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능력자들 (3)
19번째 각성촉진제가 완성된 것은 내가 계룡을 떠나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내 눈앞에서 정하영이 여준후에게 각성촉진제를 투약했다.
이번에는 주사기로 주입하는 방식이었다.
18번째 각성촉진제는 알약이었고, 17번째 각성촉진제는 좌약이었다.
-검룡님, 제발…….
여준후의 얼굴이 창백했다. 꽉 막힌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여준후의 아혈을 짚었다.
녀석이 무슨 이야기를 지껄일지는 훤히 알고 있었다. 이미 열여덟 번 반복해서 들어줬기 때문에.
의자에 묶인 놈의 목에 주삿바늘이 꽂혔다.
정하영의 손이 피스톤을 누르자 녹색빛의 불투명한 약물이 천천히 여준후의 목줄기에 주입되기 시작했다.
나를 향한 여준후의 눈동자는 공포와 두려움과 원망과 후회로 어지러웠다.
그 모든 들끓는 감정들이 사라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쿠웨엑!!!! 캬아!!!
여준후의 목에서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괴물화하며 자연스럽게 아혈이 풀린 것.
쇠사슬에 묶인 몸이 거칠게 요동쳤다. 금방이라도 쇠사슬을 끊어낼 듯한 기세였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녀석의 대가리를 후려쳐 기절시키고 마단전을 파괴하자 녀석은 일반인으로 되돌아왔다.
-또 실패네.
정하영이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시 하면 되지.
-근데… 림 오빠. 이게 한다고 될까 싶어. 지금까지 아무도 못했는데. 불가능한 일 아닐까. 이제 우리도 헛수고 그만하고 포기하는 게….
정하영이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포기는 배추 셀 때 하는 소리고.
-…오빠. 그럴 때 되게 아저씨 같은 거 알아?
타격은 전혀 없었다.
살아온 세월로 치면 아저씨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것을.
‘불가능이라… 정말 그럴까.’
정하영의 능력은 출중했다.
초반에는 MM 연구소에서 가져온 수십 권의 실험 보고서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요즘 정하영이 제조하는 약물은 그 보고서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마력증폭제고 힐링포션이고 안 듣는 나로서는 정확한 판단은 어려웠지만,
뭐. 품질이 좋으니까 많이 팔리겠지.
특히 이번에 개발한 쑥쑥커는 생산량이 주문량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현재 계룡문 수입의 70퍼센트가 약물 판매에서 나온다고 했으니 말 다했다.
검룡고속도로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면 그 통행료로 벌어들이는 돈도 꽤 되겠으나, 그러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문제는…….
-재료도 거의 떨어졌어, 오빠.
-필요한 건 뭐든지 말하라니까? 키메라 힘줄이라도 구해다 준다고.
-그건 좀 탐나는데.
-그래? 가져다 줘?
-좋기는 한데, 필요한 건 아냐.
필요한 재료는 다른 쪽이었다.
-아스트로글리세린, 날프타 인산, 수크랄벤젠, 코테로도톡신, 팍스올, 데옥신, 글루타이타민… 이게 다 뭔 말이냐?
-각성촉진제 연구에 필요한 재료들이야. 전부 옛 시대에 만들어진 합성화학물인데…….
정하영이 내민 종이에 적힌 목록은 길고도 길었다.
MM 연구소에서 가져온 물품들이 바닥을 드러냈다는 얘기였다.
-그거 없으면? 각성촉진제 못 만드냐?
-있어도 못 만들었는데 없으면 어떻겠어?
정하영이 묘하게 설득력 있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내 사전에 포기란 없다. 그렇다면 합성화 머시기를 구해야 하는데.
남쪽의 연구소는 진작 길드들에게 모두 털려 남아 있는 물건이 없었다. 진법으로 보호되고 있었던 MM 연구소만이 그 도적놈들의 손길에서 살아남았으니.
블랙데이가 터진 직후, 전세계의 정부와 기업과 과학계는 각성과 괴물과 균열이라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연구하는 데 매진했다.
3차 세계대전이 터져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전까지 북한에도 몇 개의 연구소가 세워졌다고 들었다.
다른 연구소들은 조선국에서 모두 털어갔지만…….
“저기요. 나한테 은혜 겁나게 입은 거 잘 알고 있으니까 그만 하시고요.”
공선희가 겨우 입을 다물었다.
“공 대장님.”
“뭐시든 말씀허시게나.”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평양에 국립중앙연구소 있잖아요. 거기를 털려고 하거든요.”
만만치 않은 작전이 될 것이다.
