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과거는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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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과거는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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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과거는 힘이 없다
2023.02.13.
서준과 소연이 목적지에 도착한 건 CN 사옥을 벗어난 지 20분 만이었다.
명품 배우라는 수식어로도 부족한 그가 크나큰 태산이라면 저는 한낱 평지에 작게 솟은 둔덕에 지나지 않았다. 그 때문이라도 운전기사가 딸린 그의 차로 이동하는 동안 소연은 태서준과 함께 있는 것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차에서 내린 소연은 정중한 태도로 직원이 열어주는 파란색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눈에 확 와닿는 실내의 고급스러움은 유명 브랜드 치킨 체인점일 거라는 예상과 매우 상이했다. 그것에 이어 커다란 공간으로 들어선 소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음식점 하나를 통으로 빌린 것 같은 이 으리으리한 룸은 좀 과했다. 기껏해야 치킨을 먹으러 온 것인데…….
그 생각과 함께 10명이 앉아도 충분할 듯한 커다란 테이블에 서준과 비슥하게 마주 앉은 소연은 짐짓 목청을 차분하게 가다듬어 물었다.
“이사님이 말씀하신 그 치킨집이 여기예요?”
“그렇습니다.”
“조용한 분위기도 그렇고. 여긴 치킨 전문점이 아닌데요?”
소연의 말이 맞긴 했다. 이곳은 수제 맥주가 일품인 고퀄리티 레스토랑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 집의 치킨 요리가 맛이 없느냐. 그건 아니었다. 태서준이 자주 왔던 만큼 숨은 맛집이 바로 여기였다.
“밥집이라고 밥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막걸릿집이라고 술만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하네요.”
메인 음식에 앞서 나온 애피타이저와 생맥주가 테이블에 놓였다.
살사소스에 찍은 나초의 바삭한 식감이 만족스러운 소연은 양손으로 들어 올린 생맥주잔을 얼른 입으로 가져갔다. 탐스러운 하얀 거품이 음주 욕구를 돋운 탓이었다.
그 찰나였다.
테이블의 ㄱ자로 꺾인 옆자리에서 불쑥 뻗어온 서준의 손이 소연의 잔을 빼앗으려 했다.
“아, 엄소연 씨는 안 됩니다.”
“어멋!”
이게 무슨 행패인가! 치킨에 맥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짝,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환상의 조합이거늘!
본능적으로 몸을 그의 반대편으로 홱 틀어버린 소연은 제 목숨처럼 맥주잔을 꽉 부여잡고 뾰족해진 목소리로 록 쏘아붙였다.
“왜 이러시는 건데요?”
소연의 귀로 조금 더 입술을 기울인 서준은 매끄러운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다치지 않았습니까. 엄소연 씨는 무알코올 탄산수를 마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
고막을 녹이는 눅눅한 숨결과 울림 좋은 음성에 눈앞이 아찔해진 소연은 사고마저 흐물흐물해졌다. 그 틈을 노린 건지 서준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 안 돼요!”
이 남자가 미남계를 쓸 줄이야.
하마터면 전의를 상실하고 순순히 내어줄 뻔했지만, 빠르게 정신 차린 소연은 제 잔을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뜨려 끝까지 사수했다.
“살짝 다쳤을 뿐이잖아요. 두 잔이니까 한 잔은 무조건 제 거라고요!”
“두 잔 주문한 건 내가 깜빡한 거고. 아무튼, 안 됩니다.”
“아니, 제가 괜찮다는데 자꾸 왜 이러실까요!”
앙큼한 사슴이 이러할까. 동글동글 커다래선 매섭게 치켜뜬 눈 모양이 여간 깜찍한 게 아니었다.
“훗…….”
서준은 긴 손가락으로 슬쩍 입을 가려 픽, 웃었다.
처음 만났던 그 날 지금과 똑같은 눈빛으로 겁도 없이 제 멱살을 잡고 키스했던 그녀 모습이 불쑥 떠오른 것이지만, 아직 무어라 명명할 수 없는 제 감정에서 절로 우러나는 웃음이기도 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뭐를……?”
“내 호출을 받으면 바로 달려오는 거로.”
“언제. 아니, 그건 또 무슨 얘기에요?”
“미미한 상처라도 조심할 건 조심해야지. 더구나 내가 환자를 나 몰라라 방치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서준은 그녀의 작은 상처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자신이 얼마나 유치한지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집요하게 굴 수밖에 없는 건 엄소연을 가까이 둘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기 싫은 거였다.
