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참 빨리도 묻는다
(12/51)
12화. 참 빨리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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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참 빨리도 묻는다
2023.02.10.
-야! 이 소리가 뭐야? 무슨 일이야!
뭔가 깨지는 소리에 놀란 도순이 크게 소리쳤다.
“아, 아니, 별일 아니야. 마시던 찻잔을 떨어뜨렸어.”
-얘가, 얘가, 내가 너 때문에 가슴 철렁한 게 어디 한두 번이냐고!
“알지. 내가 더 조심할게. 미안.”
놀란 도순을 다독인 소연은 급한 대로 일회용 행주로 어질러진 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순 말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갑자기 들려왔다.
-여도순, 목소리 좀 낮춰! 사람들이 우리만 쳐다보잖아!
-뭘 어쩌라고. 보고 싶어 보나 본데.
-그래도 이게!
-어쭈, 한 대 치시게?
-엄마, 얘 봤지? 버릇없이 나한테 막 대드는 거!
-둘 다 시끄럽다! 도순아, 도영이랑 난 먼저 명품관에 들어가 있을 테니 넌 전화 마치는 대로 따라와. 오늘 천 의원님댁 저녁 만찬에 우리 가족 모두 참석해야 하니 딴 데로 새면 알지?
-안 그럴 테니까, 걱정 마셔.
세 모녀 대화 소리를 듣던 소연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뭐라 하건 꿈쩍 않는 도순의 뚱한 표정이 눈에 선했으니까.
혼자 자취하는 집에서 모처럼 뒹굴뒹굴하는 걸 어찌 알았는지 지명숙 여사는 도순을 백화점으로 불러내 선머슴 같은 옷을 벗기고 참한 원피스로 갈아입혔다.
엄마와 언니에게 억지로 끌려다니던 도순은 기획실 주 팀장과 통화가 끝나자마자 소연에게 연락한 거였다.
지명숙 여사가 큰딸을 데리고 자리를 피해준 덕에 도순은 한결 편안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소연아,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단다.
“뭔데?”
-세상에, 남주 기천율 역을 우리 오빠가 맡았대! 너랑 태서준이 같은 작품을 하다니! 와, 이거 완전 대박이지?
이미 휴게실에서 알게 된 내용이라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소연은 흥분한 도순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좋아?”
-그럼! 그동안 네가 얼마나 힘들었게. 그러니까 이젠 활짝 피어보자, 엄소연! 잘할 수 있지?
“당연하지.”
통화를 끝낸 소연은 한동안 탕비실 벽면만 바라보았다.
대차게 부딪쳐보자고 굳게 다짐한 게 고작 몇 분 전인데 벌써 그 기세가 한풀 꺾인 새하얀 낯빛은 점점 의기소침해졌다.
이제껏 감추어왔던 일을 먼 훗날까지 계속 묻고 가자니 가슴 안의 양심이란 녀석이 덜그럭거리며 그러지 말라 한다. 속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마음만 더 아프고 피폐해질 거라며.
그렇다고 태서준을 비롯해 주위 사람들에게 진실을 밝히는 것도 녹록한 일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 그 사실의 여파는 감히 예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상당할 것이기에.
그를 알고부터 단단한 심장을 지니게 되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더욱 담금질 된 심장이었다. 하지만 해법을 찾을 수 없는 태서준과 직면하니 심장을 꽉 조였던 죔쇠는 여지없이 헐렁거릴 뿐이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자신과 타협점을 모색했으나 별다른 수를 내지 못한 소연이 얻은 거라곤 백탁으로 가득 찬 머릿속과 어떻게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입을 열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스읍…….”
고민이 쌓여 못 견디게 무거워질 즈음 소연은 따끔한 감각에 제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허둥대며 바닥을 치울 때 날카로운 유리 파편에 살짝 손 베였는데, 지금 보니 새빨간 피가 대충 감싼 티슈 겉면으로 제법 배어 나와 있었다.
그다지 큰 통증은 아니지만 쓰라리긴 했다.
저로 인해 어질러진 거나 마저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소연은 바닥을 깨끗이 닦은 후 무릎과 허리를 굽혀 진열장 밑 마지막 남은 유리 한 조각까지 말끔히 치웠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탕비실 안으로 들어선 건.
