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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107화 (107/122)

107화. 깊숙이 숨겨둔 (2)

최지수는 재빨리 왼손으로 목줄기를 훑었다.

미끄덩한 느낌이 선명했다.

내려다본 손바닥에 붉은 피가 몇 방울 묻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최지수의 시야를 세로로 가르며,

흰 빛줄기가 홍창욱의 어깨를 지났다.

“형!!!!”

잘려나간 팔이 허공을 돌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번에도 피는 튀지 않았다.

“오지 마!!!!”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서림이 최지수의 말을 무시하며 깊숙이 발을 디뎠다.

콰아아아!!!

땅이 솟구치고, 강철벽이 서림과 최지수 사이를 가로막았다.

서림이 휘두른 검이 강철벽을 순식간에 박살냈다.

다시 모래와 흙으로 돌아가 흩어지는 잔해 사이로, 최지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흡혈귀다!!! 물리면 감염된다!!!”

“알았으니까 물러서.”

서림의 목소리가 베일 듯 차가웠다.

팔 하나를 잃은 홍창욱이 다시 최지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최지수는 재빠르게 후퇴하며 마력을 일으켰다.

파슉! 파슈욱!

땅에서 솟아오른 강철창이 홍창욱의 발목을 꿰뚫고, 허벅지를 꿰뚫고, 무릎을 박살냈다.

단번에 가까워진 서림이 홍창욱의 등줄기를 향해 팔을 뻗었다.

다시, 홍창욱의 목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벌어진 이빨이 서림의 팔꿈치에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콰아아!

서림이 쏘아낸 작은 강기의 구슬에 얻어맞은 홍창욱의 얼굴이 폭발의 반동에 뒤로 물러나고,

뒤이어 최지수의 검등이 홍창욱의 정수리를 거세게 내리쳤다.

서림의 손끝이 몇 군데 등줄기를 짚자,

홍창욱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홍창욱의 몸이 반동으로 튀어올랐다가 다시 떨어졌다.

“지수 형……!”

“오지마.”

최지수가 물러나며 검을 움켜쥐었다.

그 검끝은 자신의 목줄기에 닿아 있었다.

서림이 숨을 들이쉬며 걸음을 멈췄다.

월영검을 움켜쥔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림아. 나 물렸다. 감염됐다.”

검끝이 닿아 있는 곳에 뾰족한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

“내가, 지나가자고 했지! 내가, 두고 가자고 했잖아! 시발! 좆같은 새끼 구하자고 오지랖을 부려서! 이 새끼들! 이 덜떨어진 새끼들이! 책임도 못 지는 새끼들이!”

화가 난다.

참을 수 없도록 분노가 치민다.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쏟아졌다.

소란을 듣고 몰려든 괴물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고도 분노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잠들어 버렸다.

이전에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었다.

소주천으로 수면을 대신해도 일주일 정도는 거뜬했다.

내상이 낫지 않아서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선천진기를 소모해서 생긴 증상이라면 심각했다.

그런 주제에 사리원성이 신경쓰여 서둘러 계룡성을 떠났다.

괜찮을 줄 알았다.

저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흡혈귀 새끼도, 괜찮을 줄 알았다.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없지 않았으나 괜찮을 줄 알았다.

내가, 다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애들에게 쏟아 부은 말은 사실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책임도 못 지면서 오지랖 부리는 새끼.

덜떨어진 새끼.

“림아. 진정하거라.”

“시발.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은영단 애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바싹 얼어붙어 있었다.

최지수는 애들로부터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마혈 잡혀 딱딱하게 굳은 빌어먹을 흡혈귀 새끼와 함께.

“애들 말이 옳다. 이 사람을 놓고 갔다면 계룡문이 다른 길드와 다를 게 무엇이겠느냐.”

“…그래서, 형이 물렸잖아!”

“괜찮다.”

최지수가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기는 뭐가……!”

“림이 네가 해독시켜 줄 텐데 내가 무얼 걱정하겠니.”

