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110화 (110/122)

110화. 능력자들 (1)

금편을 떨군 놈이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놈의 등허리를 파고든 검을 잡아 빼자 둥그런 구멍을 타고 피가 배어 나왔다.

솟구치지는 않았다.

이미 많은 피가 흘렀기 때문에.

“나를 죽이려면, 너도 죽을 각오를 했어야지.”

“잘못, 했… 악!”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놈의 등줄기를 가볍게 쓸었다.

몇 군데 혈도를 짚자 놈이 신음을 내지르며 철푸덕 엎어졌다.

분근착골의 고통에 숨이 넘어가라 껄떡거리며, 놈이 바닥을 기었다. 피 묻은 손가락이 내 발을 붙잡았다.

발목을 통해 놈의 떨림이 전해져 왔다.

“제, 발… 계룡, 검… 아으악!”

내력을 실은 발길질에 손등뼈가 아작난 놈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뒤집었다.

많이 아프겠지. 그러게 왜 그런 짓을 해서.

“너 말이야.”

“…네, 네!”

분근착골에서 놓여난 놈이 비척이며 바닥을 기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왜 나를 노렸지?”

“…말씀드리면 살려… 악! 아으악! 아악!”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싫어해. 세 번 말하기는 더 싫어하지. 이번에는 주둥아리를 벌리기 전에 생각을 하는 편이 좋을 거야.”

나는 놈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왜 나를 노렸지?”

자칭 공면독황이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떨궜다.

“…저는 그저 의뢰인의 요구대로…….”

“의뢰인이 누구지?”

“…아악! 으아아아악! 말, 씀드리, 아악! 갔! 아아아악!”

곧 놈의 입에서 하나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피투성이의 놈이 숨넘어가라 비명을 질렀다.

분근착골을 당하고 있는 놈의 팔꿈치에 검을 찔러 넣었으니 아프기는 아프겠지.

그러게 왜 최지수를 건드려.

나만 노렸으면 살려줬…….

…장담은 못 하겠다.

놈은 눈물과 콧물과 오물을 모든 구멍에서 쏟으며 줄줄이 말을 늘어놓았다.

정신력이 상당한 놈이었다.

분근착골을 당하면서도 입을 열 수 있다는 것이.

“…으윽… 정말, 다… 악, 말씀, 으윽, 드렸, 습네… 아악!”

“그런 거 같네.”

나는 몸을 비트는 놈을 내려다보며 검을 들어올렸다.

“그러니 이제 죽어라.”

스팟.

희게 빛나는 월영검이 놈의 목줄기를 지났다.

핏줄 성성한 붉은 눈을 빤히 뜬 채로 잘려나간 놈의 목이 허공을 한 바퀴 날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력을 잃어 물렁해진 몸뚱이를 향해 몇 방의 적(積)을 쏘아내자,

놈의 시체가 산산조각나 흩어졌다.

‘애들에게 보여주기에는 놈의 상태가 너무 험하니.’

분노를 참지 못해 불필요하게 잔혹하게 굴었다.

그런 모습을 닮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김강산이 달려오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헉!! 이 피는 다 뭐야!!! 시발, 이 쥐새끼를 확!!!!”

“내 거 아니다. 다 저놈 피라고.”

빠르게 주변을 휘둘러본 김강산의 시선이 잘려나간 놈의 모가지에 가 멈췄다.

김강산이 상큼하게 웃으며 쌍따봉을 내밀었다.

“역시 우리 형!”

음…….

차라리 나를 닮는 게 나을지도.

***

최지수는 해독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 밤, 구름도 끼지 않은 달빛을 밤새 받으며 바위 위에 누워 있었으나 흡혈귀로 변이하지 않았으니까.

홍성욱도 어부지리로 해독약을 얻어먹었다.

“감사합네다! 이 은혜를 읻디 않갔습네다!”

“당연하지. 잊으면 그날로 뒈지는 거야.”

그걸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는데.

나는 최지수의 해독이 완료된 것이 확인된 다음날 아침부터 다시 발길을 서둘렀다.

계획보다 늦게 출발했고, 중간에 더 늦어졌다.

이러다가 어렵게 만든 멀티를 날리면…….

안 되지.

아직 초기비용 회수도 못했는데. 절대 안 되지.

“야! 빨리 튀어오라고!”

“대표님… 헉… 헉… 사람이… 다 살자고 하는 짓…….”

“이바름아. 주둥아리 놀리는 거 보니까 힘이 남아도네?”

“아뇨, 뒈지, 헉, 겠……!”

“뒈지고 싶다고? 월매야! 이리 와서 이바름이 좀 쪼아라!”

이바름이 뚝 뚝 침을 흘리며 바닥에 엎어졌다. 월매가 이마를 쾅 쾅 쪼아내는데도 꿈쩍하지 않았다.

아무튼 애들이 약해빠져서 참 큰일이다.

“역시 내가 애들을 너무 곱게 키웠어.”

“림아. 그거 아니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야 하니.”