문을 여닫는 인기척에 이어서 뚜벅뚜벅 걷는 발소리가 제 앞에서 뚝 끊기자 소연의 눈이 반들반들 광채 나는 구두 앞굽부터 유독 긴 다리를 빠르게 훑어 올랐다. 그리고 그 시선은 저를 내리뜬 눈으로 바라보는 표정 위에 덜컥 멈췄다.
붉은 입술에 담긴 미소마저 오만한 얼굴의 주인은…….
태서준이었다.
“앗!”
소연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내질러진 건 무의식적으로 다리와 허리를 황급히 일으킨 탓이었다.
날카롭게 튀어나온 서랍 모서리에 오른쪽 팔꿈치가 세게 긁혔다. 홍차에 넣을 레몬을 자르느라 칼을 수납장 안에서 꺼냈는데 그때 서랍을 꽉 닫지 않은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긴 소매라 괜찮은 줄 알았는데 소연의 옷에선 빨간 핏물이 순식간에 번졌다.
“팔 하며 손까지…….”
담담한 눈길로 다친 곳을 귀신같이 찾아낸 서준은 짙은 눈썹을 한 번 꿈틀하며 빈정대는 어조를 느릿하게 뱉어냈다.
“꼴이 영 엉망입니다, 엄소연 씨.”
핀잔주는 음성이 석영으로 만든 비수처럼 차갑고 예리했다.
“…….”
서준을 빤히 응시한 소연은 작고 도톰한 입술을 앙다물었다.
서랍은 내가 열어놓은 것이요, 손가락을 벤 것 역시 내 잘못 아닌가. 바보 같은 제 행동에 딱히 할 말이 없어서였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움직임으로 서준은 탕비실 문을 열어 밖으로 한 발 내디뎠다.
“뭐 합니까.”
그냥 가버리는 줄 알았더니,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따라 나오지 않고.”
“어디를…….”
말똥말똥한 눈망울로 소연이 묻자 그제야 크고 유려한 몸이 돌아섰다. 한쪽으로 약간 휘어진 그의 입매는 조금 웃는 듯도 했다.
“피가 나는데 지혈은 해야지 않겠습니까.”
“…….”
따라오라는 야트막한 눈빛을 흘린 서준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싫으면 말라는 호기로운 배짱이었으나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누구라도 홀릴 수밖에 없는 강한 유혹인데.
소연은 군소리 없이 그를 뒤따랐다.
***
이사 집무실 소파에 서준과 나란히 앉은 소연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하면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가까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남자가 옆에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
어느 순간 소연은 제 쪽으로 손을 잡아당겼다.
손가락 끝에 밴드가 붙여지는 걸 멀거니 보고만 있는데 그의 따스한 체온이 손바닥 안을 파고들어서였다.
“엄소연 씨 천재잖습니까.”
꼼지락대는 손을 더욱 꽉 쥘 뿐인 서준은 블라우스를 걷어 올린 팔꿈치에 약을 바르며 씩, 미소 짓는 입술로 말했다.
“방심할 때 내빼는 거.”
“제가 언제요?”
“언제든.”
“…….”
기분 탓이겠지만 오래전 일을 들추는 것으로 들린 소연은 새초롬하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물며 비밀스러운 부분을 공유했던 사이 아니었나. 그 겨울밤 둘이 했던 부끄러운 짓까지 불현듯 떠오른 얼굴이 금세 발그레해졌다.
넓적하게 쓸린 살갗에 거즈가 덧대어졌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서준은 약품함에서 꺼낸 압박붕대를 팔꿈치에 감으며 우려하는 바를 물었다.
“파상풍 백신 접종은 했습니까.”
“작년에요.”
바람직한 대답을 소연이 내놓자 눈썹을 둥글게 말아 올린 서준은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불만스러운 냉기가 감돌았다.
어제야 너무 놀랐다 치더라도 오늘 역시 꽁지 빠지게 도망치기 바쁘지 않았나. 마치 제 인생에 나란 인간을 전혀 끼워 넣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이다.
목소리 한 번 듣기가 힘든 엄소연의 태도가 심히 거슬린 서준은 그 불쾌한 감정을 곱씹는 중이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소연은 그의 얼굴에 붙은 시선을 들킬세라 제 팔꿈치로 눈길을 바삐 옮겼다.
잠깐 훔쳐본 것뿐인데도 뚜렷한 이목구비의 잔상은 그대로였다. 지만 소용없었다. 소연의 심장 박동은 이미 정상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이 어색함을 어쩔 것인가.
“감사합니다, 이사님.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마침 치료도 끝난 터. 소연은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어냈다.
