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능력자들 (2)
다섯 개의 주성과 오십 개의 부성을 거느린 신조선국.
조선국에 소속된 능력자들의 숫자는 만 여 명. 사리원성의 개척당원의 스무 배가 넘는 병력이다.
단지 숫자로도 그러한데, 실력을 따지면 그 차이는 더욱 벌어졌다.
네 개 주성의 방위단과 순찰단도 강력하지만, 왕성을 방어하고 국왕의 명령을 직접 수행하는 보위대의 무력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열한 살에 각성하여 온갖 괴물을 잡고 마핵을 먹어 성장한 보위대는 10명으로 구성된 하나의 보위대가 주성의 순찰단 하나를 상대하고도 남는다 했다.
그런 보위대가 10명씩 30개 대.
300명의 보위대가 모두 모였을 때 발휘한 그 어마무시한 무력을 공선희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었다.
시체에서 흘러내린 피가 며칠 동안 강을 붉게 물들였던 강계의 란(亂)에서.
‘그런 비극을 다시 겪을 수는 없디.’
그래서 공선희는 처음부터 혁명당의 거사를 반기지 않았다.
구울과 오우거의 싸움, 그 이상이다. 개척당은 조선국의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일부러 버려진 서쪽 땅까지 건너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조선국의 영역에서 멀어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주와 아기씨를 인질로 잡았을 적에도 그들에게 티끌만한 해악도 끼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딸과 손주들을 구하기 위해 협상에 응하기는 했으나, 조선국 입장에서 개척당은 눈엣가시일 터.
공선희의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은 매일같이 성벽으로 밀려드는 괴물이 아니었다.
100킬로미터 떨어진 조선국. 그들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저들이 조선국이 보낸 선발대라면 어띠허야 하나.’
멀리에서 뿌연 흙먼지가 올랐다.
탐색술로 느껴지는 기운은 두 종류였다. 능력자의 마력과, 괴물의 마기(魔氣).
“괴수에게 쫓기고 있군.”
“…그런 듯 합네다만…….”
꼬리에 수십 마리의 괴물을 달고 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일행의 모습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어슴푸레하게 깔리기 시작한 어둠을 뚫고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은….
‘팔로 걷고 있다? 발에 무엇인가를 얹고? 저건… 사람은 맞는가?’
참으로 기괴한 형상이었다.
그러나 어떤 형상이든, 괴물이 들끓는 이 서쪽 땅에서 살아 움직이는 자들이 보통 능력자일 리는 없었다.
공선희는 서늘한 낯빛 속에 의문을 숨기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정체불명의 능력자들.
최악의 경우 조선국의 보위대일지도 모른다. 길 잃은 자유사냥꾼이라 하더라도 성의 위치를 노출하지 않으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할 터.
공선희는 긴장을 유지하며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이들을 주시했다. 얼굴을 확인하기에는 아직 먼 거리였다.
그때,
남빛의 하늘을 가르며 한 무리의 히포그리프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공중 공격 준비!”
공선희는 외부인에 대한 염려를 일단 뒤로 밀어내며 재빨리 지시했다.
막 공격을 명하려던 찰나.
히포그리프 떼가 급선회하며 성벽에서 멀어졌다.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 다급해 보였다.
긴장한 채 그들을 주시하던 공선희의 눈이 히포그리프의 위에서 급강하하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그야말로 한 줄기 빛 같은 속도로,
“…그리폰인가? 백색의 그리폰이 존재허나?”
“전혀, 전혀 모르겠습네다.”
희고 거대한 새가 히포그리프를 위에서 덮쳤다.
히포그리프들은 불 한 모금 뿜어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새의 발톱에 얻어맞은 한 마리의 히포그리프가 허공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고.
급강하한 흰 새가 히포그리프의 등을 발톱으로 잡아챘다.
그 두꺼운 가죽을 쉽사리 뚫어낸 새가 히포그리프를 공중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다시 떨어지는 히포그리프를 받아 또 내던졌다.
