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계룡검룡이라는 이름 (5)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양범진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서 있던 좌룡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물어볼 테니까 잘 생각하고 대답해라.”
검룡이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를 사칭했지?”
“그것이, 제가 검룡님을 뵙고… 악! 아으악! 악악!”
이번에는 다섯 대 연타였다.
지난 4차 블랙데이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울어본 적 없는 양범준의 눈가에 짭조름한 눈물이 맺혔다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이러시는….”
“한 번 더 물어본다. 내가 인내심이 많지 않지만 오늘은 일 년 치 인내심을 발휘해 보려고.”
“아니, 그러니까 왜 때리시는….”
“왜 나를 사칭했지?”
꼬올깍.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매력적인 입꼬리를 응시하며 양범진이 마른침을 삼켰다.
‘더없이 정의롭다는 평과 성품이 개차반이라는 평이 함께 들리더니. 성품에 대한 평은 사실이었구나.’
“대답 안 하냐? 사칭범 새끼야?”
“검룡님께 아뢸 이야기가 있어가지고… 악!”
“이 새끼야. 그거 말고 내 얼굴 보면 먼저 해야 하는 말이 있을 거 아니냐. 엉? 이 새끼가 지 할 말만 하네. 엉? 부탁을 하든 지랄을 하든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을 거 아니냐고.”
“악! 죄, 죄송… 악윽악! 합! 악악! 니다!”
그제야 계룡이 팔을 멈췄다.
“그 죄송한 마음 절대 잊지 말라고요. 이 사칭범아.”
“알겠습니다!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로 잊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사칭한 이유를 물어놓고 죄송하다는 대답을 요구하는 억지스러움에 대해서는 따질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분명히 비가 오는데 먼지가 나는 듯한 환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검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서 제주 최연소인 13세에 각성한 양범진으로서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아본 일은 생전 처음이었다.
각성하고 5년 만에 1차 블랙데이에 각성한 장로들도 상대가 되지 않는 수준에 올라섰는데.
이 정도 무위라면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가능할지도……!
“형. 이 사칭범 새끼 웃는데? 아직 덜 맞았나봐.”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완전 충분히 맞았습니다!”
양범진이 황급히 두 팔을 내저었다.
검룡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나긋하게 말했다.
“손끝에 얼음은 뭐지? 기습하려고?”
“아니요! 실수입니다! 이게, 계속 비가 오니까…!”
잠시 후.
비 오는 언덕에 또 한 번 한바탕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제주도에서 왔다고?”
“느예….”
“야. 대답 똑바로 안 아냐.”
“이비 안이 다 트저서….”
“그러게 왜 내 이름을 사칭해.”
놈이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푹 떨궜다.
계룡에 왔던 시기를 들어보니 혈귀단이 계룡을 공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내가 녹귀대주 뒤를 쫓아가고 남은 애들이 계룡성을 복구하느라 정신없는데 바다 건너왔다는 소리를 해대니 미친놈 취급당한 모양이었다.
헛소리 해대는 방문객들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혼자서 나무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제주에서 왔다는 얘기를 누가 믿겠냐고.
사실 나도 못 믿었다.
그런데 이놈이 보여줬다. 맨몸으로 헤엄을 쳐서 저어기 섬을 찍고 돌아왔는데 멀쩡했다.
담수와 달리 바닷물은 해수독(海水毒)을 품고 있다.
괴물의 괴독이나 어둠속성의 암독과 달리, 해수독은 해독술이 통하지 않았다.
보염련의 의뢰로 나가를 잡을 때처럼 해변의 바닷물에 몇 분 몸을 담그는 정도라면 문제가 없지만 머리가 잠길 만큼 깊은 바다로 나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물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지만 물속에서 배 밑창을 박살내려고 들이대는 괴물들을 처리하려면 수중 전투는 필수.
결국 인간은 바다를 포기했다.
포기했는데…….
바다를 건너왔다는 놈이 내 눈앞에 있다.
제 입으로 황천길 문턱을 밟았다고는 하는데 어쨌든 지금 살아 있으니까.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놈을 발견했어.’
재미있는 놈, 백록검(白綠劍) 양범진이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계룡검룡님. 제주를 도와주십시오. 오만 명 도민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양범진은 아주 비장한 얼굴이었다.
앞뒤 다 떼고 도와달라 하면 내가 어떻게 하냐고.
“뭔 일….”
입술을 실룩이던 김강산이 불쑥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야. 이 사칭범 새끼야. 우리 형한테 보따리 맡겨 놨냐? 오늘 처음 보는 사이에, 우리 형 이름을 사칭해서 피곤해 뒈지겠는데 여기까지 내려오게 만들어 놓고, 도와줘? 도와달라고? 시발. 오만 명이든 오십만 명이든 그건 니들 사정이고. 바닷물 먹고 콱 다들 뒈져… 악!”
