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깊숙이 숨겨둔 (3)
콰아아!!!!
적(積), 적(積), 적(積), 다시 적(積).
다섯 방의 강기가 모두 놈의 몸체에 격중했다.
뒤이어,
김강산이 생성한 청염구가 공기를 불사르며 날아갔다.
화르륵!!!!
맹렬한 불길이 좁은 터널을 단번에 불태웠다.
“형, 끝났… 악!”
“내가 그거 하지 말랬지.”
김강산이 입술을 삐죽이며 보도를 뽑아들었다.
동시에,
푸른 불길을 뚫고 검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터널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놈은 제 분신과 마찬가지로 박쥐의 형태였다.
긴 날개가 1미터 남짓의 몸통을 양쪽에서 덮고 있었다.
날개의 곳곳이 그을리고 녹아 있었다.
날개로 몸통을 방어한 모양이지만…….
그 그을리고 녹은 흔적은 청염과 적(積)이 통했다는 증거다.
‘어렵지는 않겠어.’
뾰족한 돌기로 뒤덮인 긴 꼬리가 허공을 단번에 가르며 날아들었다.
있는 대로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며, 내가 거세게 바닥을 걷어찼다.
“쏴!”
김강산이 곧바로 화염구를 내던졌다.
등 뒤에서 뜨끈한 불길이 느껴졌다.
화염구를 던지고 곧장 따라붙은 김강산의 발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본체놈을 향해 날아가는 화염구보다 더 빠르게,
내가 쇄도했다.
오크의 가위팔처럼 긴 놈의 꼬리가 내 목덜미를 노리며 날아왔다가,
콰아앙!
바닥에 내리꽂혔다.
그사이 나는 놈의 코앞에 도착했다.
날개 밖으로 놈의 동그란 대가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한 발 뒤에 도착한 김강산의 화염구가 놈의 몸을 감싼 날갯죽지에 격중하고,
놈이 바닥에 꽂힌 꼬리를 뽑아내 거세게 휘둘렀다.
날카로운 돌기의 끄트머리가 김강산의 정수리를 노렸다.
김강산의 보도가 꼬리를 가로막은 순간.
스파앗.
월영검의 검날이 놈의 목줄기를 지났……?
‘느낌이 없어.’
손끝에 걸리는 것이 없다.
두꺼운 가죽도, 겉가죽의 아래를 채운 살점도, 강철보다 단단한 뼈도, 찐득한 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검날은 마치 허공을 꿰뚫듯 놈의 목을 통과했다.
잘려나간 모가지가 공중을 한 바퀴 돌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웅. 쿵.
반동으로 튀어오른 목이 반 바퀴 돌아 멈춰 섰다.
검은자위만 있는 놈의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박쥐의 얼굴.
잘려나간 놈의 얼굴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환영이라고 외치려 했는데,
소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는 눈을 껌벅였다.
김강산이 보이지 않았다.
기감의 그물에도 잡히지 않았다.
‘이미 환영술에 걸렸구나.’
상관없다.
흡혈박쥐의 본체놈이 만들어내는 환영은 내 공포를 근간으로 한다.
나에게 근거하지 않은 환영을 생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의미.
괭이갈매기든, 혈왕놈이든, 검제놈이든, 놈들에게 기생하고 있는 초월자놈이든.
어떤 놈이든 상관없다.
모두 나에게 박살난 놈들.
두 번이든 세 번이든 얼마든지 다시 박살내면 된다.
‘그래. 얼마든지 박살을…….’
내가,
숨을 삼켰다.
아니, 멈췄다.
시야가 일순간 흐릿해졌다.
눈을 가득 메운 물 때문이다.
눈꺼풀을 껌벅이자,
눈꼬리를 빠져나온 따뜻하고 축축한 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시 맑아졌던 시야는 곧 다시 흐릿해졌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연신 눈꺼풀을 껌벅였다.
하지만 곧 껌벅이기조차 멈췄다.
검은 막이 그를 덮는 찰나까지도 아까웠다.
아깝고도 또 아까웠다.
‘…소화야.’
청의를 입은 소화.
어린 소화가 내 앞에 서 있었으므로.
아주 어린 소화의 손에 월영검이 들려 있었다.
[소화야.]
내가 소화를 불렀다.
내 목소리는 공기를 울리지 못했다.
못했으나.
소화는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린 소화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시선이었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차가운 시선이었다.
힘들었겠지.
내가 그리 떠나고 홀로 남겨져, 얼마나 힘들었을까.
소화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화의 목소리는 공기를 울려 내 귀를 통과했다.
-사형.
[그래. 소화야. 무슨 말이든 하려무나. 무엇이든…….]
원망이라도 좋았다.
왜 돌아오지 않았는지, 내가 떠난 뒤 홀로 남아 얼마나 힘들었는지, 왜 모두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죽어버렸는지.
어떤 말이라도 좋았다.
환영이라도 좋았다.
나는 숨을 죽이며 어린 소화를 향해 조심스레 걸음을 뗐다.
소화가 나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내가 한 발짝 다가가자,
소화가 두 발짝 다가왔다.