“…대장 동무. 제 눈이 잘못된 것임매? 히포그리프를, 가지고 노는 듯합네다만…….”
“내 보기에도 그리 보이는군.”
그 사이 외부인들은 성벽에 꽤나 가까워져 있었다.
그들이 외치는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날아들었다.
-야! 너네 저 새끼들 안 잡어? 진짜 안 잡을 거냐?
-싫은데? 형이 잡아. 나 오늘 백 마리 잡았거든?
-대표님! 어? 어? 발 떨어져요, 대표님? 발 땅에 닿으면 대표님이 진 겁니다?
-…얘들아. 제발 작작들 하거라. 괴물은 잡아야지. 소원권에 목숨이라도 건 사람들처럼 구는구나.
-지수 형님. 그 검 내려놓으시죠. 네, 저 목숨 걸었습니다. 저 목숨 걸었어요.
선두에 선, 물구나무를 선 사람이 소리를 높여 외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공 대장님! 다리 하나 놓아주쇼!”
공선희는 귀를 의심했다.
“…룡검룡, 동무?”
“나처럼 생긴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겠어요? 아, 힘드니까 빨리!”
공선희는 당황과 놀람 속에서 두 손을 휘저었다.
솟구친 땅이 솟아올라 강철로 변했다.
단단한 다리 위로, 물구나무를 선 계룡검룡이 뛰어올랐다.
뒤이어 그의 뒤를 따르던 이들이 질세라 몸을 솟구쳤다.
“혼자 어디 가요, 대표님!!!!”
귀여운 인상의 어린 여성 능력자가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팔을 뻗었다.
파아앗!
계룡검룡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얼음 화살을 회피하느라 공중제비를 도는 사이, 여성 능력자가 다리에 뛰어올라 선두를 꿰찼다.
“하하민. 네가 먼저 공격했다?”
콰아아!!!!
계룡검룡이 공중에서 쏘아낸 두 개의 빛의 구슬이 다리 한중간으로 내리꽂혔다.
단발머리 능력자가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 멈춰선 사이 높이 도약한 계룡검룡이 단발머리 능력자를 뛰어넘어 두 팔로 착지했다.
물구나무를 선 계룡검룡이 자신의 뒤로 쇄도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니들 진짜 이렇게 느려 터져….”
그 계룡검룡의 가슴팍을 향해 적염탄 하나가 날아들었다.
“같이 좀 가자고, 형아!!!”
팔 하나를 기묘하게 뒤틀어 날아오는 화염탄을 회피한 계룡검룡이 곧바로 두 팔…을 재빠르게 놀려 강철의 다리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계룡좌룡? 저건, 계룡은룡?’
공선희의 눈이 바쁘게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그때, 마지막으로 날아온 마력검기를 맨손으로 방어한 계룡검룡이 드디어 성벽에 닿았다.
“야. 뒤진 거 아니지?”
“그, 그러믄입죠! 감, 사, 합네, 다!”
두 발을 유연하게 움직여, 그 발로 껴안고 있던 남자를 성벽 위에 내려놓은 계룡검룡이 뒤를 돌아보며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공격을 했다 이거지? 니들은 오늘 특훈이다.”
바닥을 걷어찬 계룡검룡이 아래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곧, 외마디 비명 소리가 다리 위를 가냘프게 울렸다.
.
.
.
그리고 잠시 후.
발로 땅을 디딘 계룡검룡은 몰고 온 괴물들을 격살하고 데려온 동료들을 한참 동안 이리 후려치고 저리 후려친 후 드디어 공선희와 마주했다.
최지수가 공선희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는 자리에 못 볼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 형. 뭘 그리 예의를 차리냐. 이 양반이랑 방구도 텄다니까?”
“림아. 어르신께 그 무슨 말버릇이냐.”
“어르신은 무슨. 구울이 풀 뜯어먹는… 아, 알았어. 알았다고.”
공선희는 놀람과 당황을 갈무리하며 눈앞의 사내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 사내가 계룡우룡이로구나. 룡검룡 동무가 그리 아끼던….’