나는 발광하기 시작한 김강산의 아혈을 가만히 눌러 놓고 다시 물었다.
“뭔 일인데.”
놈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짧은 침묵 뒤, 놈이 입술을 뗐다.
“…제주에 물이 마르고 있습니다. 아니, 오염되고 있습니다……. 한라산의 나무들이 말라죽기 시작하더니, 농작물이 말라 죽고, 이제는 사람들이 먹을 물도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렇게 말을 시작한 놈은 길드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계룡에서 나를 만나지도 못하고, 이판사판으로 어떻게든 나를 불러내려고 계룡검룡의 이름을 팔았다는 이야기를 할 때쯤에는 거의 반쯤 울먹거리고 있었다.
많이 서러웠던 모양이다.
역시 사연 듣기 전에 먼저 두들기기를 잘했다.
서사 풀기 시작하면 다들 그럴만한 이유가 있거든. 내가 또 마음이 좀 약하냐고.
“도와주십시오. 도민 모두가 전멸의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어떻게? 너 하나 바다 건너는 데도 황천길 문턱 밟았다면서. 오만 명 일반인을 태울 배는 있냐?”
“제가 떠나기 전부터 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거의 완성되었을 겁니다.”
“바다괴물은? 배 있다고 바다 건널 수 있으면 연결이 끊기지도 않았어.”
옛 시대에는 비행기로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으나 모두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파천궁에서 한국으로 사람을 보낼 때도 서해를 건너지 않고 육로를 이용한다 들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일본의 소식이 끊긴지도 오래되었다.
바다를 건너기가 그만큼 어렵다.
아니, 지금까지는 불가능하다 알려져 있었다.
이놈, 백록검(白綠劍) 양범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분명 불가능했었다.
이제 불가능은 아니라는 사실이 막 밝혀졌지만…….
“그렇지요. 사람들의 수가 많은 만큼 저 혼자 건널 때보다 괴물이 훨씬 더 많이 모여들 겁니다.”
“잘 알고 있네.”
제주 탈출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하다. 최지수 식으로 말하면 가능성은 0.1퍼센트 미만.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많다.
평양연구소도 털어야 하고, 김영호가 구성준을 찾아내면 그놈 방문해야 하고. 또 그 뒤에는 구광성을 찾아 계룡문에 영입해야 하고. 사리원성도 계속 관리해야 하고. 계룡성도…….
“…육지에 도착해서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양범진의 진중한 목소리가 내 생각을 잘라냈다.
“가장 강한 이가 누구냐 물었을 때는 의견이 갈리더군요. 염화검제, 파천궁주, 계룡검룡…….”
놈의 곧은 시선이 똑바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의협심이 강한 이가 누구냐 물었을 때는 모두 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올 이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오래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었지.
그때 나는…….
-무림맹의 제갈표입니다. 맹주께서는 검황께서 멸마단에 합류해주시기를 간곡히 청하고 계시옵니다. 죄 없는 백성들이 마교의 지배하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검황께서 이들을 저버리지 않으시리라 믿고 달려왔습니다. 검황께서 지금껏 걸어오신 협의의 길, 그 길을….
무림맹(武林盟)의 맹주가 보내온 사자가 내 앞에서 깊숙이 허리를 접으며 간곡하게 말했다.
그리고, 설표의 비틀린 목소리가 그의 간절함을 싸늘하게 잘랐다.
-혀어업이? 사형이 너희를 도와주면 협객이고 너희를 안 도우면? 사파 찌끄레기냐?
-…질풍검께서는 말이 지나치시군요.
-지나아쳐어어?
-땅에는 국경이 있으나 사람에게는 국경이 없지요. 이 땅의 백성들과 저 땅의 백성이 다를 게 무엇입니까. 협의란 그런….
나는 결국 웃고 말았다.
설표의 목소리를 닮은 비틀린 웃음에 제갈표가 얼굴을 굳히며 말을 멈췄다.
입술 끝을 비스듬히 끌어올리며, 내가 놈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게 협의 찾는 놈들이 육 년 전에는 어째서 그리 가만히 있었을까.
붉은 두건을 두른 도적놈들이 내 나라의 양민을 학살하고 내 나라의 국토를 짓밟을 때는 뒷짐을 지고 구경하던 놈들이 협의에는 국경이 없다는 소리를 지껄이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나 역시 지금의 그들처럼 사람을 보냈었다.
내가 보낸 이들은 홀로 돌아왔다.
중원의 누구도 내 나라를 도우러 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때 결국 중원행을 택했다. 그리고,
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지더라도 또 같은 결정을 하겠지.
그것이 협(俠)이고, 그것이 의(義)이고, 그 길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니까.
-중원에 강자들이 그리도 많은데 꼭 걸음해야 하겠습니까? 사형께서 가신다 한들, 저들이 이 고마움을 기억하겠습니까?
