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계룡검룡이라는 이름 (3)
나는 주변을 재빨리 훑으며 사칭범이 주변에 있는지 확인했다.
양아치 목격자가 울먹거리며 털어놓은 바에 의하면 놈은 외모도 나와 닮아 있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그럴싸하게 잘생긴 얼굴.
나보다는 키가 크고 덩치도 나보다는 좋지만 각성자 치고는 호리호리한 편.
-진짜 그분이 검룡님인 줄 알았습니다! 그, 하얗게 빛나는 검으로 나가를 상대하시는 모습이, 소문으로 듣던 것과 너무 똑같아서….
꽤 정성들인 연출이다. 어떻게 연출했는지는 만나서 놈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것이고.
일단 주변에 놈은 보이지 않았다.
김강산은 한참을 주절거린 끝에 천천히 도를 뽑아들었다.
보도의 검은 검날이 곧 불길에 휩싸였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도 1미터 가량 솟아오른 불길에 모여든 이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선배님. 저거, 말려야 하지 않습니까? 위험한데요.
-너 탐색술 없지. 저 사람 마력이 엄청나다. 저런 사람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지? 우리가 말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본부에 알리고 오겠습니다!
한 놈이 재빠르게 팔마회 본부를 향해 사라졌다.
뭐, 의도는 나쁘지 않은데…….
내가 바들바들 떨며 뒤로 물러서는 사이 김강산이 불길에 휘감긴 도를 느릿느릿 휘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 같은 선택받은 자가 없었으면 진작 뒤졌을 프롤 새끼가 고작 돈 가방을 못 내놓겠다고 버텨? 그렇다면 모가지랑 같이 가져가주마.”
“제발, 제 목숨과도 같은 돈입니다…….”
“그러니까 목숨이랑 같이 가져가겠다고.”
비릿하게 웃는 모양이 완전 타고난 악당이다. 설마 김강산 너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내 김강산이 그 정도는 아니지.
콰아아!!!
김강산의 도가 내 어깨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 바닥을 내리쳤다.
불길이 닿은 시멘트가 녹아들어가다가, 내리는 비에 그대로 굳었다.
-형. 놀라야지.
김강산이 도를 회수하며 내 귀에 속삭였다.
아. 맞다.
지금 연약한 일반인 역할 수행하는 중이었지.
내가 한 발 늦게 휘청이며 주저앉았다.
“이러지 마십시오, 도와, 주세요!”
나는 주변을 향해 외쳤다.
몇몇이 제 병장기를 움켜쥐는 모양이 보였다. 하지만 아무도 김강산을 막아서지는 않았다.
다들 주제파악을 잘한다.
이곳에서 김강산을 상대할 수 있는 놈은 단 한 명도 없다. 아니, 이제 한반도 남쪽을 통틀어도 김강산을 제압할 수 있는 인간은 꽤나 드물 거다.
매번 죽어라 나를 쫓아다니며 괴물을 잡히는 대로 때려잡은 결과였다. 물론 마핵도 꽤나 먹였다.
길드장 정도나 되어야 제압할 수 있을 거다. 그것도 그리 손쉽지는 않을 터. 애가 또 워낙 악바리라서.
말하자면 내 김강산이 이제 어디 가도 꿀리지는 않…….
‘지금 이걸 뿌듯해할 때가 아닌데.’
나는 정신을 차리며 다시 연약한 일반인 역할에 몰입했다.
화르륵!!!
굵은 빗줄기에 약해졌으나, 일반인의 목숨을 빼앗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강력한 불길이 연신 허공을 가르고 바닥을 내리쳤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가방 내려놓고 꺼….”
김강산의 말을 자르며, 희게 빛나는 검이 빗줄기를 수평으로 가르며 날아들었다.
내 발치를 향해 휘두르려던 김강산의 도가 흰 검날에 가로막혔다.
카앙!
도를 튕겨낸 남자가 김강산과 나 사이를 가로막듯 섰다.
-검룡님!
-계룡검룡님께서 오셨다!
둘러선 군중들이 외치는 소리가 우렁찬 빗소리를 뚫고 하늘을 쳤다.
나를 향한 환호인데 나를 향한 환호가 아닌 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좀 얄딱꾸리했다.
남자의 비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단정한 이마를 덮고 있었다.
‘사칭범 새끼. 면상 좀 보자.’
놈이 몇 번 검을 휘두르자 김강산이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공간을 확보한 놈이 손을 뻗어 주저앉은 나를 일으켰다.
“괜찮으십니까?”
“…네, 뭐…….”
나는 모자의 차양을 내리며 놈의 시선을 피했다.