“회사에 있을 때 내가 부르면 이사실로 와요. 적어도 상처가 아물 때까진 살펴봐야 하니까. 특히 술 마신 다음 날은 필히 그래야 하고.”
“그러니까, 이사님 뜻을 받아들여야 제가 이 맥주를 마실 수 있다?”
“이해력이 나쁘진 않네.”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소연은 그의 과도한 요구가 싫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말은 온순하기 그지없었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그렇다고 많이는 안 됩니다. 조금만 마셔요.”
“알겠어요.”
소연은 제 상처가 늦게 아물길 바랐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사람을 매일 보고 싶었다. 욕심껏 이 남자를 가져보고도 싶었다.
그런 제게 굳이 명분을 내어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아니, 안 그래도 이사실 앞을 얼쩡거릴지도 모를 제게 적절한 핑곗거리를 만들어주는 그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저를…….”
하던 말을 멈춘 소연은 문뜩 서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엄소연 씨가 아프면 싫으니까.”
“이사님이 왜요.”
“같은 작품을 하게 된 동료 겸 상대 역으로서의 걱정과 관심? 그 정도로 합시다.”
그가 주연하는 드라마 조연으로 저가 캐스팅된 걸 이미 알고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속엔 뼈가 있었다.
동료를 강조한 것부터가 ‘과거는 힘이 없다’라고 담담하게 선을 긋는 듯했으니까.
그러니 딱 이 남자만큼만 하자. 그렇게 해서라도 간당간당 끊어질 듯한 내 숨이 조금이나마 쉬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니까.
서준과 소연은 건배한 맥주를 쭉 들이켰다.
때마침 숯불바베큐치킨이 나왔다.
두 사람은 동시에 포크를 들고 음식을 입에 넣었다.
“……!”
매콤달콤한 양념과 독특한 향신료의 향이 어우러져 살코기가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 소연은 감동적인 맛을 좁혀진 미간에 담뿍 담으며 말했다.
“맛있어요. 어떻게 이런 맛이 날까. 진짜 못 잊어 울만 했겠어요.”
“맛있다니 대행이네. 양껏 먹어요.”
서준은 소연의 앞접시에 가장 촉촉하고 맛 좋은 부위를 덜어주었다.
예전에도 잘 먹는다고 느꼈지만, 이 정도로 먹는 것에 진심인 줄은 미처 몰랐다. 자신이 준 것을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잘도 먹으니 서준의 입술에서 흐뭇한 미소가 절로 배어 나왔다.
목 넘김이 유난히 좋은 생맥주가 금세 바닥을 드러내자 서준은 소연의 빈 잔을 새것으로 바꿔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핸드폰 이리 줘 봐요.”
“그건 왜…….”
“내 전화번호 찍어주게.”
“주치의 호출?”
“그런 셈?”
“자, 잠깐만요…….”
본능적으로 가방을 등 뒤로 숨긴 소연은 손끝의 감각만으로 핸드폰을 꺼내 아이 사진이 깔린 바탕화면을 키패드 창으로 가렸다.
그렇게 건네 놓고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은 소연은 서준의 시야 옆으로 얼굴을 바짝 붙었다. 여차하면 도로 빼앗을 준비를 하는 거였다.
다행히 서준은 전화번호를 교환하자마자 소연의 핸드폰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처럼 우려한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핸드폰이 소연의 손에 건네지기 직전, 그의 긴 손가락이 통화목록 창을 닫아버린 거였다.
“!”
순간 눈앞이 깜깜해진 소연은 모근이 쭈뼛 섰다.
그가 바탕화면 속 아이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난 뭐라 할 것이며,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 생각이 뇌리를 집어삼킨 아찔한 순간이었다.
사람이 그냥 죽으란 법은 없는지 핸드폰이 진동하며 액정 중앙에 '조인하 선배님'이라는 글자가 둥실 떴다.
“죄송해요. 전화 좀.”
“얼마든지.”
천만다행인 소연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서준에게 양해를 구하며 걸려 온 전화를 허겁지겁 받았다.
“네, 선배.”
-저녁 먹을 시간인데 아직 회사에 있나 해서.
“아, 조금 전에 나와서 식사하고 있어요.”
-혼자?
“아니…… 친구랑요.”
-여자야?
“네? 아, 네.”
대충 대답하며 통화를 마친 소연이 맥주를 한 모금 입에 물을 때였다.
“나와 있다고 하지 그랬습니까.”
조인하의 목소리가 서준의 귀에도 간간이 들렸다.
더욱이 다른 남자의 전화에 지나치게 반색하는 엄소연의 표정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해서 하는 얘기였으나 서준의 굳어진 얼굴에 차가운 바람이 스친 건 멀쩡한 남자를 여자로 둔갑시켜 둘러대는 엄소연의 태도가 불쑥 화가 날 정도로 몹시 못마땅해서였다.
