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106화 (106/122)

106화. 깊숙이 숨겨둔 (1)

빡빡머리의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었다.

놈이 또 하하민을 향해 넙죽 허리를 접었다.

허리가 참 가벼운 놈이다.

눈망울도 순박한 것이, 첩자 노릇을 하기 제격인 상이다.

“생명의 은인이십네다. 이 은혜 절대로, 절대로 잊디 않갔습네다…….”

“에이, 뭘요. 이 정도를 가지고.”

하하민이 검지로 코밑을 쓸었다.

표정이 아주… 기고만장했다.

“그럼요. 이런 괴물쯤이야 우리한테 조밥이거든요.”

“바름아. 히포그리프는 월매가 다 잡던데?”

“아니거든, 누나?! 월매가 막타만 쳤거든!”

투닥거리는 이바름과 조은조를 뚫고 빡빡머리에게 다가간 서은창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상처는 좀 어떠십니까? 움직이실 수 있겠어요?”

“예. 덕분에… 덕분에 살았습네다.”

빡빡머리는 자유사냥꾼 홍창욱이었다.

놈이 가지고 있는 신분표에는 원산성 성주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내가 순찰단도 아니니 공선희가 위조해준 신분표인지 진짜 신분표인지 알 필요까지는 없겠고.

어둠속성은 아니다.

가지고 있는 마력은…….

‘그럭저럭 하하민 정도네.’

놈은 나를 알고 있었다.

혁명당을 원산성에서 탈출시킨 날 내가 보여준 무위를 목격했다나 뭐라나.

그날 이후 원산성에 계룡검룡이 무신으로 추앙받는다나 뭐라나.

홍창욱이 나를 우러러보며 깊숙이 허리를 접었다.

“계룡검룡님…….”

“뭐. 나를 안다니 빠르겠네. 생명의 은인으로서 묻겠는데, 어쩌다 여기를 헤매고 있었냐?”

놈이 머뭇거리며 입술을 뗐다.

그 입술에서 나온 소리는…….

“그것이… 실은… 저도 기억이 잘 나디 않습네다.”

하하.

이렇게 성의 없는 구라는 이번 생에 처음이네.

“참말, 참말입네다. 분명 어젯밤 동무덜과 함께 야영을 혔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홀로 이곳이었습네다. 이곳이 어디인디도 모르는 채 정신없이 괴수덜에게 쫓겨…….”

“이 새끼가. 어디서 수작질이야.”

내 오른손을 서은창이 냉큼 붙잡았다.

“사형. 환자입니다. 제발 좀 참으세요.”

“너는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 못 차렸지. 저게 조선국 첩자면 어쩌려고?”

“…사형은 의심이 너무 많아요. 이미 저분 경지도 다 파악하지 않으셨습니까. 사형에게 붙일 첩자로는 완전히 수준 미달이지요.”

서은창이 자신도 모르게 헤드샷을 날렸다.

수준이야 미달이지. 하지만…….

‘사연이 수상하다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버려진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게 말이야 방구야.

구라를 치려면 더 정성껏 쳐야지.

“내가 뭘? 네놈이 과하게 멍청한 거지. 얘들아, 안 그러냐?”

…왜 다들 그런 표정으로 보는데.

나를 바라보는 애들의 눈빛이 영…….

“엉? 이놈들이 곱게곱게 키워놨더니 인간을 모르네.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라더니. 에잉!”

“형. 나는 형 편이야.”

“어, 그러면 저도 대표님 편이에요!”

뇌 없는 두 놈만 내 말을 신뢰하다니.

허무하다, 허무해.

.

.

.

잠시 후.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홍창욱을 내려다보았다.

놈은 분근착골 고급 버전을 맛보고도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았다.

사파의 대괴수가 다섯 살에 호박에 말뚝 박은 일까지 털어놓게 만든 분근착골인데 말이지.

하하민이 해주술을 시행했으나 그 역시 깨끗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더니, 오늘 내가 그짝인 모양이다.

괜한 사람에게 분근착골을 먹였다. 미안한 일을 했다.

“미…….”

내가 홍창욱을 향해 손을 내밀자,

홍창욱이 화들짝 놀라 엉금엉금 바닥을 기었다.

“미안합니다. 항상 조심하다 보니… 저, 이것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오줌 지린 바지 대신 최지수가 내준 새 바지로 갈아입은 홍창욱이 내 눈치를 살피며 서은창의 등 뒤로 숨었다.

“보세요, 사형. 그저 불쌍한 사냥꾼이잖아요.”

“엄. 그래. 뭐…….”

“…제 주제에 어찌 계룡검룡님께 해를 끼친다는 말이십네까.”