힐끗 본 놈의 얼굴은 꽤나 단정하기는 했다. 물론 나보다는 못하지만.
“넌 뭐냐? 오지랖 넓게 끼어들지 말고 네 갈 길이나 가시지.”
김강산의 비딱한 목소리가 놈의 등 뒤에서 울렸다.
나를 일으켜 세운 사칭범이 김강산을 향해 돌아서며 검을 들어올렸다.
“저기,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제가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말을 뱉었다.
서늘한 시선으로 김강산을 응시하며 사칭범이 대답했다.
“저는 계룡검룡이라고 합니다.”
캐릭터 분석 잘 한 줄 알았는데 영 엉망이네.
나는 그딴 식으로 대답 안 한다고.
어쨌든 사칭범에 현행범이다.
다음 순서는 당연히 연행과 심문이지.
내가 김강산을 향해 눈을 끔벅이니 단번에 달려든 김강산이 내 몸을 풀썩 안아 옆구리에 꼈다.
김강산이 도를 거세게 휘두르자,
몰려든 인파 사이로 대번에 길이 뚫렸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벽 사이로 김강산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사칭범놈을 향해 목소리를 돋워 외쳤다.
“살려어어주십시오오오오!!!!! 계룡검룡니이이이임!!!!”
갑작스러운 납치극에 당황했던 놈이 내 외침을 듣고 화들짝 놀라 바닥을 걷어찼다.
놈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좀 더 빨리 가도 되겠는데.
-예압.
“그 사람을 놓아주십시오! 일반인을 겁박하지 마십시오!”
그 높임말 버려. 버리라고. 그거 내 캐릭터 아니야.
20여 미터 뒤에서 외쳐대는 목소리가 사뭇 간절했다.
원래 그런 놈인지. 계룡검룡 사칭하느라 연기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호수공원을 가로지른 김강산이 동천의 천변을 지나 순천성의 성벽을 넘었다.
이제 주위에서 인간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놈은 포기하지 않았다.
잡풀이 우거진 공터에 김강산이 나를 내려놓고,
곧 놈이 내 앞에 도착했다.
꽤나 빠른 속도로 빗속을 줄창 내달렸는데도 호흡이 멀쩡하다.
기감의 그물에서 느껴지는 마력도 그렇고, 확실히 만만한 놈은 아니다.
‘대체 이런 놈이 어디에서 튀어나왔지.’
내가 잠시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놈이 얼굴을 굳히며 김강산에게 말했다.
“능력도 뛰어나신 분께서 왜 힘없는 일반인의 돈을 갈취합니까? 가진 힘으로 벌면 될 텐데요.”
“야. 이 새끼가, 와, 진짜 어이없네. 와.”
사칭범이 지껄이는 소리라기에는 지나치게 멀쩡한 문장이었다. 김강산이 할 말을 잃게 만들 만큼.
이놈 이거, 진심이다.
실력도 괜찮고 인성도 괜찮은 놈이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이야기라도 좀 들어 볼까.
나는 제 머리를 짚으며 씩씩거리는 김강산을 지나쳐 놈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깊이 눌러 썼던 모자를 벗자 놈이 휘둥그레 눈 크기를 키웠다.
아까 양아치 놈들과 똑 닮은 표정이다.
이제 마혈이 풀릴 시간이 되었으니 허리를 부여잡고 일어나 제 갈 길 갔을 놈들.
“알겠냐, 내가 누군지?”
“계룡검…….”
하지만 놈은 네 글자 짧은 단어를 끝맺지 못했다.
“형! 저 새끼 이대로 넘어간다고?!”
외마디 외침을 내지른 김강산이 풀썩 뛰어올라 도를 휘둘렀기 때문.
콰아아아!!!!
힘과 빠르기, 정확도를 모두 갖춘 도격이 놈의 정수리를 향해 쏟아졌다.
그리고, 가로막혔다.
‘진짜 제법인데.’
놈의 단검 끝을 타고 뻗어나온 빙검이 김강산의 도를 아슬아슬하게 가로막았다.
“계룡좌룡님… 이시지요? 제가 검룡님을 뵙고자…!”
“사칭범 새끼가 말이 많네.”
놈의 말을 자르며 김강산이 재차 도를 들어올렸다.
말린다고 들을 김강산이 아니다.
사칭범의 존재를 김영호에게 들었을 때부터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말도 못 한다.
“형. 박살내고 나서 천천히 들어 보자고. 그 지랄 맞은 사연이 대체 뭔지.”
“…그래. 너 알아서 해라.”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걸음 물러서는 나를, 놈이 불러 세웠다.
“검룡님. 좌룡님과의 결투에서 승리한다면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듣기는 할게.”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약속하신 겁니다.”
