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들를 곳 (2)
응축했던 호신강기를 터뜨렸으니 놈들에게는 화염구에 격중당한 듯 보였겠지만.
‘나는 화염구를 안 맞았걸랑.’
거센 파공성과 함께 날아든 얼음창의 날카로운 창끝은 호신강기를 뚫어내지 못하고 조각조각 박살나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기화한 얼음이 뿌연 안개가 되어 내 주위를 에워쌌다.
서늘한 공기 속으로 상체를 숙이며 월영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파아앗.
큰 원을 그리며 땅을 스치듯 휘두른 월영검은 대도놈의 두 발목을 베어내고,
카캉!
장검놈의 장검에 부딪혔다.
부러진 장검이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머얼리 지평선 너머로 잠기어 가고,
파아앗.
흰 빛무리가 옆구리를 노리고 뻗어 오던 단검놈의 손목을 잘라냈다.
붉은 피가 허공으로 솟구치고,
관자놀이를 향해 내지른 장창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당, 황허디, 말, 라!”
경호단장놈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저기요. 당황은 네놈이 하고 있는데 말이지.
여덟 방향의 합공이 한 번 격돌에 파훼되었다. 그 한 번의 격돌로 두 놈이 발목과 손목을 잃었다. 아무리 빡세게 훈련을 했어도 이런 상황을 가정하지는 않았을 터.
놈들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손발이 어지러워진 놈들을 몰아세우는 것 역시 당연한 순리.
타앗.
내 발이 다시 바닥을 걷어찼다.
인중과 명치를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던 정면의 두 검수는 미처 검을 회수하지 못했다.
내지른 검끝이 떨리고 있다.
몸만 이곳에 있을 뿐, 마음은 이미 뒤돌아 꽁지 빠지게 내빼고 있는 놈들의 검이다.
‘그렇다면,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지.’
명치를 노리고 뻗어온 검의 옆면을 왼손으로 밀쳐내며, 월영검을 수평으로 내질렀다.
파아앗!
검기가 어린 날카로운 검끝이 놈의 허벅지를 파고들고,
이내 피분수와 함께 빠져나왔다.
땅을 디딘 오른발을 축으로 재빨리 회전하며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내 인중을 향해 내뻗은 놈의 검끝이 허공을 격하고,
월영검의 검날이 놈의 팔꿈치를 매끄럽게 잘라냈다.
“괴, 괴물이다!”
아니라고.
세상에 이렇게 훤하게 생긴 괴물이 어디에 있냐고.
천 머시기 금쇄진은 네 명의 부상자를 남기고 허무하게 파훼되었다.
나는 남은 놈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내지르고, 다시 휘둘렀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한 놈이 피를 뿌리며 나자빠졌다.
얼른 처리하고 본성에 올라가 한수길놈과 대화를 나누….
“이곳입네다, 대장 동무! 훈련소장 동무럴 해한 암살자입네다!”
다급한 목소리 뒤편에서 녹색 가죽 갑옷을 입은 놈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저자입네다!”
몰려온 놈들의 숫자는 열, 아니 스물, 아니….
야. 얼마나 더 올 거냐고.
조용히 왔다가려고 일부러 인피면구까지 쓰고 왔는데. 또 일이 커져 버렸다.
귀찮은데 정체고 뭐고 조선국과의 관계고 뭐고 그냥 산(散)으로 싹 박살내 버리고….
음.
그건 안 되겠다.
김강산놈이 아주 신이 나서 순찰대원들을 후드려 패고 있었다. 죽은 놈은 없는데 죽기 직전인 놈들은 꽤나 보였다.
더 이상 악연을 쌓는 일은 피하고 싶다고.
흡혈귀가 되었다가 인간으로 돌아온 홍창욱놈의 말에 의하면 원산성에서 그날 내가 보여준 무위가 꽤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듯했다.
산(散)이나 적(積)을 쓰면 알아볼 놈이 분명히 있을 터.
그래서 기공을 봉인하고 박살내는 중인데 말이지.
하나하나 후드려 패니까 끝이 없다고, 이게.
“감히 성주님을 노리다니! 내 목숨을 거두디 않으면 이곳을 넘디 못헐 것이다!”
사뭇 결연한 외침이 들렸다.
본성의 높은 성벽을 한 번에 뛰어넘은 우락부락한 사내가 내 앞에 내려섰다.
거대한 양날도끼를 움켜쥔 얼굴이 익숙했다.
방위단장 리태연.
‘목숨 좀 걸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알아 처먹지를 못하네.’
발이 땅에 닿자마자, 리태연이 곧바로 나를 향해 쇄도했다.
순식간에 내 앞에 도착한 리태연이 돌진하던 기세 그대로 도끼를 내리그었다.
성격대로의, 아주 정직한 공격.
괴물을 상대하는 전투라면 이게 최선이다.
아주 오래 묵은 상급 괴물이 아니라면 놈들은 오직 공격밖에 생각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인간을 상대하는 전투는 완전히 다르다.