손이 맞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드디어 소화가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
격통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소화의 손에 들린 월영검의 검날이 내 단전을 꿰뚫고 등 뒤로 튀어나왔다.
단전이 갈기갈기 조각나는 느낌이 손에 잡히듯 선명했다.
단전에 모여 있던 내력이 기맥을 휩쓸고, 뒤틀고, 찢어발겼다.
온 몸이 찢어지는 격렬한 통증.
그 한가운데에서, 나는 이를 악물며 소화를 바라보았다.
[왜… 이런…….]
소화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내 허리에 닿았다.
소화가 다가온 만큼, 딱 그만큼, 월영검이 내 배를 파고들었다.
어린 소화가 나이 든 목소리로 가만히 속삭였다.
-사형이 내 아버지를 죽였지요. 설마 내가 모르리라 생각했나요.
[…그, 건… 내가…….]
내 목소리는 끝내 입 밖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만약 말할 수 있었더라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기억이 사라지고 잘려나간 와중에도 이 어린 날의 기억은 선명했으니까.
깊숙이 숨겨두었던,
아주 오래전의,
지금 나에게 남은 내 최초의 기억.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그는 산을 헤매던 나를 집으로 데려갔고, 나는 그가 나를 구해주었다 착각했다.
나를 죽여 내 고기를 제 딸에게 먹이려던 그를 죽였고, 나는 그리하여 살아남았다.
갓난쟁이 아기였던 소화를 등에 업은 채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사부를 만났다.
-쯧쯧. 어린 것들이… 부모님이 돌아가셨느냐?
-이 애 아버지의 무덤이에요.
-…너는?
내가 고개를 가로젓고, 사부가 묻는다.
-네 이름이 뭐냐?
그날의 기억은 이것이 끝이었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면서 어찌 이 기억은 이리 선명한지.
‘잊고 싶었다고. 이 기억이야말로 잊어버리고 싶었다고.’
그 기억을 나는 아주 깊숙이 숨겨두었다.
검황일 시절에도,
서림으로 사는 지금도.
혹여 그 기억이 떠오를 때면 꽉 꽉 눌러 밟아 갈비뼈 사이 어딘가에 쑤셔 박았다.
차라리 잊었더라면.
잘려나간 많은 조각처럼 잊었더라면.
[소화야. 내가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내가…….]
콰직.
월영검이 뼈를 부수며 내 몸을 빠져나갔다.
내 몸이 허물어지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는 바닥을 기며 소화를 불렀다.
소화는 뒤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멀어져, 사라지고, 흐릿해진,
그 자리에,
-사형. 다시 살아나니까 좋수?
설표가 나타났다.
‘진짜… 좆같은 환영이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시야가 흰빛으로 가득 찼다.
백골의 언덕에 내가 서 있었다.
최지수의 백골이 내 발아래에서 부서졌다.
김강산의 백골이 나를 우두커니 올려다보았다.
엄마의 백골이 내 손 안에서 바스라졌다.
서은창의, 하하민의, 남지호의, 이바름의, 조은조의, 박명칠의, 남지윤의, 지남천의…….
수억, 아니, 수십억의 백골의 언덕에 내가 서 있었다.
숨을 쉬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
-캬아아아!
백호가 꼬리를 휘저었다.
건물의 기둥처럼 거대한 앞발이 서림을 움켜쥐고 있었다.
서림은 미동조차 없었다.
‘이건 환영이야. 환영이니까, 당연하다고.’
김강산은 스스로에게 되뇌며 좌룡보도를 움켜쥐었다.
김강산은 이 도가 썩 마음에 들었다.
검은 날은 무거우면서도 단단하고, 단단하면서도 날카로웠다.
무엇보다, 서림이 준 것이었다.
비록 좌룡보도라는 이름을 서림은 영 마뜩찮아 했지만.
-좌룡보도가 뭐냐? 깔쌈한 이름을 붙이라고. 그게 김강산 네 새 별호가 될지도 모른다고.
-싫은데? 난 좌룡 딱 좋은데.
-야… 완전 따까리 이름 같잖아.
-그러면 형이 더 잘나가면 되겠네.
‘뭐래.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지금 괭이갈매기의 앞발에 옴짝달싹 못하고 붙잡혀 있는 서림의 월영검은, 분명 조금 전 흡혈박쥐 본체의 목을 꿰뚫었었다.
환영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자신이 북쪽으로 돌아왔을 무렵 몇 번이고 반복해 꾼 꿈이었으므로.
하지만 그 꿈과는 달랐다.
자신의 손은 움직였고, 도를 움켜쥘 수 있었다.
-환영술을 쓴다니깐. 뭐가 나타나든 박살내라고. 내가 나타나도 박살낼 수 있겠지?
-형. 그건 실력적으로 불가능한데.
-어차피 환영인데 뭐가 문제냐.
서림의 말을 되새기며 김강산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곧, 좌룡보도의 검은 도날을 푸른 불길이 휘감았다.
“형을 놓으라고! 이 괭이도마뱀아!”
거세게 도를 휘두르자,
푸른 불길이 허공을 불사르며 백호를 향해 뻗어나갔다.