최지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를 달래는 듯, 안심시키려는 듯.

“…그거야 당연하지.”

“그래. 이번에도 고맙구나, 림아.”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들이쉰 숨을 내뱉고, 다시 들이쉬었다.

들이쉰 숨을 다시 내뱉었다.

수런거리던 마음이 느릿느릿 가라앉았다.

“그래서, 지수 형. 해독 방법은 알고 있는 거지?”

***

-흡혈병은 흡혈박쥐에게 물렸을 때 발생하는 감염병이다. 남쪽의 흡혈박쥐는 거의 박멸되었으나 과거 3차 블랙데이 때까지만 해도 상당한 숫자가 남아 있어 많은 성이 흡혈병으로 인해…….

-형. 제발. 지금 AI 모드 돌릴 때야?

잠시 말을 멈춘 최지수가 곧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지상에 돌아다니는 흡혈박쥐는 실체가 없는 분신이다. 그 본체는 깊숙한 곳에 숨어 있지. 흡혈병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본체의 심장이 필요하다. 그리고…….

해가 뜨자 홍창욱 새끼는 제정신을 되찾았다.

-저이, 이분을 물었다는 말씀이십네까? 저이, 지금 저이 흡혈귀라는 말씀이십네까?

그리고 자신이 흡혈귀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기절했다.

놈은 자신이 감염되어 있는 줄도 몰랐다.

흡혈귀가 다들 그랬다. 그런 상태에서 제 자식도 물고 연인도 물고 어머니도 물고 한다고들 했다.

지독한 전염병이었다.

낮에는 멀쩡한 인간이다.

그리고 밤이 되어 일정량 이상의 달빛을 받으면, 흡혈귀로 변이한다.

이성을 잃고 피를 탐하며 흡혈병을 전염시키는 괴물.

그리고 아침이 되어 이성이 돌아오면 간밤의 일을 깡그리 잊는다.

최지수가 물린 것은 새벽녘이었다.

곧 달이 졌고, 해가 떴다.

그래서 지난밤에 최지수는 변이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모르지.’

최지수가 설사 해독 타이밍을 놓쳐 진짜 괴물이 되더라도 놓아 줄 생각은 없다.

물론 그런 일이야말로 절대로 없다.

‘내가 해독할 거니까.’

우리는 그곳에서 하루 낮을 보내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물론 그저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근처의 괴물들을 싹쓸이하고, 또…….

-월매야. 너 지수 형 좋아하잖아. 지수 형이 지금 아야! 하거든? 네가 계룡에 날아가서 이거를 가져와야 해. 그래야 해독약 만들 수 있다고.

-뀨!

-자. 여기 필요한 재료 적어놨으니까 이거 하영이한테 갖다주고, 하영이가 주는 거 받아오면 돼.

-뀨뀨!

월매가 결연하게 모가지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최지수를 잘 따르더니, 대환단으로 꼬시지도 않았는데 말을 잘 들었다.

-대표님…….

잔뜩 쫄아 있던 하하민이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손을 들었다.

-왜.

-예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는데요… 타이밍이 좀 아닌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아, 왜!

-월매, 여자애라고요. 형 아니고 오빠인데요...

이럴 수가.

700년 동안 몰랐던 사실이었다.

-월매야. 너 여자였냐?

-꺄오욱! 끼우꾝!

-…그동안 미안했다.

새벽에 떠난 월매는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왔다.

월매의 등에 얽어맨 오우거 가죽 가방 속에는 필요 재료가 빠짐없이 넉넉하게 담겨 있었다.

해가 지기 전, 나도 그곳을 떠났다.

흡혈귀로 변이해 다른 사람을 전염시키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최지수와 홍창욱의 마혈을 짚어 눕혀 놓은 채로.

감염자에게도 점혈이 통해 천만다행이었다.

-이거야말로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증거 아니겠느냐. 나도, 홍창욱 씨도 말이다.

최지수는 나에게 마혈을 눌리면서 그리 말하며 웃었다.

