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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밤
2023.01.23.


병실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음에도 침상 위의 남자는 앉은 자세 그대로 입술을 딱 붙인 채 아래로 향한 눈을 들지 않았다.

타마욘 소굴에서 죽을 날만 기다렸던 것처럼 구출되고도 그 마음이 바뀌지 않아서였다.


“…….”

“…….”

나무 재질 의자에 한쪽 군홧발을 올린 서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려한 몸을 조금 굽혀 나직한 시선을 침상 쪽으로 던질 뿐이었다.

외국에서 혼자 생활하며 나름 괜찮은 사업가로 성장한 건 생부의 외면에 독기를 품어서였고, 테러 일당이 보란 듯이 인질에게 총부리를 겨눈 건 천문학적인 거액을 교환조건으로 내건 타마욘 우두머리의 요구를 그 아비란 작자가 일언지하에 거절해서였다.

해서 생긴 가슴 부위의 총상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외국으로. 납치당해선 외면으로. 이렇게 친부에게 두 번 버려졌으니 총알에 심장이 뜯긴 것보다 마음이 더 온전치 못한 거야 당연할 터. 그 심적 괴로움에 자신의 존재마저 부인하고 싶을 거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리안그룹> 한 회장의 아들은 하나였다. 그러므로 이 남자는 숨겨진 서자가 분명했다.

이는 본관에서 의무 병동으로 건너올 때 마중 나온 의무병에게서 서준이 들은 얘기였다.

들은 바 대로라 서준은 서두르지 않았다. 담담한 태도로 현실을 바로 일러 줄 뿐이었다.


“우리 특전사 팀이 그 위험한 곳에 들어가 구출해낸 인원이 그쪽까지 세 명인데, 그들 중 죽음을 바라는 한 사람 때문에 목숨 건 보람이 반 토막 났으니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

“그 곤두박질친 사기로 우리 군이 또 이 같은 일을 하고 싶을까?”

입 아프도록 말해 줬는데도 이놈은 당최 들어먹질 않는다. 상처가 곪아 지독하게 아픈 거야 당연할 테고,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주제에.

허리춤에서 꺼내든 그 묵직한 것을 손가락으로 빙글 돌린 서준이 차갑게 조소했다. 그러자 아무 반응도 없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 서준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가 눈을 크게 뜬 건 유명인이 눈앞에 있어 놀란 것보다 군의관이라는 작자가 이래도 되냐는, 지금 그 총으로 나를 쏠 거냐는 물음이고 항의였다. 그러나 그의 입술은 더 꽉 다물렸다.

이미 가슴 밑에 난 구멍 때문이라도 총이 어떤 건지 잘 알 텐데, 더 해줘야 정신이 번쩍 나려나.

서준이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딸깍, 하는 소리를 냈다. 권총의 슬라이드가 당겨져 해머가 뒤로 밀리는 쇳소리에 긴장감이 꽉 차오른 그의 목울대가 흠칫 떨렸다.


“다, 당신, 뭐야!”

그가 끝내 말문을 열었다.


“타락한 의사 정도라고 해 두지.”

탄알이 약실에 장전됐으니 이제는 방아쇠를 조금만 건드려도 총은 발사될 터. 그는 각오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서준은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

그러나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침상 위의 남자는 경악한 얼굴로 속눈썹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소원대로 고통 없이 보내주려고 했는데. 미안.”

다시 슬라이드를 당긴 서준은 이번엔 정말이라는 듯 긴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었다.

이 한 발에 목숨이 달려 있었다. 이미 한 번의 끔찍한 기분을 맛본 그는 돌연 마음을 바꾸었다.


“자, 잠깐만…….”

사는 것을 택한 남자는 좀 더 명확하게 말했다.


“살려…… 주십시오.”

“뭐라는 건지 잘. 다시.”

“살고 싶습니다!”

그가 연거푸 대답하자 야트막하게 미소 지은 서준이 총을 거둬들였다.


“그쪽이 일찍 가서 좋아할 사람은 따로 있지 싶은데, 복수하십시오. 살아서 더 잘사는 걸 보여 줘도 좋겠고. 그 사람들을 갈아 마셔도 좋고. 악착같이 살아서 할 거 다 하고 원 없이 천천히 죽어도 나쁠 건 없을 겁니다.”

서준이 말하는 동안 남자는 어금니를 짓씹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윽…….”

총 한 자루가. 아니, 제 앞에 있는 군의장교가 일깨워주어서였다. 죽음으로 원망하는 것보다 온몸이 깨부숴지더라도 절망을 안겨준 장본인과 맞서는 게 훨씬 더 후련한 일이라는 걸 말이다.


“박 중위.”

