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선택한 자의 몫
(2/51)
2화. 선택한 자의 몫
(2/51)
2화. 선택한 자의 몫
2023.01.06.
태서준은 원래 의대를 진학해, 의사로서의 과정을 차근차근 밟고 있었다.
외과 의사로서 생명을 다루는 미래와 가치는 있는 삶을 그렸었다.
그러나 인턴으로 근무하던 시절, 뇌사 상태로 누워 있는 환자의 산소호흡기를 제거하라는 교수의 지시를 어쩔 수 없이 따르며 서준이 느낀 건 사람의 생과 사를 어느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였다.
그 자격이 과연 의사에게 있을까.
아니, 없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부여한 신의 영역이고 사람의 오만이 생명의 존엄함 위에 군림하는 것과 진배없으니까.
꼬리에 꼬리를 문 고뇌 끝에 흰 가운을 벗고 대학병원을 등진 서준은 그렇게 배우라는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첫 데뷔작에서부터 신들린 연기력으로 온갖 상을 휩쓸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고, 우월한 피지컬로 여심을 강타하며 현재는 대한민국 명실공히 최고 배우로 자리 잡았다.
그런 태서준에겐 연인이 있다.
아니, 있었다.
데뷔작을 준비하며 무명에 가까웠던 시절, 영화 시사회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당시에도 꽤 잘나가는 여배우 중 한 명이었다.
최고 비주얼의 남자를 차지하고픈 욕심과 소유욕을 순수함으로 가장한 그녀는 서준에게 먼저 다가왔고, 그렇게 절절한 감정 없이 시나브로 가까워진 사이였다.
두 사람이 사귀었던 2년 동안 공개 연애를 하지 않은 건 연예인이라는 서로의 직업을 고려해 비밀연애를 하자는 그녀의 제안 때문이었다.
재벌 2세와 엮인 염문설이 종종 나돌 때 서준은 그녀에게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 대한 예의랄까. 순수해 보였던 첫인상, 그녀의 본모습이 처음의 그것과 다름없을 것이라 믿고 싶었으니까. 적어도 그녀의 바람피우는 현장을 그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한 달 전까지는.
서준이 제 아집과 맞닥뜨린 건 악천후로 촬영 일정이 하루 미뤄진 그날이었다.
발을 들인 현관에서부터 너저분하게 널린 옷가지를 본 서준의 표정은 차게 식었고, 방문 앞에 나뒹구는 남자와 여자의 속옷을 본 순간에는 너무도 어처구니없어 실소조차 지어지지 않았다.
문 안쪽 침실에서 흘러나오는 굵은 신음과 날카로운 교성, 그 소름 끼치는 짐승의 소리는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한 뼘가량 열린 문틈으로 서준이 목격했던 그 충격적이고도 더러운 광경에 비하면.
그동안 그녀가 보여주었던 연인으로서의 행동은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서준은 그녀의 소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부정했다. 그녀를 시기하는 자들의 입에서 비롯된 거짓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그녀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실망감조차 들지 않았다. 불시에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탓도 있지만, 믿어왔던 만큼 실망감 역시 더 커서였다.
더는 자신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본모습에 얼마쯤은 발목에 묶인 족쇄가 끊어진 듯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두 해 동안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는 존재였기에.
그날 서준은 무감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단호하게 그녀를 지워버렸다. 하지만 한편으론 가슴에 묵직한 돌덩어리를 얹은 듯 답답한 감정이 일었다.
서준은 감정의 깊이와는 별개로 그녀가 나름 특별했다. 의사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새롭게 선택한 길에서 처음 맺은 인연이었으니까.
하지만 간당간당 이어오던 그녀와의 관계도 이젠 끝이었다.
한 번 아니면 끝까지 아닌 거니까.
그런데 끝난 지 한 달이 되는 오늘 그녀가 호텔로 찾아왔다.
모던과 중후함이 공존하는 엘스텔라 특급호텔은 태서준의 친부 태 회장의 소유이고 서준의 두 형이 한국과 해외에 걸친 호텔 사업을 전반적으로 경영했다. 그러나 서준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뒷배경을 언급한 적이 없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 한 가지만 꼽자면, 자신의 자유로운 삶이 재벌 2세라는 틀에 포함되는 것 자체가 싫었으니까.
따라서 그녀 역시 그의 집안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서준은 그녀와 이별한 이후 엘스텔라 호텔에 줄곧 머무르고 있었다.
사귀던 당시 주로 자신의 집에서 데이트를 해왔고, 평소에도 일할 때 외에는 집에만 머무르는 그였다. 그러니 태서준이 어디에 있을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던 그녀는 그가 소속된 < CN 엔터테인먼트 > 대표를 무작정 찾아갔다.
