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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109화 (109/122)

109화. 깊숙이 숨겨둔 (4)

홍창욱은 아침에 깨어보니 이 벌판이었다고 했다.

즉,

원산성 인근에서 야영한 홍창욱을 정성껏 이곳까지 데려와 흡혈박쥐에게 감염시킨 ‘다른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애들의 생각대로 홍창욱은 희생자였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우리와 홍창욱의 만남은 누군가에 의해 기획된 함정이었다.

이곳이 흡혈박쥐의 서식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우리가 그 길을 지나가리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고.

우리가 괴물놈들에게 쫓기는 약해 빠진 사냥꾼을 지나치지 않으리라는 사실마저 알고 있는…….

내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가 있는 모양이다.

북쪽에 돌아오자마자 이런 일이 터졌으니.

그게 누구든 상관없다.

조선국이든, 또 다른 세력이든,

‘실수했어, 네놈들.’

-함정이라고?

흡혈박쥐의 본체에서 부지런히 심장을 발라내며 내 얘기를 듣던 김강산이 불쑥 되물었다.

-근데 왜 방금은 뒤통수 안 쳤지? 원래 대빵 잡을 때가 가장 좋은 기회잖아.

좋은, 기회라.

이 함정을 판 빌어먹을 누군가도 두려운 것이 많은 놈이 분명했다. 차마 그 소굴에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그만큼 흡혈박쥐의 본체가 만들어낸 환영은 아주 지독했다.

만약 나 혼자 마주쳤더라면 그곳을 무사히 빠져나왔을지 장담하기 어려웠을 터.

‘나조차도, 내 안에 그런 공포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으니까.’

김강산은 나를 올려다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향한 눈빛이 언제나처럼 맑았다.

나는 녀석에게 내 켜켜이 쌓인 자책과 후회와 그것이 만들어낸 저항할 수 없는 공포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가볍게 어깨를 추켰다.

-그놈도 두려운 게 많았나 보지.

김강산은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편이 나았다.

나는 다시 심장 분리 작업을 시작한 김강산에게 말했다.

-밖에 나가면 숨어 있던 놈이 공격해 올 거야. 김강산 너는 바로 빠져나가서 지수 형한테 가라.

-싫…….

-그 심장. 그거 터지면 지수 형 인간으로 못 돌아온다고. 계룡문 부대표가 흡혈귀라면 좀 그렇잖냐.

나는 최대한 가볍게 말하려 애썼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견디기 힘들었으므로.

결국 김강산은 고집을 꺾었다.

-형 내상은?

-이 새끼가, 나를 뭘로 보고. 진작 다 회복됐다고.

-…알았어. 심장 갖다 주고 바로 올게.

-그래.

사실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함정이나 파는 비겁한 놈을 박살내기에 이 정도면 충분하지.’

다행히 김강산은 내 당부를 기억했다.

암독탄이 날아오자마자, 김강산이 암독탄이 날아온 지점의 반대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으니까.

쇄도하는 암독탄을 향해 재빨리 몸을 돌리며,

나는 월영검을 둥글게 휘둘렀다.

검이 지나간 길을 따라 희뿌연 검막(劍膜)이 형성되고,

곧 그 막은 둥근 구(球)가 되었다.

파아앗.

희게 빛나는 검망(劍網) 속에서 암독탄이 조용히 소멸하고,

다시 다섯 개 암독탄이 날아들었다.

나를 향한 공격이 아니다.

검은 암독탄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곳은, 잡풀 사이로 멀어지고 있는 김강산의 등줄기.

‘…이 비겁한 암살자 새끼가.’

내가 어금니를 짓씹으며 바닥을 걷어차려는 찰나.

달려나가던 김강산이 그대로 허리를 젖혔다.

녀석이 가볍게 보도를 내리긋자,

화르륵!

푸른 불꽃이 거대한 원기둥을 이루며 쏘아져 나갔다.

다섯 개의 암독탄이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녹아 사라지고,

“혀엉! 금방 오오올게에에에에--------!!!!”

외치며 멀어지는 김강산의 등줄기를 향해,

수십 개 철침이 총알처럼 따라붙었다.

파스스스스.

고요히 날아가는 철침 하나하나의 위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다. 그러나 저 끝에는 짙은 암독이 묻어 있을 터.

하지만.

‘어림없지.’

내 발이 거세게 바닥을 걷어찼다.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월영검을 희게 빛내고,

곧 둥근 구슬이 되어 검끝에 맺혔다.

적(積), 적(積), 적(積), 그리고 적(積)의 폭발에 휩쓸린 한 무더기의 철침이 힘을 잃고 흩어졌다가,

이내 방향을 바꿔 나를 향해 쇄도했다.

기감의 그물에 더 이상 김강산은 잡히지 않았다.

충분히 멀어진 것.

