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 여자, 지금 어딨지?
(9/51)
9화. 그 여자, 지금 어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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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그 여자, 지금 어딨지?
2023.01.30.
오전 일찍 특종 기사를 접한 기자들은 아침부터 서준의 집 앞으로 모여들었다. 철옹성 같은 건물과 담벼락은 왜 이리도 높은지. 안을 손톱만큼 엿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제 늦은 오후가 다 되어가는데도 추운 날씨에 발을 동동 굴리기만 할 뿐인 기자들은 언제 모습을 비출지 모를 태서준을 속수무책으로 기다렸다.
그 바람이 통했달까.
언제 굳게 닫혀 있었나 싶게 벙커 주차장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차체부터 차창까지 새까만 차가 슬그머니 앞머리를 드러냈다.
“야! 저기 나온다!”
“태서준이다!”
“차 막아! 어디 못 가게 빨리!”
발 빠른 기자들은 그쪽으로 정신없이 몰려갔다.
그러나 모두 속은 거였다.
동에서 소리 내고 서쪽으로 내빼듯 태서준을 실은 롤X로이스 팬덤 세단은 주차장 뒤편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키하젤>과 관련된 업무 보고와 화상회의를 말끔히 처리하고 집을 나선 서준은 그 길로 삼성동 < CN 엔터테인먼트 >로 향했다.
주인처럼 매끄럽게 잘빠진 고급 승용차가 지하 3층 주차장에 세워졌다.
차에서 내린 태서준은 예전의 반듯한 이미지를 벗어버린 듯 더블 슈트의 블루그레이 색채부터 짙은 퇴폐미가 감돌았다.
완벽한 피지컬의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로비의 화려한 광채가 그의 발밑으로 고였다. 긴 다리의 시원스러운 보폭, 레드카펫 위를 걷는듯한 우아한 걸음이 비서실을 거쳐 대표실 안으로 들어섰다.
“팔자 좋아, 대표님.”
3년을 건너뛴 첫인사를 장난스레 건넨 서준이 긴 다리를 꼬아 올리며 소파에 느른한 자세로 앉았다.
“내 전화도 그렇게나 씹더니만 이제야 움직일 생각이 드셨어?”
“글쎄. 누가 나를 애타게 찾는 것 같아서 한번 와 봤는데. 아니었나.”
크리스털 책상에 다리를 걸치고 세상 편한 자세로 있던 원후가 화들짝 바닥으로 발을 내리며 말하자 반기는 리액션이 그것밖에 안 되냐는 듯 서준이 손가락 하나를 까딱였다. 냉큼 제 앞으로 오라는 거였다.
“건방진 이 새끼를 어떻게 족쳐야 내 속이 후련할까?”
말은 까칠하게 하면서도 원후의 날렵한 몸은 어느새 서준 옆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족칠 수나 있고?”
“그야,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한 번은 봐줄게.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너니까.”
“봐줘서 눈물 나게 고맙네.”
두 남자는 농담 같은 말을 주고받았지만, 그것은 무거운 진담을 가볍게 우회한 둘만의 대화법이랄까. 잠깐이지만 서준이 저세상을 다녀온 건 거짓이 아니었다.
테러가 벌어진 날, 강한 충격에 전신이 나가떨어진 서준은 등 근육이 파열되고 몸 곳곳에 타박상을 입었다. 제일 심각했던 게 뇌진탕이었는데, 만 하루 동안 의식을 잃은 것으로 끝난 게 기적이라 할만했다.
태서준을 찬찬히 훑어보는 원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회복력이 빠른 것인지 겉으로 보기엔 아주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일만큼 서준은 삐딱한 눈빛과 말투마저 지독한 우아함을 자아냈다.
입대 전보다 조금 마른 듯도 한데, 3년 전보다 더 고아해져 돌아온 서준은 미친 존재감 역시 예전보다 몇 배는 더했다.
업그레이드된 태서준의 분위기를 정확히 표현하자면 굶주렸음에도 품격을 잃지 않은 노련한 수컷 늑대 그 자체였다.
“너와 딱 어울리는 좋은 작품이 하나 들어왔는데, 시나리오 한번 볼래?”
원후는 거두절미하고 일부터 들이밀었다. 선과 악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 배역과 싱크로율 100%인 명품 배우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괜히 마음이 급해져서였다.
“대작 드라마야. 방영 시작이 여름으로 내정돼서 캐스팅만 마무리되면 바로 제작에 들어갈 거라는데, 감독은 윤지완.”
“영화만 하는 그 양반이 웬일로?”
“너 지금 감독 이름 듣고 솔깃한 거 맞지?”