“그래.”
사칭범은 사칭범 주제에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걔 이기기 쉽지 않을 걸.
***
콰아아!
어마어마한 위력의 도격이 어깨를 향해 내리꽂혔다.
가까스로 후퇴해 김강산의 도를 회피한 그가 빠르게 단검을 내뻗었다.
곧, 단검을 중심으로 뻗어 나온 수백 개의 빙날이 보도를 휘감았다.
허리를 향해 날아오던 도의 위력이 반감된 찰나.
파앗!
얇고 뾰족한 빙침(氷針)이 김강산의 들어 올린 겨드랑이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이 새끼가!”
“야. 지껄일 시간에 도를 한 번 더 휘두르라고. 너 내가 말하는 거 듣기는 하냐?”
“나만큼 형 말 잘 듣는 사람이 어디 있냐?”
“아주 주둥아리는 살았네.”
검룡과 좌룡이 주고받는 소리가 가깝고도 멀게 들렸다.
‘계룡검룡님이라면 들어주실지도 모른다. 아니, 계룡검룡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으신다면…….’
양범진은 어금니를 짓씹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분명히 빙침이 겨드랑이에 격중했는데 좌룡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은 듯했다.
좌룡의 피부를 감싼 흰색의 빛.
옅은 열기가 느껴지는 그것이 좌룡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김강산아. 밤 샐래? 그래가지고 언제 끝나냐.”
작은 바위 위에 비스듬히 누워 김강산과 양범진의 대결을 하품을 하며 구경하던 서림이 김강산을 타박했다.
“오늘 비만 안 왔으면 진작 박살냈다고!”
“꼭 실력 없는 놈이 날씨 탓하지. 나는 너를 그렇게 키운 적이 없는데.”
얼굴을 일그러뜨린 김강산이 거세게 쇄도하며 보도를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파르스름한 불길이 정수리에 닿기 직전,
양범진이 상체를 낮추며 손목을 미끄러뜨렸다.
단검이 지나간 길을 따라 내리던 비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음에 묻은 빗방울이 다시 얼음이 되고,
얼음 위로 쏟아지던 비가 또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형성된 수십 겹의 빙벽(氷壁) 위로,
콰아아!!!!!
보도가 떨어져 내렸다.
보도에 휘감긴 청염이 겹겹으로 쌓인 빙벽의 끄트머리에 닿자마자 단단한 얼음이 단번에 기화했다.
‘육지의 각성자들은 정말 대단하구나.’
양범진은 마음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크라켄도, 백상아리도 깨뜨리지 못한 빙벽이었다. 이 겹겹의 빙벽으로 얼려 격살한 괴물이 수천 마리는 넘을 터.
그 빙벽이 손쉽게 파훼되고 있다.
검룡이 아닌, 그의 수하라던 좌룡에 의해서.
좌룡의 무위가 이 정도인데 바위에 드러누워 코를 후비고 있는 저 계룡검룡은 대체 어떤 경지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죽음의 바다를 건너 제주도의 5만 도민을 육지로 모두 데려오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사실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은 채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했을 뿐.
하지만.
‘정말로 가능할지도.’
절로 부풀어 오르는 희망을 갈무리하려 애쓰며 양범진이 있는 대로 마력을 끌어 올렸다.
자신이 눈앞의 사내를 이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줄 뿐.
뿌옇게 기화한 수증기가 순식간에 다시 얼음으로 변했다.
내리던 빗방울이 얼어붙고,
빗방울 사이로 번지던 수증기가 얼어붙고,
수증기가 흩뿌려진 공간이 얼어붙고,
빙벽을 녹이며 양범진의 어깨 위로 거세게 떨어지던 김강산의 보도가 얼어붙었다.
장빙빙(長氷冰).
닿은 모든 것을 얼리며 스스로 팽창하는 극한의 얼음.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니다.
소모되는 마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
들끓듯 넘치던 마력이 순식간에 줄어드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아주 잠깐이면 돼.’
극한의 온도까지 끌어내린 더 없이 단단한 얼음이 보도의 손잡이를 쥔 손을 얼리고, 어깨를 얼리고, 몸통과 다리를 단번에 멈춰 세웠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양범진이 얼어붙은 김강산의 품으로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가늘고 날카로운 단검의 검끝이 김강산의 어깻죽지를 향해 단번에 뻗어나갔다.
검끝을 타고 솟아오른 얼음날이 김강산의 어깻죽지에 닿기 직전.
카앙!
무엇인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단검을 쥔 왼손을 후려쳤다.
‘…돌?’
허공을 돌아 떨어지는 그것은 손가락 마디 하나 크기의 작은 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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