표정의 변화는 크지 않았으나 사실 공선희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믿기 어려웠다.
그날 원산성에서 계룡검룡이 빛의 폭죽을 쏘아내던 모습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으나 지금 눈앞의 광경만큼은 아니었다.
성주는 물론 공주까지도, 아기씨들마저도 안중에 없다는 듯 굴던 그 계룡검룡이 계룡우룡에게는 한 수 접어주고 있었다.
투덜거리며 머리를 긁는 계룡검룡은 비로소 스무살 초반의 청년으로 보였다.
최지수에게 붙박혀 있던 공선희의 시선이 서림의 주위에 둘러선 은영단을 차례로 훑었다.
계룡성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은 괴물로 가득 차 있을 터.
그들이 입은 옷은 녹색과 회색과 갈색의 체액으로 덮여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괴물을 땅 위에 누운 시체로 만들었는지 쉬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 모습.
무척이나 피로해 보이는 낯빛에도 불구하고 안광만은 모두 형형하게 빛났다.
‘과연 기백이 대단허이. 아니디, 기백만이 아니디. 하나하나의 마력 역시도 출중하이. 어지간한 보위대는 명함도 내밀디 못허갔어.’
감탄 어린 눈빛으로 은영단을 차례로 응시하던 공선희의 시선이 검은 머리를 올려 묶은 여성 전사에게 멈췄다.
가장 마지막으로 성에 도달한 조은조였다.
“아, 그래요! 간다고, 가!”
“월매야, 은조 누나가 같이 산책 해준댄다!”
“대표님. 누나 아니고 언니라니까요?”
“하하민아. 습관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고.”
곧, 하늘을 꿰뚫고 날아온 희고 거대한 매가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급강하했다.
“바, 방어 준….”
“아냐. 그거 아냐.”
계룡검룡이 남쪽 성벽 방위대장의 어깨를 짚었다.
“내가 데려온 애예요. 뭐, 좀 크기는 하지만 나름 귀엽다고요.”
“…저것이 괴물이 아닙네까? 그리허면 대체 무엇입네까?”
“종류는… 일단은 매이기는 한데. 아무튼 산책한다니까 좋아서 소리 지른 거라고. 애가 좀 관종끼가 있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얼어붙은 수비대장의 옆을 스쳐, 조은조가 성벽을 뛰어내렸다.
‘그 험한 길을 뚫고 지금 막 도착했는데도 훈련을 멈추디 않는군. 이거이 바로 계룡문.’
공선희는 머릿속으로 사리원성의 개척당원의 훈련 스케줄을 재빨리 훑었다. 충분히 훈련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이들에 비하면 너무 편하게 생활한 듯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슴매. 이리 보니 반갑구려.”
“저야말로 림이에게 공 대장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말씀 편히 하십시오. 최지수라고 합니다.”
최지수는 두 손을 뻗어 공선희의 손을 공손히 맞잡았다.
각성자의 숫자로는 대지속성이 불속성과 물속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경지에 오른 대지술사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간혹 존재하는 고수는 대부분 전사였다.
자신이 검에 자질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검술이라면 서림이 분에 넘치도록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 가르침을 소화하기에도 최지수는 버거웠다.
김강산이나 서은창은 물론이고 하하민까지도 이제 자신을 뛰어넘었다.
자신의 자질과 더불어, 대지속성의 태생적인 한계였다.
공격력으로는 불속성을 따르지 못하고, 회복력으로는 물속성을 따르지 못한다.
최지수는 성장을 할수록 오래전 서림의 외침을 아프게 체감했다.
고블린을 잡았어야 했다며 아쉬워했던, 자신이 각성했던 날.
하지만 서림의 말은 달랐다.
-그 양반이, 진강을 자유자재로 쓰더라고.
북쪽에 들끓는 괴물을 뚫고, 일반인을 데리고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른 그 여정에 대해 물었을 때 서림은 그렇게 대답했다.
-대단하구나. …하지만 그게 큰 도움이 되더냐.
