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너무 예뻐서 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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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너무 예뻐서 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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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너무 예뻐서 탈
2023.01.02.
“연애는 해 봤나?”
프로필 영상을 자세히 들여다본 오디션 감독이 예리한 눈초리만큼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아……니요.”
뜨끔한 소연은 말끝을 길게 늘이며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 짝사랑은 해 봤……. 아니다, 이성과 손도 못 잡아 본 것 같은데. 맞나?”
엄소연은 말 그대로 모태솔로. 아빠 말고는 남자와 미미한 스킨십조차 있어 본 적이 없다. 젊은 감독인데도 사람을 꿰뚫는 솜씨가 아주 호호백발 도사 아닌가 말이야. 영화감독이 아니라 족집게 무당이 분명했다.
“…….”
발가벗겨진 기분에 휩싸인 소연의 낯빛이 붉은 장미처럼 새빨갛게 익은 건 오디션을 보러 이 방에 들어온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눈이 피로했을까. 금테안경을 신경질적으로 벗어버린 감독이 두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러 짚었다. 남자라기보단 미소년에 가까운 얼굴이지만 자아내는 분위기만큼은 까다롭고 지독하다는 소문 그대로 살벌 까칠 그 자체였다.
“대학생?”
“네.”
독사 못지않은 매서운 눈초리, 딱딱한 말투로 그가 묻자 곧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은 커다란 눈의 시선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고집스럽게 움직이는 탐스러운 입술과 여린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이 당황스러운 순간을 기필코 이겨내려는 듯 야무지기 그지없었다.
“3학년, 스물두 살입니다.”
“스물둘이라……. 어린 나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연기라는 게 경험이 있으면 확실히 도움은 되지. 특히 엄소연 씨처럼 발연기면 그런 노력도 절실하지 싶은데.”
“…….”
소연은 벙긋하려던 입술을 재빨리 말아 물었다.
연애 경험은 없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의 연기력 전부를 깎아내리는 게 내심 분하고 억울했다.
기본 중 기본인 체력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했고, 섬세한 심리 표현을 위해 온갖 서적과 씨름했다. 매일 다양한 작품의 캐릭터를 연구하고, 연습하는 건 기본이었다. 정말 하루 중에 잠자는 시간 빼고는 모든 시간을 연기를 위해서만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은 연기자가 되기 위해 무엇을 노력했는지를 묻는다면 얼마든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애’ 그 한 가지만큼은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는 소연은 꼼지락대는 제 손끝만 바라보아야 했다.
“배우가 되겠다는 의지. 그것만으로 어디까지 가능할 것 같아? <악녀도 운다> 이 영화에 필요한 배우는 어려도 인생의 달고 쓴맛 전부 다 아는 여자인데, 그건 숙지하고 왔나? 차려입은 콘셉트는 딱 반항하는 부잣집 딸인데. 이렇게 야한 옷, 화장 말고 자신이 어떤 이의 삶 속에 녹아들어야 하는지 알고는 왔냔 말이야!”
“…….”
아무렴 모르고 왔을까. 이날만 손꼽아 기다렸고, 오늘도 내가 얼마나 신경 써 준비해 왔는데.
할 말은 많았다. 하지만 소연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초장부터 주눅 든 탓이 아니었다. 열심히 해온 것과 별개로 자신의 연기력이 아직 큰소리칠 만큼 완벽하지 않다는 걸 스스로 알아서였다. 얼마쯤은 의욕만 갖고 덤빈 무모한 도전이었기에 별소릴 다 들어도 난 반박할 수 없는 거였다.
“딱 봐도 그쪽은 곱게 자란 공주님과로밖에 안 보여. 그리고 우린 오디션 한다고 무조건 달려드는 너 같은 애송이 때문에 죽을 맛이고.”
윤지완 감독은 신랄한 입담으로 연실 쪼아댔고, 소연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공주님과라니, 순간 울컥해 소리칠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나중에 떳떳하게 성장해서 후회하게 해주리라 다짐하면서.
“더 길게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니, 알아들었으면 그만 나가 봐!”
무려 아홉 시간에 걸쳐 쉬지 않고 오디션을 진행한 터라 윤지완 감독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단칼에 자르는 성난 목소리 역시 엄소연에 대한 고려나 가능성 따위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다음 사람 들어오라고 해.”
“네, 감독님.”
명령이 떨어지자 조감독이 방 앞에서 대기하는 스태프에게 사인을 보냈고, 곧이어 오디션에 참가한 다른 배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
감독의 시야에서 가차 없이 내쳐진 소연은 찍소리도 못하고 그곳을 나와야 했다.
정제 없는 비판과 대차게 까인 수치심, 거기에 맑고 큰 눈동자에 글썽글썽 맺힌 눈물은 덤이었다.
