겠어?

-그렇다 해도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다니. 검룡이 이리 마음이 좁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안다면 실망하겠군.

-기 못 느낀다고 그냥 솔직히 말해. 뭔 말을 그리 빙빙 돌리고 지랄이냐.

-…안 느껴지는군.

나는 결국 이정용에게 내공심법을 가르쳤다.

소설 나부랭이를 읽고 마력으로 스스로 삼매진화를 일으킨 자다. 내가 지금껏 만난 모든 사람들 중 가장 뛰어난 자질을 지닌 자.

최지수도, 김강산도, 서은창도 기(氣)를 느끼지 못했지만, 이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 때문이었다.

놈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마음이 복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 무공이 돌아온다면…….’

각성하지 못한 99퍼센트의 사람들에게도 무공이라는 또 하나의 길이 열리게 될 터.

하지만.

-완전 꽝이네.

-…내 자질이 부족하다 여겨 본 일이 없네만. 아무래도 무공에는 자질이 없나 보군.

안 됐다.

삼재공(三才功)도, 삼재혼원공(三才混原功)도, 역근세수경(易筋洗隨經)도, 자하신공(紫霞神功)도, 그 어떤 내공심법도 소용이 없었다.

기(氣)를 느끼지를 못하는데 심법이 무슨 소용이냐고.

검제놈은 꽤나 좌절한 듯했다.

놈이 나에게 살랑거렸던 게 바로 무공을 얻고 싶어서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 역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으면 내가 지금 검룡이겠냐고.

내가 그런 성정이었다면 고블린 잡고 각성 못 했을 때 진작 포기했다.

월악의 비동(秘洞) 찾으러 갈 생각도 못 하고 터덜터덜 보육원으로 돌아갔겠지.

어쩌면 이미 뒈졌다가 다시 태어났다가 또 뒈졌다가를 반복하며 여덟 번째 유년기를 보내고 있을지도.

그건 내 취향이 아니다.

전혀 아니다.

‘일단 씨앗을 뿌려 보는 거지.’

그 씨앗이 싹을 틔우면 좋고.

말라 뒈지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어차피 잃을 것도 없다.

각성자인 척하는 것도 슬슬 귀찮아지던 터.

내가 줄곧 기다리던 질문을 던진 권왕놈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꼴깍 침을 삼켰다.

나는 슬며시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력이라고, 들어는 봤나 몰라. 마력보다 이쪽이 훨씬 역사가 깊은데 말이지.”

***

제 아버지가 나와의 비무에서 패배한 그날.

박세라는 서문길드로 돌아갔다.

내가 내쫓았으니까.

걔가 열여섯밖에 안 먹었더라고.

키가 나만 하길래 스물은 된 줄 알았더니.

보호자의 뜻에 반해 가출한 미성년자를 데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그 부모가 오민주 부모처럼 개차반이라면 상황이 다르지만, 박민교는 딸 사랑이 차고 넘쳤으니까.

“열여섯이 뭐 어때서요? 열여섯에 결혼해서 애엄마된 친구들이 수두룩한데!”

하하민이 빽빽 대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검영회인지 지랄인지에서 박세라와 꽤 친하게 지냈다더니.

“세라야… 너 없으면 내가 누구랑 덕질을 하니…….”

하하민이 흘러내린 눈물을 훔쳐 얼음폭탄을 만들어 허공에 내던지며 탄식했다.

“…그 덕질 대상이 나 아니냐?”

“당연하죠! 대표님을 눈앞에 두고 내가 누구를 덕질해요?! 대표님이 최애죠. 차애는 없어요. 네버! 절대! 전혀! 다 아스팔트에 긁은 오크처럼 보인다고요.”

“대체 어느 팬이 최애한테 이렇게 소리를 쳐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현생과 덕질의 철저한 분리가 검영회의 첫 번째 강령… 악!”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개소리였다.

“…대표님 은근히 꼰대인 거 알아요?”

하하민이 불퉁거리며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야.

나만큼 열린 사람이 어디 있다고.

700년 전에는 어지간한 문파에서는 여자는 아예 받아주지도 않았다고. 소림이고 무당이고 화산이고 죄다 땀내나는 시커먼 놈들만 가득한 시절에 내 월악문은 그때부터 여제자 남제자 구분 안 하고 받았는데. 내가 얼마나 선도적인 인물이었는지…….