“대표님! 저 진짜 죽겠어요!”

“사형. 다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형의 기준이 너무 높다고요.”

“형! 나는 억울하다고! 나는 이 흡혈귀 놈까지 업고 달리잖아!”

“…이제 흡혈귀 아닙네… 예, 감사합네다…….”

입 가진 놈들이 다들 한 마디씩 씨부렸다.

주둥아리 놀리는 걸 보니까 다들 힘이 남는데 말이야. 약한 척이 아주 버릇이다.

이제 사리원성이 지척이었다.

별빛 달빛 받고 자는 것도 하루 이틀이면 족하다. 오늘은 지붕 아래에서 푹 자고 싶다고, 나도.

이럴 땐 역시,

채찍과 당근이지.

“십 분 휴식 후 출발. 사리원성에 가장 늦게 도착한 놈은 월매랑 같이 성벽 백 바퀴 돈다.”

“으아아아!!! 대표님!!! 제발!!!”

조은조가 머리를 싸매며 나뒹굴었다.

저놈이 꼴등 확률이 가장 높지. 그다음은 이바름이고.

“대신 나 이긴 놈은…….”

“우우우우우우.”

“대표님! 그건 내기가 안되잖아요!”

“헉, 누가, 대표님, 을, 이겨, 헉…….”

당근이… 당근이 되려면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만들어야지.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애들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끼고 입술 끝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빙글 돌아 물구나무를 섰다.

“대신 내가 이렇게 가면?”

순간, 애들의 눈에서 검기 저리 가라 할 빛이 번뜩였다.

“저놈도 내가 업고 간다면?”

홍창욱이 슬그머니 내 시선을 외면하고 서은창의 등 뒤로 숨었다.

상급 분근착골이… 아프기는 했겠지.

그래도 내가 심장 가져와서 해독도 해 줬는데…….

하하민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래서요? 대표님 이기면요?”

“뭘 받고 싶은데.”

하하민의 눈동자가 희번뜩 돌았다.

“소원 들어주기!”

그런 애매모호한 내기는 취향이 아니지만.

뭐 어때. 어차피 내가 이길 건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김강산이 맑은 눈의 광인이 되어 거센 안광을 내쏘았다.

“진짜지?!”

“내가 한입두말하는,”

“콜! 나는 코, 악!”

“야. 내 대사 잘라먹지 말라고.”

헤실거리며 제 정수리를 쓰다듬는 김강산을 따라 애들이 연달아 콜을 외쳤다.

저마다의 희망으로 눈을 빛내며 은영단 애들이 슬그머니 일어나 앉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모양새가 어설프기는 하지만 내가 운기를 하는 자세와 닮아 있다.

“너네 또 검룡세 하냐.”

“사형. 방해하지 마십시오. 십 분이면 소주천을 열 번 돌릴 수 있습니다.”

“모르면 말을 말어, 제발.”

무적권왕 박민교와의 비무를 마치고 나는 은영단을 모아 내공심법을 가르쳤다.

최지수와 김강산은 예전에 했던 가락이 있어 익숙하게 자세를 잡았다. 서은창도 황미영에게 배웠다더니 폼은 꽤 좋았다.

폼만 좋았다.

결국 여전히 기(氣)의 감지는 실패였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므로 큰 실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검룡세(劍龍勢)라는 이상한 유행만 은영단에 남았다.

검룡의 수련 자세… 라던데.

그래봤자 소주천은 고사하고 외기도 느끼지 못하는 놈들이… 참…….

“십 분 됐다.”

내 말에 애들이 벌떡벌떡 일어났다.

역시 힘들다는 말은 개구라였음이 분명했다.

“형. 물구나무서야지.”

“설마 대표님께서 일구이언을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홍창욱 씨! 얼른 대표님한테 업혀요!”

“아, 아닙네다… 저이 어띠 감히 검룡님께… 따라갈 수 있습네다. 제 발로 뛰어서… 흐익!”

네놈 발로 뛰어서 은영단 속도를 잘도 따라오겠다.

나는 물구나무를 서서 두 발로 홍창욱놈의 허리를 감싸 들어올렸다.

“제발… 잘못했습네다! 목숨, 목숨만 살려……!”

“야. 너 나 미안하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예에?”

서은창놈이 슬쩍 고개를 돌려 몰래 혀를 찼다.

그래.

내가 실수했다고. 하지만 어디 인간이라는 게 믿을 수 있는 종족이냐고. 내가 뒤통수를 한두 번 맞은 게 아닌데 말이지.

저렇게 턱 턱 처음 본 사람을 믿을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아니다. 아니어서,

‘…계속 그렇게 순진하게 있으라고. 이놈들아.’

팔로 땅을 디딘 채 나는 애들을 슬쩍 둘러보았다.

애들은 출발선에 선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있었다.

대체 다들 무슨 소원을 빌고 싶어서 저 난리래냐.

