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계룡검룡이라는 이름 (4)
바다 건너 육지가 있다는 이야기는 장로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1차 블랙데이가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제주는 쉽게 육지와 오갈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이후 태어난 양범진은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이지만.
그 연결은 천천히 끊겼다.
비행괴물에게 공격을 받은 비행기와 헬기가 연이어 실종되었다. 전투기를 띄울 연료는 전쟁에 대부분 소모되었다.
기름이 떨어지자 육지를 오가는 배를 수중괴물로부터 지키던 잠수함은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로 전락했다.
사흘에 한 번씩 오가던 연락선은 일주일에 한 번이 되고, 다시 한 달에 한 번이 되고, 세 달에 한 번이 되고,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잠수함 없이 배가 오갈 수는 없었다.
육지의 괴물보다 몇 배, 혹은 몇십 배 강력한 괴물들, 그 종류도 전혀 밝혀지지 않은 괴물들이 바다에 득실거렸다.
나가나 금혈어, 세이렌 등 강변과 해변을 서식지로 하는 일부 물속성 괴물들에게는 이름이 붙었으나 바닷속 깊은 곳의 괴물들에게는 이름도 붙지 않았다.
돛과 노에 의지해 바다를 건너는 일은 미친 짓이었다.
옛 시대였더라도 힘든 일이었을 테지만, 이제는 정말로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양범진에게는 다른 수가 없었다.
-장로님들. 제가 육지에 나가 대통령을 만나 뵙고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백록검, 저 바다를 무슨 수단으로 건너겠습니까?
-이렇게 앉아 죽을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양범진이 죽지 않고 남해의 인적 없는 해변에 도착한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해수독으로 썩어 들어가는 팔과 다리에 해독술과 회복술을 퍼부어가며 육지의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일주일이 지나자 살아 있는 시체 같던 몸이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도움을 청하려 했던 대한민국은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각성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다니며 아무나 붙들고 질문을 던졌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굽니까?
-글쎄. 파천궁주 아닐까요. 이번에 진한제국의 황제도 파천궁주의 손에 목이 달아났다던데.
-이 사람아. 철없는 소리 마쇼. 진한제국이니 파천궁주니 그거 다 허명이라고. 자네가 봤소? 그 파천궁주가 얼마나 강한지 봤냐고.
-왜 흥분을 하고 난리야. 그래, 당신이 생각하는 제일인자가 누군데?
모여든 사람들은 어느새 양범진을 잊고 제일인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떠들기 시작했다.
양범진은 귀퉁이에 서서 그들의 대화에 등장하는 이름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담았다.
-제일인자? 그걸 고민할 필요가 있어? 당연히 염화검제 아니냐? 내가 용병단에서 일할 때 대한길드랑 같이 일한 적이 있었거든? 그때 염화검제가 싸우는 걸 봤는데… 이야. 지리던데.
-나도 염화검제에 한 표. 1, 2회 랭킹전 1위잖아. 랭킹전은 그때가 찐이었지.
-하! 염화검제? 그것도 다 옛말입니다, 형님들.
-옛말? 그러면, 설마 네가 생각하는 제일인자가….
-이제 계룡검룡의 시대라고요. 염화검제도 어쩌지 못한 혈귀단을 완전히 끝장냈는데, 여기서 얘기 끝났죠. 인정? 어? 인정?
-아무리 그래도 4세대 각성자에 이제 막 스물을 넘긴 젊은이가 마력을 쌓아도 얼마나 쌓았겠냐?
계룡검룡이라 외친 장발의 사내가 모르는 소리 말라며 혀를 쯧쯧 찼다.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이 모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검룡님이 싸우시는 모습을 실제로 보면 그런 생각이 절대 안 들 걸.
-그러는 당신은, 직접 봤간디?
-그러엄. 내가 그때 보령에 있었거든.
장발의 사내는 자신이 목격한 계룡검룡의 무위를 한참 동안 늘어놓았다.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한 남자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다들 이 소문 들었나? 검룡님께서 각성자가 아니라는 소문 말이야.
-또. 또. 이 새끼 또 헛소리한다. 그런 개소문을 주워다 나르고 싶냐? 공기가 아깝다.
주변을 에워싼 사람들이 야유를 쏟아냈다.