-지수 형은 제 목숨으로 지키겠습니다, 사형.

서은창이 결연하게 말했다.

이놈은 진짜로 목숨 걸 놈이다. 내가 좀 지랄하기도 했지. 안 그래도 죄책감 느끼고 있는 놈한테…….

-걸기는 뭘 걸어. 본체놈 박살내고 올 테니까 그냥 잘 지켜.

-…옙. 사형.

야영지에 나머지 애들을 남기고, 김강산을 데리고 곧장 이곳으로 향했다.

홍창욱 새끼가 전날 아침 정신을 차렸다는 벌판.

놈의 자백이 사실이라 가정할 때, 흡혈박쥐의 서식지가 있을 만한 지역은 두 곳이었다.

첫 번째는 놈이 야영을 했다는 원산성 인근의 폐공장.

두 번째는 놈이 아침에 정신을 차렸다는, 이 벌판.

넓게 펼쳐둔 기감의 그물에는 어떤 괴물도 잡히지 않았다. 낮에 이미 한바탕 싹쓸이를 했기 때문.

‘만약 여기에 서식지가 있다면…….’

일이 복잡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산성 인근까지 가야 한다면 최지수의 해독이 그만큼 늦어진다.

해독은 빠를수록 좋다. 시간이 지날수록 흡혈귀와 인간의 경계가 무너지게 된다. 그 경계가 완전히 무너지면…….

‘그렇게 두지 않는다고.’

벌판을 물들인 노을이 짙어졌다.

서쪽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내려앉고 있었다.

“김강산.”

“예압.”

“알지? 박쥐 다 죽이지는 말고, 물리면…….”

“뒈진다고.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 형아.”

가벼운 듯 대꾸하는 목소리에서 긴장한 기색이 느껴졌다.

“물려도 돼. 내가 다 해독해줄 테니까.”

“형이나 조심해. 형이 물리면 끝장이거든?”

음.

맞는 말이다.

내가 전염되면 제어할 사람이 없을 테니까.

어쩌면 이 세상의 진정한 멸망……?

까지는 아니고.

“집중해라.”

“하고 있습니다.”

손톱만큼 남아 있던 붉은 태양이 드디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 순간.

넓게 펼쳐둔 기감의 그물에 마기(魔氣)가 포착되었다.

아주 흐릿하고, 아주 작은, 수백 조각의 마기.

낮에는 주변과 동화(同化) 상태에 있던 흡혈박쥐들이 활동을 시작한 것.

풀숲이 가볍게 흔들렸다.

마치 바람이 지나가는 듯한 가벼운 흔들림이었으나.

“온다.”

허리까지 자란 잡풀 사이로 순식간에 마기가 가까워졌다.

화르륵!

김강산의 주위로 백색의 화염벽이 생성되었다.

동시에, 내가 월영검을 둥글게 휘둘렀다.

검의 끝을 타고 검기가 뾰족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1미터 가량의 검날.

그리고 그만큼 솟아오른 검기.

가슴팍 앞에서 월영검을 둥글게 휘두르자,

검기가 지나간 길을 따라 흰 빛무리가 남았다.

그리고

콩. 코옹. 쿵. 찍. 팟. 콩. 파앗.

흡혈에 눈이 멀어 쇄도한 박쥐놈들이 검막에 충돌했다.

가벼운 몸체는 단단한 기(氣)의 벽을 넘지 못하고 튕겨나가고, 박살나고, 바스러졌다.

김강산에게 들이댄 박쥐들도 곧 같은 신세가 되었다.

검막이냐 화염벽이냐가 달랐을 뿐.

엄지손가락만한 박쥐들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희뿌연 검막에 부딪히고,

화염벽에 뛰어들어 사라졌다.

놈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사체도 남지 않았다.

최지수의 말대로였다.

-흡혈박쥐는 쉽게 소멸할 거다. 각각의 흡혈박쥐가 소멸하면 본체는 분신에 나눠준 마력을 잃게 된다. 단번에 끝장내지 않고 시간을 끌면…….