인간은 계략을 짜고, 함정을 파고, 흉계를 꾸민다. 정직한 공격으로는 그런 허방을 당해낼 수 없다.
어디, 다시 만난 김에….
‘내 말을 얼마나 귀담아 들었는지 확인이나 좀 해 볼까.’
나는 오른발로 무게중심을 옮기며 좌상단을 찔러 들어갔다.
뾰족한 검끝이 리태연의 어깨를 꿰뚫기 직전,
째앵!
빙벽(氷壁)이 검끝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리태연이 어깨를 뒤틀어 도끼의 방향을 대번에 바꾸었다.
서슬 퍼런 도끼의 날이 내 왼쪽 어깨를 향해 짓쳐들었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상대의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도록 힘을 남겨둔 것.
‘내 말을 허투로 듣지는 않았네.’
허리를 깊숙이 숙여 공격을 회피하자,
재차 방향을 바꾼 도끼가 바싹 따라붙었다.
카앙!
무릎을 베어든 도끼날을 월영검이 가로막았다.
어깨를 노린 공격을 쳐내고, 허리를 향한 공격을 회피하자,
허공을 격한 리태연이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왼손이 도끼자루에서 떨어지고, 하나 남은 오른손이 다급하게 도끼를 회수했다.
나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왼발을 축으로 빠르게 몸을 회전시켰다.
‘많이 컸지만 아직 멀었….’
그 순간.
리태연이 왼손을 거세게 휘둘렀다.
스파앗!
날카로운 단검이 아슬아슬하게 목줄기를 스쳤다.
찰나의 순간에, 공기 중의 수증기를 끌어모아 만들어낸 빙검.
‘…진짜 제법이네.’
리태연과 헤어진 지 고작 한 달.
젓가락질하는 방법을 바꾸기에도 짧은 시간이다. 전투 방식을 바꾸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피 나는 노력, 진짜로 피 열다섯 바가지는 넘게 흘렸을 반복적인 훈련이 아니고서야 이 정도 변화를 이루기는 어려웠을 터.
…김강산놈이 내 말을 이렇게 귀담아 들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그 김강산은 아주 신이 나서 보도를 휘두르고 있다.
“뒈져! 뒈져버려!”
나는 김강산이 외쳐대는 소리를 외면하며 눈앞의 리태연을 응시했다.
리태연의 굳은 얼굴에 낭패감이 역력했다.
빙검 공격이 나름대로 필살기였던 모양이다.
썩 나쁘지 않은 공격이기는 했으니.
리태연이 두 걸음 물러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쇄도했다.
돌진한 기세를 그대로 담은 강맹한 공격이 허공을 격하며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아까와는 다른, 여력을 남기지 않은 공격.
‘이런 점도 마음에 든다니깐.’
카캉!
내 정수리 바로 위에서, 월영검의 검날이 도끼의 날을 가로막았다.
검날을 채운 검기가 조금만 약해져도 검을 박살내고 내 머리를 으깰 만한 엄청난 힘이 검을 내리눌렀다.
하지만, 뭐.
이 정도는 하루 종일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내력이 아직 남아 있으니깐.
바싹 다가선 리태연의 관자놀이에 파랗게 힘줄이 올랐다.
마력을 집중한 팔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알아볼 만도 한데 말이지.’
실력은 나아졌으나 눈치는 그대로였다.
나를 내리누르려는 도끼를 검으로 막은 채, 내가 입술 끝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리 대장님, 오랜만입니다?”
“헛수작하디 말라. 내래 너 같은 암살자를 마주한 일은 없다.”
리 대장이 단호한 목소리와 결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김강산의 보위대 드립에 속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진짜 더럽게 눈치 없는 놈이다.
“마핵은 잘 드셨쎄요?”
리태연은 그제야 나를 알아보았다.
월영검을 내리누르던 도끼의 힘이 일순간 약해졌으니까.
“어허, 어허. 방위단장이 암살자랑 안면이 있으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검룡님, 이십네까?”
“작게 말하라고. 이 멍청아.”
리태연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가까스로 붙들었다.
“아무튼 반가웠고, 성주놈 죽일 생각은 없으니깐 걱정 말고 누워….”
“부탁, 부탁드릴 거이 있습네다!”
“부우우타아악?”
엎드려 절을 해도 부족할 판에 부탁이라고.
역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닌데. 내가 또 뒤통수를 거하게 맞….
“너무 감사해서 식사를 꼭 대접허고 싶습네다. 바쁘신 것이야 잘 알디만 여기까지 오신 김에 저녁 시간을 잠깐 내어 주시면….”
음. 그래.
부탁이 그거구나.
…방위단장이라는 놈이 침입자한테 저녁 식사 초대장이나 날리고 있으니 원산성도 참 큰일이다.
마음은 고맙지만.
설화누님이든 계룡검룡이든 리태연에게 도움이 되는 인맥은 아니다.
“내가, 일이 언제 끝날 줄 모르겠는데.”
“기다리겠습네… 윽!”
