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들를 곳 (1)
서은창이 계룡문에 합류한 지 네 달.
고작 네 달이었으나 마치 4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일을 일으키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사형이었다.
혈귀단을 박멸하고, 그 본거지를 찾아가 괴상망측한 마인을 소멸시키고, 혁명당을 원산성에서 탈출시키고, 공주를 납치하고…….
계룡에 돌아간 뒤로도 몰래 성을 빠져나가더니 김강산에게 업혀 돌아왔었다. 마(魔)의 삼천(三川)에서 괴물을 잡았다면서 커다란 마핵을 가져왔는데 대체 어떤 괴물을 잡았는지 말도 하지 않았다.
작년 백호를 소멸시킨 전투 후에도 사흘 동안 생사를 넘나들었다고 했다.
김강산이 안달복달하며 서림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몇 달 함께해보니 과연 그럴 만했다.
‘걱정할 만해.’
서은창은 마음속 생각을 입속으로 꿀꺽 삼켰다.
최지수는 이미 충분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자신마저 그 불안을 북돋을 필요는 없었다.
“은창이 너도 이제 알잖니. 림이는 각성자가 아니라는 거. 혹 다치기라도 하면 힐도 잘 안 통한다. 그리고 아무래도…….”
최지수는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서림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나, 어째서 갔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때 그 암살자의 배후를 찾아갔구나.’
-흡혈박쥐 본체놈을 박살내고 나오는데 뒤에서 덮치더라고.
-…어째서? 이 북쪽에 계룡문과 원한이 있는 이가 있더냐?
-몰라. 빡쳐서 얘기도 안 듣고 죽여버렸네.
서림은 그렇게 말했으나 최지수는 그 말이 거짓임을 쉽게 알아차렸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입술을 살짝 깨무는 것은 무엇인가를 숨길 때 나오는 서림의 버릇이었다.
더군다나 서림이 ‘빡쳐서 얘기도 안 듣고 죽여’버릴 리가 없다.
지금껏 최지수가 보아온 서림은 분노 때문에 흥분해 날뛰는 이가 아니었다.
분노하면 더 서늘해지는 사람이 서림이다.
“왜, 짐작가는 게 있냐?”
최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데?”
“그걸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목적만 짐작할 뿐 어디로 갔는지는 도로 미궁이었다.
“에이. 때 되면 어련히 돌아오겠지. 사형이랑 산이인데, 무슨 일이야 있겠어? 재앙도 놀라서 도망갈 걸. 우리는 합동 훈련이나 잘하고 있자고. 사형이 돌아와서 훈련 부족이라고 지랄할까 무서워 죽겠다.”
서은창이 짐짓 과장된 표정으로 제 어깨를 감싸쥐었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 그래야지.”
오른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최지수가 애써 대꾸했다.
***
탁. 타닥. 탁. 타다닥.
축축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이마를 후려쳤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최소로 잡아도 100명.
-어디로 갔디?!
-이쪽에서 사라졌습네다.
-3조, 지붕을 탐색허라.
-알겠습네다.
놈들이 주절대는 목소리가 예민한 감각을 파고들었다.
“야. 이쪽으로.”
나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좁은 골목을 향해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김강산이 바싹 뒤를 따랐다.
“김강산. 마력 좀 제대로 숨기라고. 여기 있다고 광고하냐? 엉?”
“…형아. 이게 최대로 숨긴 건데요.”
김강산이 울상을 지었다.
…내가 이놈을 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마혈 눌러서 던져 놓고 올 것을.
이런 일에 이 녀석 달고 가면 꼭 피곤해진다. 경험이 증명하는 진실이다.
그래서 떼어놓고 나왔는데 말이지.
뭐, 결과적으로다가 실패했다.
마력 누르는 건 몇 년을 연습시켰는데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 탐색술은 순식간에 익혔다.
그리고 그 탐색술은 아무래도 나를 감시하는 용도인 듯했다.
최지수에게 쪽지를 남긴 뒤 사리원성을 빠져나오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엄청난 속도로 김강산이 달려왔으니까.
-헉, 허억, 형… 나도!
-어디 가는지 알고 나도냐.
-몰라! 알 게 뭐냐고.
하여튼 제멋대로인 놈이다.
도로 쫓아 보내려다가 지난번에 마의 삼천에 혼자 갔을 때 김강산이 얼마나 난장을 피웠는지 최지수가 한탄하던 게 떠올라 따라오라고 했다.
그게 실수였지.
참 마음이 약해서 탈이라니까, 내가.