‘흡혈을 포기하고 분신을 불러들인다고 했지.’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우리를 향해 몰려들던 흡혈박쥐들이 일순간 멈췄다가,

어딘가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빛과 같은 속도.

타앗.

내 발이 거세게 바닥을 걷어찼다.

넓게 펼친 기감의 그물 끄트머리에 놈들의 마력이 희미하게 잡히고 있었다.

있는 힘껏 내 뒤를 쫓아오는 김강산의 발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고, 들리다가, 점차 멀어졌다.

.

.

.

내가 걸음을 멈춘 곳은 칡덩굴로 뒤덮인 오래된 터널의 입구였다.

넓게 펼쳤던 기감의 그물을 거두어 터널의 안쪽에 집중하자 작은 마기들이 일렁이는 것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큼직한 마기 하나.

분신과 마찬가지로 흐릿한 느낌의 기운이다. 하지만 조각조각 나뉘지 않고 한 덩어리로 뭉쳐져 있다.

형체를 갖춘 안개와 같은 느낌.

‘이게, 본체놈이군.’

기운을 일으키자,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월영검을 가득 채웠다.

흰 빛줄기가 터널의 어둠을 수평으로 가르고,

콰아아아아아!!!!

이내 터져나갔다.

강철로 만들어진 터널 벽을 무너뜨리지 않고, 흡혈박쥐 분신들만 박살낼 정도로 조절한 적(積)이었다.

그리고 통했다.

분신의 마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터널 안에 존재하는 것은 본체 하나 뿐.

“아! 형! 진짜! 같이 좀 가자고요! 뭐가 이렇게 빠르냐고!”

김강산이 헥헥거리며 나타났다.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네가 느린 거지.”

“나 형 빼면 계룡에서 가장 빠르거든!”

“그러니까 나보다 느린 거지.”

계룡에서만이 아닐 것이다.

매번 죽어라 내 뒤를 따라 달리더니 김강산의 속도는 몰라보게 빨라졌다.

이 한반도에서 김강산보다 빠른 사람은 열 손가락…

까지는 아니고.

발가락까지 헤아리면 분명히 그 안에 들어갈 터.

나는 기감의 그물을 넓게 펼쳐 다시 한번 주변을 확인했다.

느껴지는 것은 여전히 터널 안 흡혈박쥐의 본체뿐.

터널 안에서 새어나오는 본체놈의 마기는 리치의 그것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다.

찾기가 어려워서 문제지, 상급 괴물 치고는 난이도가 높지 않다고 했다.

그러니까 남쪽에서 흡혈박쥐를 거의 박멸할 수 있었겠지.

“김강산. 본체놈은…,”

“예에. 기억하고 있고말고요. 본체가 환영술 쓰는데 내 공포가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고, 베면 베이고 찌르면 찔리니까 깡그리 박살내면 되는 거잖아.”

이놈이.

대가리 굵어졌다고 내 말을 툭툭 잘라먹네.

“걱정 마, 형. 괭이갈매기 놈이 튀어나와도 박살낼 거니까.”

믿음직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믿음직스럽지 않은 것이 딱 평소의 김강산이다.

“얼른 해치우고, 해독약 만들자고.”

“예압, 형아.”

곧.

내가 바닥을 걷어찼다.

김강산이 내 등 뒤를 바싹 뒤따랐다.

두 명의 발소리가 깊은 터널을 순식간에 가로질렀다.

본체놈을 만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놈이 나를 맞이하러 마중을 나왔으니까.

짙은 암흑 사이로 소리 없이 쇄도하는 마기가 기감의 그물에 선명하게 포착되었다.

김강산에게 눈을 껌벅이자,

김강산이 눈을 껌벅였다.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월영검의 검날을 희게 빛냈다.

가볍게 월영검을 휘두르자,

빛줄기가 수평으로 어둠을 가르며 놈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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