불길의 끄트머리가 백호의 가슴팍에 닿는 순간.
김강산이 바닥을 걷어찼다.
‘선빵필승. 내 의도대로 적이 움직이게 한다. 적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서림이 만 번도 넘게 되풀이한 이야기가 저절로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공격을 할 때는 몰아치되, 적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다.’
청염에 그을린 가슴팍을 향해 김강산이 도를 휘둘렀다.
도날이 지나간 자리가 깊숙이 파였다.
날카로운 파공성이 등 뒤에서 울렸다.
허리를 비틀어 백호의 꼬리를 회피한 김강산이 백호의 첫 번째 날개를 잡고 매달렸다.
자신을 떨어내려 백호가 거세게 몸을 뒤챘다.
수백 개의 얼음창이 소낙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화염벽을 세워 얼음창을 녹여내며, 김강산이 백호의 등줄기를 기어올랐다.
기어코 화염벽을 통과한 얼음창 수십 개가 화염 방어막에 튕겨 부서졌다.
그리고도 남은 얼음창이 허리를 꿰뚫었다.
분수처럼 피가 솟구치고, 격통이 몸을 파고들었다.
‘괜찮아! 어차피 다 환영이라고. 림이 형이 저렇게 붙들려 있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잖아?’
이를 짓씹으며 격통을 견디며, 김강산이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다.
화염구와 화염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불길과 폭음 속으로 도날이 짓쳐들었다.
***
“…형! 림이 형!”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커다란 손바닥이 잡혔다.
뺨이 좀 부은 것 같은데 말이지.
“야. 나 쳤냐?”
김강산이 높이 들어올렸던 팔을 슬그머니 등 뒤로 감췄다.
“아니… 그게… 형이 정신을 못 차리길래…….”
나는 버퍼링 걸린 김강산의 얼굴을 지나쳐 주변을 훑었다.
김강산이 생성한 백염이 내가 서 있는 곳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터널의 구석에 박쥐의 목이 나뒹굴고 있었다.
몇 발짝 떨어진 위치에 널브러진 몸뚱아리가 보였다.
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목 잘랐어! 완전 조밥이던데?”
지껄이는 말과 달리 김강산의 왼쪽 팔꿈치 아래가 사라져 있었다.
깨진 이마에서 흐른 피가 얼굴 절반을 덮고 있었다.
양쪽 다리도 절름거리는 모양이 꽤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환영술에 당한 사이에…….’
김강산이 조금만 약했더라면, 실수했더라면,
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김강산은 환영처럼 백골이 되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릿한 통증에, 나는 뒤늦게 내가 주먹을 움켜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잘했네.”
“헐. 나 지금 칭찬받은 거? 형! 한 번만 더 말해주면 안 돼?!”
“잘했다, 김강산.”
“한 번 더!”
“강산아, 잘했다.”
“한 번만… 악!”
이 새끼가.
아무튼 적당히를 몰라요.
김강산은 내가 괭이갈매기 놈에게 당해 죽어가는 환영을 보았다 했다.
백호를 박살내니 환영이 깨지고, 본체놈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
‘김강산 네 두려움은 그것이구나.’
나의 공포는…….
소화는 제 아비를 죽인 사람이 나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날 만난 사부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은.
‘하지만 언제나 두려웠지.’
사실을 알게 된 소화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쩔 수 없었으니 이해한다고 할까.
혹은 아버지의 원수라며 차갑게 돌아설까.
그리고, 마교를 멸하겠다며 나를 따라나섰던 강호행에서 목숨을 잃은 설표는…….
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내 안에는 두려움이 너무나 많았다.
눌러 놓고 외면했던 공포, 그 아득하고 까마득한 기분.
모두 죽은 세상에 나 홀로 환생해 살아가야 한다면…….
쑥쑥커 두 알을 한꺼번에 씹어 삼킨 김강산이 쭈그려 앉아 거대박쥐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며 말했다.
“형이 그 괭이갈매기 앞발에 잡혔다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딱 봐도 환영이드만. 내가 싹 박살냈지.”
본체놈 입장에서 보면 운이 나빴다.
내가 본 모든 인간 중에 가장 단순한 놈이 김강산이다.
겹겹이 쌓인 내 두려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깊은 공포는 김강산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김강산이 두려워하는 것이 내 죽음이라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하냐.
입안이 좀 썼다.
“형은? 형은 뭐가 나왔길래 그렇게 정신을 못 차렸냐?”
“…그냥, 돌아가신 부모님.”
“헐. 저 새끼 진짜 나쁜 새끼네. 할 게 없어 패드립을 해?”
놈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던 김강산이 고개를 픽 들며 얼굴을 찡그렸다.
“조심조심해라. 심장 터진다.”
“옙. 썰.”
김강산의 도날이 심장과 연결된 근육을 잘라냈다.
놈의 싱싱한 심장이 곧 김강산의 손에 놓였다.
어쨌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내 두려움은 온전한 내 몫일 뿐.
나는 앞장서 터널을 나왔다.
옅은 달빛이 벌판을 덮은 잡풀 위로 부서지고 있었다.
창백한 달빛을 가르며,
암독탄(暗毒彈)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