하지만 구원후 대표는 원체 입이 무거워 별 소득이 없었고, 대신 회사 정문에서 운 좋게 맞딱뜨린 태서준의 로드매니저를 온갖 협박으로 다그쳐 끝내 그의 위치를 알아냈다.
그리하여 그녀는 엘스텔라 호텔 VIP층 로비에서 태서준을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예 모른는 사람처럼 그냥 지나치려 했고, 그녀는 서준의 팔을 끈질기게 붙잡고 그날 일을 해명했다.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하지만 한 번은 봐줄 수 있잖아! 죽으면 흙이 될 몸, 그깟 실수 한 번에 우리가 헤어지다니! 그게 말이 돼?”
그깟 실수.
그녀의 구차한 변명 중에 가장 거슬린 게 이 말이었다. 서준은 차가운 목소리에 약간의 실소를 섞어 정확히 말했다.
“실수? 사람이니 그럴 수야 있겠지. 하지만 같은 실수가 여러 번이면 그건 네 자체가 그런 거야. 내가 거짓말인 줄 몰라서 그냥 넘어갔을까.”
“거, 거짓말? 너, 넘어가다니?”
“약쟁이로 유명한 <리안모터스> 한승재 전무. 네가 놀아난 남자가 어디 그뿐이던가.”
“그, 그 사람은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야. 매일 내 자리를 노리는 신인들이 무섭게 치고 올라와. 이 바닥에서 여배우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거 서준 씨도 잘 알잖아!”
그녀를 믿은 게 실수라면 실수겠지만, 이제 서준은 그와 같은 실수를 반복할 일말의 여지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실오라기 한 줄, 그만큼의 연조차 싹둑 잘라내고 싶었다.
“내 온기가 채 식지도 않은 침대에 내가 빠져주길 바랐다는 듯 바로 다른 남자를 끌어들인 너. 그 상황을 즐기듯 되풀이한 너. 들키고도 실수라고 변명하며 내가 더 속아주길 바라는 너. 이러고도 내게 할 말이 더 있다면 정상적인 사람은 아닐 텐데.”
“서준 씨, 나 진짜 앞으로는 딴짓 안 할게. 정말 맹세한다니까. 그러니 한 번, 딱 한 번만…… 제발…….”
그녀의 뒤늦은 변명은 이 빠진 녹슨 칼처럼 무디기만 했다. 아니, 숨소리 빼고 다 거짓인 여자의 신뢰는 이미 땅에 떨어졌다.
“됐고. 심심하면 다른 남자한테나 가 봐. 난 약속이 있어서 너와 더는 못 놀아주니까.”
제 팔에서 그녀의 손을 간단히 털어낸 서준이 말하자 그녀는 대번 악다구니를 썼다.
“설마…… 새 여자가 생겼다는 뜻은 아니지? 하,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그동안 남들이 뭐라고 해도 서준 씨는 나를 끝까지 믿어 줬잖아! 그거 사랑이잖아!”
이미 깨져버린 관계는 무슨 짓을 해도 다시 이어 붙일 수 없는 것인데, 그녀는 조각난 사기그릇을 들고 터무니없이 악쓰며 우기고 있었다.
더 깨줘야 이 관계가 끝나려나.
서준은 냉정하게 말했다.
“착각하지 마. 네가 지겨워진 거야. 그래, 나 사귀는 여자 있어. 내가 무척 좋아하고 있지. 그러니 더는 미련 갖지 말고 네 갈 길이나 가.”
“거짓말! 태서준이 어떤 남자인데 한 달 만에 다른 여자를 만나? 사실 아니잖아!”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이보다 더한 말도 할 수 있었다.
피가 나더라도 끊어내야 할 인연이기에.
그녀를 뒤로한 서준은 곧장 칵테일 바를 찾았다. 이곳엔 애인인 척해줄 여자는 얼마든지 많았으니까.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할 정도로 홀 전체가 텅 빈 듯 한산했고, 그것이 변수라면 변수였다.
태서준이 엄소연에게 접근한 이유는 단순했다.
혼자여서.
칵테일 한 잔을 앞에 놓고 창밖만 바라보는 분위기가 누구와 약속이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와 비슷한 여자는 몇 명 더 있었다. 그런데도 오로지 엄소연만 눈에 확 박혀 들어온 것과 그녀에게 서슴없이 다가간 건 그도 설명할 수 없는 전개였다.
초면인 여자에게 예쁘다고 말한 건 그도 모르게 뱉어낸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목적에 맞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소 센 느낌의 여자라야 적합한데 가까이에서 보니 크고 부드러운 눈매부터 여리게 생긴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뭔들 어떨까.
이미 과거가 돼버린 여자에게 끝나도 벌써 끝난 관계라는 걸 명확히 깨닫게 해주면 끝 아닌가.