***
영화 오디션장에서 된통 깨진 소연은 무작정 걸었다.
아…… 너무 힘들다…….
하염없이 걷는 가느다란 발목은 곧 부러질 듯 휘청거렸고, 탈탈 털려버린 멘탈은 위치 감각은커녕 그녀의 정확한 시간 개념마저 저 멀리 사라지게 했다. 지금 디디고 있는 이 길이 강남 한복판 어디인지, 낮이었던 때가 어느새 밤이 된 것조차 전혀 인지하지 못할 만큼.
견고했던 인생관이 하루아침에 박살 난 소연의 사고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키워왔던 꿈이 배우였다.
진솔한 감정을 연기에 담아내는 사람 말이다.
캐나다에 계신 부모님은 배우의 꿈을 인정받고 싶으면 연기과로 가장 유명한 대학부터 가라고 말씀하셨다. 소연이 악바리같이 연기와 공부를 병행해 소위 최고라 일컫는 S대에 입학한 건 그 때문이었다.
대학생이 되기 전에는 입시 준비로 다른 것에 한눈팔 새는 조금도 없었다. 입학 후에는 학교 축제는커녕 그 좋은 캠퍼스를 여유롭게 거닐어 본 적도 없다. 그저 좋은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오로지 연기와 그에 필요한 것들에만 몰두했으니까.
미팅이며 MT 같은 것에 시큰둥했던 것도 느리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자신의 삶이 꽤 만족스러워서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모든 것이 어렵게만 느껴진 소연은 쓰나미처럼 밀려온 허무함에 영혼마저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학교, 연기연습, 오디션…….
그녀의 삶엔 이 세 가지가 전부였다. 누군가에게는 따분하고 가치 없는 인생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엄소연에게 있어선 단 하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었다.
누군 즐길 줄 몰라 이렇게 살았겠나. 누군 일탈을 몰라 다람쥐 쳇바퀴 안에 모든 걸 쏟아부었겠냐는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막말이 하루아침에 저를 아무것도 못 해본 공주님으로 전락시켜버린 동시에 부단히 노력하며 열정적으로 살아온 제 삶에 찬물을 끼얹었다.
소연은 빛나는 미래까지 한순간 너덜거려진 게 무척 속상했다.
참지만 말고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오늘 하루만이라도 너를 놔주는 거야. 한 치 앞도 모르는 세상사에 정답은 없으니까.
악마인지 천사인지 내 안의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음에서 메아리치는 속삭임이 꽤나 솔깃하다. 하지만 막상 다 내려놓으려니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망설이며 걷기만 하던 소연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래.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데, 뭐. 지금의 난 아무것도 아니잖아. 새하얀 도화지처럼. 또 알아? 내게 생각지도 못한 좋은 기운이 깃들지도.
소연은 어느새 엘스텔라 호텔로 들어서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강한 힘에 이끌리듯이.
***
특급호텔답게 화려한 외관과 로비의 눈 부신 불빛에 현혹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 춥기도 하거니와 지친 발이 뻐근한 통증을 호소하는 터. 마침 잘됐다고 생각한 소연은 내친김에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라운지 칵테일 바는 호텔 상층에 자리했다. 그곳으로 들어선 소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운치 있다고 해야 할까,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 시야에 제일 먼저 닿은 건 곳곳을 은은하게 밝히는 예쁜 조명들이었다.
칵테일로 혼탁한 마음을 달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여 들어온 것이지만, 소연은 괜스레 어깨가 좁혀졌다. 어른이 어른들만 드나드는 곳에 온 것이니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텐데도 처음이라는 생소함이 그녀를 모기보다 더 작은 존재로 만들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것으로 낯선 압박감을 희석한 소연은 다소 어색한 걸음을 안쪽으로 내디뎠다.
걱정과 달리 바에 들어선 소연의 존재감은 빛이 났다. 그 사실을 방증하듯 몇몇 사람들의 눈이 그녀를 흘긋거렸다. 오디션 때문에 평소 그녀답지 않게 한껏 치장한 차림새는 근사한 이곳과 딱 맞아떨어지게 어울렸다. 거기다 그녀 자체가 워낙 반짝거려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미모이기도 했으니까.
타원형 실내 분수대를 반쯤 끼고 돌아 창가 앞 4인용 테이블에 착석한 소연은 크림색 캐시미어 코트를 살며시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훔쳐보는 시선이 한층 많아진 건 타이트한 코랄색 미니 원피스 위로 여성스러운 실루엣이 고스란히 드러난 탓이었다. 그들의 시선을 의식했을까. 살짝 말려 올라간 스커트 끝자락을 얼른 잡아 내린 소연이 롱부츠로 감싸진 한쪽 다리를 짐짓 요염하게 꼬아 올렸다.
