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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신의 선물 (8/51)


8화. 신의 선물
2023.01.27.


함박눈이 내리던 그 밤, 아름다운 남자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신의 선물이거나 재앙일 수도 있는 그 판도라의 문을 말이다.

그 후 갑자기 찾아온 시련.

그 안에서 발견한 희망은 진귀한 보석보다 더 소중한 것이라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가슴 깊이 품어버렸다.

그러나 가진 것을 지키려면 그만한 책임과 희생이 뒤따르는 법. 그것마저 기꺼이 껴안은 탓인지 꾸준히 저를 찾는 온갖 불운과 팍팍한 현실에 참 많이도 시달려야 했다.

그 무거운 시간을 인내로 삼키는 동안에도 기다렸다. 태서준이 어서 돌아오길. 어디서라도 빛날 그를 먼빛으로나마 볼 수 있는 그 날이 하루빨리 다가오기를.

비록 하룻밤이지만, 이미 그는 첫사랑보다 더 큰 의미가 되어버렸으니까.

엄소연이 4학년 봄학기를 포기하고 밴쿠버로 날아간 건 혼자선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부모님과 캐나다에서 1년을 보낸 소연은 그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와 학업을 마무리 짓고 미미한 역할이라도 감사히 여기며 연예 활동을 재개했다.

엄소연에게 크고 작은 악재가 끊이지 않은 건 그때부터였다.

구두로 이야기가 다 되어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되는 작품이 돌연 어그러지는가 하면, 잘 출연하던 작품에서도 중도 하차할 수밖에 없는 일이 그녀 주위를 둘러싸고 빈번하게 발생했으니까.

그리고 그 일이 저를 곱게 보지 않는 누군가의 힘이 작용해서라는 걸 소연이 알게 된 건, 작년 큰 사고로 병원 신세를 질 당시 그 장본인이 병실로 찾아왔을 때였다.

감히 저와 같은 작품에 출연하려고 했냐며, 이 일은 그 건방진 태도의 대가이며 경고라고 말한 그녀는 소연에게 협박인지 충고인지 모를 소름 끼치는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그때 소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딱히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잎이 무성한 거목과 이제 막 새싹을 틔운 묘목의 차이랄까. 그쪽의 막강한 위치와 연예계에 끼치는 영향력에 비하면 저는 한낱 배우 지망생에 불과했으니까.

그 와중에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CN에 먼저 터를 잡은 조인하의 추천과 매니저를 자처한 도순의 당찬 추진력으로 소연은 작년 말 국내 메이저급 연예 기획사인
와 전속계약을 맺었다.

태서준이 몸담은 기획사라는 걸 알고도 망설임은 없었다. 오히려 지척에서 그를 지켜볼 수 있다는 게 저를 안타까워한 신의 흔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운이 따라 준 것만 같았으니까.

태서준이 엄소연의 인생에 끼어든 이후 그녀의 시간은 외줄 타기처럼 아슬아슬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넘어져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 근성이 있어 지금껏 잘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가혹한 신은 기다리고 멀찍이서 바라보겠다는 작은 소망조차 허락하지 않겠다 한다.

그와의 첫 키스. 아니, 태서준과 함께했던 그 모든 처음을 추억 속에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나인데…….

소연은 자신의 첫 남자가 누구인지 단 한 번도 발설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도순 앞에서 그 어떤 내색조차 할 수 없는 그녀는 허공으로 망연한 시선을 던지며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런 때 벌벌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액정을 뒤적거린 도순이 울먹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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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팬클럽 애들 다들 모였대. 이럴 게 아니라 어떻게 된 일인지 나도 가서 자세히 물어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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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가 어디야?”

다 꺼져가는 촛불 같았던 소연의 힘없는 눈빛에 반색 돌았다.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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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따라가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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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왜 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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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신에 네가 운전을 어떻게 해. 넌 급한 일이 생겼고 내 일은 끝났으니 같이 움직이자고.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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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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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가자!”

추운 날씨지만 촬영할 때 입은 얇은 옷 그대로였다.

도순과 스튜디오 건물 밖으로 재빠르게 이동한 소연은 가벼운 몸짓으로 밴 운전석에 올라탔다. 운전은 매니저의 몫이지만, 급할 땐 카레이서 버금가는 엄소연이 하곤 했으니까.

보조석으로 밀려난 도순은 얼떨떨한 중에도 안전띠를 황급히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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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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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하이힐을 벗어 뒷좌석으로 던진 소연은 맨발로 가속페달을 꾹 밟았다.

‘꽉 잡아!’라는 말은 필요 없었다. 습관이 된 듯 도순의 두 손은 이미 손잡이를 꽉 부여잡고 있었다.

끼익, 마찰 소리를 낸 차는 주차장을 날쌔게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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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장 10시간.

중동에서 한반도로 날아온 대형헬기 치누크가 군 비상활주로에 안착했다.