윤지완이라면 충무로 바닥에서 천재라 불릴 만큼 유능한 영화감독이고, 배우라면 누구나 그 감독과 작업 한번 같이해 보는 것이 꿈이었다.
스케줄이 맞지 않아 그 감독의 러브콜을 몇 번 거절한 적이 있는 서준은 그런 능력자가 드라마까지 손을 대는 게 다소 의외일 뿐 그다지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당분간은 쉴 생각이야.”
“그 생각 좀 바꾸면 안 될까?”
“…….”
대꾸 없이 활짝 편 손바닥을 내저은 건 단호하게 거절한다는 의미였다.
서준의 시선이 공원이 내다보이는 창으로 옮겨졌다.
하늘에 하얗게 핀 구름이 목화솜처럼 몽글몽글했다. 길을 따라 늘어선 나무는 아직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지만, 머지않아 봄을 싣고 올 따스한 바람과 햇볕이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고 연녹색 새싹을 틔워낼 것은 자연의 당연한 순리였다.
이제 곧 저물 듯한 햇살에서도 봄기운이 느껴지는데 제 마음은 아직 한겨울이었다. 스산한 기운으로 가득한 가슴이 왠지 답답하게 느껴진 서준은 한숨을 툭 내뱉으며 말했다.
“난 됐고, 다른 배우한테 주면 되겠네. 기회는 공평해야지.”
목소리 역시 찬 바람에 메마른 낙엽처럼 건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리 회사에 그 배역을 감당할 만한 남자 배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너보다는 못해. 그러니까 이 작품만 내 말대로 하자. 응?”
말이 길었다. 다른 속셈이 있으면 모를까, 뭐든 간결한 걸 추구하는 구원후가 평소와 다르다는 건 누구보다 서준이 더 잘 알았다.
“입 아프게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새끼, 하여튼 눈치도 기막히다니까.”
“그래서 네 꿍꿍이가 뭔데?”
“사실 그 드라마에 오민정이 여주로 정해지긴 했는데 겸사겸사 여자 조연 한 명을 더 꽂으려고 해. 그런데 주연과 맞먹는 역이라 워낙 지원자가 많은데, 윤 감독이 널 연결해주면 그 일이 가능할 것도 같다고 했거든.”
원후는 탁월한 비즈니스 미소까지 동원해 시큰둥하게 구는 서준을 살살 꼬셨다.
“그러니까, 감독이 날 원하는데 그걸 이용해 네가 염두에 둔 여배우를 그 드라마에 끼워 넣으시겠다?”
“그렇지. 아직 연기력은 부족한 것도 같지만 그건 경험이 없는 탓이겠고, 무엇보다 무명으로 있기엔 너무 아까운 비주얼이란 말이지.”
“배우 자질이 부족한 모양인데, 별것도 아닌 일에 왜 나까지 끌어들여? 누군지는 몰라도 능력이 안 되면 포기하라고 해. 너도 마찬가지고.”
한쪽 눈썹을 삐뚜름히 세운 서준의 표정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슬릭백 헤어만큼이나 차분하고 견고했다. 적어도 그녀의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아, 쫌! 그러지 말고 도와주라! ”
“안 한다니까.”
테이블에 놓인 지포라이터를 집어 올려 손장난을 치기 시작한 서준은 턱도 없다는 듯 나직하게 피식거렸다.
어차피 안 할 거지만, 제가 끼고 들어간 배우라면 작업하는 내내 꽤나 신경이 쓰일 것인데, 서준은 그것부터가 귀찮았다.
그 속내를 모를 리 없는 원후는 소파에 털썩 앉아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심드렁하게 읊조렸다.
“너도 알 거 아니야. 내가 언제 이런 부탁 한 적 있나?”
“내 말이. 캐스팅 건이라면 엄연히 기획실 담당자가 있는데 네가 왜 나서냔 말이지. 나와 끼워 팔 생각인 그 여자한테 다른 마음이 있지 않고서야.”
서준이 깊고 진한 눈매가 설핏 가늘어졌다.
“야, 인마, 그건 아니다!”
장난삼아 살짝 찌른 건데 원후는 도끼에 찍힌 것마냥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아니면 뭔데.”
“엄소연이라고 본명 쓰는 배우야. 기회만 잘 잡으면 분명히 뜰 건데, 일이 꼬여 지금껏 고전하고 있는 게 안쓰러워서 그런다!”
“…….”
엄소연.
그녀의 이름을 여기에서 들을 줄 몰랐다.
미간을 찡긋, 고개를 비스듬히 비틀어 원후를 직시한 서준은 서두르지 않았다. 공명 깊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물을 뿐이었다.
“그 여자, 지금 어딨지?”