최지수는 자신이 진강주를 생성했던 일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어떤 것으로도 뚫을 수 없는 금속이라는, 전해지는 이야기는 사실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때도 자신은 적귀단주를 붙들어 놓기만 했을 뿐 그에게 어떤 타격도 입히지 못했었는데.
-진강벽 세우고 사냥하니까 상급 괴물 잡기가 어렵지 않더라고. 찌끄레기들 다 치우고 보스몹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원래 보스몹이 피곤한 게 그놈 때문도 있지만 그 옆에 자잘한 애들 때문이거든? 보스몹 하나만 있으면…….
보스몹이 어쩌고 하는 그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비로소 자신의 역할을 찾은 듯했다.
최지수가 공선희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접었다.
‘보기 드물게 예의 바른 청년이군.’
공선희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
내 윗마당 멀티 사리원성은 잘 굴러가고 있었다.
매일 들이닥치는 오크와 히포그리프와 오우거와 와이번과 삼미호와 오미호와 구울과 고블린과 또 이러저러하고 저러이러한 괴물들로 인해 개척당 애들의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와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아직 무너지지는 않았으니까.
“산이 오라바이! 용용이 오라바이! 은창 오라바이!”
우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오민주가 문을 뚫을 기세로 뛰어와 김강산에게 안겼다.
남지윤이 운영하는 뚜엣의 뜰에서 잘 지냈는지 얼굴빛이 영 좋았다.
“어째, 공 대장님. 여기서 살 만해요?”
“각오보다 낫다우. 거사를 일으킬 적 이미 죽음을 각오했던 이들이니. 룡검룡 동무 덕에 두 번째 목숨을 받은 것이디.”
“그 두 번째 목숨, 소중히들 여기시라고요.”
공선희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피로가 짙은 얼굴이었으나 표정은 밝았다.
공선희만이 아니었다. 남지윤도, 한수길의 애첩으로 잡입했다는 정아 동무도, 원산성의 유격대장이었다가 이제는 방위단장이 된 엄두병도, 말 걸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힐끔거리다가 눈이 마주치면 푹 고개를 숙이는 모든 개척당원도, 그들의 가족도…….
“당연허디.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뒈질 줄 알라는 룡검룡 동무의 당부를 모다 기억하고 있음매.”
“기억한다니 다행이네.”
흙과 벽돌로 올린 집들은 허름했지만 깨끗했다. 사람들은 지쳐 있었으나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근데 이런 식으로 오래는 못 버텨요.”
“…알디. 알다마다.”
의지는 몸을 움직이지만 계속 그러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한계까지 힘을 쏟아부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성은 작은 위기로도 쉽게 무너지고 말 터.
그렇게 둘 생각은 없다.
‘숫자만 많지, 실력자가 부족해.’
고작해야 자유사냥꾼이나 방어단, 순찰단 노릇을 하던 이들이다. 조선국에서는 재능 있는 자들은 모두 보위대로 뽑혀 간다 했으니 이들은 남은 찌끄레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찌끄레기도 괴물을 잡으면 성장한다.
성장이 느리고 솜씨가 부족하다면 그만큼 더 많은 괴물을 잡으면 장땡이다.
“공 대장님. 거하게 원정 한 번 가시죠.”
그러라고 은영단을 데려왔으니까.
사리원성도 좀 안전해지고, 우리 애들도 쑥쑥 크고 말이지.
원래 인생은 선빵필승이다.
싸움은 더욱 그러하다.
공선희가 잔뜩 감동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
“허디만 룡검룡 동무에게 그렇게까지 신세를 져도….”
“안 되죠.”
이다가 멈칫 입을 다물었다.
“여기가 수습이 되면, 내 일 도와줘요.”
“그야 당연허디. 지금껏 룡검룡 동무가 우리 혁명당, 아니, 개척당에게 베푼 거이 얼마인데. 내 그 은혜를 잊으면 사람이 아니라 금수이디. 우리 개척당원들도 모다….”
…이 아지매가 뭔 일인지 물어보지도 않네.
나를 너무 믿는 것 같은데. 사람 양심 찔리게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