꽤 많은 인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계룡성을 비우고 계룡문 애들을 장벽 너머까지 데려오기도 어렵고.
그러니까, 멀티 놔둬서 뭐 하겠어.
이럴 때 써먹으려고 멀티 세운 거지.
“…그 괴물성에 들어가갔다고?”
“어,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든 돕겠다고 해놓고 바로 말 바뀌네.”
“아니네! 거저 그곳이 워낙….”
“워낙, 뭐요?”
“…자네도 이미 아는 것 같네만.”
안다. 알다마다.
조선국의 국경에서 고작 100키로미터 떨어져 있는 평양연구소가 아직 털리지 않고 남아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방법이 있나?”
공선희의 눈빛이 기대로 반짝였다.
이 인간이.
내가 툭 치면 해답이 튀어나오는 기계인 줄 아시나. 그런 건 Chatgpt도 못한다고요.
“이제부터 찾아봐야죠.”
각성촉진제의 완성은 미래를 위한 준비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세상의 균열을 끝내 소멸시키지 못한다면, 괴물과 맞서 싸울 힘을 모두가 가져야 할 테니까.
결코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다급할 이유도 없다.
그 전에 당장 해결할 일이 또 가득이다.
일단 내 뒤통수를 노린 놈을 가만히 둘 수는 없지. 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은….
“일단 원정 좀 뛰어야겠는데요. 주변 뺑뺑이부터 돌자고요. 콜?”
“그것이야 물론 콜이디.”
여기를 사람 살 만한 데로 만들어야겠다.
***
계룡성처럼 인근에 지뢰지대가 있으면 참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운은 없었다.
덕분에 괴물 소탕은 온전히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쿠웨엑!”
“캬악!”
전방에서 달려들던 삼미호와 오크와 오우거와 구울과 또 이러저러하고 저러이러한 괴물들이 날카로운 얼음창에 가슴팍과 모가지를 꿰뚫려 절명했다.
무릎이 박살난 오우거놈이 땅을 굴렀다가 풀썩 일어났다. 박살난 무릎이 실시간으로 재생하기 시작했다.
주변을 가득 메운 괴물들이 얼음창이 뚫어낸 시체의 길을 덮으며 우리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몇 겹으로 쌓인 시체를 밟으며 달려드는 놈들을 향해 이바름이 다섯 개의 백염구를 내던졌다.
폭음이 작렬하고, 조각나 비산하는 괴물의 가죽 사이로, 와이번 세 마리가 급강하했다.
“바름아, 숙여!”
조은조가 외치기도 전에 이바름은 이미 땅바닥에 바싹 붙어 있었다.
퍽! 퍼억!
조은조의 철퇴가 와이번의 대가리를 찰흙처럼 으깨고,
나머지 두 놈을 향해 김강산이 도를 휘둘렀다.
도에서 발출된 청염의 불줄기가 도망치려던 두 마리 와이번을 불살랐다.
콰아아아!!!!
단번에 세 방의 적(積)을 쏘아내자, 드디어 시야가 트였다.
옆에서 달려드는 오크놈의 무릎을 향해 검을 내지르며 내가 외쳤다.
“달려!”
“넵, 사형!”
서은창이 화간일광(花間一光)을 쏘아내며 전방으로 쇄도했다.
이바름과 조은조와 하하민이 그 뒤를 바싹 따라붙고,
김강산이 내 옆으로 달려왔다.
월영검을 휘둘러 뒤를 덮치는 괴물들에게 적(積)을 날리며 내가, 거세게 바닥을 걷어찼다.
보이는 곳이 모두 괴물이었다.
시체가 된 괴물도 많았으나 살아 있는 괴물들이 몇 십 배는 많았다.
하지만 그래봐야 괴물일 뿐.
날카로운 검날이 단번에 오크놈의 무릎을 잘라내고 뒤이어 놈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의지에 따라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검날을 가득 채….
‘아윽.’
단전이 조금 뜨끔, 했다.
아직도 내상이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았다.
재앙의 둥지를 박살낸 게 한 달도 넘었는데 영 회복이 더디다.
이놈의 비루먹은 몸뚱이란.
나는 입속으로 혀를 차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곧, 진기가 검날을 희게 빛내고,
월영검에서 발출된 수십 가닥의 검기가 일직선으로 앞을 향해 뻗어 나갔다.
파바바바바바밧!
작은 파공성과 함께, 삼반공의 4절 산(散)이 지나간 길을 따라 새로운 시체 더미가 형성되었다.
광분한 수백 마리 괴물들이 시체를 밟으며 내 뒤를 움켜쥘 듯 따라붙었다.
