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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설렜던 만큼 (4/51)


4화. 설렜던 만큼
2023.01.13.


한 잔, 두 잔 와인을 홀짝이는 사이 소연과 서준은 꽤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웬만한 강단으론 버티기 힘든 일을 하려고 하네, 엄소연 씨는. 배우라는 직업이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


‘안 힘든 일이 어딨겠어요. 의지로 이겨내야죠. 모르는 길이라도 뚜렷한 목표가 있다면 가야 하는 거잖아요. 제일 나은 선택이 내 발등을 찍더라도, 후회하더라도.’

 
이 조그만 여자는 의외로 당찼다.

그 사실이 서준을 긴 침묵에 잠기게 했다. 끌리는 제 감정도 믿지 못하는 자신이 이제 소녀티를 갓 벗은 이 여자에게 무슨 짓을 하는가 싶어서.

크리스털 조명 빛이 조각 같은 얼굴에 짙은 음영을 만들었다. 그 위로 피식, 하는 미소가 내려앉았다.

자조하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보는 소연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제 안에 알코올이 쌓일수록 소연의 경계심은 점차 느슨해졌고, 존대에 가끔 섞는 반말이, 꾸준히 들리는 낮고도 매끄러운 목소리가 저를 자꾸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연애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남자와 단둘이 있으면 이렇게 마음이 붕 뜨고 말랑말랑 이상해지나? 아니면 지나치게 잘생긴 남자라서 흔들리는 걸까?

복잡한 생각이 꼬인 머릿속이 뜨끈했다.

오후 10시 30분.

벽시계를 확인하고 테이블 한쪽으로 유리잔을 치운 서준은 식탁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만 술자리를 끝내려는 거였다.


“이제 말해봐요. 바라는 게 뭔지.”

뜻밖의 만남. 그 시작은 부탁이었고 그 끝은 대가였다. 그리고 그는 그 마지막을 말하는 거였다. 장대같이 서 있는 서준의 턱 밑으로 가까이 다가선 소연이 그를 빠듯이 올려다보았다.

나를 이토록 설레게 만드는 남자도 없지 않았나. 연애는 몰라도 ‘사랑’ 그 비슷한 감정이라도 내게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후회되더라도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앞으로 이처럼 강하게 끌리는 남자를 또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 윤 감독인지 뭔지 하는 그 사람의 신랄한 목소리가 또 들려오는 것 같아 소연은 속이 탔다.

이미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떨리는 심장에 영혼을 빼앗겨버린 소연의 생각은 점점 위험한 방향으로 흘렀다.

내일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가 보이지 않는다면 지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 조급한 마음이 소연을 자꾸 충동질했다. 어쩌면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에 배신당한 서준에게도 사람의 따스한 온기가 위로가 될지도 몰랐다.


“아까 분명 뭐든, 이라고 했죠?”

“그것보다 후하게 쳐줄 수도 있습니다만.”

첫 키스로 갓 깨어난 스물두 살의 본능은 그녀 자신조차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인심 좋은 서준의 대답에 용기를 얻은 소연은 끝내 말해버렸다.


“안아 봐도 될까요? 제가…… 태서준 씨를.”

“…….”

이미 키스까지 한 사이에, 그냥 포옹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을까.

찰랑거리며 반짝이는 눈빛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 알 것도 같은 서준은 피식, 하며 실소를 머금었다.


“사람 쉽게 믿으면 안 된다는 말, 못 들어봤습니까.”

어차피 소연은 서준과의 만남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까지 생각하고 말한 거라면요.”

“…….”

서준의 심장이 사납게 뛰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크게 한 번 진동한 건 의외의 대꾸에 이성이 잠깐 흐트러진 거였다. 그러나 그의 가라앉는 눈빛은 소름 끼칠 만큼 고요하고 완벽히 아름다웠다.


 
눈앞의 먹이를 당장 삼키는 거야 일도 아니지만…….

커다란 손으로 작은 얼굴의 턱을 감싸듯이 쥔 서준은 엄지손가락을 도톰한 입술에 대어 보았다.

살성이 여린 여자였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끝에 금세 열꽃으로 물든 붉은 입술이 갓 피어난 꽃망울처럼 톡 벌어졌다.

살갗에 달라붙은 손길이 뜨거워서인지, 입술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놀라서인지, 소연의 어깨가 흠칫 떨리며 좁혀졌다.

맹수의 사나운 이빨에 물린 어린 짐승의 심정이 이러할까. 한순간도 여유와 우아함을 놓지 않는 남자에게 심장을 관통당한 소연은 꼼짝도 못 한 채 길고 촘촘한 속눈썹을 잘게 파들거릴 뿐이었다.

얼마 후 그의 손길이 제 얼굴에서 멀어지자 소연은 야트막한 안도의 숨을 잇새로 내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자연스럽게 입에 무는 서준을 본 순간, 당혹감은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아, 아니……!”

그걸 왜……!