***
쇼핑하는 엄마와 언니를 종일 따라다닌 데다 남의 집 만찬까지 참석한 도순은 늦은 저녁 무렵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으아아! 이러라고 내 휴일이 있는 건 아니잖아! ”
갑갑한 정장을 벗어 던진 도순은 절규하듯 소리치며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따뜻한 물이 채워진 욕조에 들어앉은 도순은 태블릿PC를 켜고 당장 내일 있을 일정을 점검했다. 하지만 새로 들어갈 드라마 말고는 특별한 것도 없기에 습관대로 핸드폰과 연동된 앨범을 뒤적거렸다.
오매불망 태서준 사진을 들여다보다 은연중 다른 사진을 발견한 도순은 피식거리며 중얼거렸다.
“요 녀석, 그새 많이 컸네.”
캐나다에 있는 아이를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도순은 며칠 전 소연의 핸드폰에 새로 깔린 현우 사진을 제 핸드폰에 저장했다. 그걸 이제야 자세히 보는 거지만, 보면 볼수록 익숙한 것이 제가 아는 누군가와 닮은 듯도 했다.
그게 누구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도순은 어느 순간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어랏?”
해맑은 아이의 얼굴에서 왜 태서준이 보이는 건지. 잘생겨서 닮아 보이나? 아니면 내 눈이 이상해졌나?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몇 번을 거듭 생각하던 도순은 한참 만에 제 머리를 콕 쥐어박았다.
“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 얼굴은 하루에도 여러 번 변한다고 했다. 그러니 각도에 따라 실물과 다르게 찍히는 사진은 오죽할까.
게다가 아이 아빠는 수년 전 오다가다 만난 사이라고 소연에게 듣지 않았나. 어디 태서준이 우연으로 만날 수나 있는 사람이어야 말이지.
그래, 그런 거다!
요즘 태서준을 자주 봐서 내 눈이 이상해진 게 틀림없다!
“와, 여도순! 이상한 상상이나 하고, 너 아직 덜 바빠서 그러지!”
욕조에서 일어난 도순은 싱거운 웃음으로 일말의 의심마저 싹 지워버리며 욕실을 나섰다.
***
흘러간 시간만큼 테이블 끝에도 빈 맥주잔이 꽤 많이 쌓였다.
서준은 얼굴이 발갛게 익은 소연을 넋 놓듯 바라봤다. 그런데 곧 울 것처럼 눈을 아래로 내리뜬 소연은 시선을 좀처럼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랬다.
태서준의 얼굴만 봐도 괜히 서러운 소연은 테이블 위에 얹어진 그의 고운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금세라도 터져 나올 듯한 울음을 꾹 참고 있었다.
절대 과거일 수 없는 그에게 닿고 싶어서. 감히 탐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끌려가는 자신을 도무지 말릴 수가 없어서.
그 마음 때문이었다.
소연은 손을 조금씩 움직여 남자의 섬세한 손끝을 톡 건드렸다. 그런데도 그는 가만히 있었다. 그 탓에 배포가 더 커진 소연은 서준의 손가락 하나를 슬쩍 손 안에 쥐어 보았다. 그의 체온이라도 느껴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정말 미쳤다, 엄소연…….
자책하면서도 소연은 한번 잡은 그의 손가락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도 별다른 움직임 없이 그녀에게 잡힌 제 손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정지된 사람처럼.
소연은 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조금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 줘요.
내가 당신을 느낄 수 있게. 내 눈물이 마를 수 있게.
“손이…… 예뻐요. 자꾸 만지고 싶게…….”
“…….”
이미 그러고 있으면서 새삼 만지고 싶단다. 아무리 취했어도 하는 짓이 보통 앙큼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서준도 손에 감겨드는 작고 보들보들한 감촉이 싫진 않았다.
아니, 그는 그녀보다 더한 걸 원하는지도.
한순간이었다.
서준은 내주기만 하던 손에 힘을 실어 무방비한 여린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방심하다가 서준에게 잡혀버린 소연은 짧은 숨을 잇새로 터트렸다.
“헛……!”
“이 이상은 나도 못 참을 것 같은데. 어떻게, 더 만질 건가?”
깜짝 놀란 소연은 불현듯 너무 오래되어 새까맣게 잊고 있던 그 무엇이 생각났다.
가만 있다가도 수컷의 본능을 단박에 드러내는 이 남자야말로 맹수 중 맹수라는 걸.