“네. 대위님!”

부름을 받은 군의관이 서준에게 다가서며 대답했다.


“이제 얌전히 있을 것 같으니 치료해드려. 또 거부하면 내게 곧장 알리고. 그땐 실탄을 꼭 장전해 오지. 그럼, 수고!”

픽, 웃으며 애초에 빈 총이라는 것을 알린 서준은 들어올 때처럼 견고한 표정으로 그곳을 나섰다.


 

***

의무 병동에서 나온 서준이 본관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쾅!

엄청난 폭발음이 고막을 찢었다.


“컥!”

“!”

갑작스러운 폭격으로 앞서가던 의무병이 흙바닥으로 곤두박질치듯 맥없이 쓰러졌다. 서준의 군복이 검붉게 물든 건 순식간이었다. 난데없이 날아든 포탄 파편에 맞은 그 병사의 피였다.

애애애애앵…….

공습경보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쾅! 콰쾅!

그 순간 전투기에서 또다시 떨어진 포탄이 부대에서 제일 큰 본관 건물을 참혹하게 부서뜨리고 그 주위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었다.

의무 병동으로 오지 않았거나 조금 빨리 집무실로 돌아갔다면 태서준은 본관 안에서 즉사했을 상황이었다. 이생과 저승의 간격이 이토록 얄팍했다.

맥을 짚을 필요도 없이 숨을 거둔 의무병을 한 번 더 살핀 서준은 숙소 건물에서 신속히 빠져나온 군인들과 이 급박한 위기를 일사불란하게 대처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국군 주둔지인 이곳은 돌무더기 산으로 둘러싸여 최적의 요새라 할만했다. 따라서 고작 두 대의 전투기로 이곳을 초토화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오늘 낮, 인질을 구출해 온 셀아르에서 날아온 보복성 기습공격이 확실했다. 그런데 중요한 협상을 바로 코앞에 둔, 내일이면 평화를 논할 그들이 왜 전에 없던 미친 도발을 해오는가. 이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여전히 포탄이 떨어지고 있지만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은 서준은 작전실이 있는 지하 벙커로 재빠르게 걸었다. 깨진 벽돌과 온갖 파편 위를 성큼성큼 밟으며.

그러나 또다시 날아든 포탄이 그의 앞길을 막았다.

쿠아앙!

그 순간 몸이 튕긴 서준은 상당한 충격으로 걷던 길 위에 자신이 쓰러져 있다는 걸 뒤늦게 인지했다.

다시 일어서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땅바닥에 세게 부딪힌 머리와 몸에서 번진 피가 흙을 흥건히 적시는 동시에 서준은 정신마저 멍해졌다.

하지만 어두운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빛이 그 눈 속 깊이 쏟아져 내리자 서준은 무너져가는 의식을 잠시 늦출 수 있었다.

땅은 지옥인데 하늘은 저리 반짝거려도 되는 걸까. 생에 마지막일 수도 있는 이 순간에 깨끗한 눈동자여서 더 예뻐 보였던 그녀가 생각나는 건 정말 웃긴 일이었다.

그녀와 하루뿐이었던 그 겨울밤이 새삼 그립다면 내가 정말 미친 거겠지?

생각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삐, 하는 이명이 들리며 머릿속은 그녀의 얼굴만 뱅글뱅글 맴돌았다.


“큭…….”

서준은 피식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점점 흐릿해져 가는 시야에 겹쳐 보이는 건 밤하늘에 보석 가루처럼 뿌려진 은하수와 땅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이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서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더는 어떠한 표정도 지어지지 않는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밤이었다.


 

***

그런 것이 있다.

예전에도 어려웠지만, 지금은 더더욱 어려운 것. 모르면 모를까 알아서 더 못하는 그것. 사고의 여파가 너무 커 도무지 엄두조차 내기 힘든 그것이 바로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카메라 앞에 서는 거였다.

그런데, 그 두려운 걸 기어코 해냈으니 어찌 안 기쁠 수가 있을까.

조금 긴장하긴 했으나 카메라와 당당히 맞선 커다란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욱 반짝거리는 건 그래서였다.


“아주 좋아! 소연 씨는 그 자세로 조금 더 있어 봅시다!”

화면에 잡힌 소연의 모습은 여신이 따로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 때문에 감탄사를 연발하는 촬영감독의 표정이 흥분이 가득했다.


“자, 줌 샷 들어갑니다!”

감독의 말이 떨어지자 번쩍하며 수십 개의 조명이 일제히 켜졌다. 그리고 그 환한 빛은 신비스러운 뒤태로 고스란히 고였다.