그러나, 풀숲에 숨은 놈의 기운 역시 선명하게 잡히지 않았다.

은신 실력이 상당한 놈이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전문적인 암살자 같은데 말이지.’

신중하게 함정을 파고, 함정에 빠지기를 끈질기게 기다렸다가 서두르지 않고 덫을 조인다.

기회를 기다리는 인내와 기회를 붙잡는 기민함은 특급 살수의 필수 요건.

그 둘을 모두 갖춘 살수를 마주한 적은 내 긴 인생에서도 손에 꼽혔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기감의 그물을 더 섬세하게 펼쳤다.

짙은 암독이 달빛이 비추는 벌판을 단번에 뒤덮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호흡을 따라 스며든 암독이 기맥을 타고 침투했다.

손가락 끝이 저릿하더니, 몸이 파드득 굳었다.

아주 짙은 마비독이다.

현무의 그것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

호신강기마저 뚫고 들어오는 암독을 삼매진화로 불태우며,

나는 있는 대로 기운을 끌어 올…….

‘아윽.’

새빨간 인두로 지진 듯한 통증이 급작스럽게 단전을 파고들었다. 완전히 낫지 않은 내상 때문.

아프다. 졸라리 아프다.

그런데 지금 이 새끼를 제대로 조져놓지 않으면 내 마음이 더 많이 아플 것 같다.

나는 통증을 눌러 참으며 계속해서 기운을 운용했다.

호신강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리고, 그 틈으로 배어든 암독을 삼매진화로 불태우며, 동시에,

파바바바빠바바바빠바밧.

검끝에서 폭발하듯 발출된 수백 가닥의 빛줄기가 폭죽처럼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삼반공의 4절, 산(散).

어디에 숨었는지 찾기 어렵다면,

모든 곳을 두들기면 그만이다.

날카로운 기운이 나뭇잎을 자르고, 꽃잎을 떨구고, 바위를 꿰뚫고, 나무를 산산조각내고, 흙을 파헤치고,

세 가닥 빛줄기가 끝내 놈에게 닿았다.

산(散)은 닿았으나, 놈을 박살낼 만큼 충분히 빠르지는 못했다.

아니, 놈은 산(産)을 회피할 만큼 충분히 빨랐다.

‘하지만, 더 이상 숨어 있지는 못할 거다.’

거세게 바닥을 걷어찬 내가 순식간에 놈의 앞에 도달했다.

수직으로 내리그은 월영검이 허공을 절반으로 갈랐다.

놈이 후퇴하며, 재빠르게 단검을 내던졌다.

고요한 파공성과 함께 세 자루 단검이 날아들었다. 단검의 끝이 향하는 곳은 인중과 목줄기와 명치. 단검의 주변을 검게 물들인 암독무는 보너스.

나는 숨을 멈춘 채 월영검을 우하향으로 휘둘렀다.

다시 좌하향.

중앙 수직베기.

하단 수평베기.

상단 수평베기.

다시 좌상단.

또 다시 우상단.

파바바바바밧.

눈 깜박할 찰나에 수십 번 휘둘러진 검날이 암독무를 가르고 또 갈랐다. 거센 검풍에 짙은 암독무가 밀려나가 흩어지고,

내가 깊숙이 오른발을 내디디며 어깨를 비틀었다.

인중을 노린 단검이 코끝을 스치고,

목줄기를 노린 단검이 종이 한 장 차이로 허공을 가르고,

캉!

명치를 노린 단검이 월영검에 가로막혔다.

그 사이 놈은 또 세 걸음 달아나 있었다.

역시 빠른 놈이다.

움직임도 빠르고, 판단도 빠르고, 그 빠른 공격 하나하나에 실린 마력도 상당하다.

길드장들도 쉽게 상대하기 어려울 수준.

이런 놈이 왜 나를 노리는지는…….

‘잡아 놓고 두들기면 알겠지.’

달빛이 놈의 얼굴을 흐릿하게 비췄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턱.

휘어진 매부리코.

울퉁불퉁한 이마.

짝 찢어진 두 눈.

전형적인 암살자의 얼굴이다.

심지어 눈썹에서 시작된 흉터가 턱까지 이어져 있다.

힐 한 번 받으면 바로 없어지는 흉터를 간직하고 있는 놈들 중에 제정신 박힌 놈을 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놈이 허리춤에서 금빛의 검을 뽑으며 지껄였다.

“계룡검룡. 이 공면독황에게 검을 뽑게 만들다니. 젊은 나이에 이룬 성취가 대단허구나. 저 세상에 가서…….”

콰아아!!

내가 날린 적(積)이 놈의 말을 끊었다.

제 입으로 별호를 지껄이는 놈들 중에 제정신 박힌 놈도 드물다.

미친놈과 말을 섞을 기분이 아니거든, 내가.