양범진은 그들의 대화가 끊긴 틈을 타서 두 번째 질문을 했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의협심이 강한 사람은 누굽니까?
제일인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던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를 냈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입에 올린 것은,
계룡검룡이라는 이름.
-그야 계룡검룡이지.
-하먼. 검룡님만한 분이 어디 있간디.
-난 좀… 프롤들한테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가 있냐? 그게 의협이야? 솔직히 그거 호구짓 아니냐?
한 명이 작은 의문을 던졌으나,
-이 혈귀단 같은 새끼 봐라.
-쯧, 쯧. 프롤이라니. 요즘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네.
사람들의 비난에 금방 묻히고 말았다.
양범진은 그날로 계룡을 향해 출발했다.
계룡문의 본부 1층 대기실에서 하루를 꼬박 기다렸다. 그러나 검룡은 만날 수 없었다.
턱밑까지 다크서클이 내려온 짧은 머리의 남자가 퀭한 얼굴로 빠르게 말했다.
-…제주도에서 오신 분이라고요. 바다를 건너서요. 네에. 검룡님은 지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용건이 있다면 저에게 말씀하십시오.
-언제, 오십니까?
박명칠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썹을 찌푸렸다.
-글쎄요. 저도 그걸 알면 참 좋겠습니다만.
계룡성에서 나온 양범진은 곧바로 서울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서울 3성의 성문에서 대한길드의 길드원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출입증이요.
-저, 염화검제님을 꼭 뵈어야 합니다.
-어디서 오신 누구라고요?
-제주의 백록검 양범진입니다. 제주의 모든 도민들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제발, 염화검제님을 뵙게 해주십시오.
-…어, 제주, 백록검 양범진… 그런 사람은 명단에 없는데. 약속 잡고 온 거 맞아요?
-약속이요?
성문을 지키던 대한길드의 길드원들 십여 명이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양범진이 그들을 반쯤 제압했을 때 성벽 안에서 그만큼의 사람들이 다시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는 한층 수준 높은 고수들이었다.
결국 양범진은 두들겨 맞고 서울성에서 쫓겨났다.
화성길드에서도, 무등길드에서도, 유성길드에서도… 어떤 길드장도 만나지 못한 양범진은 터덜터덜 남해안으로 돌아왔다.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육지에 닿았을 때만 해도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었다.
하지만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전국을 뛰어다녔는데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자신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바다를 건너왔다고 얘기하면 헛소리 집어치우라고 하거나 피식피식 웃으며 고생 많았다고 했다.
‘내가 육지에 온 지 벌써 삼 개월… 차라리 섬으로 돌아가 장로님들과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편이 나을지도…….’
배를 정박해 둔 곳으로 향하던 양범진은 바다에서 올라온 한 떼의 나가 무리와 마주쳤다.
어린아이와 그의 아버지로 보이는 부자(父子)가 나가 무리에게 쫓기고 있었다.
양범진은 생각에 잠긴 채 손 가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얇고 가는 검이 극한의 얼음으로 에워싸여 하얗게 빛을 냈다.
허공에서 생성된 빙침이 흰 빛줄기처럼 공중을 가로질러 나가의 목을 꿰뚫었다.
양범진이 넘어진 아이에게 다가가 겨드랑이를 잡아 올려 일으켜 세웠다. 입을 헤 벌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계룡검룡님?
옆에 있던 아이의 아버지가 화들짝 놀라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검룡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양범진은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잠시의 머뭇거림 후였다.
-계룡검룡이라. 어째서 그리 생각하셨을까요.
-…검룡님이 아니십니까?
아버지가 횡설수설 변명인지 칭찬인지 모를 얘기를 늘어놓았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호리호리한 몸, 잘생긴 얼굴, 희게 빛나는 검! 그리고 뭣보다, 위험에 처한 일반인을 외면하지 않는 이 의협심…! 검룡님이 아니라면 대체 뉘신지……? 아…! 비밀리에 내려오셨습니까?
호기심과 존경으로 범벅된 두 쌍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양범진은 돌아가기 전에 딱 한 가지만 더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계룡검룡은 성격이 불같고 행동이 더없이 빠르다고 했다.
그의 귀에 자신의 이름을 사칭하는 이가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간다면 허허 웃으며 들어 넘기지는 않으리라.