단지, 그뿐인 일이었다.
***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한데…….”
“제대로 봤다면?”
“누, 누구신데…….”
“나? 알 텐데.”
그, 그래 안다. 무려 태서준인데! 한국 사람이라면. 아니, 현 문명과 소통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모를 수 없다! 의사 출신 영화배우, 현재 최고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 중 단연코 톱클래스 스타니까!
그런데, 그 대단한 배우님이 내게 왜? 그런 분이 저와 일면식도 없으면서 왜 이러시는 건데요! 호, 혹시, 미치셨나요?
하지만 미친 건 자신의 심장인 듯했다.
스크린에서만 봤던 남자가 눈앞에, 심지어 꿀을 뚝뚝 흘리는 눈빛으로 저를 직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심장이 팔딱거리다 못해 덜컥 서버린 소연은 겁먹은. 아니, 금세 울 것 같은 눈망울로 환상적인 이목구비를 빠끔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를 보아도 이 순간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진다.
“좀 도와줍시다.”
고개를 숙인 채 소연의 귀에 가까이 입술을 가져간 서준은 작게 속삭였다.
“귀찮은 일이 생겼거든.”
코끝에 스민 남자의 매혹적인 향기는 한순간에 이성을 압박했고, 귓바퀴에 눅진하게 닿는 마성의 숨결은 독극물처럼 뇌로 침투해 전신을 마비시켰다. 무엇보다 실물로 접한 태서준의 강한 존재감이란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거였다.
서준은 자신의 사정을 간단히 설명했고 소연은 듣는 중에도 현기증이 계속 일었다.
“…….”
아, 통 모르겠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고 무슨 말인지.
불쑥 남자의 겨드랑이 틈으로 막힌 시야를 뚫은 소연은 몇 발치 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눈길이 이쪽을 향하고 있는 걸 보니 저 여자가 맞는 듯한데, 마스크와 선글라스에 얼굴이 가려져 있어 누군지는 몰라도 자아내는 분위기는 분명 연예인이었다.
그러니까, 귀찮아 따돌리고 싶은 사람이 저 여자란 말이지?
남의 치정 놀음에 호기심이 발동하는 건 또 뭔지.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견적이 나왔다.
나왔다 하면 관객 천만은 우습지도 않게 훌쩍 넘기는 흥행보증수표 태서준. 그의 크고 탄탄한 체격은 액션에 최적화되어 있고, 우직한 몸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완벽한 마스크는 여자 남자 배우를 막론하고 가장 아름다웠다.
여심 강탈자. 이런 그에게 혹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스크린을 들락거리는 여배우라면 단 한 번이라도 태서준과 같이 카메라 앞에 서 보는 게 로망일 거다. 그건 소연도 마찬가지지만 끽해야 주, 조연의 주변 인물역이 전부인 제게 가당키나 한 남자인가.
그래서였다.
급한 건 그인데, 시간에 쫓기는 건 그녀였다.
소연은 1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자신과 힘겹게 타협했다.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것이고, 현실에서나마 이 남자와 연기 호흡을 맞춰보는 게 어딘가. 횡재인지도 모른다. 아니, 행운이 확실하다.
소연은 선심에 사심을 듬뿍 넣어 물었다.
“도와드리면……?”
동글동글 선한 눈매가 무척이나 진지했다. 거기에 후각에 솔솔 감기는 베이비파우더 향 때문이었을까. 예쁜데 귀엽기까지 한 소연의 갸름한 얼굴을 내려다보는 서준의 짙은 입매가 살긋 길어졌다.
“하나 해드리지. 그게 뭐든.”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이자 소연은 긴장된 숨을 코로 뭉근히 내뿜었다.
뭐든……이라고? 내가 뭘 바랄 줄 알고!
“진짜요?”
“그렇습니다.”
“무리하시는 거 아녜요?”
“무리한 부탁을 했으니까.”
무엇이든 가능한 태서준이 대단한 건지, 저 여자를 떼어내는 게 그만큼 절박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이 남자의 사정은 뇌가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생각해도 모를 것이지만, 소연은 덥석 받아들였다.
부탁이며 제안인 딜을.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를 태서준의 유혹을.
“좋아요. 도울게요! 제가 뭘 하면 되죠?”
좀 더 그녀 쪽으로 바싹 몸을 기울인 서준은 초콜릿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애인합시다. 오늘만.”
내가 홀린 걸까, 미친 걸까.
후폭풍은 오롯이 선택한 자의 몫.
그것까지 받아들인 소연은 그의 뺨에 과감하게 입술을 붙였다. 그리고 작고 도톰한 입술은 쪽 소리를 내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이러면 되는 거죠?”
열어 보지 않은 문을 처음 여는 그녀의 눈빛이 무척이나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