놈이 검을 휘둘러 적(積)을 쳐내고는 나를 향해 눈을 치떴다.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군. 어차피 곧…….”

말이 많은 놈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받아줄 생각도, 시간을 끌 생각도 없다.

나는 후퇴하는 놈에게 빠르게 따라붙으며 오른발을 깊숙이 내디뎠다.

바로 그 순간.

놈이 기다렸다는 듯 쥐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놈의 검은 30센티 정도의 단검.

그게 닿겠냐. 이 멍청한 새……?

‘…검이, 길어졌어?’

팔꿈치에서 뜨끔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짧은 검날이 채찍처럼 길어지고, 그 끝이 팔꿈치를 스친 것.

작은 상처를 통해 짙은 암독이 순식간에 침투했다.

나는 풀썩 뛰어 거리를 벌리며 삼매진화로 스며든 암독을 불태웠다.

“어떠허니, 내 독연금편의 맛이!”

그렇게 조심스럽게 함정을 파던 새끼가 겁 없이 덤벼든다 싶었는데. 믿는 구석은 있었던 모양이지.

차르르르르!

놈의 검이 다시금 길어졌다.

오른쪽으로 빙글 돌며 공격을 회피하는 찰나.

거대한 구렁이처럼 땅을 휩쓸며 쇄도한 검끝이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꾸며 내 등 뒤로 바싹 따라붙었다.

채찍처럼 유연하고,

검처럼 날카롭다.

놈이 손목을 비틀어 휘두르자,

등줄기를 노리던 금편이 크게 출렁였다.

검끝처럼 뾰족한 금편의 끄트머리가 정수리를 노리고, 검날처럼 날카로운 채찍 줄기가 종이 한 장 차이로 어깨를 스쳤다.

소낙비처럼 거센 맹공이 가슴팍과 허리와 정수리와 발목을 향해 연달아 날아들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갑작스러운 변주와 익숙지 않은 무기에 당황해 손발이 어지러웠을 터.

하지만.

‘내가 기이한 무기를 처음 봤겠냐.’

강호에서는 훨씬 괴상망측한 병장기가 많았다.

생존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싸움을 위해 싸우는 미친놈들이 바로 강호인이니까.

나는 놈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서 금편의 움직임을 살폈다.

검의 모양으로 되돌아갔던 금편이 순식간에 펼쳐지며 정수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최대치로 길어졌을 때의 길이는 3미터 남짓.

검의 형태를 유지할 때는 30센티 남짓.

분명 기묘한 병장기이지만…….

‘단지 기묘할 뿐이라고.’

채찍과 단검을 동시에 상대한다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파스슥!

정수리를 노리며 날아든 금편의 끝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빗나갔다.

복잡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놈의 강맹한 공격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기기묘묘하기로는 취원보(醉猨步)를 따를 수 없고,

빠르기로는 순삭보(順槊步)를 따를 수 없으며,

겨우 이 정도 강맹함으로는 월영보(月影步)의 흐름을 멈출 수 없으니.

“왜, 안 맞는 거지?!”

놈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놈에게 파고들며 오른발을 길게 뻗었다.

대번에 방향을 바꾼 금편이 발목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걸렸네.’

오른발을 재빨리 회수하자,

콰아아!!!

금편의 끄트머리가 거세게 바닥을 때렸다.

자갈이 박살나고 흙이 튀어올랐다.

피어오른 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먼지 사이로 짙은 암독이 스며 나왔다.

바로 앞 내 손가락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농도 짙은 어둠.

그 어둠을 뚫고, 금편이 쇄도했다.

보이지 않지만 뱀처럼 휘어진 금편이 날아오는 모양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진다.

휘어진 끄트머리가 정확히 내 목을 노리고 있다.

나는 스며드는 암독을 삼매진화로 불태우며 깊숙이 발을 내디뎠다.

금편이 등 뒤의 공기를 찢어발기고 바닥을 거세게 내리치고,

스파앗!

내지른 월영검이 놈의 가슴팍을 찔렀다.

검을 비틀어 뽑아내자,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등 뒤에서 날아드는 금편을 껑충 뛰어 회피하고,

놈의 머리 위에서 아래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월영검의 검끝이 놈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찔렀다.

“으으윽!”

놈이 신음을 흘리며 다시 금편을 휘둘렀다.

속도와 힘이 모두 아까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공격이다.

힘없이 휘어지는 금편을 어깨를 젖혀 회피하며 다시 월영검을 내질렀다.

허벅지.

팔꿈치.

무릎.

발목.

손목,

을 찌른 검을 뽑아내자 놈이 몸을 떨며 금편을 떨궜다.

놈의 몸은 붉은 피로 범벅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

물론 내 피는 아니었다. 놈에게서 솟구친 피가 닿았을 뿐.

“살, 살려, 주시라요…….”

피로 범벅된 놈의 입술에서 결국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차분한 대화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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