김강산 녀석은 대가리 후리기 100일 금지 같은 거라도 노리는지 기세가 아주 흉흉했다. 곧 뒈지겠다던 조은조마저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하하.

기대하는 건 죄가 아니지. 시합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기 마련이니까.

양쪽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내가 기운을 끌어 올렸다.

단전에서 출발한 진기가 기맥을 타고 내려와 손에 맺혔다.

“출발!”

하고 외치며, 내 손이 바닥을 후려쳤다.

내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으어억!!!!!”

“팔로 그렇게 달리면 반칙이라고요, 대표님!!!!”

김강산과 하하민이 미친듯이 달려나오고,

“림아!!! 앞에!!! 오크!!!!”

최지수가 다급하게 외쳤다.

내가 살짝 속도를 줄이자 달려든 김강산이 오크를 후드려 패 박살내고, 뒤이어 따라오던 미니오크를 하하민과 이바름이 한마음 한 뜻으로 박살냈다.

네 마리 오크가 정리되기를 기다려 나는 다시 바닥을 후려쳤다.

“악!! 당했어!!!”

“어쩌라고? 발로는 얘 업고 손으로는 달려야 하는데. 나는 이게 최선이라고.”

“그 아저씨 대표님 몸통에 묶으면 되잖아요!”

하하민 너도 바보는 아니구나.

그래도 어쩌겠니. 이미 승부는 시작된 것을.

***

“대장 동무! 남쪽 성벽에……! ”

“무슨 일이디?”

“그것이, 와보셔야 할 듯합네다.”

남쪽 성벽에서 달려온 전령이 숨을 헉헉거리며 말했다.

“알갔다.”

공선희가 양손을 휘젓자 성벽 바깥의 땅이 일순간 뾰족한 철창이 되어 솟아올랐다.

철창은 성벽으로 달려들던 삼미호 수십 마리의 배와 발등을 꿰뚫었다.

철창을 피하기 위해 뛰어오른 삼미호들을 향해 화염탄과 얼음화살이 쏟아졌다.

곧 성벽을 공격하던 삼미호 떼는 시체가 되어 성벽 바깥에 널브러졌다. 살아남은 삼미호는 몇 마리 남지 않았다.

“정아 동무. 마무리를 부탁하갔소.”

“맡겨주시디요, 대장 동무.”

공선희는 빠르게 남쪽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성벽의 곳곳에서 소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침에 고블린 백여 마리가 북쪽 성벽을 공격했고, 오전에는 동쪽 성벽을 기어오르려던 오우거를 격살했다. 점심을 먹고 식후 운동으로 와이번을 잡았다.

자잘한 습격이 지속적으로 이어진, 말하자면 아주 평범한 날이었다.

“대장 동무!”

성벽 위에서 보초를 서던 이들이 달려가는 공선희를 향해 경례를 붙였다.

“수고하라우.”

공선희는 스치듯 대꾸하며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개척당이 이 사리원성에 자리 잡은 지 한 달.

사리원성은 공선희의 염려보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중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괴물들이 성을 습격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개척당의 당원들이 격퇴하지 못할 정도의 대규모 습격은 없었다.

매일같이 몰려드는 괴물들을 막아내며 개척당원들은 힘들기도 했으나, 동시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겨울이 되고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면 상황이 달라지겠으나 다가오는 겨울은 지금부터 준비하면 될 터.

‘이거이 모다 검룡 동무 덕택이디.’

서림과 김강산, 서은창이 사리원성을 떠나기 전에 인근의 상급 괴물을 싹쓸이한 영향이 여태껏 이어지고 있었다.

괴물이 들끓는 땅에 성을 세운다는,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한 검룡 동무는 급한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계속 사리원성에 머무르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별의 아쉬움은 컸다.

-검룡 동무… 이 은혜를 갚어야 하는데. 이리 가면 어띠허나.

-에이, 뭘 마지막처럼 그래요? 여기서 거기까지 멀지도 않던데.

룡검룡 동무가 가볍게 어깨를 추키며 말했다.

공선희는 그것이 진담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의외로 듣기 좋은 소리로 사람을 위로할 줄도 안다고 생각했을 뿐.

거리로는 그리 멀지 않다.

하지만 자신에게 지켜야 하는 성이 있듯, 그 역시 마찬가지.

혈귀단의 근거지를 말살한다는 목적을 이루었다 했으니 이제 다시 북쪽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었다.

보름 남짓을 함께했을 뿐이지만 깊은 인상을 남긴 룡검룡 동무를 떠올리며 공선희가 걸음을 재촉했다.

곧 그가 남쪽 성벽에 도착했다.

“대장 동무. 외부인입네다.”

“정체는?”

“확인되지 않았습네다.”

공선희는 긴장을 삼키며 희끄무레한 어둠을 뚫고 다가오는 흙먼지를 응시했다.

하루를 종일 가도 사람 하나를 마주치기 어려운 버려진 땅이다.

이곳에 나타날 이는, 아마…….

‘조선국의 병력이라면 어띠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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