괴물이 내지르는 괴성 때문에 귀가 터질 지경이다. 놈들의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나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빠르게 후퇴했다.
잠복조가 숨어 있는 계곡의 입구까지는 이제 50미터.
30미터.
10미터.
“튀어!”
내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은영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너도 튀….”
“싫은데.”
그래, 말해 뭐 하겠냐.
나와 김강산은 수백 마리의 괴물을 꼬리에 단 채 빠른 속도로 계곡에 진입했다.
깎아지른 듯한 두 절벽 사이에 형성된 좁은 계곡의 중앙에 도착했을 때.
콰아아아아!
100여 미터 계곡의 양쪽 입구가 동시에 닫혔다.
공선희가 형성한 진강벽(眞鋼壁)과, 최지수가 형성한 진강…. 비스무레한 강철벽.
그리고,
사방에서 빙결공격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호신강기를 끌어올리고 얼음창을 쳐내며 재빨리 절벽을 타고 올랐다.
김강산 녀석은…….
‘잘하네?’
녀석의 몸 주변으로 흐릿한 백색의 방어막이 생성되어 있었다.
검제놈이 생성했던, 마력 방어막.
다른 애들은 설명해줘도 아직 실전에 써먹을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는데.
역시 김강산이 개중에 자질이 뛰어나기는 했다.
내 말을 귓등으로 들어서 문제지.
순식간에 절벽의 꼭대기에 도착한 나와 김강산이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절벽의 중간중간에 미리 만들어 둔 엄페물 뒤에 숨은 개척당의 술사들이 좁은 계곡에 갇힌 수백의 괴물들을 향해 속성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괴물을 유인하느라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던 하하민과 이바름과 서은창도 제각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아래를 향해 얼음창과 화염탄과 마력검기를 쏟아내는 중이었다.
애들이 약한 척을 좀 해대서 그렇지 해야 할 때는 이렇게 열심….
“으핫핫! 이리 오시려고요? 선물 드릴게요! 먹고 가세요!”
하하민이 생성한 얼음길이 가파른 절벽을 꽁꽁 얼렸다. 절벽을 기어오르려던 오우거가 두 팔을 휘저으며 쪼르륵, 미끄러졌다.
“뒈져! 뒈지라고! ***해서 **하고 *를 **해 **할 새끼들이!”
이바름이 화염탄과 화염구와 함께 거친 욕설을 내뱉고,
“만나서 반가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서은창이 힘없이 지껄이며 세우윤윤(細雨潤潤)을 쏟아냈다.
다들 조금씩 다르게 맛탱이가 가 있다.
“김강산아. 왜 다들 이렇게 어디 한 군데 나사 풀린 애들 같지?”
“…형. 원정이 오늘로 며칠째인지 알어?”
“어… 일주일?”
“일주일 같은 소리 하네! 사리원성에 도착하자마자 하루 자고 나와서 보름 째 지붕 있는 건물에서 자 본 적이… 악!”
“괴물 잡고, 재료 팔아서 돈 벌고, 니네 경험치 오르고. 일석삼조인데 뭐가 문제냐.”
“뉘예. 뉘예.”
김강산이 큰 손바닥으로 제 머리를 비비적대며 툴툴거렸다.
일정이 좀 빡세기는 했지.
그래도 한큐에 해결하는 게 속이 편하다.
‘내가, 들를 곳이 있어서 말이지.’
***
「잠시 다녀올게. 닷새면 될 거야.」
최지수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쪽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당장 괴물들을 소탕하지 않으면 성이 무너질 것처럼 몰아댈 때부터 또 뭔가 있구나 싶었다.
서림이 이렇게 훌쩍 떠나는 일에 익숙해질만도 했건만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지수야, 산이도 없는데?”
문이었었는데 조금 전 최지수에게 박살나 이제 나무 파편이 된 조각을 밟으며 서은창이 서림의 방에 들어왔다.
최지수가 서림이 남긴 쪽지를 서은창에게 내밀었다.
“…이야. 우리 사형 또 사고 치러 갔나보네.”
“원산성에는 무슨 일일까.”
“그거야….”
서은창이 가볍게 어깨를 추켰다.
“내가 어떻게 알겠냐. 지수 너도 모르는데.”
“지난번 셋이서 원산성에 갔을 때 혹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을까 싶어서.”
“내가 알기로는 없는데. 뭐… 사형이 어디 자기 속셈을 솔직히 말하는 사람이라야지.”
최지수가 전적으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 너는 뭘 또 걱정하고 그러냐.”
서은창이 최지수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목소리는 가벼웠으나 진심은 달랐다.
‘또 어디 가셨어요, 사형. 사람 걱정되게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