원산성에 도착하기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김강산에게 업혀 가니까 기운 쓸 거 없이 편안해서 좋기도 했다.
문제가 있다면,
혁명당을 탈출시키면서 화려하게 전투를 벌였던 일이 생각나 귀찮은 일을 피하려고 설화누님 인피면구를 착용한 게 문제였을까.
스쳐간 순찰단원에게서 살기가 일렁이더니,
곧 순찰단원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단장 동무! 저자입네다!
한놈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눈을 희번뜩 떴다.
-내가 뭘 어쨌….
-훈련소장 동무럴 살해한 여성 능력자가 바로 저자입네다!
그런 일이 있었었었지.
하도 별거 아닌 놈이라 까맣게 잊었었었다.
-이번에는 성주님을 암살하기 위해 돌아왔간!
참 듣는 사람 서운하게 말하는 재주가 있는 놈이었다.
계룡검룡이 원산성에서 또 파티를 벌였다가 조선국과 계룡문의 관계가 악화될까 염려되어 특별히 원산성 앞에서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김강산에게도 모자를 눌러 씌우는 성의까지 보였는데.
근데 그게 이런 오해를 유발할 줄은 몰랐지, 나도.
나는 상황을 수습해보기 위해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저기요. 그거 아니….
-기어코 원산에 다시 돌어왔간! 내래 오늘 기필코 네년의 정체를 밝….
콰아아!!!
김강산의 손에서 떠난 황염탄이 순찰단장의 가슴팍에 격중했다.
-이 새끼가. 감히 우리 누님 말을 끊어? 야. 우리 누님이 말 끊는 거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알어? 엉? 모르지? 모르니까 맞아야지.
폭발의 충격에 뒤로 20여 미터 날아간 순찰단장의 몸뚱아리가 건물의 벽과 거세게 부딪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벽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고,
-단장님을 공격혔다! 침입자를 막으라!
그것을 시작으로, 순찰단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조용히 들어가서 볼일만 보고 나오려고 했는데.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이리저리 달리면서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 이제 꼬리에 붙은 순찰단원들만 따돌리면….
“여기입네다!”
좁은 골목 정면에서 불쑥 나타난 순찰단원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순찰단이라는 완장이 폼이 아니라면 놈들이 김강산이 흘리는 마력을 탐지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놈들의 완장은 폼이 아니었다.
역시 김강산을 달고 온 게 문제였다.
“형. 이미 글렀는데? 그냥 선빵필승 시전하지?”
“이 새끼가.”
내 대꾸를 제멋대로 긍정의 의미로 해석한 김강산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푸른 불길이 녀석의 보도를 휘감고,
콰아아아아아!!!!
원산성 본성의 귀퉁이와 거세게 격돌했다.
뻥 뚫린 구멍으로 휘앵앵 바람이 불어 들어갔다.
구멍 뚫린 계단에서 붉은색 갑옷을 입은 경호단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뒤이어 따라붙은 푸른색 갑옷을 입은 순찰단이 그 주변을 겹겹이 포위했다.
“전 경호단! 천표금쇄진을 펼치라!”
경호단장놈의 외침에 따라 경호단 놈들이 재빠르게 위치를 잡았다.
…니들이 먼저 시작했다, 이놈들아.
나는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양심에 손을 얹고, 진짜 정말 진심으로.
“끼아윽!”
기습을 시도하던 경호단 놈이 비명을 내지르며 빠르게 진형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월영검의 검날에 잘려나간 발목이 공중을 한 바퀴 돌아 덜컹,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를 본 경호단 놈들이 제각기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살기가 폴폴 풍기는 꼴을 보니 좋게 풀기는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야. 아주 구울떼처럼 몰려왔네.”
김강산이 헤실거리며 도를 뽑아들었다.
주위를 에워싼 놈들이 바싹 긴장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놈들의 마력이 일순간 증폭했다.
어지간히도 이를 갈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작 훈련소장 박살낸 범인들 잡겠다고 마력증폭제까지 복용하다니.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죽이지는 마라.”
“형도 참. 내가 혈귀단이냐? 빡 좀 친다고 사람 막 죽이게?”
내가 죽으면 혈귀단 할애비는 우습게 뛰어넘을 것 같은데.
…죽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계속 많아지는군.
“됐고. 기왕 싸울 거면 어떻게 하라고?”
“당연히….”
김강산이 씩 웃으며 왼손을 들어올렸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백색의 불덩이가 녀석의 손 위에 순식간에 생성되었다.
“선빵필승이지!”
화르륵!