‘사람들의 입이 옳다면 계룡검룡이야말로 제주를 도와줄 협객이다. 만약 사람들의 입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육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생각을 마친 양범진이 싱긋 웃었다.
-예. 제가 검룡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온 것이 딱히 비밀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 내려왔을 뿐입니다.
계룡검룡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사천성을 뒤덮었다.
양범진의 예상보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는 이틀 후 사천성을 떠나 하동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이틀 후 순천성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이틀 후 보성성으로 떠났다.
계룡검룡은 나타나지 않은 채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마음속으로 정한 기한이 이제 이틀 앞이었다.
‘별수 있나. 돌아가야지.’
양범진은 배를 정박해둔 사천 인근의 만으로 돌아가는 길에 순천성에 들렀다.
그곳에서 맛본 꼬치구이가 아주 맛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주점은 조금 전 있었던 작은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일반인이 돈 가방을 열어젖히며 각성자들 앞에서 겁도 없이 돈 자랑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아이고. 그 사람은 어쩌다 그런 실수를 했나.’
양범진은 꼬치구이를 급하게 먹어치우고 금방 주점을 나왔다. 폭행을 당하고 있다면 도와줄 생각이었다.
여러 각성자들이 그 일반인을 따라 몰려나갔다고 했다. 아마 좋은 뜻은 아닐 터였다.
잠시 후 그는 주점 뒤 으슥한 골목에서 바닥에 쓰러진 각성자들을 발견했다. 각성자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무슨 상황인지 고민하던 양범진은 골목 바깥에서 커다란 마력이 확장되는 것을 느끼고 빠르게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신이 구하겠다고 달려든 일반인이 자신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푹 눌러쓴 모자챙 속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이 사람이 계룡검룡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입이 마르도록 얘기하던, 잘생쁨이 뿜뿜한 얼굴.
자신 역시 인물이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으나 저 얼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 검룡은 비스듬히 누워 있던 바위에서 지금 막 일어나 앉은 참이었다.
자신의 손등뼈를 박살낸 듯한 작은 돌조각은 검룡이 날려 보낸 것이 분명했다.
돌에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엄청난 타격감이었다.
그 통증에 양범진이 잠시 멈칫거린 사이,
화르륵!
불길을 일으켜 얼음을 녹여낸 좌룡이 재빨리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기회를 놓쳤어.’
다시 장빙빙(長氷冰)을 시도할 만한 마력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검룡은 좌룡에게 이겨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겠다 했다. 손 놓고 돌아가려고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각오를 다지며 단검을 움켜쥐는 양범진의 귀에 검룡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까지 하지?”
“…네?”
“얘기 들어줄 테니까 거기까지 하라고. 이 새끼야.”
어느새 일어선 검룡이 팔짱을 낀 채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매끈한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복잡했다.
‘화가 난 건가?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좌룡이 도를 치켜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형! 왜 끼어드냐? 이제 거진 다 끝났는데!”
“김강산아. 내가 방어막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라고 말 했냐, 안 했냐.”
검룡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좌룡을 노려보았다.
좌룡이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외면하며 슬그머니 뒷목을 긁었다.
방금 전까지 미친 크라켄처럼 날뛰던 좌룡이 갑자기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보이는 이상 현상에 양범진은 할 말을 잃었다.
“말했지. 근데 그게 쉬운 게 아니라니까? 그게, 집중력이 엄청 필요하더라고. 공격 하다보면 순간적으로다가….”
“그래서 어디 내가 마음 편하게 너를 믿겠냐? 엉? 한! 순! 간! 도! 방어막 풀지 않게 훈련하라고! 그리고, 언제까지 백염막만 만들 건데! 청염막은 대체 언제 되는데! 엉? 마핵을 그렇게 처먹은 놈이!”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참 동안 좌룡을 다그친 검룡이 드디어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검룡은 입술 끝을 비스듬히 올리며 웃고 있었다.
검룡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실력이 꽤 있는 양반인데. 왜 나를 사칭했는지부터 들어 볼까?”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며 검룡이 말했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얼굴은 웃고 있는데 어쩐지 한기가 느껴졌다.
양범진이 양손으로 제 팔뚝을 감싸쥐며 입을 열었다.
“부탁드릴 게… 악!”
순식간에 다가온 검룡이 머리를 후려치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대체 어떻게 얻어맞았는지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확실한 사실은, 엄청나게 아프다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