순간 당황한 소연은 젠틀하기로 유명한 태서준이 더는 신사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임에도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는 그에게 미친 듯이 빠져드는 자신이 더 문제였다.


“거봐. 손끝 하나로도 이렇게나 겁먹으면서 나랑 뭘 어쩌려고.”

“…….”

표정을 부드럽게 바꾼 서준은 아무 소리도 못 내는 소연의 머리를 한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나니까 안 보고 안 들은 척해 준 거지, 말과 행동은 한번 밖으로 나오면 주워 담을 수 없는 겁니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소연의 키에 맞게 허리를 굽혀 조언하는 선한 미소는 누가 보아도 날개 달린 천사였다.


“허……!”

날 놀린 거였어?

이제야 뭐가 뭔지 알 것 같은 소연이 서준을 향해 커다란 눈매를 치떴다. 순해 보이지만 그녀도 한끝 성질은 있었다. 자그마한 손이 서준의 멱살을 야무지게 꽉 붙잡았다.


“이건 뭘까…….”

잠깐 주춤했으나 당황과 거리가 먼 서준의 음성은 여지없이 매끄러웠다.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는 건가요? 겁주고 홀리고 내 입술에 이상한 짓도 했으면서. 그래놓고 이제 와 얌전히 있어라?”

소연은 말하며 그의 셔츠를 꼬깃꼬깃 구겨 바짝 움켜쥐었다.


“잘 아네. 더 할 말 있습니까?”

서준은 그녀가 하는 대로 가만있어 주었다. 강자로서 따지고 드는 그녀가 무척 흥미로웠으니까.


“나도 할래요. 엘리베이터에서 그쪽이 했던, 그거!”

“…….”

서준은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세웠다. 고작 ‘키스’라는 단어도 부끄러워 ‘그거’라고 돌려 말하는 주제에 뭘 하겠나 싶은 거였다.


“꼼짝 마요, 저도 그럴 권리 있다고요! 뭐든 들어준다는 말, 벌써 잊으신 건 아니죠?”

설렘으로 시작한 유혹에 이제는 오기가 더해졌다. 소연은 저도 여자라는 걸 확실히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높은 곳에 있었다. 힘껏 발돋움한 그녀의 입술이 정확히 서준의 입술에 닿았다.

소연은 눈을 꽉 감고 기다렸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 그에게 내쳐질 일만 남았으니까.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먼저 입맞춤한 건 그녀인데 깜짝 놀란 것도 그녀였다.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제 입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뒤로 넘어갈 듯한 제 등을 어느 틈에 긴 팔로 안고 있었다.


“……?”

이 반전은 뭘까.

살그머니 눈을 뜬 소연은 까만 눈동자를 마주했다. 저를 담은 그의 눈빛이 그윽하게 느껴지는 건 착각이려나? 전혀 예상 못 한 일이라 뒤로 무른 그녀의 고개가 설핏 갸웃거려졌다.


“꼼짝 말라며.”

“제, 제가 그랬나요?”

기억 안 난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면서도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나를 아직도 안고 싶습니까.”

“…….”

밑바닥 생각까지 전부 내비치는 커다란 눈이 느리게 감기고 떠졌다.

참았던 만큼 욕망의 불씨가 크게 인 서준은 소연을 잡아당겨 거칠게 몰아붙였다. 입술이 깊이 맞물리며 작고 동그란 뒤통수를 움켜쥔 손에 강한 힘이 실렸다.

쿵쿵쿵…….

두 사람의 심장이 사정없이 뛰었다.

지독한 설렘이었다.

***

어둠이 짙은 새벽.

열띤 시간이 물러가고 정적이 찾아왔다.

침대 위엔 긴 머리칼을 쓰다듬는 서준이 있었다. 그의 다정한 손길이 너무 좋은 탓이었을까. 소연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뭉클했다.


“……화낼 줄 알았어요.”

“내가 왜.”

서준은 희미하게 눈썹을 구겼다. 처음인 줄 알았으면 속도감 있게 밀어붙이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냥 그럴 것 같았어요.”

“그래도 말은 했어야지.”

“몰라요.”

새초롬히 토라진 말투였지만 그 끝은 예쁜 미소였다.


“고집 있네. 그런 소리 자주 듣지 않습니까?”

“가끔?”

“어떤 남자인지는 몰라도 속 좀 타겠네.”

서준은 미처 몰랐다.

별 의미 없이 나온 소리가 훗날 자신이 수없이 곱씹게 될 말이 될 줄은.

그에게 한참 안겨 있는 게 어색한 소연이 발을 꼼지락거리자 서준은 그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 발로 어떻게 걸어 다니는 겁니까.”

“잘 다니는 거 봤으면서.”

작은 발도 그렇지만 유난히 가는 발목은 조금만 힘주어도 부러질 것 같았다. 서준은 재빠르게 상체를 움직여 그곳에 입을 맞췄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히힛, 하지 마요!”

간지러운 걸 잘 못 참는 소연은 이불 속으로 쏙 숨어버렸다. 팔다리는 물론이고 부끄러워 발갛게 익은 얼굴까지 전부 다.