라고 늘어놓는 대신 나는 한 번 더 하하민의 대가리를 후려쳤다.

닷새 후.

서문길드에서 보문산채의 산적을 소탕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다음날, 또 하나의 소식이 들어왔다.

파주에서 개성으로 통하는 땅굴을 발견해 통행 가능한 상태로 준비를 완료했다는, 검제놈이 보낸 연통이었다.

계룡에 돌아오며 따로 부탁한 일이었다.

사리원성에 자주 출장을 나갈 텐데 매번 양구 방향으로 우회할 수는 없으니까.

검제놈은 나로부터 무공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계속 친절함을 유지했다.

그 시커먼 속이야 다 알 수는 없지만.

경계를 놓지 않고 얻을 것을 얻어내면 될 터.

그리고.

다시 며칠 후.

“허억… 산아… 이걸 닷새만에… 허억… 주파했다고……?”

“이거보다 훨 멀었거든. 사리원에서 원산 찍고 계룡까지 왔으니깐.”

이바름이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출발 첫날까지만 해도 멈추지 않던 하하민의 주둥아리도 이틀째부터는 조용했다.

계룡을 떠난 지 사흘째.

계룡성에 남은 박명칠을 제외한 은영단은 줄곧 북쪽을 향해 내달렸다.

김강산과 서은창은 지난번 북행에서 빡세게 뛰어다닌 보람이 있어 전혀 헉헉거리지 않았다.

그 둘을 제외한, 아니, 여유롭게 하늘을 활공하고 있는 월매까지 포함해 셋을 제외한 나머지는…….

“역시 훈련이 부족…….”

“아니라, 고요! 절대 아니, 라고요, 대표님!”

하하민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외쳤다.

“지껄일 정도면 힘이 남아도네. 자. 나보다 뒤처지는 놈은 취침 전에 추가 훈련한다.”

“으아아악!!!!”

“림아. 그것은 아무래도 과한 처사……!”

내가 속도를 높여 이바름과 조은조를 추월했다.

뒤이어 하하민을 추월하고, 최지수를 추월했다.

등 뒤에서 씨 어쩌고 지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특별히 오늘만 용서해주기로 했다.

‘애들한테 힘든 일정이기는 하지.’

하지만 필요한 훈련이다.

혈귀단의 습격 때도 체감했던 대로, 기동력은 아주 중요했다. 상대방이 예측하지 못하는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술이니까.

그리고…….

‘처음 생각보다 늦어졌어.’

급한 대로 사리원성의 주변을 정리해 놓고 오기는 했다.

하지만 변수는 얼마든지 있었다.

30년 동안 버려져 있던 땅이다.

사람 고기 맛을 오랫동안 보지 못한 괴물들이 오랜만에 나타난 먹잇감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미지수니까.

“야. 이바름아. 이 정도로 징징댈 거면 명칠이 형이랑 계룡성에 있으라고.”

“대표님, 허억, 제가 언제 징징, 헉, 댔습니까? 저는 그저 훈련이 참, 허억, 검룡스럽다, 했을 뿐, 허억, 이라고요.”

저 입만 다물어도 속도가 0.3m/s는 빨라질 것 같은데.

“됐고. 거의 다 왔다.”

“…림아. 그 말 지금 스물여섯 번째 했다만.”

“형은 그걸 다 세고 앉았냐.”

달려드는 고블린 다섯 마리를 김강산의 보도가 한 번에 절단냈다.

뒤따르는 고블린들을 얼리고 불태우는 하하민과 이바름을 곁눈으로 보며 나는 기감의 그물을 넓게 펼쳤다.

정말로 사리원성이 멀지 않았다.

이 숲을 지나고, 그 뒤에 작은 개천을 건너고, 그 뒤에 언덕을 다섯 개 정도 넘고, 다시 강을 건너고, 또 숲을 두어 개 통과하면…….

“왜 그러느냐. 림아.”

기감의 그물에 괴물의 기운이 잡혔다.

우글거리는 마기가 한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괴물의 전방 십여 미터에서 인간의 기운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괴물에게 쫓기고 있는 것.