공기를 사납게 가르는 두 개의 프로펠러가 속도를 늦추자 뽀얀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헬기에서 내리는 군인들의 모습이 차츰 선명해졌다.

들것에 실린 병사와 관에 안치된 시신 여러 구가 군용 구급차에 옮겨지고, 나머지 다섯 명의 용사들은 일렬횡대로 활주로를 저벅저벅 걸어 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장시간 비행에 지칠 만도 할 것인데 그들은 흐트러짐 없는 늠름한 모습 그대로였다.

파병부대 일부만의 귀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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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

특수부대 팀장을 비롯한 장교 다섯 명이 사령관집무실로 집합해 임무의 끝을 알렸다. 이들은 타지의 묵은 때를 벗어내고 정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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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관들의 고생이 많았다. 위험한 상황에서 무엇 하나 녹록한 것이 없었을 텐데.”

하급자의 경례가 끝나자 사령관의 근엄한 입매가 무겁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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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부상 중인 태 대위가 가장 많이 애썼다는 보고는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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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습니다, 사령관님.”

중동지역 반란군이 한국군 주둔지에 보복성 테러를 저질렀다. 우리 군이 인질을 구출한 것에 대한 응징이었고, 그로 인해 다수의 부상자와 여섯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극악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대참사였다.

그러나 무장단체 타마욘은 작전을 함께 전개한 미국군 주둔지는 전혀 건들지 않았다. 우리 군이 이를 더 악물어야 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한미연합군에게 인질을 고스란히 내어주고 가만있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데다 기대하던 협상마저 사우디 정부의 일방적인 통보로 결렬됐으니 타마욘은 무슨 짓을 벌여서라도 그 분함을 풀어야 했다.

그러나 자국이나 강국인 미국을 상대하자니 그 부담감이 없지 않았을 터. 그러므로 우리 군을 본보기로 삼아 무력을 과시한 거였다.

그 어처구니없는 인과 관계를 우리가 왜 모르겠나. 그렇지만 UN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는 한 반격조차 할 수 없는 한국군은 묵묵히 어금니를 짓씹으며 그들이 쓸고 간 아픈 흉터를 복구하는 것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했다.

하지만 피할 수도 있었던 사태였다. 타마욘과의 협상을 사우디 국왕이 주도해 무산시켰다는 정보를 한국 측에 미리 건네만 줬어도.

이에 아랍 왕자는 유감을 표명하는 대신 수표에 간단히 사인하는 거로 그 엄중한 책임을 회피했다.

고작 돈 따위로.

안타깝지만 그와 비슷한 일은 우리나라 안에서도 흔하게 저질러지는 비정한 것이기도 했다.

작게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돈 밑에서는 개가 되어도 거리낌 없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권력과 품위를 지키기 위해 생명과 인간의 존엄을 발밑에 놓는 거대 집단도 꽤 보았으니.

군인으로서 3년.

세월이라는 게 쓸모 있긴 했다. 비상식적인 인간들이 싫어 진저리치며 고국 땅을 떠났을지언정 그 시간 동안 욕지거리를 뱉을 작은 증오조차 남지 않았으니까.

인간 이하의 여자를 2년 남짓 제 중심에 두었던 것조차 자신의 오만이자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달았으니까.

그리고 엄소연. 단 하룻밤의 그녀를 몇 년 동안 그리워할 수도 있는 저라는 걸, 그만큼 순수한 감정이 아직 제게 남아 있다는 걸 새로이 일깨워준, 가끔 두근두근 설레기도 한 뜻깊은 시간이었으니까.

맡은 임무, 그 이상의 소임을 다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태서준의 눈시울은 붉었다. 하지만 단정한 목소리와 표정은 굳건함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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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단합하여 혼란을 수습한 우리 군 모두는 명예로웠습니다.”

단단한 목소리에 모두 한동안 침묵했다.

군인은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하지만 전사한 동료를 애도할 때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태서준을 비롯한 다섯 명의 남자들은 장교모를 벗고 고개 숙여 묵념했다.

먹먹해지는 마음을 각자 추스르며.

***

비로소 전역을 명 받은 서준이 운전석에 올랐다.

임시지만 군에서 차를 내어준 건 그의 남다른 책임감과 희생정신을 치하하는 사령관의 배려였다. 전역은 물론 귀국한 사실조차 아직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사회에서의 좋고 나빴던 기억을 초기화하고 다소 지친 심신을 재충전하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났다. 친분 있는 사람들은 물론 가족들의 연락까지 기피해 왔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서준은 3년 동안 꺼져 있던 핸드폰에 전원을 넣었다.

섬세함이 묻어나는 유려한 손가락이 액정 어느 지점에서 멈칫했다. 손끝에 걸린 이름을 보며 서준은 얕게 실소했다.

유정화. 더는 추억조차 될 수 없는 전여친이 아직 휴대폰에 남아 있었다.