그런데도 서준이 장난을 멈추지 않자 얼마 못 가 이불 밖으로 얼굴만 삐죽 내민 그녀는 무섭게 보이도록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겁나기는커녕 귀엽기만 한 그 입술로 덤벼든 서준은 이 밤을 다 쓸 모양이었다.


 
먼동이 터올 무렵이었다.

이곳에 들어설 때처럼 겉옷까지 말끔히 챙겨입은 소연은 창가에 섰다.

밖은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제 눈만 보면 지난 밤이 떠오를 것만 같은 소연은 이만 침대로 다가가 서준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잠든 남자의 얼굴은 성인인데도 소년처럼 어려 보이고 예뻤다. 밤새도록 저를 놔주지 않던 그 남자인가 싶을 정도로 빽빽한 속눈썹도 얌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어젯밤 일이 차례차례 떠오른 소연의 귀가 새빨개졌다. 잠시지만 태서준의 여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게 몹시 벅차기도 하고, 아무도 모르는 제 모습을 그에게 보인 게 엄청 부끄러웠으니까.

낯선 하룻밤이었다.

이제껏 가 본 바도,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맞는 아침도 생소했지만 좋았다. 난생처음 느껴본 어젯밤의 통증조차 설렘이었을 정도로.

실내 공기가 다소 선뜻했다. 혹여 감기라도 걸릴까, 그에게 이불을 조심조심 덮어준 소연은 아주 작게 읊조렸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래요. 지금은 힘들어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잊히지 않겠어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좋은 추억으로 오래 남았으면 해요. 당신도 나도.”

첫 남자였다.

그러나 단 하룻밤으로 잊어야 할 사람.

그러므로 마지막 인사였다.

소연은 잰걸음으로 룸을 나왔다. 밤새 수북이 쌓인 눈을 한쪽으로 치워놓은 호텔 정문 앞엔 택시가 줄지어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손님이 차에 올라타자 택시 기사가 목적지를 물었다.


“도곡동이요.”

소연은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지독히도 설렜던 만큼, 지독한 그리움으로 살 거란 걸 벌써 아는 것처럼.

***

서준이 잠에서 깨어난 건 소연이 엘스텔라 호텔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쯤이었다.

오랜만에 단잠을 취해서인지 몸도 개운하고 기분도 최고였다. 그런데 이 허전한 느낌은 뭔가. 썰렁하기까지 했다. 분명 잠들 때까지 옆구리가 따뜻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서준은 옆자리를 바라봄과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같이 잠들었으니 지금도 제 옆에 있어야 마땅할 사람이 없다. 잠깐 침대를 비웠나 싶어 그녀가 누웠던 자리를 더듬어 보았으나 미약한 온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가운을 걸칠 새도 없었다. 잠결에 들은 어여쁜 목소리가 꿈이 아니었다는 걸 비로소 실감한 서준은 유려한 맨몸으로 침실을 뛰쳐나와 객실 전체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흔적이라곤 침대 협탁 위에 얌전히 놓인 메모지 한 장이 전부였다.

「언제 어디서든 행복하세요. 당신의 슬픔과 아픔은 제가 나눠 가져갈게요. 저도 행복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태서준 씨…… 안녕.」

동글동글한 손글씨로 예쁘게 써 내려간 내용은 다시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실마리도 없이 아주 간단했다. 마치, 어젯밤 일들을 모조리 부인하듯이 말이다.

그녀에게 무엇을 더 바란다거나 어떻게 할 생각은 딱히 없었다.

다만, 그녀와 같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좋아하는 음식은 뭔지, 어떤 취미를 가졌는지, 휴일이나 시간이 날 땐 주로 무엇을 하는지, 어디 사는지, 가끔 연락은 해도 되는지. 함께 식사하고 그 소소한 것들을 이야기하며 그녀와 좀 더 친밀해지고 싶었다.

수줍어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첫사랑에 설레하는 순수한 남자가 되어보고도 싶었다.

내가 여자에게 흔들린 적이, 이토록 안달한 적이 있던가. 내가 시답지 않은 욕망 따위에 지배당한 적이 있느냔 말이다. 아니, 단 한 번도 없다.

한때 제 곁에 두었던 연인에게조차 느껴 본 적 없는 이 감정의 정체를 뭐라고 명명할 순 없다. 하지만 인내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에도 그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런데 이게 뭔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마구 흔들더니. 천사 같은 미소로 사람 애간장을 다 녹이더니. 그래놓고 말도 없이 사라져? 쥐락펴락하는 네 농간에 내가 놀아난 거냐고!

난생처음 먹힌 것도 같고, 대차게 까여 버려진 것도 같은 서준의 기분은 말도 못 하게 불쾌했다.


“엄소연, 넌 대체……!”

앞머리를 시니컬하게 흩트린 서준은 손에 든 종이를 바스락 구겨버렸다.

그것을 휴지통에 처박는 서준의 표정은 더없이 차갑고 오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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