엄소연의 키는 하이힐 높이를 더하면 175였다. 비록 런웨이를 걷는 모델처럼 크진 않지만, 전신의 환상적인 비율과 탄력적인 굴곡은 그에 못지않았다.

작은 얼굴에 담긴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또한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빚은 도자기 인형 같았다.

얼마 전 갑작스러운 사고에서 얼굴을 다치지 않은 게 천운이었다.

지난해 중순, 6개월 전의 일었다.

그때 발생한 끔찍한 사고의 흔적은 8센티 정도의 긴 흉터로 소연의 뒤통수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신의 유혹>이라는 영화에서 조연역을 어렵사리 따낸 소연은 그 영화를 촬영하는 첫날 세트장 일부가 무너져내려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철골 구조물이 천장에서 떨어지며 연기에 몰입하는 소연을 덮친 거였다.

하지만 소연이 더 뼈아파 했던 건 이 바닥의 냉혹한 섭리였다. 자신의 배역이 다른 이에게 넘어갔다. 심지어 카메라 울렁증까지 생겨버린 소연은 수개월 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 공백기를 깨고 활동을 재개하는 만큼 소연의 짐짓 앙다문 입술은 퍽 야무졌다. 비록 CF지만, 이번 기회는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벼랑 끝 집념이 만든 일이니 정말 잘 해내고 싶었다.


“서브 모델이 꽤 예쁜데? 신인 연기자인가?”

“쟤는 엄소연이라고, 정화 언니가 작년에 주연한 영화에서 조연으로 발탁됐었어. 그런데 사고가 있었지, 뭐야.”

“사고?”

촬영장 구석에서 잡담을 나누는 두 여자는 지금 촬영 중인 CF의 메인 모델이자 현재 최정상 여배우라 일컬어지는 유정화의 매니저와 코디였다.


“그래, 그 사고로 혼자만 다친 데다가 조연역은 바로 새 배우로 교체됐어. 연기력이랑 학벌은 충분한데 운도 참 안 따라 주는 애지. 아마 그 일 이후로 이 CF가 첫 촬영일 거야.”

“학벌?”

“어. S대 출신이거든. 거긴 연기과라도 공부 잘해야 가는 곳이잖아.”

신입이라 연예계에서 돌고 도는 소문을 알 리 없는 코디가 눈을 씀벅거리며 궁금함을 계속 내비치자 매니저로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성진아는 유정화가 시킨 일도 까맣게 잊은 채 아는 사실을 낱낱이 이야기했다.


“얼마 전까지 캐나다에 있었다는데, 다시 돌아와서도 하는 일마다 신통치 않았나 봐. 그나마 이번에 계약한 소속사가 그 유명한 CN이라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하여튼, 심히 부럽다. 나이가 스물여섯이면 아직 늦은 것도 아니고. 학교가 거기면, 예쁜 외모에 좋은 머리는 타고난 거잖아.”

“좀 그렇긴 하지?”

지이잉…….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 잡담을 이어가던 성진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이 종이처럼 구겨졌다.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구는 유정화의 꾸중에 주눅 든 거였다.

언제 입방아를 찧었냐는 듯 두 여자는 부랴부랴 대기실로 달려가는 그 순간 감독의 외침이 촬영장 실내를 크게 울렸다.


“컷!”

오랜만의 촬영을 무사히 마친 소연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옮겨 카메라 뒤로 이동했다.


“잘했어!”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쌩 달려온 도순이 고생했다며 소연의 등을 토닥거렸다.


“나 괜찮았지?”

“걱정 마셔. 너무 예뻤으니까. 거봐, 하면 되잖아!”

“하…….”

안도의 한숨과 만난 소연의 입술엔 흐릿하게나마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가만 보니 시선부터 어쩔 줄 몰라 하는 도순의 태도가 왠지 심상치 않다. 소연은 그 연유를 물었다.


“너 왜 그래? 눈꼬리가 밑으로 처진 게 딱 울게 생겼잖아.”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은 너부터 챙겨야지.”

“빨리 말해. 무슨 일인데?”

“그게 글쎄…… 방금 기사 뜬 걸 봤는데…… ”

소연이 다그치자 도순은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우리 서준이 오빠가…… 전역할 날도 며칠 안 남았는데, 파병부대에서 큰 폭격이 있었…….”

먹구름 잔뜩 낀 얼굴에서 나오는 얘기가 결코 희소식일 리는 없겠지만, 그의 일임을 직감한 소연은 도순을 다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서.”

“죽었대! 으헝헝…….”

“……!”

그, 그럴 리가 없다!

하늘이. 아니, 세상의 모든 신이, 내게 정말 이럴 순 없다!

모든 사고가 일순 멈춰버린 소연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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