그 이름을 간단히 지운 서준은 가벼운 미소를 입술에 적시며 눈을 감았다. 머리를 뒤로 기대자 예전보다 더 날카롭고 뚜렷해진 얼굴에서 노곤함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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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래요. 지금은 힘들어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잊히지 않겠어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좋은 추억으로 남겼으면 해요. 당신도 나도.’

그 얘기가 맞는지도 모른다.

엄소연으로 유정화가 떠안긴 더러운 기억이 완전히 묻히긴 했으니까.

그날 밤은 충동적이었다.

몹시 격렬하게, 미친놈처럼 몇 번이고.

오래전 그 일이 마치 어제처럼 선명한 건…….

이국의 황량한 땅, 까만 하늘을 뒤덮은 수많은 별은 어찌나 찬란하게 반짝이던지. 그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건 우습게도 너더라.

그때마다 헛웃음을 짓던 나.

그런 숱한 날들이었다.

정신 못 차리게 홀려놓고 내가 잠든 사이에 홀연히 떠난 엄소연은 분명 겨울이 만들어낸 신기루였을 것이다. 눈 내리는 밤에 나타나 눈이 그치는 아침에 사라졌으니.

아무튼, 그녀는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을 테니 나도 내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그러면 될 일이었다.

***

「톱스타 태서준이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오늘 오전, 파병지에서 전사한 줄로만 알았던 태서준이 이미 전역해 닷새 전부터 논현동 자택에 머문다는 사실이 어느 한 매체의 특종 기사를 통해 보도되었다.

이는 태서준이 속한 부대에서 사망자가 생겼다는 종군기자의 전언이 잘못 와전되어 세상을 뒤흔든 지 보름 만의 일이었다.

오보가 터졌을 당시 터무니없는 루머에 화가 난 < CN 엔터테인먼트 > 구원후 대표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헛소문을 퍼뜨린 기자들에게 ‘기레기’라 가차 없이 쏘아붙이며 쓴소리를 퍼부었다.

또한 그 자리에서 공신력 없는 매스컴의 보도를 일갈하는 동시에 호언장담했다. 쉽게 갈 친구는 아니라고. 설사 지옥에 털어져도 염라대왕과 담판 짓고 무조건 살아 돌아올 거라고.

이렇듯 구원후 대표는 태서준의 친구이자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두 남자가 이종사촌인 건 친인척만 아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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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봐! 대표님 말이 맞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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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멀쩡한 사람을 골로 보내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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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찌라시들이 문제라니까! 오보해놓고 사과할 줄은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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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도 심장 떨려 죽겠다. 진짜면 어쩔 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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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모르겠고, 난 안구 정화 대상이 무사 귀환해서 정말 다행이야.”

아이돌과 연기자들이 모인 CN사옥 휴게실에서도 태서준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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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태서준 이사님은 회사에 언제 나오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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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드물게 들르셨는데 새삼? 그게 아니라도 며칠은 쉬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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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된 건 오늘이지만, 이사님이 전역한 건 며칠 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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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라. 이사님이 오신대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확률은 희박하니까.”

CN에서 직함은 있으나 이사 집무실에 태서준이 출근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같은 회사 소속이라도 신 같은 존재인 그를 보는 건 공식적인 행사가 있으면 모를까,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다.

< CN 엔터테인먼트 > 사옥은 지하 4층 지상 10층의 큰 규모인데, 액터 연습실이 있는 9층에서 한 층만 더 오르면 옥상이었다.

연습하다 태서준의 무사 귀환 소식을 도순의 문자로 알게 된 소연은 계단을 올라 옥상정원 끝에 다다라 바삐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동안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그 비보 때문에 노심초사했던 지난 며칠을 되새김질한 심장이 쿵쿵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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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소연은 숨을 길게 내쉬고 들이마셨다. 숨통이 뻥 뚫린 폐부로 겨울 끝자락의 찬 기운이 깊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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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남자인지는 몰라도 속 좀 타겠네.’

한 침대에서도 확실한 선을 그었던 그였다.

그런 이유로 애써 모른 척하고 싶었다. 첫눈에 홀딱 빠져버린 첫 남자에게서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한 자신을. 이 순간에도 그가 사무치게 보고 싶을 뿐인 제 마음을.

하지만 태서준이란 가시가 심장을 콕콕 찌르는 걸 어쩌란 말인가. 아니, 이젠 대못처럼 확 박혀 빠지지도 않는다.

커다란 눈망울이 어느새 촉촉했다.

크고 부드러운 눈매, 그 안의 말간 눈동자가 하늘을 발갛게 물들이며 저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소연에게도 단 하나의 태양이 존재했다. 그게 바로 태서준이지만 영원히 마음에서 꺼내선 안 될 비밀이었다.

문뜩 시선을 내려 들여다본 핸드폰 배경화면엔 아주 작은 아이 사진이 깔려 있었다.

후회란 잣대를 절대로 댈 수 없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보석. 그 사진 위로 하얀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여태껏 꿋꿋이 견뎌왔던 만큼 참아지지 않는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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