곧장 책상 앞으로 이동한 원후가 인터폰 버튼을 누르며 비서에게 말했다.
“엄소연 씨 오늘 회사에 나왔습니까.”
-점심때 구내식당에서 여도순 매니저와 식사하는 걸 보긴 봤습니다만. 엄소연 씨한테 연락해 볼까요?
“아닙니다. 연습실에 있을 텐데 내가 하지요.”
대충 엄소연의 소재를 파악한 원후가 소파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걷는 서준을 불러세웠다.
“넌 어디 가는데?”
그새 갑자기 맘이 바뀌었나? 하던 얘기도 안 끝났는데 이곳에서 나가려는 건 무슨 심보인지. 어이없는 원후의 눈빛이 삐딱해졌다.
“내 방.”
서준의 ‘내 방’이라 함은 본인의 이사 집무실을 말하는 거였다.
“엄소연 씨 만나보고 제안 받아들이려는 거 아니었어?”
“그건 아니고. 그냥 한번 볼까 했는데 쓸데없는 짓 같아서.”
“와……!”
와, 진짜 한 대 때리고 싶다!
안 그러던 놈이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니 원후는 약 오른 눈빛으로 문고리에 손을 얹는 서준의 뒤통수를 한 대 쳤다.
그 시선을 느꼈을까. 문밖으로 나가려던 서준이 움직임을 멈추고 원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뭐.”
“그 여자 나이가 스물여섯?”
“아는 사이였어?”
“글쎄.”
서준은 그럴 리 있겠냐는 실소만을 남긴 채 대표실을 나왔다.
나이도 그렇고. 그 엄소연이 맞는 듯했다. 그런데 그게 뭐. 지금에 와서 그 여자랑 뭐를 어쩌겠다고.
먼지가 쌓여도 뽀얗게 쌓였을 3년 전의 과거를 굳이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서준은 자신의 발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터벅터벅 걸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심히 뛰고 있었다.
엄소연.
대표실에서 그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
파병지에서 다시 손대기 시작한 그것이 그의 손에 들렸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서준은 부지불식 9층 버튼에서 머뭇거린 손끝을 위로 올려 10층을 눌렀다. 흡연 구역이 옥상에 있어서였다.
10층에서 내린 서준은 바로 앞에 있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발짝 움직였을 때였다. 옥상정원 끝에 홀로 서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
역광에 묻힌 뒷모습임에도 서준은 알 수 있었다.
노을빛에 물든 가느다란 실루엣이 그 누구도 아닌 그녀란 것을.
까만 눈동자에 그녀가 담기자마자 오랫동안 꽉 막힌 것 같던 숨통이 탁 트였다. 서준은 그것만으로도 여태 저를 괴롭혔던 갑갑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웃긴 일지만, 결국 저 여자 때문이었다.
하루도 채우지 못한 만남과 이별.
시작이 없어 끝내지 못한 여자.
그 못다 한 미련이 내 머릿속을 그토록 헤집고 파먹은 거다.
“엄…… 소연?”
혀끝을 간질이며 나온 소리는 그 자신도 모르는 것이었다.
제 입에서 뱉어진 이름 때문일까. 서준은 차분한 입술이 냉소를 머금었다.
신의 오류, 혹은 운명의 얄궂은 장난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
낮고도 매끄러운 음성이 저를 불렀다. 보고 싶은 마음이 불러들인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소연의 귀에 들린 목소리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흑, 하며 숨죽여 우는 흐느낌이 입 밖으로 여리게 새어 나왔다.
그때였다.
엄소연 앞으로 서준이 성큼 다가왔다.
흐린 시야를 손등으로 닦아낸 소연은 제 앞에 선 그를 멍한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눈을 연거푸 깜빡이며.
허상 같은 눈부신 남자의 큰 형체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
암만 봐도 그였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태서준인 건 알겠는데…….
너무 잘 알겠는데…….
그런데……
서준은 작고 하얀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보았고 소연은 지나치게 눈부신 그의 얼굴을 물먹은 눈으로 계속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코끝이 맞닿을 위치에서.
“…….”
“…….”
드세게 얽힌 두 눈빛 사이로 따스한 바람이 이는 듯했다.
겨우내 얼어 있던 마음을 녹이는 봄바람이었다.
그에게서 풍겨온 진한 향기가 소연의 심장을 꽉 붙잡았다. 바람에 날린 그녀의 긴 머리칼이 서준의 옷깃에 닿자 그의 심장이 사정없이 뛰어댔다.
쿵쿵쿵…….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린 두 사람은 기억을 거슬러 과거로 빠져들었다.
꽤 오랫동안 멈춰져 있던 그 겨울밤.
그 시간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