“뭘 기다려. 다음 기회가 있겠지.”
퍼어억.
월영검의 검등이 놈의 목줄기를 거세게 후려쳤다. 힘 빠진 도끼가 허공을 한 바퀴 날아 바닥에 처박혔다.
도끼처럼 땅에 널브러진 리태연이 또 무엇인가를 지껄이려 했다.
눈치 없는 놈이 괜히 이것저것 떠들다가 제 목숨 깎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저 여성 능력자는 바로 그 계룡검룡님이시고, 계룡검룡님께서 성주님을 해치지 않겠다 약조하셨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뭐, 이런 소리.
‘에이. 고블린 뇌도 아니고. 설마….’
가 아니지.
이놈은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나에게 여간 감명을 받은 게 아닌 모양이라.
나는 재빨리 리태연의 마혈과 아혈을 짚었다.
“푹 쉬고, 언젠가 또 보자고요.”
***
본성의 꼭대기에 있는 한수길의 방으로 향하는 길에는 계단이 참 많았다.
길고 긴 계단을 오르는 동안 본성 내부를 지키던 경호단 몇몇이 앞을 가로막았다.
“야. 다치지 말고 비….”
콰아아!!!
입을 열기가 무섭게 김강산이 날린 백염탄에 얻어맞은 놈들이 저 멀리 날아가 반대쪽 벽에 부딪혔다. 그래도 경호단이라고 죽은 놈들은 없었으나 각성자의 단단한 몸뚱아리에 부딪힌 벽은 무사하지 않았다.
“아주 원산성이랑 전쟁을 하지?”
“그런 거야, 형?”
“…말을 말자.”
실실 쪼개던 김강산이 문득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근데 조선국이랑 전쟁할 거 아니면 여기 왜 온 거?”
“빨리도 묻는다. 지금까지는 왜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생각 안 했는데요.”
예상대로의 말이다.
참 인생 편하게 사는 놈이다. 나도 생각을 좀 덜 해야 하는데 말이지.
“여기 집주인한테 볼일이 있어서.”
“원산성 성주?”
“그래.”
“죽이게?”
“야. 무슨 일인지를 묻는 게 정상이라고.”
“형이 원산성주랑 쎄쎄쎄하려고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김강산이 의외로 핵심을 찌르는 대답을 했다.
언제 한번 한수길을 만나러 원산성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이전부터 하고 있었다.
물을 말이 있었기 때문.
하지만 이번 원산행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산성주가, 진, 진룡보도를 되찾아 달라 의뢰허여….
암살자놈이 콧물눈물오줌물을 질질 흘리며 자백한 의뢰인.
그게 한수길이었다.
-근데 왜 아까 보도 가진 애 안 따라가고 나한테 붙었냐?
-저이 스스로 분수를 알디 못허고, 강자를 마주치니 호승심이 생기어….
뭐.
대충 그런 소리였다.
-검룡님을 해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네다. 그저 무위가 너무 대단하시어 보도를 훔칠 기회를 만들다보니 이런 무례를 저질렀습네다. 실지로, 실지로 아무도 안 죽디 않었습네까….
-그런 짓거리를 벌여 놓고 잘도 지껄이네. 아무도 안 죽은 건 내 덕분이지.
최지수가 그 새벽에 홍창욱을 막지 못했다면 우리 일행 전체가 감염되었을 터.
우리가 감염되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사리원성에 들어갔더라면 사리원성은 흡혈귀의 소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놓고 ‘아무도 안 죽디 않었습네까.’라니.
어이가 대기권을 뚫고 탈출할 개소리였다.
-살려주시라요…….
분수를 알디 못헌 그놈은 스스로 그 책임을 지고 죽음을 맞았으니 끝났고.
문제는, 한수길의 처분이다.
암살자를 섭외해 내 뒤통수를 친 음험한 놈이다.
마음 같아서는 대가리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박살내고 싶지만….
나는 설명 대신 가볍게 어깨를 추키며 말했다.
“조금 뒤면 알게 될 거야.”
“알았어.”
김강산은 언제나처럼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부지런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본성의 가장 높은 방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성주 가족의 거주 구역이다.
지난번에 들어갔을 때는 문이 아니라 창문을 이용했던 터라 문은 처음이었다.
화려한 봉황이 양각된 철문 안쪽에서 일렁이는 마력이 느껴졌다.
바깥의 침입자가 나라는 사실을 모르니, 한수길놈이 저항이라는 선택지를 고른 모양이다.
잘 된 일이다.
보자마자 무릎 꿇고 잘못했다면서 눈물 질질 짜는 사람을 후려 패면 좀 찝찝….
하지는 않지.
저놈이 한 짓이 있는데.
나는 가볍게 월영검을 내리그었다.
다시, 위쪽 수평베기.
아래쪽 수평베기.
반대쪽 수직베기.
단단한 철문이 두부처럼 잘려나가고,
우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안쪽으로 넘어졌다.
콰아아!!
뻥 뚫린 공간을 가르며 두꺼운 얼음창이 총알처럼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