반쯤 울먹이며 홍창욱이 말을 이었다.

“제 처의 가장 친한 친구의 동생이 혁명당이었습네다. 그아가 계룡검룡님 덕분에 살아남았디요. 저이 검룡님을 해할 능력도 없으나 그리할 의도도 티끌만티도 없습네다.”

“걱정 마세요. 창욱 씨. 우리 사형이 말은 저렇게 해도 사람은 참 조… 조… 조옷… 악!”

“좀 이상한 부분에서 말을 더듬네, 내 사제가.”

서은창이 후려 맞은 대가리를 쓰다듬으며 홍창욱에게 말했다.

“아무튼 걱정 말고 함께 가시죠.”

“함께 가? 누구 마음대로?”

서은창이 나를 향해 도끼눈을 뜨다가 다시 대가리를 후려 맞았다.

이번에는 내력을 꽤 실었는데도 서은창은 눈에 힘을 풀지 않았다.

“안 데리고 가면요? 여기다가 버리고 갑니까? 이 괴물들 한가운데에? 그러면 뒈지라는 건데요.”

이바름과 조은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들은 사정을 자세히 모르니 그렇다고 쳐도.

혁명당이 사리원에 자리잡은 과정을 잘 아는 서은창놈이 이러니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아플 지경이다.

나는 후려맞은 대가리를 붙잡고 끙끙거리는 서은창의 귀때기를 꼬집어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가만히 속삭였다.

-생각을 좀 해라, 응? 저게 첩자여도 문제지만, 아니면 괜찮냐? 사리원성의 위치가 알려지면 조선국이 가만히 두겠냐고, 그걸. 그거 위치 숨기느라 얼마나 고생했냐? 어? 아니면, 지금 발길 바쁜데 저놈을 원산성까지 데려다 주고 가자고?

-저도 압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

서은창이 진지한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표정인데.

-어머니께서는, 대의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협의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황미영 씨.

거 참 소화의 뜻을 잘도 이었구려.

“그래. 알아서 해라.”

홍창욱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쩐 일로 보채지 않고 가만히 있던 최지수도 마음은 같았는지 그제야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아주 나만 나쁜 놈이지.

그래, 내가 거악이다, 이놈들아.

***

“지수 형님. 교대 타임입니다.”

“그래, 고생했다, 은창아.”

서은창이 크게 기지개를 펴며 침낭에 몸을 파묻었다.

곧 길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깊은 밤이었다.

별빛을 가린 구름 사이로 초승달이 슬며시 나타났다가 느릿느릿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나뭇가지에 앉아 날갯죽지에 목을 파묻은 월매의 흰 깃털이 달빛을 흐릿하게 반사했다.

조은조의 코 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어둠을 흔들고 있었다.

최지수는 모닥불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침낭에서 반쯤 빠져나와 바닥을 구르는 하하민을 다시 침낭 속에 곱게 넣어주고, 김강산의 왼팔도 침낭에 넣어주고, 이바름의 목에 베개를 받쳐주었다.

서림은 침상 속에 단정하게 누워 있었다.

칠흑빛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희고 반듯한 이마 위에 흩어져 있었다.

최지수는 서림에게서 흘러나오는 길고 깊은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흘 동안 강행군이 이어졌다.

평탄한 길이 아닌, 끝이 없이 들이닥치는 괴물을 베어내며 전진하는 북행이었다.

‘이 험한 길을, 이보다 멀리 돌아오며, 닷새만에 계룡에 도착했다니.’

김강산과 서은창이 계룡에 도착하고 이틀 동안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가 새삼스레 이해가 되었다. 마지막에는 서림이 둘을 들춰 업고 달렸다고 했었다.

그때도 팔팔했던 서림은, 지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서림이 성 밖에서 깊이 잠드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잠을 잔다고 해도 두세 시간. 그것도 반쯤 깨어 있는 가수면 정도였지, 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 부상이 낫지 않았구나.’

마의 삼천에 다녀온 서림은 또 마핵을 가져왔다.

-오다 주웠어.

-…말이 되는 소리를...

-내가 요즘 깨달음이 좀 높아져서. 졸라리 쉽더라고.

그렇게 말은 했으나, 사실일 리 없었다.

마핵의 크기로 봤을 때 보통 상급 괴물은 절대로 아니었을 터였다.

더군다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의 삼천에는 대체 왜 간 것이냐.

-염화검제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그 기생충 있잖아.

-…신에 관한 이야기구나.

-신? 그딴 새끼들이 신은 무슨.

서림은 당분간은 자신만 알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초월자와 계약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 과정에서 염화검제와 오해가 생겨 잠시 검을 섞었고, 별 문제 없이 풀렸다지만.

김강산의 얘기는 달랐다.