글쎄.
고마움을 기억했을까.
가지 말라던 표는 나를 따라나서 만 리 타향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나 역시 오래지 않아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나와 표를 찾아 나선 소화가 남긴 기록에는 중원 무림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마교. 마교. 마교. 오직 마교에 대한 기록뿐.
표와 나를 잃은 후 소화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
그리 편안하지는 못했겠지.
불필요한 자책과 그리움으로 가슴을 앓았을 터.
하지만 만약 내가 그때 중원행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그 결정을 후회한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래된 기억이 스러진 귓가에 양범진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열기를 띈 목소리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모두들 계룡검룡이라는 이름을 말하더군요. 검룡님이야말로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의인이라고…….”
알아달라고 내린 결정들은 아니었다.
그저 그리할 수밖에 없으니 그리했을 뿐.
“검룡님. 제주를 도와주십시오… 제주의 도민들을…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놈의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뺨 위에서 빗물과 뒤섞였다.
좋은 놈이다.
김강산이라는 나쁜 각성자가 연약한 일반인인 나를 겁박한다는 질 낮은 상황극에 걸려드는 순진한 놈이기도 했다. 행협멸악 구약보세를 입에 달고 다니는 서은창과는 영혼의 단짝일지도.
거의 길드장 수준인 마력에 비해 싸움질하는 솜씨가 영 서툰 건 리태연과 비슷하다. 인간이 아닌, 괴물과 주로 상대한 각성자들의 특징이다.
제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기껏 도착한 육지를 떠나 위기의 섬으로 다시 목숨을 걸고 돌아가려는 놈.
할 일은 많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가득했고, 여유 있는 날은 드물고도 드물었다.
결국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 어떤 일을 할지, 무엇이 더 시급한지를 결정해야 한다.
‘오만 명이라.’
…몰랐다면 좋았겠지만, 어쩌겠냐고.
이미 알아버린 것을.
“뭐, 그래.”
“…예?”
“일단 가보자고.”
“진심…이십니까?”
놈이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젖은 땅에 이마를 처박은 양범진의 입술에서 억눌린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계룡검룡님, 감사, 합… 흐윽……!”
왜 벌써 감사를 해.
나 바다 건너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이번 일은 나도 진짜 자신 없다.
그 감사, 거절하고 싶은데 말이지.
“감사는 선불로 내는 거 아니라고. 일 끝나고 하라고.”
“그래도… 감사… 제 이야기를 믿어… 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흐규흐규…….”
이놈 이거 왜 이래. 사람 부담스럽게.
벌써 취소하고 싶어지는데.
***
“이게 청색초야?”
“네.”
양범진이 겹겹이 싸맨 지퍼백 속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건낸 것은 한 줌의 풀 쪼가리였다.
민들레 이파리처럼 뾰족하게 갈라진 풀은 청색이라기보다는 남색에 가까워 보였다.
“백록담 인근에 자생하는 풀이지요. 이걸 씹으면 해수독의 체내 침투를 방어할 수 있습니다.”
용케 바다를 건너왔다 싶었더니 이런 스페셜 아이템이 있었다. 수중전투를 위한 필수템이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삼매진화를 삼십 분, 한 시간 동안 돌려대며 해수독을 태워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한 줌의 청색초를 입 안에 털어 넣자, 태청단을 씹은 듯 화한 느낌이 잠시 입 안에 맴돌더니 기맥을 타고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이 정도 양이면 한 시간 정도 효능이 유지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괴물의 상처를 통해 괴독이 스며 나오면 다른 괴물들이 몰려드니까 최대한 상처를 덜 내고 잡는 것이 관건입니다. 또한 괴독이 해수독과 접촉하면 두 독이 융합하여 아주 강력해지므로….”
내가 오른손을 들자 놈의 잔소리가 멈췄다.
도와달라고 울고불고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걱정이 태산인 표정이다.
“시간 아까운데, 시작하자고.”
“…네.”
놈이 결연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바다를 향해 걸음을 뗐다.
두터운 빗줄기가 개펄에 찍힌 발자국을 금방 훑어냈다.
흔적만 남은 발자국을 따라 나는 느릿느릿 걸었다.
한 발 한 발 바다가 가까워졌다.
밀려든 바닷물이 발목을 적시고, 무릎을 덮고, 허리춤에서 일렁거렸다.
“깊습니다. 조심하세요.”
물속에서 빼꼼 머리를 내민 양범진이 뒤늦게 지껄였다.
…그런 건 미리 말해야지, 이 사칭범 새꺄.
내디딘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미끄러진 몸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 발이 습관적으로 연환퇴(連環腿)를 운용….
‘아니, 아니지. 공격이 아니라 수영을 해야 하는데.’
콰아아!!!
후회는 한 발 늦었고,
물기둥과 함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