자유사냥꾼의 발길도 드문 버려진 서쪽 땅이다.

가장 가까운 유민의 마을은 동쪽으로 하루를 가야 한다. 애들 속도가 아니라 내 속도로, 꼬박 하루.

이런 곳에,

몇 십 명 사냥꾼이 모여 원정을 나와도 모자랄 판에,

‘저 정도 인간이, 혼자서?’

마력이 빵빵한 것도 아니다.

실력이 엄청난 것도 당연히 아니다.

저 정도 실력이면 이곳까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죽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놈이 멀쩡히 살아남아 괴물에게 쫓기고 있다.

함정이다.

앞으로 보고 뒤로 보고 물구나무서서 봐도 함정이다.

조선국의 첩자거나, 위장한 보위대거나, 한수길이 따로 보낸 놈이거나.

어느 쪽이든 사양…….

“사형. 괴물에게 쫓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이 탐색술을 시전한 서은창이 진중하게 지껄였다.

‘내가 그걸 모르겠냐, 이놈아.’

눈치 빠른 놈이 협행멸악 구약보세랑 관련이 될라치면 꼭 정신을 놓는다.

이게 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인건가……?

“쫓겨? 헐… 어디? 당장 가서 구해줘야지.”

“대표님! 어디로 가요?”

얘네는 또 왜 이러셔.

이바름과 하하민이 연달아 외쳤다.

조은조 역시 각오를 다지는 표정을 지으며 철퇴를 움켜쥐었다.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세상에 참 오지랖들이 끝이 없다.

대체 어디서 이딴 놈들만 모았는지.

…내 탓이구나.

이런 놈들만 모아 놓은 내 탓이다.

“뭘 또 구해. 방금까지는 힘들어 뒈지겠다고 난리더니? 림이 형, 저딴 새끼 신경 쓰지 말고 제발 좀 사리원… 악! 왜 나한테만 그래!”

…이놈만 빼고.

“가자.”

어떤 덜떨어진 놈이 파 놓은 덜떨어진 함정인지는, 면대면으로 확인하면 될 일이니까.

찝찝한 건 또 못 참지, 내가.

내 발이 바닥을 걷어차자,

혹이 난 대가리를 움켜쥐고 투덜대던 김강산이 곧바로 뒤를 따랐다.

그 뒤를 은영단이 바싹 뒤따랐다.

곧,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빠르게 움직이는 괴물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크 가죽 갑옷을 입은 빡빡머리 남자가 뒤쫓아오는 괴물들을 향해 얼음화살을 날렸다.

갑옷의 곳곳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괴물의 이빨에 목줄기가 뚫렸을 터.

남자가 날린 얼음화살을 박살내며 삼미호 다섯 마리가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콰아아!!!!

서은창의 화간일광(化間一光)이 놈들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캬아앙거리는 괴성을 지르며 나뒹구는 놈들을 향해 김강산이 쇄도했다.

불길 휘감은 보도가 삼미호 한 마리를 동강내고, 뒤이어 또 한 마리를 동강냈다.

“산이 동무! 제 몫도 남겨주시라요!”

김강산에게 매일같이 북한 사투리를 물어대던 하하민이 신이 나서 외치며 또 한 마리의 모가지를 날렸다.

조은조의 철퇴가 한 놈의 대가리를 박살내고, 최지수의 검이 마지막 한 마리의 목줄기를 꿰뚫었다.

콰가가가!!!

이바름이 쏘아 올린 얼음창이 급강하하던 히포그리프의 날갯죽지를 꿰뚫고,

하늘을 휘돌던 월매가 휘청이는 히포그리프의 목줄기를 물어뜯었다.

음…….

힘들어 뒈지겠다더니 다 엄살이었던 모양이다. 다들 힘이 넘친다.

나는 뽑아들었던 월영검을 슬그머니 제자리에 꽂고 가만히 팔짱을 꼈다.

“감사, 감사합네다!”

피를 철철 흘리며, 빡빡머리가 답싹 허리를 접었다.

고개를 든 놈의 눈동자가 나에게 닿은 순간.

놈이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역시 나를 알고 있다.

어디서 파견한 놈인지는 모르나 이제부터 싹 다 불어…….

“…계룡, 검룡님……?”

놈이 더듬더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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