김강산의 손에서 떠난 화염구가 공간을 불태우며 경호단 놈들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놈들은 침착하게 간격을 유지하며 물러섰다. 동시에, 뒤를 에워싸고 있던 순찰단 놈들이 경계하며 간격을 좁혀들었다.
훈련은 잘되어 있고, 대처도 나쁘지 않지만.
‘경지가 어느 정도는 되어야 의미가 있지.’
김강산이 세운 화염벽이 놈들을 가로막고,
거센 불길에 잠시 주춤한 순찰단 놈들을 향해 김강산이 달려들었다.
마치 양떼 가운데에 오우거 한 마리를 풀어놓은 듯한 광경을 곁눈으로 보며, 내가 바닥을 걷어찼다.
화염구가 지나간 길을 따라 쇄도하자,
물러서 다시 진형을 갖춘 여덟 중 중앙의 두 놈이 두 걸음 재빨리 후퇴했다. 동시에 좌우의 양 날개를 맡은 네 놈이 양쪽에서 짓쳐들었다.
대도와 장검.
단검과 장창.
네 개의 날붙이가 무릎과 허벅지, 허리와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왔다.
물러섰던 두 놈이 대번에 방향을 바꿔 인중과 명치를 찔러왔고,
등 뒤로 돌아든 두 놈이 화염구와 얼음창을 내던졌다.
동시에.
솟구친 바닥이 족쇄가 되어 내 발목을 휘감았다.
자로 잰 듯한 정확한 타이밍이다.
아마 수만 번은 합을 맞췄을 터.
대지술사가 발을 묶고, 찰나의 순간에 화력을 집중하는 작전.
어지간한 상대라면 경지의 차이를 훌쩍 뛰어넘어 막아낼 수 있었겠지만…….
‘내가 어지간한 상대는 아니라서.’
발목을 단단하게 옭아맨 지표면은 이제 정강이를 타고 올라와 무릎을 뒤덮으려 하고 있었다.
발을 묶은 강철은 진강(眞鋼)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그에 근접하는 상당한 강도였다. 최지수와 비슷한 수준의 대지술사가 있는 모양이다.
그대로 방치하면 다리가 완전히 굳어버릴 터.
하지만 방치하지 않으면 그만이거든.
내 의지에 따라,
단전에서 출발한 기운이 단번에 기맥을 타고 올랐다.
내력을 담아 무상각(無上脚)을 연달아 시전하자, 내 다리와 다리를 옭아맨 강철 사이에 약간의 틈새가 생겼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큼의 좁은 틈새일 뿐이지만.
‘이 정도 공간이면 충분하지.’
천근추(千斤錘)를 운용해 거세게 진각(震脚)을 내리밟자,
콰아!!
발을 옭아맨 강철이 충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스러졌다.
파직, 파지직, 작은 소리와 함께 깨진 바닥에서부터 파열이 시작되었다.
헐거워진 족쇄 사이로 다시 한번 진각을 내리밟자,
콰아아앙!!!!!
한때 강철이었던 것이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흙먼지가 주변을 뿌옇게 물들였다.
이로써 다리는 다시 자유로워졌다.
비록 그걸 제외한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사방과 정면에서는 날붙이가 날아들고,
등 뒤에서는 화염구와 얼음창이 쇄도하고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
까지는 아니고.
‘그래도 제법이네.’
상대를 얕보고 이 한 번의 공격으로 끝장내려고 들이대지 않는다. 상체만이 아니라 하체까지도 골고루 노리고 들어오고 있으니까.
공격 지점이 넓게 펼쳐져 있다.
아무리 나라도 여덟 방향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동시에 방어하기는 불가능….
까지는 역시 아니고.
콰아아!!!
등 뒤에서 날아들던 백염구가 대퇴이두에 닿는 순간, 격렬한 폭음이 일었다.
응축했던 호신강기를 단번에 터뜨린 것.
폭발에 튕겨나간 불길이 작은 불씨가 되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소멸했다.
그 뜨끈한 열기를 뚫고, 곧바로 얼음창이 날아왔다.
불과 얼음의 연쇄 공격이다. 급격한 온도차는 단단한 가죽에도 틈새를 만드는 법이니까.
이 전술로 계룡문 애들이 금강변에서 시체덩어리를 박살냈고, 이번에 개척당과 합동 사냥을 한 은영단 애들도 쏠쏠한 경험치를 먹었다.
말하자면 아주 효율적인 공격이라는 의미다.
다수가 강한 소수를 상대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술이기도 하고.
하지만.
‘모든 공격은 맞아야 의미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