“무엇을 준비해드릴까요.”
다가온 웨이터가 친절한 어조로 묻자 소연은 커다란 눈이 느리게 깜빡이며 무언가를 떠올렸다. 영화 ‘우리의 밤’에서 여주가 술 마시는 장면을 일전에 연습한 적이 있다. 그걸 지금 써먹을 줄이야.
“전 레드베리 펀치가 좋은데, 있나요?”
짙은 화장이어도 어쩔 수 없이 앳된 얼굴이지만 소연은 최대한 성숙하고 능숙한 척 연기했다.
“물론입니다.”
“탄산수보다 보드카를 더 진하게요. 오늘은 제가 좀 취하고 싶거든요.”
소연은 여유를 부리듯 콧잔등을 찡긋하는 것마저 완벽히 해냈다.
“더 필요하신 건.”
웨이터가 씩 웃었다. 아무리 봐도 앳된 쪽에 가까운 아가씨가 섹시한 척하는 게 깜찍해 보여서였다.
“아, 감바스도 같이 부탁해요. 저녁 식사 때라 배가 살짝 고프네요.”
“네. 곧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정중한 몸짓으로 돌아선 웨이터를 바라보는 소연의 입꼬리가 예쁘게 말려 올라갔다.
마지막 마무리까지 역시 귀여웠으나 본인은 전혀 모르는 일. 소연은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실내를 유유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곳은 큰 별 작은 별,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처음엔 몰랐지만, 자세히 둘러보니 꽤 익숙한 연예인의 얼굴들이 눈에 쏙 들어왔다. 어디선가 보았음 직한 사람부터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아주 귀하신 톱스타까지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순간 못 들어올 곳을 왔나 싶었지만, 자신의 진입을 막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았나.
그러니, 뭐.
소연은 강남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통유리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도시의 불빛이 꽉 들어찬 그녀의 눈동자는 보통 사람보다 확연히 크고 색 또한 엷었다. 그 투명하고 깨끗한 눈망울 때문에 더 신비롭게 느껴진달까.
그런데 그녀의 말간 눈동자가 갑자기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까는 꾸물거리기만 하던 하늘이었는데 지금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목화솜처럼 제법 커다란 눈송이가 조명을 받아 더 하얬다. 올해 처음 보는 함박눈이었다.
와, 예쁘다…….
소연의 눈매가 반달처럼 접혔다.
어느새 주문한 칵테일과 감바스가 테이블에 놓였다.
눈이 내리는 밤과 어울리는 피아노 선율, 딸기향을 품은 알싸한 보드카가 주는 여유는 오디션에서 맛보았던 씁쓸한 기분을 삽시간에 상쇄시켜주는 듯했다.
근사한 분위기에 취한 소연의 입꼬리가 한참 춤을 추고 있을 때였다.
똑똑.
“오래 기다렸나.”
테이블을 두 번 두드린 누군가가 낮고도 매끄러운 목소리를 소연에게 던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어 올린 그 순간이었다. 모근이 쭈뼛 서며 눈이 크게 떠진 소연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
그러니까, 이 남자는……!
아주 잠깐 스캔한 거지만 세련된 향기와 눈부신 광채를 지닌 이 남자는 190은 족히 넘을 만큼 키가 매우 컸다. 현실감 제로인 소연은 눈앞에 있는 그를 당최 믿을 수 없었다.
“여기 오래 있었냐고.”
남자는 허락도 없이 소연의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아 또다시 천연덕스러운 말을 건넸다.
피식, 웃는 붉은 입술이 지나치게 매혹적이다. 그의 미친 카리스마에 일순 홀려버린 소연은 제대로 따져 묻지도 못한 채 입만 벙긋했다.
“네. 네?”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오, 오래는 아니고…… 한 15분쯤 된 것 같은…… 그런데 그건 왜…….”
남자의 물음에 떨리는 입술은 기계적인 대답만을 겨우 뱉어냈다. 그러나 그가 이어서 하는 얘기는 더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다행이네. 누가 수작 부리면 어쩌나 서둘러 왔거든. 넌 너무 예뻐서 탈이야.”
“……?”
예, 예쁘다니……. 내, 내가?
소연이 놀란 표정을 짓자 남자는 다부진 상체로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그만 볼 수 있게 교묘히.
그에게 가려진 소연은 남자의 품에 폭 파묻힌 모양새가 되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라는 걸 고려하고서라도 그의 가슴은 망망대해처럼 지나치게 넓었다.
쿵쿵쿵쿵쿵…….
소연은 전신이 팔딱팔딱 뛰었다.
지독할 만큼 강한 남자의 향기가 심장까지 압박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