“아, 주연 맡으신 거 축하드리고요.”
“그게 뭐라…….”
그다지 축하받을 일은 아니었다. 제게 주연이란 지극히 당연한 것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서준은 하던 말을 바꿔 간략하게 답했다.
“고맙습니다. 나가 봐요.”
서준은 시큰둥하게 다리를 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네?”
“나가 보시라고.”
“아, 네.”
그러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건 맞지만 막상 가라고 하니 그러기 싫어지는 건 무슨 맘인지. 갑작스레 내쳐지는 기분이 썩 좋지만도 않은 소연은 얼떨떨한 몸짓으로 문 앞까지 이동했다.
문고리에 손을 얹은 소연이 그를 돌아다보며 정말 묻고 싶은 말을 건네려는 그 순간이었다.
“저…….”
“엄소연 씨…….”
서준이 그녀를 불렀다.
둘이 동시에 말하려던 터라 서준은 먼저 해보라는 듯 날렵한 턱을 까딱이며 치켜올렸다.
“파병지에서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이젠 괜찮은 건가요?”
“…….”
참 빨리도 묻는다.
다소 빠른 움직임이었다. 딱딱한 표정으로 소파에서 몸을 세운 서준이 긴 다리의 보폭을 늘여 그녀 앞으로 그가 다가섰다.
“내 안부가 걱정되긴 했습니까.”
“물론이죠.”
“…….”
이 한마디를, 이 목소리를 듣고 싶어 내가 그토록 안달했었나. 이 여자가 뭐라고 내 귀와 심장이 이리도 간지러울까.
엄소연이 저를 진심으로 걱정했음은 분명했다.
말간 연갈색에 둘러싸인 깊은 동공이 살며시 떨리는 것도 그렇고, 크고 부드러운 눈시울이 이슬이 맺힌 것처럼 영롱함을 내비치는 것이.
서준이 피식, 웃었다.
여태 무표정이었던 얼굴이 이제야 밝은 광채가 돌았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마음이 살며시 닿은 봄바람에 사르르 녹는 미소였다.
“엄소연 씨, 치킨 좋아합니까.”
“저야…….”
괜찮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치킨이란다.
무엇 때문인진 몰라도 냉기에서 온기로 전환된 서준의 표정을 모를 수 없는 소연은 대답하기에 앞서 잠시 골똘해졌다.
뜬금없는 전개지만 먹는 것은 종류를 막론하고 좋은 의미이니 건강에 문제가 없음을 돌려 말한 것이겠고, 그것을 좋아하냐고 내게 물은 건 언제 한번 같이 먹자는 뜻?
정말 그런 거라면 무조건 ‘Yes’인 소연은 동그랗게 커진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떠듬떠듬 대꾸했다.
“좋아하죠. 그냥도 아니고 엄청나게요.”
“중동에서 한국 치킨이 생각나 밤마다 울었다고 하면 믿겠습니까.”
설마, 태서준이? 고작 치킨 때문에? 응당 농담이겠지만, 소연의 가슴은 콩콩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에 홀린 것도 같았다.
“돌아오신 지 꽤 되셨을 텐데, 아직 못 드셨어요?”
“…….”
서준이 시원한 웃음을 소리 없이 터뜨렸다.
치킨이 먹고 싶어 울었다는 어처구니없는 핑계로 엄소연을 충동적으로 붙잡는 것이. 이 여자의 관심을 받지 못해 짜증스러워했던 자신이 기막히면서도 이 순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으니까.
“아직이라고 하면 같이 가 줄 겁니까.”
“그럴까요?”
치킨을 같이 먹어 줄 사람이 필요한 걸까?
소연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더 같이 있을 수도 있다는 두근거림에 ‘생각’이란 것을 거치지 않은 빠른 대답이었다.
“나 점심도 못 먹었는데. 지금 가능합니까.”
“어머나, 지금이 몇 시인데……. 빨리 가죠. 사실 저도 점심을 걸렀거든요.”
역시 그거였다.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음을 확인한 소연은 흥분으로 꽉 찬 마음을 눈동자에 실었다.
“그러면 더 빨리 가야겠네.”
치킨 따위에 저리도 예쁜 눈을 해도 되는 건가.
처음 만났을 때의 엄소연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서준은 옷걸이에 걸어둔 상의로 팔을 뻗으며 입매를 늘였다.
무구한 눈망울 하며 미소 짓는 그녀의 표정이 무척 마음에 들었으니까.
웃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