-검제 그 새끼? 팔이랑 다리 다 잘렸던데? 우리 형아가 염화검제도 박살내는 사람이라고! 아, 림이 형은 왜 이걸 소문을 못 내게 하냐고요!

아무리 서림이라도 염화검제와 맞붙어서 아무 부상 없기는 어려웠을 터.

‘내가 더 믿음직했다면 림이가 마음 놓고 쉴 수 있었을 텐데.’

은영단에서 제대로 된 탐색술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최지수와 서은창 둘뿐이었다.

서림이 염화검제에게 배워왔다는 새로운 탐색기술을 은영단 전부에게 가르쳤으나 아직 익숙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 사흘 동안.

서은창과 최지수와 서림은 밤을 나누어 보초를 섰다.

서은창이 첫 번째, 최지수가 두 번째, 서림이 세 번째 순서였다.

‘내일 무어라 책하더라도 오늘은 림이를 쉬게 해야겠구나.’

최지수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며 모닥불 앞에 앉았다.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모닥불 주위를 한 바퀴 돈 최지수의 시선이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홍창욱의 담요 위에서 멈췄다.

서은창이 그를 구해주자 말했을 때, 최지수는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예전이었다면 나 역시 은창이처럼 말했었겠지.’

계룡대첩(鷄龍大捷) 그 이후.

계룡문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퍼졌다.

일반인을 아무도 희생시키지 않고, 혈귀단의 공격을 막아냈다. 나아가 혈왕의 목을 베고, 나아가 혈귀단을 박멸했다.

그러나.

여섯 명의 계룡문도가 사망했다.

그날 계룡성은 지옥이었다.

사망자가 여섯 명에 그친 것은 서림의 엄청난 활약과 최지수의 작전과 피나는 훈련, 그리고 서로를 믿고 물러서지 않은 계룡문도 하나하나의 용기 덕분이었다.

암독무가 성을 잠식하고 암독탄과 암독창이 연신 허공을 가르던 끔찍한 현장.

‘살의로 가득 찬, 인간의 탈을 쓴 악마…….’

사람의 악의(惡意)가 그렇게 깊고 넓을 수 있다고는 최지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사람이 두려웠다.

모든 사람을 돕고, 구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과거의 자신이 무모했다 여겨졌다.

-인간이라는 게 그렇지. 다른 사람의 마음속 깊은 우물을 어떻게 다 알겠냐?

돌아온 서림에게 자신의 막막한 기분을 털어놓았을 때, 서림은 가볍게 대꾸했다.

-그런 고민을 하는 거 보니까 형도 이제 나이 들었네?

그리고 웃었다.

홍창욱이라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일행에 합류시키는 것은 위험하다는 서림의 생각에 최지수는 동의했다.

그렇지만 그를 이 괴물들의 한복판에 남겨두고 가는 짓은 그를 죽이는 일과 다름없다는 서은창의 말 역시 옳았다.

‘어렵군.’

먹구름이 낀 듯 가슴이 답답했다.

검은 하늘에도 가슴처럼 구름이 끼어 있었다.

구름 뒤에 숨었던 달이 나타나고, 다시 숨었다가 또 나타났다.

최지수는 계속 탐색술을 펼치며 괴물의 기운에 주의를 기울였다.

선뜻한 마기가 느껴진 것은, 구름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달이 서쪽으로 꽤나 내려앉았을 때였다.

최지수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벌떡 일어났다.

‘가깝다.’

마기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땅에서 불쑥 튀어나온 듯, 하늘에서 떨어진 듯, 갑자기 나타난 마기가 별안간 증폭했다.

그 순간.

담요를 젖히며, 홍창욱이 스르륵 일어섰다.

무릎을 굽히거나 허리를 펼치는 동작도 없이, 허공에 매달린 끈에 의해 일으켜진 인형 같은 움직임.

홍창욱이 소리 없이 서림의 침낭을 향해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습격이다!”

최지수가 외치며 바닥을 박찼다.

홍창욱이 날듯이 침낭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거세게 어깨를 젖힌 최지수가, 홍창욱의 뒷모습을 향해 단번에 검을 내질렀다.

파앗!

검이 홍창욱의 허벅지를 뒤에서 관통했다.

검끝이 허벅지를 뚫고 뾰족하게 빠져나왔다.

최지수는 검을 비틀어 뽑아냈다.

‘피가……?’

피가 튀지 않았다.

당혹감을 누르며 최지수가 다시 한 번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홍창욱이 선 채로 허리를 돌렸다.

인간이라면 부러졌을 각도로 기묘하게 허리를 뒤튼 홍창욱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당했다.’

선뜻한 통증이 목줄기를 파고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